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후덥한 열기에 설화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어젯밤 여솔이 추울까 봐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었더니, 티셔츠는 어느새 땀범벅이 되어버렸다.
" 나 참…. "
여솔 옆에 있고 싶어서 노트에 글을 쓰다가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자다 일어난 자신의 모습에 설화는 피식 웃었다. 설화가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새근새근 잠든 여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화는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였지만, 다행히 여솔은 잘 잔 모양이다.
설화는 혹시라도 여솔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고 화장실에 들어섰다.
" 끄으으…. "
바닥에 이상하게 쭈그려 자서 그런가. 온몸에 알이 배긴 듯 뻐근했다. 설화는 칫솔에 치약을 짠 후,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앉아 칫솔을 물었다.
과음한 거 같은데, 집에 콩나물이나 북어가 있었던가…. 그냥 나가서 먹자고 할까….
설화가 눈을 감은 채 양치를 하며 생각하는 동안, 무릎 위로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뜬 설화 앞엔 어느새 다가온 여솔이 무릎 위에 앉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나두 칫솔 "
" 엉제 일허나서혀? "
양치하던 칫솔을 입에 물고 있던 설화는 취한 듯 우물우물 소리를 내다가 입에 물린 치약을 뱉었다.
" 설화씨가 끄으으 하는 소리에? "
" 좀 더 자지 "
" 나도 칫솔 줘요 "
설화는 칫솔을 달라는 행동이랑 다르게 무릎 위에서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솔의 허리를 감쌌다.
" 일어나야 주죠 "
" 안 일어나도 줄 수 있…. !! 꺄악 "
설화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여솔의 허리를 잡아 들고 일어섰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당황했는지 팔에서 버둥거리는 여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설화는 그대로 자신의 품에 안았다.
별생각 없었는데, 졸지에 자신이 파묻힌 가슴이 맨가슴이란 걸 알아챈 여솔의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늘 유약한 모습에 글 쓰는 작가라고해서 전혀 생각 못했는데, 의외로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 그렇게 만지면 좀 민망한데 "
무심한 듯 여분의 칫솔을 찾던 설화는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여솔에게 난처한 듯 말했다.
" 아…. 이게 아…. 저도 모르게…. 만져보고 싶어서…. "
" 칭찬이죠? "
" 칭찬이죠 "
집에서 처박혀서 글만 쓰다 보니 좀처럼 몸을 움직일 일이 없어서, 체력관리를 위해 꾸준히 해온 운동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설화는 뿌듯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겸, 이 순간을 즐길겸 그대로 안은채 새로 꺼낸 칫솔에 치약을 짰다.
동시에 현재 상황을 인지한 설화는 급격하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칫솔을 여솔의 입에 넣어주고 마저 이를 닦았다. 화장실엔 말없이 그저 이 닦는 소리 뿐이었다.
" 이러고 있으니까 부부 같네요 "
" 풉 쿨럭 쿨럭 "
먼저 양치를 끝낸 설화가 입을 열자, 깜짝 놀란 여솔의 입에서 치약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괜찮아요?? "
설화는 사레가 들렀는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콜록거리는 여솔에게 서둘러 휴지를 뜯어주며 물었다.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입을 헹군 여솔이 말했다.
" 설화씨 은근한 척 되게 대놓고 뻔뻔한 거 알아요? "
" 여솔씨 은근 당돌한 척 안그런건 알구요? "
" 갑자기 그렇게 낯간지러운…. "
" 그래서 싫어요? "
딸꾹.
갑자기 눈앞까지 다가와 씨익 웃고 있는 설화 때문에 놀란 여솔은 딸꾹 거리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열린 건가. 본래 가지고 있는 피지컬이 딸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솔의 눈에 설화는 그 이상으로 빛나 보였다.
여솔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설화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입을 맞추고 말했다.
" 좋아요 "
" 아 이거 좀 야한데 "
" 애인의 특권이기도 하죠 "
" 그거 내 대산데 "
" 그래서 싫어요? "
여솔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설화는 고개를 떨군 채 긴 한숨을 쉬고는 여솔을 그대로 감싸안아 들고 말했다.
" 아뇨 좋아요 "
둘이 화장실을 나서는 동시에 여솔에겐 낯설고 설화에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주 깨를 쏟고 있구만 "
민준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쓰러진 둘을 한심한듯 내려다보고 혀를 찼다. 한창 좋았던 분위기를 방해받은 설화가 한껏 썩은 표정으로 말했다.
" 되게 실례되는 등장이다 "
" 미안 습관이라 생각 못했네, 다음부턴 꼬박꼬박 먼저 연락하고 초인종 누르고 들어올께 "
" 아냐 내가 비번을 바꿀께 "
귀까지 빨개진 여솔이 구석에 박힌 채 벽만보고 있는 동안, 민준이 말했다.
" 마침 잘됐네, 여솔씨도 우리랑 입장이 비슷할 것 같은데 우리 다같이 대책회의 좀 할래요? "
***
여솔의 사무실 근처 카페의 미팅룸. 스터디나 회의를 위한 대여장소로 쓰이는 장소라 그런지 괜스레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설화가 어색하게 주눅 들어 무슨 일이냐는듯 여솔을 바라보고 있을때, 민준과 화연이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설화의 엄마를 맡고 있는 김민준 입니다. "
" 처음 뵙겠습니다. 여솔의 노예를 맡고 있는 우화연 입니다. "
분명 처음 보는 사이에도 불구하고 묘한 동질감은 느낀 둘 사이에 공감의 기류가 흘렀다.
" 노예 일도 힘드실 텐데 우리 아들내미까지 낑겨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
" 아들내미가 속 많이 썩일 텐데 우리 주인이 거기서 갑질하진 않으셨는지요. "
" 둘이 뭐하냐 "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묻는 설화를 바라보는 민준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흡사 니가 낄 자리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듯했다. 그 감정을 충분히 전달했다는듯 다시금 영업미소를 장착한 민준이 다시 말했다.
" 아이고, 저새끼 저거 답답하니 속 터지게 했을텐데 힘드셨겠어요 "
" 아이고, 아니죠. 우리 주인이 변덕이 심해서 그쪽이 힘들었을 텐데요. 저거 보기랑 다르게 모쏠이나 다름이 없어서…. "
" 야!! "
이번엔 둘 대화가 재밌는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던 여솔이 화연의 말을 끊었다.
" 여솔씨 모쏠이었어요? "
전혀 몰랐다는 듯 물어보는 설화의 입꼬리가 실룩실룩 거렸다. 마치 놀릴 거리 찾았다는듯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에 여솔은 당황하며 말했다.
" 아…. 아니거든요!! 나…. 완전…. 많이 해봤거든요! "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건 화연도 마찬가지였는지, 화연은 등골이 서늘해질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어머어머, 저거 봐 설령 사실이라도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그리고, 그 썸같지도 않은 썸으로 한 데이트 같지도 않은 데이트를 연애로 치지 않거든요. 호호 "
쾅!
주변이 가득 울릴 만큼 책상을 내려친 여솔이 웃으며 말했다.
" 회….의….할….꺼…. 있….다….며….요…? "
분명 웃고 있지만, 이마에 힘줄이라도 생길 것 같은 모습에 조용히 침을 삼킨 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네…. 그럼 뭐 사담은 이쯤하고 "
민준은 가방에서 무언가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꺼냈다.
" 일단 상황이 꽤나 절망적이란 건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테고…. 제가 아는 기자부의 팀장님을 만나 이것저것 주워온 것들이 좀 있습니다. "
기업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구멍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우위에 있으려는 그 욕심으로 인한 경쟁의식. 당연한 이야기지만 파벌부터 사내정치로 인한 서로간의 견제는 없을 수 없었고, 비집고 들어갈 바늘구멍이 반드시 생길 수 밖에 없다는게 민준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민준이 가져온 정보들은 분명하게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쉽게 파고들 구멍을 모를 리 없다는거죠 "
가장 큰 문제는 이슈화. 요즘같이 인터넷문화가 발달해 있을 때 확실하게 이슈화 시킬수 있다면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함부로 입막음하려 들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나 따라 붙는 문제는 그만한 영향을 가진 기자들이 확실하지 않은 주제를 물어줄 리 없었다.
어떻게든 특종을 써보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사설 기자들도 있었지만, 만약 그저 루머를 담은 찌라시 정도로 매장당한다면 같은 주제를 다시 꺼내면 또 저얘기야? 로 끝날터였다.
SNS도 마찬가지였다. 강태화가 제법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기업인이라, 연예인에게 문제가 생겼을때만큼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리 없었다.
" 자칫하면 구멍을 파고들려고 하다가 거기에 깔려죽겠네요 "
여솔의 회의적인 반응에 미팅룸엔 정적이 흘렀다.
긴 시간 동안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무기가 있어도 함부로 찔러볼 수 없는데서 오는 막막함에 결국 나오는 건 한숨 뿐일때, 설화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 우리 휴가 갈래? "
***
직원이 모두 퇴근한 어두운 사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 상무님…. 부르…. 셨어요…? "
유진은 태화의 사무실에 조심스럽게 들어가며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과 화이트색으로만 채워진 태화의 사무실의 불을 끄고 있자 어두운 분위기가 한결 더 강하게 느껴졌다.
" 니가 할 일이 있다. "
" 네? 아! 네! "
책상위 스탠드 불빛에 비친 태화는 유진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유진은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빛이 강한 만큼 짙은 그림자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만큼 깊어 보였다.
의자 뒤로 보이는 야경에 만약 혼자 있었더라면 제법 운치 있다고 좋아했을 분위기를 태화 한사람이 냉랭하게 바꿔놓고 있었다.
유진은 문앞에 선 채 태화가 말하기만 기다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 한 방울이 섬뜩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앉으라는 말도 없이 한참을 세워둔 채 펜만 튕기고 있던 태화가 입을 열었다.
" 설화를 좀 만나고 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