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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흔한 양판소 세계의 클리셰 사냥꾼
작가 : 빈둥남
작품등록일 : 2017.11.9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
요즘 핫한 키워드들은 다 들어가 있는 양판소 세계.
하지만 짜여진 대로 흘러갈지는 글쎄요. 파란만장 퓨전 판타지의 시작.

 
프롤로그 : 이 세계는 특별한 놈이 너무나 많다.
작성일 : 17-11-09 16:03     조회 : 493     추천 : 4     분량 : 17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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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아론 스미스는 평범한 대장장이의 아들이다. 그는 가업을 이을 후계자이자 도제로서 별일 없으면 항상 아버지를 옆에서 도왔다. 그렇기 때문인지 피부는 그을린 듯 까무잡잡했으며, 체격은 소년답지 않게 다부졌다.

 

 그 덕분인가 이런 작을 마을에서는 아론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배짱을 가질만한 소년은 없었고, 그도 줄곧 골목대장역할을 자처했었다.

 

 16세 소년 아론은 오늘도 친구들을 뒤에 길게 세우며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한 쌍의 앳된 남녀를 발견했는데,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을 지나쳐 걷고 있는 소녀는 이런 촌구석에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대장?”

 

 “…….”

 

 이상을 느낀 듯, 유독 아론을 따르는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소년이 물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의 말을 못들은 듯, 아무 대답도 안한 채 걷고 있었다. 뭐에 홀린 것 마냥.

 

 “…….”

 

 아론은 방금 처음 본 소녀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확신했다. 그녀 옆에는 헌칠하고 잘생긴 흑발의 소년도 함께 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따위 방울 달린 놈을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왜 그래 아론!”

 

 “…….”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소년이 힘껏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헛수고였다. 선남선녀들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주점에 들어갔고 아론은 터벅터벅 걸아가 창문으로 이상형의 동태를 훔쳐보았다.

 

 소녀는 고결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순백의 옷을 입고 있었다. 화장을 한 흔적이나 화려한 장신구 따위는 보이지 않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수정을 세공한 듯한, 그녀의 보라색 눈빛은 그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영롱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항. 대장 한방에 플래그가 꽂혔구나.”

 

 아론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소년 벤자민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창문에 얼굴을 처박았다. 무리들도 재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같은 행동을 취했다.

 

 -쾅

 

 그때였다. 얌전히 있던 흑발의 소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고선 머리만큼 검은 빛이 감도는 눈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움찔

 

 아론을 비롯해 훔쳐본 것을 들킨 무리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흑발흑안의 소년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해 먹겠군. 부끄러움도 모르는 쥐새끼들이 휴식마저 방해 할 줄이야.”

 

 “…….”

 

 여기서 쥐새끼들은 당연히 아론 일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껏 홀린 듯 움직였던 아론은 흑발소년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저런 모욕적인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돌아가자.”

 

 아론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기분을 숨기며 애써 담담한척 입을 열었다. 이렇게만 되었더라면 오늘일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발의 소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자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거기서 이 새끼야. 베아트리스 양에게 음흉한 시선을 보냈으니 사죄는 하고 가라.”

 

 “…….”

 

 어느새 흑발 소년은 주점에 나와 아론 앞에 섰다. 잠시 후 베아트리스라고 불린 백의의 소녀도 밖으로 나와 낭랑한 목소리로 중재했다.

 

 “강진성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냥 계획했던 대로 식사나 하고 돌아가도록 해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스님. 이런 쓰레기들을 일일이 봐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일은 저에게 맡겨주시길.”

 

 “…….”

 

 베아트리스는 일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강진성이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이 흑발의 소년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그대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아무리 그가 먼저 잘못했다지만, 저런 폭언까지 들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을 비롯해서 무리들은 열 댓 명이었다.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진즉에 이 괴상한 이름을 가진 소년을 묵사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봐주면 어쩌네 하다니.

 

 “…….”

 

 아론은 얼굴이 벌게지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래. 남자답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사과하고 넘어가자.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빨리 와서 고개를 안숙이지?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텐가?”

 

 강압적인 강진성의 말이었다. 이쯤 되자 아론도 폭발했다. 그가 조금만 정중히 사과를 요구했더라면, 아니면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의 찌르는 시선이 없었더라면, 혹은 첫눈에 반한 이상형의 소녀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론은 끝끝내 화를 눌러 참고 고개를 숙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가정일 뿐이고, 결국 일은 터졌다.

 

 “이런 시발새끼가! 너부터 그런 재수 없는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라. 그럼 나도 무릎 꿇고 저분에게 용서를 빌겠다.”

 

 “…….”

 

 아론이 소리치자 무리들은 호응하듯 흑발의 소년을 둘러 감쌌다. 여차하면 폭력도 행사하겠다는 무언의 압력에도 강진성은 주눅이든 기색 없이 아론을 노려보았다.

 

 “역시 쓰레기가 맞군. 잘못을 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다니.”

 

 그의 말이 일견 옳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론은 이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고작 16살인 혈기왕성한 소년이었다.

 

 “지랄. 그러니까 네가 먼저 사과를 하라니까?”

 

 “…….”

 

 아론과 강진성은 서로 노려보았다. 이정도 까지 왔으면 잘잘못을 가리는 게 아니라 두남자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강진성은 최후의 통첩인 냥 씹어뱉듯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지금 당장 사죄해라.”

 

 아무리 강진성이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지만,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아론이 조금이라도 경험이나 통찰력이 있었더라면 강진성의 저런 태연자약한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경계 했을 것이다. 허나 현재의 그는 자존심의 상처가 난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마지막 허세라고 판단한 아론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마지막 기회를…”

 

 철컥-

 

 무리들이 본 것은 허연 빛줄기가 전부였지만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자신들의 대장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모두의 시선이 아론에게 향했다. 그의 왼팔 전체가 통째로 사라졌으며, 피분수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강진성에게 향했다. 그는 광채를 내비치는 휘황찬란한 보검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었다.

 

 “어어...”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진 지금 무리들은 제대로 된 말도 못 꺼내며 하나둘씩 도망치기 바빴다. 가장 먼저 도망친 이는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소년이었다.

 

 “쯧. 버러지들은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무리들을 와해시킨 강진성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론은 피를 콸콸 쏟아내는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원독에 찬 눈으로 흑발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강진성은 버러지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아론의 목에다가 갖다 대었다.

 

 “어쭈. 눈에 힘 안 빼지?”

 

 “…….”

 

 아론은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자 그리고 잊은 것 없나?”

 

 “…죄… 죄송합니다.”

 

 “크하하하. 잘 어울리는군.”

 

 강진성은 아론이 굴복하자 호탕하게 웃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가시죠. 베아트리스 양. 무지렁이들 때문에 결국 피를 흘렸으니, 이곳은 고결한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번거롭지만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네.”

 

 그 말을 끝으로 강진성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장내를 빠져나갔다. 마치 백의의 소녀는 당연히 자신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듯이.

 

 베아트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아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이 그의 왼쪽 어깨를 짚자 놀랍게도 출혈이 멎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베아트리스의 정체는 성왕국의 차세대 성녀였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아론의 팔도 원상 복구하는 게 가능했을 테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곧바로 드러났다.

 

 “죄송해요. 저도 용사님이 심했다는 것을 알지만 감히 그분의 기휘를 거스를 수가 없네요. 강진성님은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분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정도 뿐이 겠네요.”

 

 무척 안쓰러운 얼굴로 아론을 향해 말하는 베아트리스의 말이었다.

 

 아론은 초점이 사라진 듯한, 허망한 눈빛을 하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용사라고?”

 

 “…….”

 

 지금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르비스 대륙은 삼백년에 한 번씩 다른 세계에서 용사를 차출해, 마왕군을 토벌해 왔다. 강진성은 지구에 사는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차세대 용사로 간택되어 진 특별한 소년이었다.

 

 “…용서를”

 

 베아트리스는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하며 용사 강진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

 

 아론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그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시선을 돌려 이제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한손으로 날붙이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 망치를 두드릴 수조차 없었다.

 

 오늘 아론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만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던 것과 고집을 조금 피운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가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한순간에 대장장이의 미래를 빼앗겼으며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으니까.

 

 “…흐윽”

 

 투명한 물방울이 바닥을 조금씩 적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양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소년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

 

 

 집에 돌아온 아론의 몰골을 확인한 그의 아버지는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당장 무거운 몸을 움직여 영주인 지카르트 남작에게 탄원서를 내밀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온 것은 이런 사소한 일이 자신이나 용사님 귀에 다시 한 번 들어갈 시에는 용서치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이웃사람들도 그들 부자를 동정하긴 했으나, 천재지변을 만난 것처럼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심지어는 용사님에게 대들었으니 아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오르비스 대륙에서 용사는 모두에게 신임 받고 있고, 동경의 대상이며 그 인기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 가. 아무리 특별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자신의 세계도 아닌 곳에서 타지 사람들을 위해 목숨 받쳐 헌신하는 소년에게 감동받지 않는 게 이상한 세상이었다.

 

 “젠장… 젠장!”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미래를 빼앗긴 아버지한테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가능만 하다면 용사가 아니라 용사 할아비라도 찾아가 따지고 싶은 기분이리라.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술을 퍼마시며 세상을 비관하는 게 전부였다.

 

 “…….”

 

 아론은 아버지의 망가진 모습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었다. 벌써 몇 주 째 저러고 계신다. 그동안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애써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 볼 때면 노기가 더욱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아론은 아버지가 아들이 왼팔을 잃은 것보다 가업을 이를 후계자를 잃은 것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이런 힘든 때에 아버지가 굳건한 모습으로 서있길 기대했었다.

 

  “…끄윽.”

 

 딸꾹질을 하며 테이블에 엎어진 중년의 사내. 아론은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는 이런 꼴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론은 아버지가 만든 것 중에 훌륭해 보이는 날붙이 몇 개를 쥐고 길을 떠났다. 비록 대장장이는 될 수 없지만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그리고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던 소년에게 복수하는 것은 덤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뚜렷이 살아 날 때가 많았다. 몸의 한 부분을 잃은 것보다 끝내 위협에 굴복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마음 깊숙이 새겨져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계에서 온 용사니, 대륙의 구원자이니 칭송하는 놈일지라도, 한칼 먹여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아론이 집을 나온 지 10년이 지났다. 처음엔 그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해보려고 했으나 한 팔이 없는 소년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끝내 찾은 것은 험하기로 유명한 용병 일이었다.

 

 다행히 아론은 오랜 시간 대장장이의 도제로 살아오면서 단련된 근육이 있었고, 스스로도 몸을 쓰는 것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물론 이쪽 업계에서도 무시와 경멸은 뒤따랐으나, 그는 집을 나왔을 때 다짐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리고 이제는 나름 명성을 떨쳐서 외팔의 용병 아론으로 불리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그는 회의감이 짙은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게 아니었다. 금의환향하겠다는 결심도 복수하겠다는 맹세도 조금씩 연소시킬 만큼. 지금은 거의 다 타버리고 아주 작은 심지 하나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니, 현실과 타협했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용병일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만큼 제법 수입을 벌며 살고 있었으나, 그만큼 나가는 비용도 많았으며, 게다가 겨우 이정도로 자랑스레 귀환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성과였다.

 

 “…….”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론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것은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용사 강진성이 마왕군의 대장군중 하나인 발제부르를 없앴다는 승전보였다.

 

 대륙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용사를 칭송해 마지않았고, 성왕국에서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만인장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

 

 아론은 여태껏, 강진성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격차는 더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맡은 의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시키는 독심으로 제법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나, 과연 수준 높기로 유명한 성왕국의 기사를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강진성은 그런 정식서임을 받은 기사들을 턱짓하나로 수백 명을 부리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의 몸에 한칼을 먹이기는커녕 알현이나 할 수 있을까?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왼팔이 쓰라리건만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아론. 또 하늘 보면서 똥폼 잡고 있냐. 저녁이나 하러 와.”

 

 “…….”

 

 아론은 자신을 부르는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단련된 몸과 얼굴에 난 수많은 흉터들이 그가 해쳐 나온 수라장이 적지 않음을 나타내는 듯 했다. 실제로도 아론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용병 신입 때부터 지금의 ‘외팔의 용병’이 있기까지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지금 갑니다. 반 단장님.”

 

 그리고 중년의 사내는 아론이 속해있는 임모탈(immortal) 용병단의 책임자였다. 임모탈 용병단은 반이 젊었을 적 명백한 사지에서도 몇 번이고 생존했기 때문에 붙여진 ‘불사의 용병 반’과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아론이 반을 따라서 조금 걸어가자, 장작불 근처에 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앉아있었다. 사실 죽지 않는, 불멸의, 불후의. 등 거창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임모탈 용병단은 총인원이 고작 6명뿐인 소규모 집단이었다. 다만 개개인의 무력이 출중한 편이라서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아론과 반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앉자, 일행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가 잽싸게 움직여 그릇을 내밀었다.

 

 “고기 수프에요. 마지막 날이라서 인심 좀 썼습니다.”

 

 “고맙다.막둥아.”

 

 “잘 먹을게. 제임스”

 

 반과 아론이 차례대로 감사를 표하자, 용병단의 막내인 제임스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들은 현재 장기 의뢰를 마치고 귀환하는 길이었으며, 내일이면 숙소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후련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노숙도 오늘로 끝이다.

 

 그때였다. 슬슬 어두컴컴해지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왔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후폭풍이 몰려왔다. 먼지바람이 장작불은 물론이고,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에도 다 들어갔다. 용병들은 한참을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잠잠해지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들 앞에는 알몸으로 땅에 박혀있는 사내가 보였다.

 

 “뭐야 저게?”

 

 “설마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진 건 아니겠지?”

 

 “…….”

 

 경악한 용병들은 한마디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본 것이 헛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잠시 후 알몸의 사내는 땅에 박혀있는 하반신을 스스로의 힘을 빼내었다. 저렇게 깊숙이 박혀있으면 몸이 성한 게 이상할 정도였지만, 그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표정이었다. 게다가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체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당히 한걸음씩 그들에게 걸어오며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你們是誰?”

 

 “…….”

 

 신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병들은 알몸사내의 말을 꺼내자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냐하면 알몸의 사내가 뱉은 말은 익숙한 오르비스 공용어가 아닌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한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저런 말 들어 본 사람?”

 

 반이 단원들을 둘러보며 꺼낸 말이었다.

 

 “아니요. 저런 해괴한 언어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일행 중 가장 유식한 편인 제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확실히 대륙에는 공용어 말고도 여러 언어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띠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알몸 사내의 말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이었으니.

 

 “언어는 개뿔. 그냥 딱 봐도 미친놈의 헛소리잖아.”

 

 용병 중 가장 덩치가 크고, 성격이 급한 아놀드가 그렇게 말하며, 위협적으로 알몸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는 저 괴상한 사내를 처음발견 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처럼 오붓한 식사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둬! 아놀드.”

 

 그동안 묵묵히 상황을 보고 있었던 아론이 다급히 말했다. 알몸의 사내는 자신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강진성과 같은 검은머리와 검의 눈의 사내였다. 게다가 불길한 그의 검은 눈은 결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했으며, 또한 강렬했다.

 

 “滾!”

 

 아놀드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다가오자 알몸의 사내는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분위기와 억양으로 봐서 욕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뭐래 미친 새끼가.”

 

 아놀드도 그 뉘앙스를 느꼈던 듯, 얼굴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

 

 “…….”

 

 알몸의 사내의 눈빛이 이전과 다르게 무섭도록 침잠되어져 갔다. 그러다 그가 검지를 들어올려 아놀드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 단순한 동작에 용병 중 유일하게 아론만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물러서라니까. 아놀드!”

 

 “하핫. 이 새끼가 누구한테 삿대질이야!”

 

 하지만 아론과 다르게 아놀드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나보다. 그의 제지를 무시하며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둘렀다.

 

 그 순간. 아놀드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팍- 피를 사방팔방 뿜어내며 사라졌다.

 

 -철푸덕.

 

 아놀드의 건장한 몸만이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이 없는 채로.

 

 “…….”

 

 사람이 정말 예기치 못한 일을 겪으면 아무 반응을 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지금의 임모탈 용병단 처럼. 그들은 동료가 잔혹하게 살해당했음에도 비통한 비명도, 복수라는 단어도 내뱉지 못했다. 말 그대로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

 

 한동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장내에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용병들을 일깨운 것은 알몸 사내의 검지였다.

 

 “으으... 으아아악!”

 

 용병 중 한명은 그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자,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푸덕

 

 이번에도 얼굴이 사라진 채 몸만 덩그러니 쓰러지는 용병.

 

 “아론! 단원들을 데리고 도망쳐라. 내가 시간을 벌겠다.”

 

 단장 반의 비장한 외침이었다.

 

 “안돼요! 단장.”

 

 아론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말렸다.

 

 “이얍. 죽어라 괴물!”

 

 반은 애검을 들어 올리며 알몸 사내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사의 용병이라는 이명이 무색하게 일초도 버티지 못하며 허망하게 죽은 것이었다.

 

 “바아아안!”

 

 아론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남은 단원들과 전력을 다해 발을 놀렸다.

 

 이번엔 죽음의 검지가 제임스를 향했다.

 

 -피슛

 

 제임스가 쓰러지며 혈액이 옆에 있던 동료인 콜린에게 대량으로 튀었다. 그러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며 주저 않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일어나 콜린!”

 

 아론은 잽싸게 달려가 콜린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난 못해... 먼저 가.”

 

 콜린은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전의는 애초에 사라졌고, 도망칠 의지도 일지 않는 것 같았다.

 

 “닥쳐! 넌 할 수 있고 해야만 돼.”

 

 아론은 강제로 콜린을 일으켰다. 냉정히 판단한다면 패닉에 빠진 그를 버리고 가는 게 조금이라도 살아날 확률을 높이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임모탈 용병단의 단원은 콜린과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결코 쉽게 동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린 시절 팔을 잃자마자 도망친 친구들처럼 비겁자가 되기 싫다는 게 더욱 정확하리라.

 

 “아아…”

 

 하지만 아론의 노력도 헛수고에 불과했다. 마지막 남은 동료인 콜린의 머리도 사라지며 피가 튀었다.

 

 “…하하하.”

 

 아론이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알몸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섯 명을 터트려 죽였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신도 용병 일을 하면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건 정말 아니었다.

 

 차라리 아놀드의 말처럼 미친놈이었으면 이해라도 하겠다. 하지만 알몸사내의 뚜렷한 눈빛은 자신이 벌인 일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으며, 태연자약한 태도는 용병들의 죽음을 주변에 있는 돌맹이가 사라진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게 분명해보였다.

 

 어째서 신은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에게 저런 특별한 힘을 허락했을까. 아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검지가 아닌 손바닥이 향하고 있었다.

 

 “크윽.”

 

 아론은 엄청난 흡입력을 느끼며 알몸 사내 쪽으로 빨려 들어가 그대로 목을 잡혔다. 실로 놀라운 힘.

 

 아론이 허공에서 아등바등 거릴 때 알몸사내는 심유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본좌는 무림의 절대종사 천마라고 한다. 내 말을 이해했는가?”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을 천마라고 소개한 사내는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아론은 분명하게 그가 전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방금 천마가 사용한 기술은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무공이었다. 전음입밀(傳音入密)처럼 단순히 특정대상에게 몰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일종의 텔레파시라고 보면 되었다.

 

 -끄덕끄덕

 

 아론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혜광심어는 통하는 것 같군. 본좌의 신안을 봐라.”

 

 천마의 검은색 눈이 붉게 변하며 귀기(鬼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불길함은 느낀 아론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미증유의 힘이 강제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크아아아”

 

 생전 경험도 못한 고통에 아론은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 천마가 하는 것은 사혼술의 하나로 심령을 제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파닥거리던 아론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제야 옥죄던 손을 풀어주는 천마. 이제 그는 영혼이 없는 인형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간 천마는 아론에게 대륙의 공용어를 배우고 정세를 들었으며, 혹은 식량을 구해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잡일을 시키다가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꼭두각시의 주인이 사라진 아론은 며칠간 아무것도 안하고 그대로 있다가, 결국 본능에 따라 먹을 것을 구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름도 모를 산속에서 근근이 연명하며 살아 간 것이 무려 10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가에서 게걸스럽게 물을 마시고 있던 아론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으억!”

 

 물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기겁을 하는 아론. 잘생겼다고 까지는 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 남자답게 생겼던 그의 얼굴이 너무나 볼품없게 변해버렸다. 게다가 자랑하던 근육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리고 불연 듯 그동안에 기억들이 한 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통에 머리를 쥐며 괴로워하는 아론. 그 억겁 같은 시간이 끝나자,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동료들은 전멸했으며, 자신은 십년의 세월을 빼앗겼음을.

 

 “허허허….”

 

 

 아론은 초라해진 몸을 만지작거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복수? 개나 줘버리라지. 이제 모든 것을 다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

 

 

 아론이 힘겹게 고향에 도착했지만, 집은 폐허가 되어있었고,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애써 안 좋은 생각을 털어내며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아론의 기억에도 있는 사람이었다. 많이 늙긴 했지만 분명히 아버지의 벗인 브레드 아저씨였다. 가금씩 자신에게 먹을 것을 쥐어주던.

 

 “브레드 아저씨!”

 

 “누구신지?”

 

 “접니다. 아론이요. 아론 스미스.”

 

 “뭐라고?!”

 

 브레드는 머리털이 거의 다 빠지고 초췌한 몰골의 사내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이게 그 재기 넘쳤던 소년이라니. 하지만 이내 그는 수긍했다.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한쪽 팔이 허전한 게 아론 스미스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오랜만이구나. 아론.”

 

 “예. 아저씨.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왜 안 보이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

 

 브레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아론은 불길한 예감에 아찔한 기분이 들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인내했다. 그의 입이 열리기를.

 

 “너희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살다가 몇 년 전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아론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대로 서있었고, 브레드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아론은 꽤 오랜 시간을 폐인처럼 지냈다. 이미 망가 질대로 망가진 몸으로 그렇게 지냈다 함은 정말로 언제 돌연사할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보다 못한 브레드는 아론을 찾아가 일갈했다.

 

 “이놈 자식아 네 아비도 그리 죽었는데 너도 이러고 자빠져있으면 잘도 좋아하겠다!”

 

 “…브레드 아저씨? 여긴 어쩐 일로….”

 

 “그래. 하나뿐인 친구 아들인 네가 이 꼴로 있으면, 내가 나중에 그 친구를 볼 면목이 없지 않겠냐.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와라.”

 

 “…….”

 

 아론은 취한 와중에도 못이기는 척 브레드를 따라나섰다. 본능적으로 이게 자신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날이후로 브레드는 아론이 딴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일감을 물어 와주며 굴렸다.

 

 아론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브레드가 너무 고마웠다. 때때로 아버지를 생각하면 괴로운 마음에 몸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금의환향하겠다는 철없는 욕심을 진즉에 버렸다면, 효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성한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또한 부질없는 복수를 일찌감치 포기했더라면 동료를 잃지도 허송세월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

 

 또 잡생각이 올라온다. 아론은 외팔로 힘껏 장작을 팼다.

 

 꽈직-

 

 보기 좋게 양단되어지는 작은 땔감.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일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아론의 홀쭉한 얼굴은 제법 살들이 올라왔으며, 자취를 감췄던 근육들은 슬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전성기 때를 생각해보면 아직도 한참은 모자라지만 이정도만해도 환골탈태라고 불러도 좋을 긍정적인 변화였다.

 

 한동안 장작을 패던 일을 마무리한 아론은 이마에 땀을 닦았다.

 

 -씨익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는 아론. 그도 이제 종종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땔감들을 가지고 가면 브레드 아저씨도 좋아해 주시겠지.

 

 사실 현재의 아론은 브레드를 제2의 아버지처럼 모시며 잘 따랐다. 단순히 자신을 구제해준 은인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뒤에서 보내는 따뜻한 눈빛은 부정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론이 친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그에게 투영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마을을 향하던 아론은 경악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는 마을. 이제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쓰러져있는 사람들.

 

 아론은 당장 메고 있던 지게를 내팽겨 치며 브레드의 집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그는 신에게 빌고 또 빌며 전력을 다해 발걸음을 놀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불타고 있는 집과 꼬챙이에 꿰뚫린 채 죽어 있는, 흰머리의 노인이 보였다.

 

 “…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인가? 벤자민?”

 

 아론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20년이 넘게 흘렀으니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는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장 잘 따르던 소년. 세월이 흘러 모습은 많이 변했으나 얼굴에 있는 주근깨가 그것을 증명한다.

 

 “안녕? 대장. 오랜만이야.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자면 맞아. 내가 그랬어.”

 

 작은 체구의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사내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범행을 인정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몰살시킨 천인공노 할 짓을 하고도.

 

 “벤자민 이 개새끼! 내가 통째로 씹어 먹어주마!”

 

 아론은 웅크리고 있던 분노를 모두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조금의 자비도 없이 전력을 다해 벤자민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휘익

 

 아론의 도끼질은 용병시절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기세만큼은 사람을 장작처럼 양단 할 만큼 매서웠다.

 

 하지만 놀랍도록 가볍게 피하는 벤자민. 어린 시절 겁 많던 소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브레드를 관통시켰던 꼬챙이를 빼낸다.

 

 “이…이익!”

 

 그 모습을 본 아론은 더욱 분에 못 이겨서 마구 도끼를 휘둘렀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별 어려움 없이 피하는 벤자민. 오히려 훨씬 여유로워진 듯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도발했다.

 

 “하하하. 왜 이렇게 화났어. 대장.”

 

 “…….”

 

 “…쳇 생각 보다 재미없군.”

 

 벤자민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꼬챙이를 쭉 내밀었다. 그러자 복부를 꿰뚫리며 무릎을 꿇은 아론.

 

 “크헉...”

 

 아론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지옥불 같은 안광으로 벤자민을 노려보았다.

 

 “오우. 그렇게 노려보지 마. 무섭잖아.”

 

 “…이 개자식. 어째서 네가 이런 흉악한 짓을?”

 

 벤자민은 잠시 고민하던 기색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냐. 아냐. 그 대답을 지금 바로 해주기에는 너무 재미가 없어 대장.”

 

 “…….”

 

 벤자민은 아론에게 다가가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쥐고 있던 손도끼를 놓치며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아론.

 

 벤자민은 가차 없이 복부에 박혀있는 꼬챙이를 빼냈다.

 

 “크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아론에게 벤자민은 그대로 힐링 포션을 들이부었다. 그 효과는 놀라워서 조금씩 관통된 부위가 닫혀 지기 시작하며 출혈이 멎었다.

 

 “…왜?”

 

 아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벤자민은 그런 그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한다는 듯이 말했다.

 

 “응. 걱정 마. 어차피 대장은 죽을 거니까. 단지 유흥을 위해 시간을 벌어놨을 뿐.”

 

 “…미친 새끼.”

 

 “후후 그래?”

 

 그때부터 벤자민의 고문은 시작되었다. 꼬챙이로 사정없이 아론을 찌르며, 그가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면 포션으로 그를 살려놓기를 반복했다. 아론은 악착같이 입을 다물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이 미친놈을 기쁘게 할 뿐 일 테니까.

 

 그러나…

 

 아론의 그런 결심도 벤자민의 잔혹한 행위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가 않자, 흐느낌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도끼로 하나 남은 팔마저 잃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 미친 새끼야.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야!”

 

 비분강개. 아론은 문자 그대로 슬픔과 분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리고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곳엔 억센 용병들 사이에서도 독한 걸로 인정받았던 ‘외팔의 용병’은 없었고 오직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의 남자만 존재할 뿐이었다.

 

 벤자민은 아론의 절규가 듣기 좋은 음악이라도 되는 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헤헤. 이제 들을 자세가 된 것 같군.”

 

 “…….”

 

 “대장 혹시 기억나? 우리 마을의 소피아.”

 

 “…….”

 

 아론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예쁘고 착한 소녀가 아니었던가. 벤잔민은 아무 반응도 없는 아론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그녀와 나는 약혼을 했었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영원히 함께하기로.”

 

 “…….”

 

 “그런데 대장이 그녀를 빼앗았어.”

 

 “…….”

 

 이게 무슨 소린가? 아론은 황당했지만 벤자민의 입은 그칠 줄 몰랐다.

 

 “나와 약혼한지 3개월도 안되어서 대장과 결혼을 해버리더군. 갈보 같은 년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금의 상황도 잊고 크게 반발했다. 자신은 결혼은커녕 누구와 사귀어본적도 없었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용병생활에서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벤자민은 꼬챙이로 회복된 아론의 복부를 다시 한 번 찔러 넣으며 소리쳤다.

 

 “크아아악!”

 

 “닥치고 내 말 끝까지 들어 이 새끼야!”

 

 여태껏 보지 못했던 벤자민의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참 별 볼 일없는 놈이었어. 그래서 복수할 생각도 없이 세상을 저주하며 자살을 했지. 병신같이.”

 

 “…….”

 

 자해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아론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지만 굳이 입을 열어 미친놈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나서 난 깨달았어. 난 눈 놓고 애인을 빼앗긴 열등한 놈 따위가 아니었어. 오히려 아주 특별한 놈이었지.”

 

 “…….”

 

 “난 전생자다. 아론. 전생에 원한을 갚기 위해 지금껏 때를 기다렸다.”

 

 “…하하하.”

 

 묵묵히 벤자민의 말을 듣고 있던 아론은 실소를 터트렸다. 참 인생이 꼬여도 뭣같이 꼬였다. 처음에는 이계에서 온 소년 용사에, 이후에는 무림에서 온 절대자, 이제는 전생에 악연을 끊기 위해 찾아온 회귀자라고 한다.

 

 “그래. 너 같은 범부는 이해 못하겠지.”

 

 벤자민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그래 네 말이 모두 맞다 치자. 그렇다면 복수는 나로 국한시키면 될 것 아니었냐?”

 

 “아주 좋은 지적이군. 원래는 너와 소피아가 결혼을 하면 강제로 빼앗을 생각이었다. 너에게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그런데 네가 용사에게 왼쪽 팔을 잃고 아무도 몰래 가출을 해버렸지. 그때부터 계획이 틀어졌다.”

 

 “…….”

 

 “너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용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이후로 너를 발견했다는 사람이 없더군. 그래도 언젠가 네가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 믿고 지금껏 기다렸다.”

 

 묵묵히 듣고 있었던 아론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20년을 넘게 기다렸다고?”

 

 그것이 벤자민의 심기를 건드린 듯, 그는 아론의 복부에 박혀있는 꼬챙이를 후벼 파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크아악.”

 

 “닥쳐! 자살까지도 행했을 정도의 고통과 원한이다. 그런데 고작?!”

 

 “…….”

 

 다시 조용해진 아론을 무시하고, 벤자민은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너는 아주 실망스러웠지. 몰골은 추레하기 그지없었으며 눈빛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어.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네가 다시 삶에 애착을 가질 때까지.”

 

 “…….”

 

 아론은 전신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말하자면 자신이 재기를 할 때까지 기다리며, 두 번 다시 없을 절망을 느끼게 하기위해 때를 기다렸다는 말이리라. 얼마나 원한이 컸으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벤자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한테 지금 가장 소중한 게 무얼까 하다가, 일을 꾸몄다. 어때 마음에 들어? 대장?”

 

 이제는 다시 처음과 같은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되찾은 벤자민이었다.

 

 “…미친놈. 네가 죽인 사람들은 나한테만 소중한 게 아니라 너한테도 해당되는 거 아니었나? 정말 조금의 죄책감도 없어? 앞으로 후회하지 않겠냐고!”

 

 일순간이라도 그가 동요하길 기대했던 아론이지만, 벤자민은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 이 사람들은 내 치욕스런 과거들을 상기시키게 하는 치부일 뿐이야. 오늘 너와 함께 마을을 깨끗이 지우고 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아론은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희희낙락하겠지만,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벤자민.”

 

 “닥쳐! 난 특별한 사람이다. 선택 받았다고.”

 

 벤자민이 화가 난 얼굴로 다시 꼬챙이를 후벼 팠다. 하지만 이번에 아론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말을 끝까지 뱉었다.

 

 “특별히 미친놈이겠지. 오히려 전생의 네가 훨씬 낫다고 본다.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으니까. 쓰레기 같은 놈. 그러니까 소피아도 네가 아니라 나를 택한 거겠지.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추악한 놈이니까. 크크큭.”

 

 “닥쳐! 닥쳐! 닥쳐!”

 

 “크하하하!”

 

 아론은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면서도 광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정도로는 도저히 그의 웃음을 멈출 수 없다고 판단한 벤자민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안식을 선사해주었다.

 

 -파앗

 

 꼬챙이가 아론의 심장을 꿰뚫었다.

 

 ‘참 좆같은 인생이었다.’

 

 그것이 아론이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프롤로그: 이 세계는 특별한 놈이 너무나 많다. 완.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첫 습작인 '페이크 라이프'를 일단락 짓고, 심기일전해서 쓴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재미가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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