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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미스테리클럽
작가 : 겨울뱀
작품등록일 : 2017.7.6

너를 만나고 싶어.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줘(12)
작성일 : 17-11-14 21:17     조회 : 265     추천 : 0     분량 : 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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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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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소개팅나가니?"

 

 은랑이 그렇게 말하며 어쩔수 없다는 듯 웃었다.

 

 "기지배, 아주 얼굴에 힘이 바짝 들어갔잖아."

 "어때? 예뻐?"

 

 그렇게 말하며 빙그르 돌자 아이구 곱다 고와, 하며 박수까지 쳐주는 모양새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제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잘든 논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공평성이라는거야."

 "뭐가."

 "널 만날때 나랑 은랑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꾸미고 나갔는 줄은 아니? 이번에도 신경은 써줘야할거 아니야."

 "미친년. 이왕 그럴거면 그때처럼 해오지 그래?"

 "왜, 너무 예뻐서 가슴이 설렜어? 우리 제윤이가 그걸 또 보고싶었구나."

 

 "그만 좀 왈왈대 이것들아. 개새끼들도 아니고 뭘 만나면 계속 짖어대."

 

 서로 틱틱대는 제윤과 단아를 제지하며 은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잠깐 우울함이 비쳤던 단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를 좀먹고 있는지는 뻔했다. 그건 단아는 물론이고 은랑에게도 주어진 일종의 형벌이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일상속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바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 뿐이다. 단순히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평범하게 남아있을 수가 있어서.

 

 "여하튼, 마제윤 넌 조심하고."

 

 은랑의 말에 제윤이 흘끔 그녀를 보곤 고개를 돌렸다. 하운즈에서 다시 한 번 탈퇴를 선언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대할 지는 눈에 보일 듯 뻔했다. 어쨌거나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기사님, 우리 없는데 잘 할수 있어요?"

 "무서워서 우는건 아니겠지?"

 "해코지하면 당당하게 외쳐! 싫어요! 안돼요! 하지마세요!"

 "악, 미친! 풉!"

 

 단아의 마지막 말에 그녀와 만담을 나누던 은랑이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윤은 무표정으로 손을 뻗어 두 친구의 머리칼을 쭉 잡아당겼다.

 

 "너희나 잘해."

 "야야야야. 내 머리! 컬 망가진단 말이야!"

 "꺼져라!"

 

 단아와 은랑의 열렬한 반항에 제윤의 입가에 작게 웃음이 걸렸다.

 

 "가서 꼴사납게 질질 짜지나 말고, 할 말 속시원하게 하고."

 "우리 걱정일랑 마셔. 너나 정말로 조심해."

 "계속 잊는것 같은데 나도 미드워커라고.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네가 더 허접하지 않아?"

 "시끄러. 어쨌거나 위험하면 또 우리가 구하러 가줍니다 공주님."

 

 마주치는 세 사람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단아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은랑과 제윤을 껴안자 은랑이 손을 마주벌려 제 친구들을 껴안고는 두 사람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길 한복판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꼴에 시선이 느껴져 제윤이 힘을 줘 두 사람을 밀어냈다. 징그럽게, 좀 떨어져라.

 

 공주님은 너무 부끄러움도 많으셔. 한창 예민한 시기라 그런가봐. 제윤은 뻔뻔하게도 서로 쫑알거리는 말들을 무시하곤 바이크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려 보이는 두 사람은 빙글빙글 웃고있는 얼굴인데도,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듯한 어느 날의 모습과 겹쳐져서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따스히 한 번 바라보거나 다정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건 제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희미하게 품 안에 남은 온기가 싸늘한 냉기에 흩어지지 않도록 옷깃을 여몄을 뿐이다.

 

 "금방 갈게."

 "응, 기다릴게. 셋이서…."

 

 * * *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답했는데.

 

 단아는 침묵속에서 손톱을 깔짝거렸다. 예상했던건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 흘긋 마주치는 시선에 애정을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조금더 상냥하고 따뜻한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끝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면서도, 상냥했던 예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속에서 은랑과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

 "오랜만이지?"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삼키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 욱. 작년 11월이 지나 딱 일년만이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이 유한 인상을 더욱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단정한 셔츠에 네이비색 코트를 입은 욱은 은랑과 단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은색 뿔테안경 너머로 건네지는 시선에 어쩐지 목이 타서 주스를 조금 들이켰다.

 

 "한번쯤은 얼굴 볼 일이 생기겠지, 라고 생각은 했었어. 이렇게 집적적으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조금은…."

 

 감회가 새롭네. 욱이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벌려 무미건조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아득한 거리감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데도 그대로 쭈욱 밀려나버린 것만 같았다.

 

 "잘…, 지냈어? 미안,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네."

 "조금 어색하다, 그치?"

 "그러게. 예전엔 이렇게 침묵이 어색했던 적이 없어서, 진짜 새롭다면 새롭다."

 

 은랑이 꺼낸 말에 단아가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제법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은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혼자였더라면 어떻게 해야하나 진땀을 흘렸을 게 뻔했다. 상상으로는 당당하게 나서서 그 전의 일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싶었다. 서로의 오해와 과오에 대해서 묵은 감정을 뱉어내고 새로운 감정을 쌓아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눈을 마주하니 손이 덜덜 떨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관계와 감정. 성벽을 쌓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지반이 내려앉는다. 나는 폐허가 된 감정의 잔해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단아는 더욱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비참한 감각을 느꼈다.

 

 "그래. 얼굴은 보니 나쁘지 않네. 그래서, 할 말이 있는것 같은데 용건이 뭐야? 이제와서 화해니 뭐니하는 유치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닐거잖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뱉어내는 감정은 차갑다. 억지로 웃음을 띈 얼굴이던 단아와 은랑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탁. 엄지 밑의 살점을 건드리던 검지가 뚝 하고 멈췄다.

 

 가서 꼴사납게 질질 짜지나 말고, 할 말 속시원하게 하고.

 

 단아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조금 진정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건데?"

 "뭐?"

 "알잖아. 나는 유치해. 지금도 철 같은 건 하나도 안들었어."

 

 고집스럽게 마주쳐오는 눈빛에 욱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것 참."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담은 표정이다.

 

 "끔찍한 대답이네."

 

 너는 너무나 상냥했지만 나를 가장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말을 잘 알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시간을 넘어서 지금까지도.

 

 어긋나기 시작했던 건 늑대들의 울음이 떠나지 않던 10월의 밤이었다. 어쩌면 최초의 불씨를 거슬러올라가자면 하연의 죽음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게 찰칵, 하고 불씨를 피운 게 틀림없었다. 늑대들의 밤은 불안정하게 사그라들던 불씨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기름이 되어 난폭해지고 아프게 제 살을 태워냈다.

 

 우리는 거기서 어긋났다.

 

 공간과 공간의 사이, 닫혀져 버린 문. 아키폴레음에 갇혀 울음과 비명만 쏟아내던 그 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점점 숨결이 미약해지던 은랑과 그저 검게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단아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란 없었다. 처음엔 닫혀져 버린 문을 손톱으로 긁으며 제윤의 이름만 목이 쉬어라 외쳤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도와줘. 끊임없던 발악은 목소리마저 막혀버리고서야 멈췄다.

 

 힘없이 등뒤로 기댄 문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기절한 은랑의 한쪽 손을 잡고 그렇게, 가만히. 침묵의 시간을 견뎌냈다. 기사와 문지기, 광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할 수 있는 건 대답없는 친구의 손을, 마지막 온기를 손에서 놓치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본 기사의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많이 야위었다.

 

 광대와 문지기. 두 사람은 괜찮을까? 늑대들에게 당하진 않았을까. 아니, 괜찮을 거다. 순간이동으로 바로 이동했을 테니까. 돌아오지 않는 우리를 걱정하겠지? 다시 보게된다면 정말로 혼날지도 모르겠다.

 

 은랑아, 은랑아. 제발 일어나.

 

 생각이 점점 발걸음을 끌었다. 이것저것 떠오르던 망상의 경계가 길게 자취를 남기면서 늘어져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정신이 희미해졌다. 아, 은랑이는 어디에 있지? 시야가 흐려져 감각도 무뎌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손가락을 까닥여보았다. 은랑의 손이 제 손가락에 닿았다.

 

 그 순간의 기묘한 안도감이, 편안한 안식으로 이끌었다. 그래. 잠시 쉬는거야, 괜찮아. 스스로 되뇌이는 그 순간,

 희미한 바람이 불었다.

 

 눈이 뜨였다. 뭐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절로 번쩍 떴다. 새벽인지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푸르고 검은 밤이 고고한 달빛에 부스러져내리고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학교 양호실이었다.

 

 "일어났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예상치못하게 훅 다가왔다.

 

 "랑이는?"

 

 욱의 물음에 답하지않고 다급하게 묻자 그는 옆에 세워진 차단막을 밀었다. 다행이다. 이상하게 끌리는 발을 절뚝이며 다가가자 편안히 숨을 내뱉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힘이 빠져서 그대로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왜 그랬어."

 

 분명 저를 향하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지만 욱은 다른 곳을 보고있었다. 창 밖의 하늘, 그 속의 달을 담던 두 눈동자가 천천히 단아에게로 향했다.

 

 "묻잖아, 왜 거짓말을 했어."

 

 단 한번도 본적없던 서늘한 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안하면…, 너랑 우주는 거길 빠져나가지 않았을 테니까. 짐이 되고싶지 않아서 그랬어."

 "나랑 우주탓을 하고싶다는 거네."

 "욱아."

 

 "아니야."

 

 언제 일어난건지 은랑이 몸을 일으킨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말하지마."

 "은랑아."

 "욱아, 정 욱. 그건 우리가 선택했어. 네가 거짓말을 싫어하는 것도, 우리가 잘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두 번째 선택의 순간이 주어져도 난 아마, 단아도 마찬가지고, 똑같이 그렇게 했을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평소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던 은랑은 이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서 그냥 그만하면 안될까?"

 

 침착하게 말하다 결국 울음기가 배여나오는 은랑의 마지막 말은 사그라들듯이 위태롭게만 들렸다.

 

 "그냥, 다행이라고…. 잘 돌아왔다고, 한 마디만 해줘. 그러면 되니까…."

 

 단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차오르자 욱은 괴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눈을 감았다.

 

 "너희들은, 왜 자꾸만…."

 

 그렇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그 괴로운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서. 결국 또다시 제 선택이 불러온 결과는 성처만 남길 뿐이었다. 조금씩 어긋나서, 한 걸음 서로 뒤로 물러나버려 두 걸음 사이. 그래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을 텐데.

 

 아주 조금 멀어진 거리는 이상하게도 감정의 뾰족한 면만 내세우게 만들었다. 가끔씩 굳어버리는 얼굴과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정신상태. 은랑도 조급해져선 몇 번의 대화끝엔 서로 말이 없어지곤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욱의 시선이었다. 다정한 투로 이야기하지만 어느 순간 가만히 그는 전혀 다른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곤 했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부터 느꼈던 기묘한 감정의 일렁임.

 

 그게 너무나 무서워서.

 

 "왜? 나를 그렇게 보는거야?"

 "단아야."

 "내가 더러워? 끔찍해?"

 "네가 그러는 것도 이젠 지쳐. 제발 좀 그만해."

 "지친다고? 나도 멈추고 싶어. 나도!"

 

 어쩌면 우리는 그 상황이 그저 두려워서.

 

 "…노력이란 걸 해보기는 했어?"

 "무슨말이야?"

 "내가 보기엔 넌 그냥 투정만 부리고 있을 뿐이잖아. 조금은 어른스럽게 견디고 방법을 찾을 생각은 해봐야하는거 아니야?"

 

 "너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래. 말이 심했어. 단아도 어쩔수가 없잖아."

 "그럼 계속해서 이대로 지내자고? 은랑아, 천은랑. 너도 좀 적당히 해. 언제까지 그럴건데? 무조건 단아만 두둔하지말고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봐. 지치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적당히해, 정 욱! 너 여기서 그만해!"

 "네가 자꾸 그렇게 감싸주니까 단아 버릇만 나빠지는거 아니야!"

 "말 다했어?"

 

 자꾸만, 멀어지고.

 

 "버릇?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너 진짜 사람 미쳐버리게 만든다. 너야 말로 적당히 좀 해. 그렇게 역겹다는 얼굴을 하고선 다정한 체 하는 것도 그만두라고. 위선자 같이 좀 굴지 마. 소름끼치니까!"

 

 뱉어내는 말은 재빠르게 뻗어오는 후회의 손을 내려쳤다. 이미 그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는데도. 시간은 멈출 줄을 몰랐을 뿐이다.

 

 "하…. 그래,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착한 척하는 거. 다 알면서도 모른체 한 것도 너였고 단순히 네 편의를 위해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들인 것도 너잖아."

 "그래서? 뭘 원해 나한테."

 "네가 멋대로 행한 일의 결과를 봐. 자꾸만 혼자서 피해자인척 하지 말란 말이야. 그게 제일 역겹다는 이야기야."

 "뭐야, 결국 너도 내 탓을 하고싶은 거잖아. 마제윤처럼."

 

 겉잡을 수도 없이 어긋나버렸다.

 

 "그럼 너도 꺼져버려."

 

 * * *

 

 "여전히 나는 네게 끔찍하구나."

 

 단아가 그렇게 말하자 욱의 입이 꾹 닫혔다. 잠깐의 기억을 정리하니 오히려 감정이 더 단단하게 내려앉았다. 숨을 멈춘 듯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계속 미친척 너한테 손을 내민다면, 끔찍한데도 함께해줄 수 있어?"

 "나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잖아."

 "응. 맞아. 그래도 난 원래 이기적인년이니까. 그러려니하면 안될까."

 "..."

 "정말, 내가 생각해도 방금건 역겨운 요청이었어. …못들은 걸로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아가 힘없이 미소지었다.

 

 "사실 널 보면 제일 먼저 사과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용기가 안났어."

 "하고싶은 말이 정말 많았어. 우리 조금만, 천천히 이야기하면 좋겠어."

 

 은랑이 조심스럽게 단아의 말을 받았다.

 

 "넌,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그 때였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랑 다시 이렇게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잊지못할 순간이 될 거야."

 

 은랑이 말을 끝내고 테이블로 향했던 시선을 올려 욱을 마주했다. 처음보다는 풀린듯한 표정이었다. 케케묵은 감정의 골은 사실 조금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굳게 닫혀있던 욱의 입이 마침내 작게 열렸다.

 

 "…난."

 

 [누나! 단아누나~은랑누나~]

 

 순간 금빛으로 빛나는 글자가 유리창을 넘어 너울너울 날아들었다.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와 욱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반사적으로 돌린 시야엔 그들의 후배인 빈이 반갑다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쟤가 왜 여기에 있어?'

 

 눈이 마주치자 글귀를 적어내던 손을 붕붕흔들어 금빛이 파스스흩날렸다. 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어 아래로 떨어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늘한 한기가 뱃속에 웅크려 앉은 듯 단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누구야."

 "후배야, 유신고 후배."

 "하나만 묻자, 단아야."

 

 겨우, 이 만큼. 한 발짝 다가섰다고 생각했는데.

 

 "세례를 내렸어?"

 

 대답대신 고개가 힘겹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무겁게 끌려올라왔다. 아. 작은 탄식이 은랑의 입을 통해 빠져나와 공기중에 스며들었다.

 

 "정말 복잡해.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응?"

 "발케 때문이었어!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었단 말이야. 신우주도 완전히 우리랑 갈라섰고 마제윤도 다시 만나기 전이었단 말이야!"

 "저 얘. 책임질수 있어? 저 얘뿐만이 아니지, 가족들은? 친구들은? 아니잖아. 미쳐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미드워커라는게 그렇게 간단해? 아직도 이 모든 게 그냥 게임인것 같아?"

 

 문득 현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럼 우리가…."

 "그럼 나랑 은랑이가 그 자리에서 발케한테 뒈졌어야한단 말이야?"

 

 현실이 아름답고 간단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봐, 지금 네가 그걸 말해주잖아.

 

 "정말 여전하구나, 너네."

 

 덜컹. 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소음을 만들어냈다. 참담함과 원망으로 일그러트렸던 단아의 얼굴에 아차, 하는 후회의 감정이 스쳤다.

 

 이게 아닌데. 왜 자꾸 말을 뱉어낼 수록 멀어지기만 해.

 그 날처럼.

 

 돌아서려는 어깨를 다급하게 붙든건 잘못된 대화주제였다.

 

 "겔샤르의 인이 깨졌어. 너도 봤을거 아니야."

 "…하고싶은 말이 겨우 그거야?"

 

 아니.

 사실 모르겠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돌아서 나가는 등은 다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 * *

 

 "씨발새끼, 개새끼!"

 

 단아가 욕설을 내뱉으면서 소주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래서 뭐야, 어? 시발. 우리가 발케손에 그냥 썰렸어야하냐? 응?"

 "그러니까. 미친, 진짜 지는 뭐가 그렇게 떳떳하고 잘나셔서!"

 "야. 근데 우리 공듀님, 이 새끼는 왜 안와!"

 "하. 쓰벌. 금방 온다더니 지금이 몇 신데."

 "아니…. 김콩이는 왜 그 때 짜잔, 하고 나타나가지구."

 "집근처에서나 놀지 고딩이 까져가지구 말이야, 응?"

 

 잔뜩 술기운이 올라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대화를 나누지만 시선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은랑은 제 소주잔을 보고있었고 단아는 생선구이의 눈알을 바라보고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롭게도 대화는 통하고 있었다.

 

 "우욱…."

 

 은랑이 급하게 올라오는 토기에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숙이려고만 했는데 머리가 무거워 테이블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은랑의 대화상대였던 소주잔이 그녀의 머리통에 치여 튕겨져나갔다.

 

 "어머어머 내칭구! 안다쳤어? Are you okay?"

 

 그러자 단아가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걸었다. 젓가락으로 생선구이를 들고 눈을 마주치면서. 술기운에 흐리멍텅해진 눈에 생선대가리만 가득했다. 그러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근데 왜이렇게 못생겨진거야…!"

 

 그러더니 주르륵 눈물을 흘리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이 미친년이….생선잡고 뭔 지랄이야 지랄이…."

 

 고개를 가까스로 들어올린 은랑이 그렇게 말하다가 다시 우욱! 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머리를 이기지못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미친년 둘 콤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이고….우리 은랑이 여기서 토하면 안되는데…. 거기 선생님! 제친구가 토해요!"

 

 아르바이트생에게 손을 번쩍들면서 소리친 단아의 젓가락에서 생선구이가 스르륵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내 칭구…내 칭구…. 왜 바닥에 쓰러져있지."

 "우으으으….우윽!"

 

 "저기요. 정신 좀 차리시죠."

 "이봐요, 119좀 불러줘여…. 내 칭구가 아이고 바닥에 드러누웠네."

 

 그 순간 은랑의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우읍!"

 

 딱 봐도 그 순간이다. 사색이 된 아르바이트생이 겨우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은랑을 일으켰다. 꽤 이른 시간 술집에서 벌어진 진상 퍼레이드에 모든 아르바이트생들을 비롯해 주방 아줌마들과 사장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르바이트생 몇이 더 붙어 은랑을 화장실로 이송시키고 캐셔를 맏고있던 여자는 기겁을 해서는 이제 바닥을 기어 생선구이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단아를 말리러 뛰어갔다.

 

 "웩. 웨엑!"

 

 괴물처럼 위장으로 들이킨 음식들을 다시 재확인하니 점점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술에 약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금세 취해버렸다. 은랑은 취할 때 구토를 하면 바로 맨정신으로 돌아온다. 토하면서 점점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인데 그래서 항상 첫기억이 토하는 제 소리다.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제 친구인 단아보다는 괜찮다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단아는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눌 때 술이 깬다고 그랬었다. 앉아서 쭈욱 볼일을 보고 있으면 뭔가 그 때 공중부양하던 정신이 돌아온다나?

 

 '봐봐. 내가 술을 마셨어. 너무 많이 마시니까 이걸 배출하긴 해야하는데 화장실을 안 가. 그럼 내 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겠지? 그러다가 내 정신이라는 게 거기에 밀려서 잠시 유체이탈을 하는 거지!'

 '아주 대단도 하시다, 너 이과출신이 맞기는 하냐?'

 '그러다가 딱! 그게 나가는 순간! 정신이 드디어 돌아오는거야! 아싸 내 자리다! 하고, 하하!'

 

 진짜 정신나간 소리를 지껄이던 단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것만 같았다.

 

 문지기, 정 욱을 안주로 들이킨 소주만 몇 병인지도 모르겠다. 소주만 마셨던가? 기억은 여전히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정신이 담담하게 돌아왔는데 속은 그렇지 못해 웩웩대며 계속해서 쏟아내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등을 두드려주는 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이 언니는 왜 이렇게 손이 매워.

 

 "괜찮으세요?"

 

 언니가 아니라 오빠다. 제길, 여긴 왜 화장실이 공용이야.

 

 "수…."

 "?"

 "수치스럽네요…."

 

 남자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씰룩이는 입가가 경련을 일으킬것만 같았다. 입을 헹궈내면서 눈을 깜박였다. 괜찮아요? 아직까지도 등을 두들기는 남자에게 그만좀 때려요,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욱과의 대담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은 확실했다. 천천히 단아와 자신의 만행이 떠오르자 웃음이 불시에 풉. 하고 터져나왔다. 진상도 이런 지상이 없다. 사장님께 사과를 하고 친구를 챙겨서 재빨리 여기를 떠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와서 은랑을 맞이한 건 친구의 빈자리였다. 화장실은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으니 거긴 아닐 테고. 시선을 휙 돌리자 옆테이블의 커플이 보였다.

 

 "저기, 혹시 여기있던 여자애 못보셨어요?"

 "아, 큽…, 그 생선녀요?"

 "생…생선녀…. 네…."

 "방금전에 뛰쳐나가던데요? 갑자기 밖을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대로 가방까지 들고 뛰어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알바생들이 쫒아갔는데…. 아, 저기 오네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중에 단아는 없었다.

 

 "아. 방금 친구분이 뛰쳐나갔는데 주사가 원래 저래요?"

 

 숨을 몰아쉬며 남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분명히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코너를 도니까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갑자기 사라져? 순간이동이다.

 

 "아…. 예. 제 친구가 좀 특이해요. 죄송합니다. 일단 계산 좀 부탁드릴게요."

 

 기분이 싸해졌다. 아무리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해도 갑자기 뛰쳐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정신에 자기 가방까지 챙겨간다는 건 말이 전혀 안 된다. 게워내서 아픈 속에 입을 꾹 다물면서 가방을 어깨에 매곤 계산을 하기 위해 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무언가 얇은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은랑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천천히 손을 넣어 두 장의 카드를 쥐었다. 단아의 물건, 여왕의 증표, 퀸 모멘타 (Queen Momenta). 그녀가 남긴 메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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