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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년간 응축되어있던 태초의 악은 거대했다.
그것이 자신을 가둬두었던 별에서 내려와 하늘에 내려앉자,
대지가 흔들리고 지상엔 어둠만이 내려앉았다.
그 변화는 미세하여 보통의 인간이라면 분명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예외는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정말 미세한 변화도 감지 가능한 실력자라던가.
아니면 단순히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거나.
"아..으..어.."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은 단지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저게 대체 뭐야..!'
벌벌 떨며 올려다본 그곳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의
기분나쁜 기운의 흐름이 가득했다.
보는것만으로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그의 몸이 떨려왔다.
그것은 이내 점점 작아지더니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생각에 그칠뿐 겁먹은 그의 다리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제발 움직여!'
그의 간절함 덕분인지 그의 다리는 조금씩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굳어있던 다리에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근육은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가 자욱한 어둠으로부터 도망치려던 그 때였다.
"그만"
쿠우우웅-
"내 앞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공기와 공명하며 위압감을 자아냈다.
사람의 육성이 아닌 그 말은 소리가 아닌 '의지' 로서 남자에게 전해졌다.
남자는 그 음성을 듣자마자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누가 조종이라도 하듯이 그의 몸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던
어둠의 흐름으로 삐걱거리며 걸어들어갔다.
"나의 이름은 세이트리아"
그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어둠의 힘을 가진 나와 자아를 가진 나의 육체는 한몸이니
그대는 나의 육체가 완전히 힘을 제어할 때까지 나를 보호하라."
그녀는 그렇게 명령하곤 자신의 아래에 있는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지상으로 내려올 때 그의 앞으로 내려온 건 우연이 아니였다.
자아를 가진 힘과 육체가 분리된 바람에 '나' 는 온전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폭주하여 인간계를 소멸시킬지도 모르는 노릇이였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인간이 필요했다.
그의 체내의 마나의 흐름을 보니 적어도 대마법사,
아니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몸속에서 활개치는 마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마법을 시도했으며 마법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중에서 이정도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자는 극히 드물것이었다.
외모는 40대 중후반 쯤으로 보이는데 인간들의 평균 수명이 80년도 되지않아 죽는것을
생각하면 그의 나이는 경험이 풍부해 마법사로서 세이트리아를 보호하는데는
문제 없었다.
오히려 딱 적당한 나이였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완전해질때까지 외부로 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인간을 찾는다면 그녀는 이만한 자가 없음을 확신했다.
"내가 그대에게 명하노니, 인간이여 나를 데려가라."
그는 왠지 그 명령을 거부할수가 없었다.
자신의 일생이 이 사명을 받기 위해 살아온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세게 꿈틀거리던 어둠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어둠으로 뭉쳐진 구는 인간의 형태가 되어가며 한 소녀의 모습을 빚어냈다.
흑발에 흑안 그와 대조되는 투명한 흰피부.
특히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뭐든 삼킬것만 같이 깊었다.
거기에 붉디 붉은 입술은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함께
퇴폐적인 느낌을 풍겼다.
15살도 채 안되어보이는 소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가히 매혹적이였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자 숱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녀의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말투는 그녀가 힘과 분리된,
자아를 가진 세이트리아의 육체라는 것을 깨닿게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크게 안도했다.
"나..나는"
그는 말을 더듬으며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부여잡았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상황은 충분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직감했다.
"...헤르테스"
이 명령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음을.
그녀가 밝게 미소지었다.
"내 이름은 세이트리아!"
깊고 깊은 어둠속에서 나온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웃음은 깨끗하고
무척이나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