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그는 나락의 끝에 서있었다.
땅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수들이 지축을 올리며 해일처럼 몰려왔고, 하늘 또한 벌떼처럼 수많은 마수들이 하늘을 메웠다.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는 마수들의 발톱으로 찢어발겨졌고 지형은 뭉개지고 박살나며 그 모습을 바꾸었다. 주변 모든 이가 술렁이는 게 들려왔다.
저것은, 불합리한 폭력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
짙은 공포가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마음을 갉아먹어왔다.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등골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도망쳐야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단숨에 깨달았던 것이다 저것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라는 것을.
“프레이.”
그가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전투용 투구를 쓴 오크, 붉은말이 그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왜 후퇴하지 않는가?”
“후퇴······ 말입니까?”
“이것은 이미 진 전투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단언한다. 그를 응시하던 프레이가 시선을 뒤로 향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오크 전사들이 질리고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프레이는 그들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시꺼먼 공포와 마주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 또한, 그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공포를 품고 덜덜 떨고 있었다.
프레이는 다시 마수의 해일을 향해 눈을 돌렸다.
저걸 보고도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공포에 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저것은 인간이, 오크가, 아니, 모든 존재가 본능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기에, 후퇴하려면 지금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저 해일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붉은말.”
“······.”
“당신이 말하는 것이······ 후퇴가, 맞습니까?”
프레이의 쥐어짜는 물음에 붉은말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주다.”
“······.”
적나라한 대답이었다. 오크 병사들의 신음성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너무나 직접적인 말이었으나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해서 프레이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등을 꼿꼿이 펴고 앞을 응시했다. 뒤에 있던 오크들이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프레이.”
그의 이름을 부른 붉은말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죽음을 존중한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굳이 그 죽음을 향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붉은말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남아있는가?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전투다.”
이미 전열은 무너졌다. 사선을 이루고 있던 대형 중 괴물과 가장 가까웠던 왼쪽 측면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은 오른쪽 측면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슬금슬금 물러서는 오른쪽 탓에 사선을 이루고 있던 대형은 어느새 삼각뿔 모양을 갖추었다.
그 삼각뿔의 정점에 위치한 꼭짓점. 그곳에 있는, 그리고 유일하게 처음 배치받은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백인대는, 오직 그들이 속한 제10백인대 뿐이었다.
다른 백인대와 연결되어 있는 마법통신은 후퇴해야한다는 중얼거림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누가 보아도 그럴 것이다.
군단을 통솔할 지휘체계는 전부 몰살당했고 남아있는 건 각 백인대장들과 병사들뿐이었으며, 병력의 차이는 네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더구나 상대는 마수들.
아무리 온갖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오크들이라 하더라도 공포에 질리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말.”
그는.
“우리는, 이겨야만 하는 겁니까?”
공포와, 마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