19. 반목(反目) - ②
방청석 주변의 소란도 이제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동원과 승희, 지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방청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에 온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그때 문득 지인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인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지혜를 쳐다봤다. 지혜가 의장단석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지혜, 설마 ……?’
지인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동원이 깜짝 놀라 지인을 붙들었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추스른 지인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동원을 옆으로 밀쳐내고는 곧장 단상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지혜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지혜야, 저거 넌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 저긴 재필 씨도 있었잖아! 응? 아니라고 말 좀 해봐!”
하지만 지혜는 우물쭈물하며 지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지인은 애가 탔다.
“지혜야, 왜 말이 없어? 저거 니가 한 일 아니지? 응? 그렇지?”
단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느낀 승희가 지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동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지인이 지혜를 계속 닦달하는 것을 보다 못한 학현이 버럭 짜증을 냈다.
“이 봐! 그만하지 못해? 지혜 씬 당신을 지키려고 그런 힘든 결정을 한 거야! 그런데 왜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몰아붙이는 거야?”
지인은 학현을 째려봤다.
“당신이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지혤 꼬드겼지?”
평소 순하기만 했던 지인이 갑자기 매서운 얼굴로 쏘아붙이자, 비록 한 순간이긴 했지만 학현은 저도 모르게 찔끔하며 목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만 할 학현이 아니었다.
“난 지혜 씨한테 기자들을 의심 없이 유인할 방법이 있겠냐고 물었을 뿐이야. 그 이후의 행동은 모두 지혜 씨 스스로 결정한 거라고!”
그러나 지금 지인의 귀엔 그런 건 다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지인은 당장 마음 같아서는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원망이란 원망은 죄다 학현에게 퍼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고 머릿속마저 하얘진 나머지, 원망의 눈초리로 학현을 노려보는 것 외엔 선뜻 아무것도 하질 못하였다. 단지 답답하고 억한 마음에 명치에서부터 숨만 턱턱 막혀올 따름이었다. 그러다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더니 끝내는 그 위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승희가 불쑥 지인의 편을 들고 나섰다.
“학현 오빠, 비겁해요!”
학현은 인상을 팍 쓰며 승희를 쏘아봤다.
“뭐야?”
승희는 아차 싶었다. 그래서 바로 눈을 내리깔며 우물거렸다.
“그, 그게 …….”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속에 있던 얘기를 막 내질러버렸다.
“왜, 왜 지혜 언니 핑계를 대요?”
학현은 다시 발끈했다.
“뭐, 핑계?”
그러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승희를 노려봤다. 승희는 순간 오금이 저려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마치 뭐에 씌기라도 한 듯 머릿속에 있던 말들이 엉겁결에 다 튀어나오고 말았다.
“오, 오빤 다 알았잖아요. 지혜 언니가 지인 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는 성격이란 거. 그래서 그걸 이용한 거 맞잖아요!”
그래놓고 정작 먼저 깜짝 놀란 쪽은 승희 자신이었다. 승희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학현을 쳐다봤다. 학현 또한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승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승희 얼굴에 대고 바락바락 악을 퍼부어댔다.
“이 씨 …… 닥쳐! 니가 뭘 알아? 저 놈들한테 공범의식이란 게 있을 것 같아? 저 놈들은 공명심으로만 똘똘 뭉친 녀석들이라고! 저 놈들은 살아나가면 분명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다 까발려! 내가 장담해! 그럼 과연 쟤들이 처벌을 받을까? 웃기지 말라 그래! 언론하고 정보기관이 저놈들을 철저히 감싸줄 거라고! 지혜씨도 그걸 알기 때문에 자진해서 나선 거야! 알았어? 알아들었으면 그만 닥치고 저리 꺼져!”
학현은 아주 길길이 날뛰며 승희를 정신없이 몰아쳤다. 그걸 바로 코앞에서 고스란히 다 당한 승희는 어질어질 숨이 다 멎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끝내는 다리의 힘이 풀려버리면서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동원이 마침내 발끈하면서 달려와 학현을 확 밀쳐냈다.
“저리 가요!”
하지만 학현은 악에 잔뜩 받혀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상태였던 탓에 겨우 반 발짝밖에 밀려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학현도 가만히 서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발로 바닥을 힘껏 디딘 다음 그 반동의 힘으로 동원을 도로 밀쳐내 버렸다. 그 바람에 동원은 한순간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승희는 깜짝 놀라 동원에게 달려갔다.
“오빠!”
동원은 학현에게 힘에서 밀린 것도 분했지만, 승희를 도우려다 오히려 부축 받는 신세가 돼버린 자신의 처지가 더욱 부끄러웠다. 그래서 최소한 말에서라도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쳐들고 학현을 쏘아붙였다.
“선배 말이 다 맞는다고 쳐요! 하지만 송재필 씨는 지혜 씨 애인이니까 한 번 쯤은 설득해보라고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학현은 자꾸만 자기 탓으로만 몰아가는 분위기에 분통이 터졌다. 씩씩거리던 학현은 급기야 지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함을 쳤다.
“아 씨팔! 송재필이 내 애인이야? 왜 자꾸 나한테만 뭐라 그래? 정 궁금하면 본인한테 물어보라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지혜에게로 쏠렸다. 지혜는 갑자기 본회의장 안의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돼 버리자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평소의 지혜답게 금방 작심하며 입을 열었다.
“기자들이란 원래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살릴 생각보단 특종 잡을 생각을 먼저 하는 족속들이야. 재필 씨라고 특별히 다를 거라 장담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속였어. 언니가 범죄자로 몰리는 걸 막기 위해선 불확실한 건 다 제거해야 했으니까.”
지혜의 말에 지인은 눈앞이 캄캄해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 때문이라니, 나 때문에 지혜가 자기 애인마저 죽일 생각을 했다니, 지인은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반면에 드디어 비난의 화살을 완벽히 피할 수 있게 됐다고 여긴 학현의 얼굴에선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때? 이래도 계속 내 탓만 하고 있을 거야? 니들이 못하는 일을 우리가 대신 해줬잖아? 그러면 고마워해야지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어? 그럴 시간 있으면 살기 위해 뭘 해야 할지 그걸 생각하란 말이야! 알았어?”
그런데 그때 지인이 돌연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느님, 저와 제 동생이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
기도가 계속될수록 학현의 얼굴은 점점 심하게 일그러졌다. 학현의 귀에는 그 기도문이 자기를 죄인 취급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에 심히 못마땅해진 학현은 지인 앞에 쭈그려 앉아 빈정거렸다.
“그래, 기도는 바로 이럴 때 하는 거야. 신이란 족속들은 원래 살려달라는 기도는 잘 안 들어 주거든? 그러니 차라리 딴 놈부터 죽여서 일단 내가 산 다음에 그 죄를 사해 달라 기도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지. 안 그래?”
그러나 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기도에만 열중했다. 대신 보다 못한 동원이 학현의 어깨를 잡아채며 따졌다.
“야, 남학현! 적당히 하지 못해?”
학현은 어이가 없었다.
“뭐, 남학현? 이 새끼가 돌았나?”
“아니, 돈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뭐야?”
학현은 울컥하여 동원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하지만 동원은 굴하지 않고 계속 바락바락 대들었다.
“지금 지인 씨 심정이 이해가 안가? 자기 때문에 동생이 애인을 죽였다고! 그런 사람을 위로는 못할망정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래도 이 새끼가 …….”
학현은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이까지 빠드득거리며 동원을 노려봤다. 그러나 선뜻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방금 전 동원의 행동이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그때 어느 새 의장석 부근까지 와서 상황을 지켜보던 민철이 돌연 둘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봐 강동원 씨, 혼자서 잘난 척 하지 마! 그러는 당신은 지혜 씨 기분은 생각이나 해 봤어? 언니를 위해 자기 손으로 애인을 죽였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민철에게 쏠렸다. 동원은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누가 더 슬픈지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민철은 계속 동원을 몰아세웠다.
“시끄러!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도 없어! 우리가 의원들 죽이고 기자들 죽일 때 당신은 뭐 했어?”
“그, 그게 …….”
“아무것도 안했지? 그렇다고 의원들을 죽이는 걸 반대한 거였어? 그것도 아니잖아. 뭐야 그럼? 그냥 비겁한 무임승차자 아냐? 그러니까 당신한테서 그런 속 편한 소리가 나오는 거야. 우리라고 사람 죽이는 게 맘 편하겠어? 우리도 힘들어! 힘들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민철의 계속된 다그침에 동원은 어느 새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 그건 오해야. 난 지혜 씨랑 다른 사람들을 탓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단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혜 씨보고 애인을 죽이라고 꼬드긴 학현 선배를 문제 삼았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 말은 민철의 화를 더 돋웠다.
“꼬드겼다니? 그런 식으로 막 말하지 마! 그렇게 한 학현 씨는 마음이 편하기만 했겠어? 왜 그걸 몰라주는 거야?”
그러자 이번엔 승희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학현 오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방금 전 지인 언니한테 하는 짓을 봤잖아요!”
학현은 발끈했다.
“뭐야?”
그러나 승희는 이번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학현 오빠가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애초에 지혜 언니보고 재필 씨를 한번 설득해 보라는 말이라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이용만 했잖아요! 내 말이 틀렸어요?”
학현은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승희 말이 맞다는 걸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꼴이 될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면서, 담담한 척 실실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지금 양심의 가책이라고 했냐? 그래, 니 말대로 송재필은 설득해서 살려놨다고 치자. 그럼 다른 기자들은? 또 의원들은? 니 말대로라면 걔들 죽일 땐 양심의 가책 따윈 하나도 안 느껴도 되겠네?”
“억지 논리 펴지 마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러더니 둘은 한동안 입술까지 씰긋대며 서로를 노려봤다. 둘 사이엔 어느 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좀 전까지 학현이 쳐다보기만 해도 그렇게 질겁하던 승희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난 건지 그걸 보고 있는 동원도, 또 직접 당하고 있는 학현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