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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향기를 입다
작가 : 서은환
작품등록일 : 2017.6.24

" 여솔씨, 사랑에 눈 먼 남자에겐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어요. 얼마나 멀리있던, 얼마나 높이있던,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께요. 누구도 무시 할 수 없는 최고의 남자가 될께요. "

 
23화
작성일 : 17-11-06 13:21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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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천하의 강태화도 가족이랑 여자 앞에선 참 약해지네? "

 

 설화가 사무실을 나서자 곧바로 들어온 현정이 웃으며 말했다. 태화는 덮어뒀던 결재서류를 다시 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 형이니까요 "

 

 마실 거라도 내오기 위해 따라 들어온 비서에게 됐다는 손짓을 한 현정은 태화 맞은편 쇼파에 앉아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신기하단 말이지, 사람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한텐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는데…. "

 

 " 이사님한텐 아니지 않습니까? "

 

 " 그게 매정한건데 "

 

 현정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뿅 뿅 뿅 하는 게임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 하실 말씀 있으시면…. "

 

 현정이 아무리 용아 그룹에서 태화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중 하나라지만, 여태껏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태화는 대답 없는 현정을 묵묵히 바라봤다. 평소랑 다른 딱딱한 눈빛에 태화는 더는 말하지 않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 이상하지,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

 

 한참을 뿅 거리던 핸드폰에서 게임오버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현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태화는 그저 말없이 서류만 바라봤다.

 

 또각또각

 

 게임 소리를 대신해 울리는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자 읽고 있던 서류가 태화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서류는 공중에서 흩뿌려진 채 팔랑거리며 바닥을 가득 메웠다.

 

 " 무슨 의미죠 "

 

 김현정 이사. 부회장의 둘째 딸이자 김태성전무의 동생. 용아 그룹의 실질적인 전권은 대부분 김태성이 가지고 있었고, 김현정은 그저 가족이란 이유로 한자리를 꿰차고 있을 뿐인 여자였다. 출근하는것 자체가 의미 없을만큼 놀기 바빳고, 매일같이 파티를 다니는것이 전부인 여자. 홍보기획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실제 업무는 대부분 태화의 몫이었다.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보이는 멍청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좀처럼 생각을 파악할수 없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이외 모습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계대상에서 한참 벗어난 존재일 뿐이었다.

 

 " 내가 만만해? "

 

 그런 여자가 처음 보는 눈빛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물었다. 태화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제가 말실수를 해서 이사님 기분을 상하게 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

 

 현정을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 그거 알아? "

 

 태화는 그저 대답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고, 현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상대방이 우습게 느껴졌다면, 그건 그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다는 거야. "

 

 본래 타인을 깔보는 태화에겐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태화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변명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단, 약간 붉게 충혈된 현정의 눈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읽혀서 였다.

 

 " 하…. 진짜 짜증나…. "

 

 현정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현정이 나가자마자 들어온 비서는 서둘러 바닥에 흩뿌려진 서류를 다시 주워서 태화에게 건넸다.

 

 " 이해할 수가 없군 "

 

 혼자 조용히 중얼거린 태화는 받아든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

 

 

 

 

 

 

 며칠이 지났지만, 상황이 딱히 좋아지진 않았다. 설화는 티 내지 않기로 민준과 한 약속 때문에 그저 답답함만 가지고 있어야 할 뿐이었다.

 

 조급해졌다.

 

 태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작은것부터 차근차근 손길을 뻗어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설화의 출판사는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터라 그럭저럭 잘 피해가고 있었지만, 여솔은 어떤지 알수없었다.

 

 " 여솔씨? "

 

 " 네? 아…. 네, 딴생각을 좀 하느라…. "

 

 " 피곤하시면 들어가서 쉴래요? "

 

 " 그래야 할 것 같아요…. "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여솔의 반응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듯 당당하던 그녀가 근래들어 설화 눈에는 아주 작아 보였다.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었고, 그마저도 억지로 힘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설화를 가장 힘들게 했다.

 

 어쩌면, 나를 만나는 시간 자체가 부담이지 않을까.

 .

 .

 .

 .

 .

 " 설화씨한테 미안한 짓을 하는 거 같아 "

 

 설화와 헤어진 후, 화연을 마주한 여솔이 입을 열었다.

 

 "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야? 후회해? "

 

 " 후회하는 건 아닌데…. "

 

 화연은 여솔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 너 요즘, 문제가 많지? 털어놔봐 "

 

 한참을 망설이던 여솔은 입에 잔을 털어 넣고는 안주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응시 했다. 그리고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듯 파리에 가게 된 일부터 차근차근 늘어놨다. 강태화와 있었던 최근 이야기를 끝내갈때쯤 화연이 나직이 물었다.

 

 "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

 

 " 뭘 어떡해…. "

 

 흥분해서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칠줄 알았던 화연의 차분한 반응에 여솔은 화연의 잔을 채웠다.

 

 " 지금 당장 니 생각이 어떠냐고, 관두고 싶어? "

 

 " 어떤…. "

 

 " SoL이든 설화씨든 "

 

 화연은 잔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여자의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망가진 그 손이 여솔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 난 솔직히 니가 SoL을 없앤들 다른데 취직할 수 있어. 문제는 너겠지. 아니 말이 샐 것 같은데, 간단하게 말하면! "

 

 화연은 잔을 꽉 쥐고 말했다.

 

 " 내가 걱정이고 문제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거야. 아깝고 억울하고 많은 생각이 들겠지만, 막말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회사가 아니라 니가 어떤가잖아 "

 

 " 그래도…. "

 

 " 그리고! 설화씨 한테도 포지션 똑바로 잡아 "

 

 " 내가 성급했던 거 같아….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머릿속에 복잡한 게 너무 많아서…. 남자친구도 친구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린 거 같아…. "

 

 여솔은 마시려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고 말했다.

 

 " 좀 오글거리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빛이고 난 어둠이야…. 그 사람이 나한테 물들까 봐…. 내가 상처줄까봐…. 그게 너무 무섭고 미안해 "

 

 화연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잔과 여솔의 잔을 채운 후 쨍 부딧치며 말했다.

 

 " 설화씨도 그렇게 생각해? "

 

 " 아니겠지 "

 

 " 애초에 좋아하려고 노력은 해봤어? "

 

 " 나도 나름…. "

 

 " 그래, 안 하지는 않았겠지. 진심으로 대하려고 해봤냐고. 애초에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웃긴소린데,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잖아. 마음주기 싫어도 좋아서 미치겠는 사람, 그래 어딘가엔 있을 수도 있겠지. "

 

 맞는 말이었다.

 

 " 좋아 죽을 지경이던 남녀도 감정이 뜨면 다시 돌아가기 힘든데 "

 

 그래서 권태기라는 게 있는 거겠지.

 

 " 시작도 전에 그래서 쓰겠냐, 내 생각엔 지금 니가 몸도 마음도 힘드니까, 도망치는거야"

 

 비겁하게.

 

 " 그 진심을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까. 부담스럽고. 그래서 피하고 도망치려는거라고 "

 

 나도 솔론데 누구한테 조언질인지…. 중얼거리는 화연을 보며 여솔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잔을 채우는 동안 잔 위로 손가락 하나가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서 화연이 웃으며 말했다.

 

 " 혼자 앓지 마. 이러나저러나 너한테 이렇게 술 한잔 사주고, 자작할 때 손가락 하나 올려줄 친구가 있잖냐 "

 

 " 너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갈래? "

 

 " 여자 취향 아닌데? "

 

 " 라면 먹고 갈래? "

 

 " 뭐래 미친년이 "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자리가 끝나면 또다시 고민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당장 버틸수 있는 작은 힘을 받았다.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이 제법 좋았다.

 

 적당히 취해서 적당히 몽롱하고, 찬 바람이지만 적당히 시원했다. 오랜만에 껴본 팔짱에 마치 학생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도 들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쯤, 화연이 팔짱을 풀었고,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여솔을 보며 화연이 말했다.

 

 " 음 오늘은 안될 것 같다 "

 

 " 왜? "

 

 화연이 턱짓으로 가르킨 곳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쭈뼛쭈뼛 어색하게 서있는 모습이 잘 안보였지만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화연은 여솔을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 얘기 잘해봐. 결과를 떠나서 내일 나한테 보고 하는 거 잊지 말고 "

 

 여솔이 붙잡기도 전에 손을 흔들며 사라진 화연을 대신해 익숙한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왔다.

 

 까만 밤에 내리깔린 가로등 불빛 아래로 실루엣은 형체를 갖춰갔다.

 

 " 설화씨 여긴 언제…. "

 

 " 좀 전부터요 "

 

 빨갛게 물든 얼굴과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지만 보이는 떨림이 조금 기다린 정도가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 얼마나 떨고 있었던 거에요! 말을 하시지 갑자기…. "

 

 " 갑자기…. "

 

 설화는 여솔의 걱정스러운 표정도, 느끼는 추위도, 얼마나 기다렸을지 모를 시간도 상관없다는 듯한 웃음으로 말했다.

 

 " 보고싶어서 "

 

 

 

 

 

 

 

 ***

 

 

 

 

 

 

 낮에 여솔은 집에 보내고 집에 들어온 설화는 답답함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 하…. 어떡해야 하냐 진짜…. "

 

 집에 들어서서 코드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쇼파에 늘어진 채 눈 위에 손을 올렸다. 왠지 열이 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 여자 꼬시는 꿀팁 알려줌, 여자가 100명이잖아? 그럼 100가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됨 '

 

 연애 고수 민준의 꿀팁 덕분에 깜깜해진 눈앞과 현실로 부딪친 막막함에 설화가 골머리를 썩혀갈때 쯤, 현관벨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신명나게 울렸다.

 

 " 벨을 누르면서 올 사람이 없는데…. "

 

 일어나 현관문을 연 설화의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서있었다.

 

 " 강설화씨죠? "

 

 " 그런데 누구세요? "

 

 " 들어가서 말하죠. 서 있기 싫은데 "

 

 가발인가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세팅한 머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메이크업에 날카로운 눈매, 오똑하게 선 코, 빨간 입술. 전형적인 냉미녀의 얼굴을 가진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당돌한 표정으로 설화를 노려 보고있었다.

 

 아무리 옷을 모르는 설화라도 이 여자가 걸치고 있는 화려한 악세사리와 몇 번이나 입었을까 싶은 옷을 보면 보통사람이 아니란건 알 수 잇었다.

 

 " 누구신데요 "

 

 하!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숨을 내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클러치에서 명함을 꺼내 설화에게 건네며 말했다.

 

 " 들어가도 되죠? "

 

 -용아그룹 홍보마케팅 이사 김현정

 

 용아그룹. 전형적인 재벌 2세 공주님 같다고 생각했는데, 설화는 여자의 분위기를 천천히 살피며 말했다.

 

 " 일단 들어오시죠 "

 

 설화는 나름 그럭저럭 만족스러워하는 집이었지만, 공주님에겐 한없이 누추해 보일 텐데, 현정은 드라마랑 다르게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뭐 내드릴 게 없는데…. "

 

 " 필요 없어요 "

 

 불만 없이 앉은 모습이 의외라고 느낄 때쯤, 현정은 설화가 던져둔 코트를 쓰레기 집듯 손끝으로 잡아 옆으로 던졌다.

 

 역시 공주님이구만. 그렇게 생각할 때쯤 현정이 말했다.

 

 " 내가 도와줄께요 "

 

 " 공주다운 거두절미한 대화로군요 "

 

 " 뭐요? "

 

 현정의 치켜뜬 눈을 피해 설화는 다시 말했다.

 

 " 앞에 아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말하면…. "

 

 현정은 팔짱을 낀 채 쇼파에 기대고 말했다. 대우받으며 살아온 사람 다운 고고한 모습, 일전에 강의 때도 금수저 학생을 봤지만,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포스에 설화는 살짝 긴장했다. 현정은 다시 말했다.

 

 " 당신과 여솔. 내가 도와주겠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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