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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제는 지나간 것들에게
작가 : 은호
작품등록일 : 2017.10.28

"엄마의 새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과
이제는 식어버린 이름
가까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 했던 이름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1부_10회
작성일 : 17-11-14 10:24     조회 : 232     추천 : 0     분량 : 9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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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서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이잖아요? 당신도 당연히 가야죠.”

  한껏 추워진 날의 아침. 엄마는 제안인지 설득인지 모를 명령조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처럼 그의 얼굴에 난처함이 드러나는 건 처음이었다.

  인천에 다녀온 이후 조용히 지나가는 듯 했던 일상 속에,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싶기도 했지만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이 모든 걸 선명하게 만들었다. 두 개의 벽을 사이에 두고 건넌방에 있을 그를 생각하다가, 엄마를 생각하다가, 남자친구를 생각하다가, 끊어내고. 끊어내고. 그런 불면의 밤이 계속 됐다.

  그리고 오늘, 불면증에 기말고사까지 합쳐져서 몹시 초췌해진 아침, 식탁 앞에서 엄마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시작은 이랬다.

  “아 참, 이번에 천은혜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파주 갤러리에서 개인전 여는데, 이번에 한 번 와달라고 하더라고요.”

  “천은혜 씨요?” 나는 모르고 둘은 아는 그 이름에 그는 멈칫하는 것 같기도 했고, 탐탁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일요일이 개관일이라고 해서, 인사하러 가겠다고는 했어요. 웬만하면 당신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안 가는 게 낫지 않나요?” 그가 나를 흘끔 본다.

  “어머, 아마 그날 다른 인사들도 많이 올 테고, 안면 있는 기자들도 더러 온다고 하던걸요.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서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이잖아요? 당신도…당연히 가야죠.” 이번에는 엄마가 나를 흘끔 본다.

  “그리고 어차피 그 여자가, 아니, 천은혜 씨가 당신도 초대했는걸요.”

  “그래요?”

 엄마는 흠흠-웃는다. 약간 껄적지근한 분위기였다.

  “불편해할 거 하나도 없어요. 결국 그 여자 상대하는 건 나고. 당신은 얼굴 비치는 데 의의가 있는 거니까. 아, 그래. 하나랑 두리도 가면 되겠다. 가족들 다 같이 가는 것도 의미 있겠네요.”

 의미 있나? 내가 되묻고 싶어 하는 찰나, 옆에 조용히 있던 언니는 재빨리 손을 들고 발언권을 가져갔다. “저, 그날 선약 있어요. 이번엔 내가 가르치는 학원 회원들하고.”

  “어머, 그래? 뭐 그럼 두리만 가든가. 넌 괜찮지?”

  “음….” 엄마의 눈을 피하는 척 하며 그를 한 번 봤다. “…괜찮아.”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렵냐며 문자로 징징대는 남자친구를 진정시키는 데 진땀을 빼면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겨우 화장을 끝내고 방에 있는 옷장을 열어 원피스를 꺼냈다. 남자친구와 사귀기 시작했을 즈음엔 치마나 원피스를 꽤 자주 입었던 것 같은데, 한동안 뜸했다. 검은색 기모 레깅스에 다리를 집어넣고, 와인색 바탕에 잔 꽃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머리부터 뒤집어쓰듯 입고 목에 달린 리본을 묶었다. 머리는 묶지 않고 놔둔다.

  ‘오늘 저녁에라도 보면 안 돼?’ 핸드폰 진동과 함께 울부짖는 이모티콘이 가득한 문자가 온다. 마음이 좋지는 않다. 잠시 고민하다가

  ‘미안, 늦게 끝날 지도 몰라서 시간 보고 연락할게.’ 라고 보내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코트와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건넌방 문이 열려 있어서 그냥 내려가려다 노크를 해봤다.

  “아, 다 했어요. 차에 시동 걸어 놨으니까 먼저 내려….”

 커프스 단추를 채우느라 뒤도 안 보고 말하다가 얼굴이 마주치고서야 나라는 걸 안 듯, 풀어진 웃음을 짓는 그. 단추를 다 채우자 이번에는 넥타이를 맨다. 목에 걸고 혼자 매듭을 만드는 동작이 능숙했다.

  “그 넥타이 안 어울려요.”

 내 말에 그는 손을 멈추고 자기 목에 걸린 남색 넥타이를 내려다본다.

  “처음 본 날에도 그거 맸잖아요.”

 그러자 그는 반쯤 완성된 것을 풀고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골라줄래?”

 그는 캐리어 중 하나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서 뚜껑을 열고 침대에 올려놓았다. 돌돌 말린 넥타이가 3열종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거의 무채색 계열이었지만. 그런데 왜 아직도 짐을 다 안 풀었을까? 의문이 들지만 일단은 코디부터 하기로 하고 상자 속을 들여다본다. 남색, 짙은 회색, 옅은 회색, 검은색, 진초록…칙칙하기 그지없네. 결국 짙은 와인색 바탕에 아주 작은 흰색 도트가 드문드문 박힌 것을 골랐다. 오늘 입은 먹색 수트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꺼내서 내밀자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아….” 나는 곧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저, 넥타이 못 매요.”

  “괜찮아.”

 매듭짓는 법을 그림으로 배워서 안 괜찮을 것 같지만 그에게 다가섰다. 어라, 뭔가 낯선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 흰색 와이셔츠 목깃을 두 손으로 펴고 타이를 그의 목에 한 번 둘렀다. 조심스럽게 길이를 가늠해보고 넓은 쪽으로 좁은 쪽을 감으며 예쁘게 매듭을 만들어 보려 최선을 다했다.

  “머리 풀었네.”

  “네.”

 이 정도면 된 건가? 매듭을 쭉 올려서 정리하고 보니, 뭐, 처음치곤 나쁘지 않았다. 그도 거울에 비춰보고 살짝만 매만지고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인다.

  “고마워.”

  “저, 내려가 있을게요.”

  “곧 갈게.”

 

 

  “인상 좀 풀어요.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인데, 그렇게 찌푸리고 있으면…. 결혼식 날도 하도 표정관리 안 하고 있어서 오죽하면 내가 귓속말 까지 하고.”

  앞서 걷는 엄마는 옆에 걸어가는 그에게 작은 소리로 핀잔을 주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 치마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손에 클러치를 들고 걸어가는, 오늘도 어김없이 세련된 엄마. 또각-또각-대리석으로 된 갤러리 바닥에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울린다.

  “인사만 하고 같이 조금 둘러보다가 빠져도 돼요. 아무튼 내 옆에 있을 때는 최대한 표정 밝게 해봐요. 못 하는 것도 아니더구만. 근데 자기, 오늘은 향수 안 뿌렸어요?”

  빼먹었다고 그는 단순하게 답했다. 아아, 그래서 낯설었던 건가. 넥타이를 매주러 다가갔을 때 스쳐지나간 기분은 아무 향도 나지 않았던 탓이었구나.

  “왜? 아, 상관없죠. 웃기만 해준다면야. 알겠죠? 스마일!”

 

  전시관 안은 따뜻한 색의 조명을 썼음에도 다소 차가운 느낌이었다. 갤러리 외관은 안도 다다오 식으로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를 섞어서 지은 커다란 원통형이었는데, 내부도 외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각 섹션을 나누는 가벽과, 2층 까지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낸 좁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단조롭지는 않았지만, 하얀 대리석 바닥과 노출 벽, 그 위에 걸린 하늘색과 파란색 조합의 뻣뻣한 화풍의 대형 작품들이 쌀쌀맞은 분위기를 더했다. (아마 천은혜라는 여자도 저렇게 뻣뻣하겠지.) 그나마 그 안에서 온기가 느껴지던 것은 작게 흐르는 음악과 바닥에 놓인 축하 화분들 정도.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그가 한 번 돌아보았고. 줄곧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던 그의 팔에 엄마가 팔짱을 끼면서 한껏 밝은 톤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어머나, 천 작가님.”

 그러자 커다란 캔버스 앞에 사람들과 서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았다. 30대일까. 염색하지 않은 숏커트 머리와 검은색 원피스. 날카로운 인상 위에 극단적으로 검은 색과 붉은 색만 사용한 화장을 덮어 써서 더 차갑게 보였다. 알 만 하네. 그녀 뒤에 놓인 캔버스 속의 커다랗고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얼굴은 거의 같아 보였다. 그녀가 반색을 하며 엄마를 맞이했다.

  “대표님 와주셨네요. 감사해요 요즘 가뜩이나 바쁘실 텐데.”

  “아니에요 당연히 와야죠. 보니까 이번 작품도 호평 일색이던 걸요. 축하해요.”

  “이제 시작이죠. …작가님도 좋아 보이시네요. 두 분 결혼식에 못 가서 죄송해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대사에서 나는 가시를 느꼈다. 아하. 엄마가 그렇게 웃으라고 했는데도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어색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아, 이쪽은 우리 막내 딸. 인사 해. 이쪽은 천은혜 작가님이셔. 작품 본 적 있지?”

  “안녕하세요.”

  “따님이 벌써 이렇게 컸어요? 대표님 좋으시겠어요. 따님들이 둘 다 미인이라서.”

  아아, 간지러운 거짓말. 괜히 따라왔나. 저절로 살짝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간신히 펴고 나는 그 대화에서 빠졌다. 그녀는 곧 인터뷰가 있어서 잠깐 안내만 해주고 자리를 옮겨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내가 원하던 게 그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전시관 안을 걸으며 간단하게 작품을 소개해 주고 근황을 이야기 했다. 엄마는, 이야기 하나 하나에 호의를 가득 담은 반응을 해주었다. 분명 연기일 텐데도 자연스럽다. 우리 엄마지만 대단하다. 그 옆을 따라가는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두어 섹션을 지날 때쯤 되자 시간이 되었다며 그녀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손사래를 친다.

  “그럼, 편하게 구경하세요. …두 분이 잘 어울리세요. 다행이네요.”

 다행이네요? 어색한 문장이다.

  어쨌든 나는 내 의무를 다 했으니까, 엄마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엄마가 약간 피곤한 얼굴로 돌아보더니 가도 된다고 손을 저었다. 자유다.

 

  엄마와 그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걸었다. 모르는 사람들, 딱딱한 얼굴들. 그림도 사람도 재미가 없어, 한쪽 구석에 벤치가 붙어있는 곳을 찾아냈다. 은테 안경을 쓴 초로의 남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깡마른 여자, 그리고 그들보다는 젊어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거기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몇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 조금 서 있었다고 벌써 다리가 아프다니. 종아리를 주무르며 고개를 드니 저 멀리에 사람들 곁에 서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키가 크니까 어디서든 잘 보이는구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 엄마에게 끌려서 이 사람 저 사람 인사를 나누고 다니는 모습은 정중했지만 다소 곤욕스러워 보였다.

  “저거 신우진 아냐?”

  순간 내 옆자리에 있던 세 명의 대화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귀가 쫑긋해졌다.

  “저 양반이 이런 델 다 오고. 결혼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니까.” 은테 안경의 남자가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놀란 목소리로 되묻는다.

  “결혼했어요? 신우진?”

  “지난달인가…김진숙이랑 했잖아. 저기 같이 다니네. 보나마나 끌려왔지 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내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더 기울이자 잠자코 있던 후덕한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자기 발로 올 데는 아니죠. 하여튼 김 대표님이 대단하다니까요. 지금까지 저기가 만나고 다닌 여자들 자기도 다 봤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나 봐요. 최후의 승리자는 역시 달라도 달라.”

  “독한 여자잖아. 혼자 딸들 키우면서 지금 회사 일으켜 세워놓은 거 봐.”

  “뭐, 우진 씨 여성편력에 비할 건 아니지만 진숙 씨도 꽤 여러 번 갈아타지 않았어요?”

 깡마른 여자는 거슬리는 하이 톤의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하고 웃는다. 그게 웃을 일이야?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귀에 쏙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는데?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그래도 이전에 김 대표님 재혼할 때는 비즈니스 상 그럴 만한 사람이다 싶기도 했는데. 신우진은 좀 뜻밖이죠. 오랫동안 알았다고는 해도.”

  “잘생긴 것도 아닌데, 능력 좋은가 봐.”

  “섹시하잖아요.”

 여자의 말에 두 사람이 돌아봤고, 나도 자동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던지 여자는 헛기침을 하며 무마했다.

  “어쨌거나 저 둘은, 에로스를 넘어서 거의 아가페라고 봐.”

  “아무튼 오늘 이 자리에선 천은혜 씨만 안됐네요.”

 깡마르다 못해 지푸라기 같은 인상의 여자가 말하는 순간 어디선가 싸한 느낌이 들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안 된 여자가 와 있었다.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그 모습에 괜히 내가 소름이 쭉 끼쳤다.

  “한 작가님 오셨네요. 어디 계신가 했어요. 이 교수님이랑 박 기자님이랑 계셨구나. 세 분 다 잘 지내셨어요?”

 저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한껏 반가운 톤으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그러니까, 안경을 쓴 남자가 한 어쩌구 하는 문화 평론가이고, 여자는 무슨 서양화 교수, 후덕한 남자는 잡지사 기자인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입방아를 찧던 사람들이 천은혜라는 여자가 나타나자 한껏 온화한 얼굴로 일어서서 악수를 청하며 진중하게 인사를 나눈다. 지켜보던 나는 헛웃음이 났다.

  “…그럼, 세 분 다 천천히 돌아 보시구요. 나중에 봬요.”

  한참 뜬구름 같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세 사람은 어물쩍 자리를 떠버리고. 그래, 그렇게 떠들 거면 나가서 하는 게 낫지.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을 보낸 천은혜 씨도 곧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선다.

  “김 대표님 따님?”

  “아, 예.”

  “보통 다 저런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죠. 신경 쓰지 말아요.”

 되게 일찍부터 와서 듣고 있었던 건가. 그녀는 풀어진 얼굴로 내 옆에 앉았다.

  “어떻게, 전시는 볼만 해요? 엄마가 오자고 했죠?”

  “그건 그렇지만…잘 보고 있어요. 좋은 작품도 많고요. 잠깐 다리가 아파서 앉아 있었는데 그만….”

  “뭐, 틀린 말들은 아니니까.” 내가 세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슬쩍 바라보자 그녀가 미소 지으며 일축했다. 첫인상처럼 차가운 여자는 아닌 듯한데. 아까는 역시, 그것 때문인가.

  “어머니는 우진 씨랑 잘 지내요?”

 역시나.

  “네,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솔직히 어떤지 모르면서, 나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한다. 그녀의 씁쓸한 얼굴을 보고 나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질투, 우월감, 동질감 그런 것들.

  “두리…맞죠? 두리 씨는 어때요, 우진 씨?”

 그녀는 아무 악의도 없었겠지만, 나에겐 최악의 질문.

  “아직 잘 몰라요. 어떤 분인지.” 안다고 한다면 몸에 관해서만 조금.

  “작가님은 잘 아세요?” 이번엔 내가 물어본다. 그녀는 문득 머뭇거리고 통제되지 않는 눈썹이 약간 아래로 처졌다. 한숨.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아니요.” 라 말한다.

 

 

 

  그녀가 다시 사람들 곁으로 떠나간 후, 괜스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기에 와봤더니 사람도 거의 없고 채광도 훨씬 좋았다. 건물 중앙이 보이드 공간으로 뚫린 복층이라, 안쪽 난간에 서면 아래층을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 머리를 보고 있을 생각은 없어서 전면 유리로 된 외벽을 향해 섰다. 바깥 공기는 차갑겠지만 실내에서 느끼는 볕은 따사롭고 기분이 좋다. 창밖에는 다소 인위적인 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앙상한 나무들과 마른 억새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저 멀리 바람개비 모양의 장식물이 세차게 돌아간다.

  “여기 있었네.”

  어느새 나타난 그가 내 옆에 걸음을 멈춘다. 역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 봤어요?”

  “내 의무는 끝났어.” 의무라, 나와 같은 입장인가 보다.

 나는 안쪽 난간에 기대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그도 팔짱을 끼고 나처럼 기대어 섰다.

  “그림은 어땠어?”

  “그냥저냥…. 컨셉도 딱히 없는 것 같고. 팸플릿에는 미니멀리즘이 어쩌고 해서 기대했는데, 프랭크 스텔라를 따라한 것 같은 몇몇 작품 말곤 거의 없었어요. 팜플릿을 쓴 사람이 미니멀리즘이 뭔지 오해했는지….”

 나는 느낀 그대로 말했는데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저 전형적인 표현주의 같고. 어떤 부분에선 나르시즘도 느껴지긴 하는데, 화풍은 한국에선 그런대로 희소성 있겠죠. 아무튼 요즘 예술이야 다 그렇지만 공감이 안 가서 그냥 그랬어요.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 연작이라면 성공적이지만….”

 너무 주절거렸나. 무언가를 평가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늘 이렇게 되고 만다. 고쳐야 하는데.

  “비평 수업이라도 들었나?”

  “그냥, 미술사 같은 건 좋아해서 이것저것 주워듣고 읽었어요.”

  “차라리 그쪽으로 가는 게 맞을 수도 있겠네.”

 정말? 언젠가는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길인지 확신은 없지만.

  “좀 전에 천은혜 씨랑 이야기했어요.”

  “무슨?”

  “별 얘기 아니었어요. 작가님은 어떻게 지내는지, 저랑은 어떤지.”

  “뭐라고 했어?”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아직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고 했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 잠시 그러쥔 손을 입가에 받치고 생각하는 모양을 하다가 다시 팔짱을 낀다.

  “천은혜 씨는, 아직 작가님을 좋아하는 모양이던데요.”

  “그렇게 말해?” 목소리의 톤은 그대로지만 되묻는 속도가 빨랐다.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그래 보이던걸요.”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거야.”

  “예전에 사귄 여자예요?”

  “…아니.”

  “그럼 잤어요?”

 나는 최대한 가볍게 물었는데, 그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 후에야 풀어진 채 미소를 짓는다.

  “질투해?”

  “설마요.”

 우리 사이에 무슨 질투할 건덕지라도 있나. 하지만 좀 전에 세 사람이 쑥덕이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맴돌고 있었다.

  “작가님은 어땠어요, 천은혜 씨?”

  “어떤 부분?”

  “음…그냥 전체적으로.”

  “길게 안 봐서, 특별히 호감 있었던 건 아니야.”

  “그럼 왜 잤어요?”

  “사랑이 섹스고, 섹스가 사랑인 건 아니라고 보는데.”

 흐음-나는 그냥 시큰둥한 척 소리를 냈다. 그래, 이 사람은 이미 나보다 20년도 더 살았고, 이 전까지 미혼이었고, 작가였고, 감안할 것들은 차고 넘치니까. 그래 괜찮아. 하지만…지나간 일에 의미를 둘 건 아니라지만, 어림짐작하기보다 직접 듣는 게 속은 시원하니까 물어본 거지만….

  “나는 몇 번째예요?”

 결국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 하고 이런 말이 나왔다.

  “무슨 뜻이야?”

  “그냥, 저는 몇 번째 여자냐고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의미인지 궁금한 것이다.

  “저 사람이 그런 얘기도 했어?”

  “아니요.”

 손톱을 뜯으며, ‘그냥, 들었어요. 작가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유언비어는 아닌가 봐요?”

 허허 웃는 그. “왜요?”

  “그래서 질투가 난 거야?”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런 거 아녜요.”

  “한 사람한테 되게 빨리 질리는 스타일이에요?”

 나도, 단지 ‘몇 번째’라고 번호 매겨진 채 흘러간 이름이 될까?

  “내가 좋아서 만난 사람은 없었어.”

  아. 그가 말하는 순간 뜯어낸 손까시 자리에 피가 고였다. 혀로 상처를 핥아내고 그를 돌아보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작가님은 안 좋은데, 그냥 했다는 거예요?”

  “뭐, 처음엔 좋았나.”

 맙소사.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혀끝에 굴리던 피비린내를 삼켜내자 헛웃음이 나왔다.

  “저번에 차에서 했던 말 있잖아요. 나를 좋아한다고.”

  “응.”

  “그건 진심이죠?”

  “아닌 것 같아졌어?”

  “그런 건 아니지만…갑자기 몸부터 그렇게….” 자기가 잘못한 거라고는 했어도. 혹시나 나에게 원한 게 그것뿐일까 봐.

  “예뻐서.”

 네? 아직 질문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나온 답변에 나는 당황했다.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햇빛에, 이마와 옅은 미소를 띤 입가의 주름이 더 도드라져 보였을 뿐이다.

  “천천히 가고 싶었는데. 예뻐서 주체가 안 됐어.”

 진심인지 농담인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경직되었던 마음이 스르르 놓였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온기가 그에게 있다는 걸 느낀 탓이었다.

  “뭐…남자들은 일단 덮쳐놓고 다음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그렇게 대답하던데요? 그렇게 말하면 풀릴 줄 아나봐.”

  “나 이전에 아홉 명이나 더 있었어?”

  “네? 아녜요!”

 내 속을 알까 모를까. 그는 나를 놀려먹고 있었다. 그 장단에 맞춰 내가 안달하자 결국 그는 웃음을 터뜨렸고. 아마 이것은 내가 그와 있으면서 겪은, 또 앞으로 겪게 될 처음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는 팔짱을 풀고 한 쪽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내가 본 중 가장 크게 웃었고. 나는 내 안에 눈이 쌓였다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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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부_1회 2017 / 10 / 28 422 1 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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