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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의 집 2층에는 미친 무언가 숨어있다.
작가 : 접견
작품등록일 : 2016.8.26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내게 된 류설하와 류진, 그 집, 2층에서 승강기를 발견한다.
(지구라면, 시계탑의 숫자가 13까지 있을 리 없고, 건물이 허공에 떠 있지 않으며, 바다가 하늘에 뒤집혀 있을 리 없다. 구름이 그 바다 밑으로 붕붕 떠다니고 있을리가 없다. 태양이 두 개일 리도 없다. 잔디 잎이 먼지처럼 붕붕 떠다니고 있을 리도 없다. )

 
3. 그래서, 그는 눈을 맞으며 꿈틀대고 있었다.
작성일 : 16-08-28 23:39     조회 : 312     추천 : 0     분량 : 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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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래서, 그는 눈을 맞으며 꿈틀대고 있었다.

 

 승강기에 갇혀버린 쌍둥이는 각자 다른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설하는 꺼내달라고 소리치면서 승강기 문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자그마한 주먹이 문을 때릴 때마다 설하의 재킷이 펄럭거렸다.

 류진은 한 손에 담요를 들고 승강기에 딸린 버튼을 조사했다. 흔한 숫자 버튼은 없었고, 열림 버튼이나 닫힘 버튼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단 6개.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알파벳 X,Y,Z,W 가 새겨진 4개와 가습기 기능 버튼과, 신고 버튼뿐이다.

 그는 일단, 가습기 기능 버튼을 눌렀다. 연기 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연기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뿜어져 나올 뿐이다. 한 번 더 누르자, 야속하게도 더욱 세게 나왔다. 가습기 가동음이 귀를 멍하게 할 정도로 커졌다. 질식사에 대한 불안감에, 들고 있던 핑크색 담요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것 좀 내버려 둬!!”

 설하가 주먹을 내리치다 말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으며 말했다.

 

 “어떻게 끄는 건지 모르겠어. 벌써 두 번이나 눌렀는데도 안 꺼진다고”

 

 그는 과다한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기 시작했고, 너무 상쾌한 나머지 질식해서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은 그러고 보니 상쾌하게 인생을 끝내는 건 나쁘지 않은데, 로 이어갔다. 물론, 떠올리자마자 기침 소리로 묻혀버렸지만.

 

 “그럼 아무거나 눌러!!”

 설하가 콜록거리다가 소리쳤다.

 

 류진은 주먹을 쥐고 정말로 ‘아무거나’ 눌렀다. 그러자 고독한 운의 여신은 그를 하여금 신고 버튼을 누르게 했다.

  승강기 위, 왼쪽에 붙어있는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5월의 햇살처럼 활기차고 빠른 사람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상쾌한 날씨로군요! 호오, 그러고 보니 간만의 손님이군요. 요 몇 년간 사람이 뜸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전 그동안에도 항상 고객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힘이 다하는 데까지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아십니까? 이 안은 어찌나 심심하던지....주저리 주저리”

 

 쌍둥이는 갑작스러운 수다에 혼란스러워했다.

 

 “저기...”

 류진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아하, 드디어 말을 하시는군요! 네, 전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항상 말하는 것보단 듣는 걸 선호하는 편이죠오오! 몇십 년 전에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아가리 닥치라고. 그 이후로부턴 아가리 닥치고 듣는 걸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더라고요! 이제는....주저리 주저리"

 

 목소리는 말을 쉴 틈 없이 이어갔다. 말할 타이밍을 노리던 류진은 그런 것 따윈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닥쳐’라는 심정을 담으며 소리쳤다. 좀체 목소리를 키우는 일이 없었던 그는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연기가 너무 많아요. 좀 ‘줄여’ 주세요!”

 

 그러자 목소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생일 파티에나 쓰일 만한 팡파르 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네에, 감사합니다! 고객님의 건의가 지금 막, 중앙부서로 요청서가 올라갔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반영될 예정이며, 저 또한, 옆에서 응원이라도 하겠습니다! 만약 응원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시면.....쥬저리 주저리”

 

 실제로 연기 줄임 건의는 중앙부서로 실시간으로 접수되었다.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어쨌거나 지금은 가습기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문을 열어 달라고 해야지!!”

 설하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네에에, 그거라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기꺼이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시는 동안은 오늘 하루 나머지 기분 좋으시라고 음악이나 하나 깔아 드리겠습니다!”

 

 설하와 류진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스피커에서 외국 팝핀 음악이 흘러나왔다. 랩이 승강기의 주절거림만큼이나 빨랐다.

 숫자 표시기는 숫자, 십을 나타냈다. 숫자가 매 초마다 내려가는 걸 보니 카운트다운인 듯했다.

 그동안 엘리베이터는 가동한 듯 어딘가로, 쏠려갔다.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고 미묘한 ‘어딘가’였다.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지만 불행히도, 승강기의 수다는 계속 이어나갔다. 잠시간 말을 멈췄던 건 잠시 리듬을 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뿐이리라.

 승강기의 목소리는 음악이 더해져서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욱 들떠 있었다.

 

 “추가로, 오늘의 추천 요리는 버터를 곁들인 랍스터 그릴 구이입니다. 고객님도 아시겠지만, 이 랍스터는 실은 바닷가재라고 부르죠! 하하, 전 몰랐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기서 하는 거라곤 입김이나 불어주면서 위아래로 흔들어 대는 것뿐인데 말이죠! 게다가 저는....주저리 주저리”

 

 반박할 여지없이, 설하와 류진은 말을 ‘당하고’ 있었다. 쓰나 쓴 고통이었다. 연기 과다 흡입도 그렇지만, 말을 당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 희미해질 정도로 타격을 주고 있다고 그들은 느꼈다.

 

 정말로 그랬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승강기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시야 역시 흐려졌다. 연기가 뇌의 회로를 끊으려 했다.

 

 카운트가 0으로 바뀌고 드디어 문이 열리자, 그들은 연기와 함께, 엘리베이터 밖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설하는 일찌감치 기절해버려, 밖을 볼 수 없었지만, 류진은 쓰러지면서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기에, 딱히 형체라 할 만한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스쳐지나갔던 생각이 자신이 내린 곳이 ‘학교 급식실’ 같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

 .

 

 꿈 속에서 류진은 거대한 돼지 저금통에 앉아있었다. 몸은 핑크색에, 처진 눈은 연필로 일자로 그은 듯 간단했다. 동물 모양 저금통이 다 그렇듯, 배가 뚫려있었다. 돼지가 먹은 동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돼지고기 목살 백 그램 정도. 딱 그 정도였다.

 류진이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저금통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돼지가 말했다.

 

 “어쩌다 기절했어?”

 

 “잘은 모르지만 가습기 때문인 것 같은데”

 류진이 대답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

 

 “어딜?”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

 

 “그게 어딘데?”

 

 “너의 그 보잘것 없는 몸뚱어리 말이야. 지금 비상사태라고”

 

 “왜 가야 하는데?”

 류진이 말하자 잠시간 침묵에 휩싸였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왜 가야 하냐고.”

 류진이 되물었다. 그러자 돼지가 재빨리 받아쳤다.

 

 “멍청이, 그럼 가지 말던가.”

 

 돼지는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그래도 기울여져 있던 고개가 더 삐딱해졌다.

 

 돌연,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 얼굴이 얼음장처럼 시리다 못해 따가울 정도였다. 게다가 몸이 무거워졌다. 어째서일까, 그는 무의식중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왜 육신으로 되돌아가야 하냐고 물었던 것뿐인데. 그게 뭐, 그렇게 잘못한 거람?

 

 이제 한기는 몸까지 내려왔다. 몸 앞에서부터, 등 뒤로, 점차 다가왔다. 깊은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워지자, 온몸이 오돌오돌 떨려왔다. 한계까지 다다르자 마침내 꿈의 환상곡은 절망한 피아니스트가 내뿜는 불법 화음으로 바뀌었고,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무언가에 뒤덮여 있었다. - 이불이었다. - 아니, 그 이불 너머, 위로 더 무거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그 무게 때문인지,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 틈새로 가루가 흘러들었다. 맛은 밋밋하고 싱거웠다, 동시에 차가웠다.

 급기야는 숨도 쉬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고, 그 생각은 컴퓨터에 숨긴 야동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장례지도사한테 들을 말도 한 번 상상해 봤다. 당신의 아드님은... 가실 때 유품으로 100기가바이트 상당의 야동을.... 곧 그 고민은 하나 마나 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최대한 꿈틀거려 보기로 했다.

 

 꿈틀.

 

 꽤 성공적이었다.

 

 꿈틀, 꿈틀.

 

 꽤나 성공적이었다.

 

 꿈틀, 꿈틀, 꿈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꿈틀, 꿈틀, 꿈틀, 꾸움틀.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뒤덮여 있던 것들이 조금씩 지워졌다.

 

 그것들이 덜어 지고 나니, 그제야

 숨을 쉬려고 하니, 쉬어졌다.

 입을 열려고 하니, 열려졌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움직여졌다.

 눈을 뜨려고 하니, 떠졌다.

 

 그를 덮고 있었던 새하얀 눈이었다.

 옆에는 또래로 보이는 어떤 여자애가 서 있었다. 아까부터 무게를 덜어주던 사람이었다.

 

 “정신이 들어?”

 그녀가 말했다. 조용하면서도 툭툭 내뱉는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무표정으로 절제된 표정은 어딘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뭐야?”

 류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긴 병원이야. 넌 급식실에서 쓰러졌었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류진은 그제야 자신이 일인실 병실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허나, 이상한 게 있었다. 병실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몸 위로 쌓였던 게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병실 안에서 눈이 내릴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이 내려”

 류진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말했다. 구름은 없었고, 눈 뿌리는 기계도 없었다.

 그럼에도, 눈은 공기중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다가 하염없이 내려질 뿐이었다. 분명 그의 머리는 그것이 자신에게 대통령 안부 전화가 오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음에도, 너무나도 담담하고, 평온하게 받아들여졌다. 침대가 너무 푹신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요점이 아니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응. 심심할까 봐 분위기 좀 내봤어.”

 

 류진은 어리벙벙했다. 그 심정을 표정으로 나타내려고 살짝 찌푸렸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말했다.

 

 “표정을 보니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지. 지금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게 꿈틀대며 몸서리를 쳐댔으니.”

 

 “넌 누구야? 의사?”

 

 그렇게 묻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의사는 아니야. 뭐랄까, 그래. 널 구해줬던 사람이야.”

 

 “설하는...?”

 

 “설하?”

 

 “나 구할 때,... 내 옆에 있던 여자애 못 봤어?”

 

 “설하라... 설하, 아, 그 애 말이구나. 바로 옆 병실에 있으니까. 걱정 마. 그 애, 혹시 여자친구?”

 

 “우린 쌍둥이야. 이란성 쌍둥이”

 류진이 목소리를 볼륨을 유지하면서도 낼 수 있는 힘을 다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그런 여자를 여자 친구로 삼겠냐? 여우같은 여자를? 그 누구도 걔의 실체를 알면....”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모순을 느꼈다. 분명 데이터도, 남자친구하고 문자나 날리려고 그랬던 거라고 짐작했다. 결국 또 자신이 엉뚱하게 희생된 거라고 단정 짓고는 허탈해했다.

 

 “호오, 그렇구나. 넌 여자 친구가 없는 게로구나”

 그녀가 불쌍하다는 듯이 피식하며 말했다. 무표정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낸 첫 번째 변화였다.

 “게다가, ‘여자 친구’ 라는 말이 나오니까, 불쾌하다는 듯이 말하고.”

 

 류진은 가만히 들었다.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녀가 틈을 주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하니 살인 가습기가 딸린 승강기에 다시 갇혔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는 것은, 알 만하겠네. 너 혹시...무정자증? 그것도 아니라면 동성애자니?”

 

 그제야 틈이 주어지자, 류진이 재빨리 받아쳤다.

 

 “둘 다, 절대 아니야. 이상한 생각 마. 난 ‘여자 친구’를 불쾌해하는 게 아니야. 설하의 남자친구라고 오해받는 걸 싫어하는 거지. 근데, 대체 여긴 어디 병원이야? 빈정리였나, 암튼 시골 동네인데도 병원이 있다니. 보통 보건소 정도인데 말이지.”

 

 “여긴 시골이 아니야. 오히려 도시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류진은 그간 차 문 밖으로 봐왔던 풍경을 떠올렸다. 건물이라고는 자그마한 주택 밖에 없었던 것, 밭과 논으로 덮인 땅. 누가 봐도 그런 곳이 도시일 리는 없었다.

 

 “빈정리가 도시라고?”

 

 “음...빈정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여하튼, 여기는 도시가 맞아. 학교도, 수십 층짜리 건물도, 이 병원도, 길 건너에는 아이맥스 영화관도 있는 걸”

 류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뭐라고?”

 류진이 적잖이 놀라며 말했다. 하룻밤 새에 그렇게 많은 건물이 지어질 리는 없었다.

 

 “영화관이 있다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맥스가 싫으면 4DX랑 THX관도 있어. 난 가끔 거길 가. 영화를 좋아하거든.”

 

 류진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 튀어나왔다.

 “난 믿을 수 없어”

 

 “THX관이 있다는 거? 예전에 ‘스카루’ 필름에서 인증....”

 

 “아니, 아냐. THX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거 말고"

 류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여기에 높은 건물이라든가 그런 게 있다는 걸 못 믿겠다고. 난, 빈정리가 논밭이라는 걸 봤단 말이야.”

 

 “정 못 믿겠으면, 일어나서 창밖을 보렴.”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류진은 머뭇거리며 잠시간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반은 정말로 그래도 되는지, 믿을 수가 없어서였고, 반은 경계심을 곤두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래,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손을 잡아도...?”

 류진이 말했다.

 

 “딱히 사적인 감정을 품으면서 내미는 건 아닌데? 그저, 내 지절골을 이용해 너의 요추의 움직임을 도울 뿐이야. 뭐, 네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한다면 네가 변태인 게 아닐까? 무정자증도, 동성애자가 아니라면,.,그럴 가능성도 있겠네.”

 

 그녀는 다시 손을 뺐다.

 류진은 지절골이니 요추니 하는 것들이 뭔지는 몰랐지만, 또다시 오해받았다는 생각에 재빨리 받아쳤다.

 

 “변태나 그런 건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야, 기분 나빠할 수 있으니, 허락을 받으려던 거야. 자꾸 날 이상하게 몰아가지 마.”

 

 류진은 어쩌면 설하보다 더한 이상한 여자 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도 뇌리에 스치길, 다시 눈이 쌓여 몸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불을 걷어내자 이불 위로 뭉친 눈이 갈라지면서 떨어졌다.

 침대에서 나가려 했을 때, 바닥에는 눈이 발목 깊이까지 쌓여있는 걸 발견했다.

 표면은 분명히 냉동실만큼이나 차가울 테고, 이대로 나가다간 발이 동상에 걸리고 만다. 신발이 없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발가락만 꼼지락대는 것뿐이었다.

 

 “신발 줄까?”

 그녀는 류진이 곤란해 하는 걸 보자 말했다.

 

 “있어?”

 

 “슬리퍼가 있어”

 그녀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한테 갖다 줄래...?”

 

 류진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옷 너머로 가슴골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습이다. 네 놈, 원하는 게 뭐냐.’

 

 방 안에서 컴퓨터나 만지작거리던, 침대에서 온종일 뒹굴뒹굴하기만 하던 그가 의도치 않게 여자애의 가슴골을 보며 든 생각.

 심장이 급작스럽게 가속되면서, 몸을 살짝 움찔대면서, 얼굴을 희미하게 붉히고 고개를 돌리며 든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혀 눈치를 못 챈 건지, 알면서도 무덤하게 지나가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언급했다가는 또 이상한 소리를 들을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밭에 손을 집어넣어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슬리퍼를 꺼내 내밀었다. 눈송이가 듬성듬성 묻어있었다.

 그는 슬리퍼를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속도로 낚아챘다.

 

 “고...고마워”

 류진이 더듬거리면서도 성가셔하는 투로 말했다.

 

 “어라, 감사 인사를 건네는 데 서툰가 보네? 말더듬증은 아닐 테고, 혹시,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걸까? 아니, 쥐꼬리만큼도, 아니야,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걸 수도?”

 그녀가 말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직선으로 내리꽂는 화살이었다. 곧바로 퇴촉되긴 했지만.

 

 분명 더듬은 건 사회성 때문은 아니었을 텐데, 그가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설하보다 이상한 여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걷어치웠다. 대신 그 자리는 이상한 여자임이 ‘틀림없다’로 대체되었다.

 

 그가 슬리퍼에 발을 넣자, 온갖 세포들이 퇴폐하며 오므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 이름이 뭐야?”

 류진이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름?”

 

 “이름말이야, 그러니까, 널 뭐라고 불러야 돼?”

 

 “아이린”

 

 “아이린?”

 

 “응”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은 가운을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이십대 후반에, 키는 180정도, 선글라스를 끼고, 한 손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나 볼 수 있는 빨대 꼽힌 종이컵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얇은 여행 잡지를 들고 있었다. 여행 잡지의 제목은 <당신이 영원히 떠나지 못할 휴양지에 대한 모든 것> 이였다. 입은 빨대를 컵에 담긴 콜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넌, 누구야?”

 아이린이 그를 멀뚱히 쳐다보며 말했다.

 똑같은 말을 말하려던 류진은 그녀가 먼저 말해버려,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저 엄청난 바보가 된 기분을 안고 입만 열었다 닫아야 했다.

 

 가운의 사내는 빨대에서 입을 떼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그러는 넌 누군데?”

 놀랍게도, 트림은 나오지 않았다.

 

 “난 이 애를 구했던 사람이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류진을 가리키며 답했다.

 

 “오!”

 그가 작게 감탄을 질렀다. “그거 우연이네. 나도 그 애를 구했던 사람인데.”

 

 류진은 여전히, 당연하게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언제 구했는데?”

 

 “어제, 급식실 승강기 통로에서. 넌?”

 

 “난 아까 살려줬어.”

 그녀가 말했다. “눈에 깔려 죽을 뻔 했거든.”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행동도 없었다. 그저, 눈만이 과도할 정도로 아름답게 내릴 뿐이었다. 눈은 소리없이 바닥에, 전화기에, 침대 위에 쌓였다. 세 명의 머리위에도 쌓이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누구도 자기 머리를 털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마, 조금 쌓이다 보니, 의외로 포근했던 모양이다. 그거 외에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거 눈, 누가한 건지 알아?”

 그가 물었다.

 

 “난데?”

 그녀가 재빨리 답했다. 무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꽤 흥겨운 듯한 어투였다. “눈을 좋아하거든.”

 

 류진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전히, 어떻게 눈을 내리게 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것조차, 이해하기란 불가능 했다. 그냥 다 말이 안 되었다. 도대체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건 쥐뿔,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대통령이 갑자기 전화해서 기분전환이나 할 겸 살사댄스를 배우기로 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했다.

 

 “그럼, 네가 얘를 죽을 뻔한 사태까지 몰고 갔다는 거네?”

 

 “전적으로 동의해.”

 

 “그리고는 다시 구했다는 거네?”

 그가 콜라를 한 모금 더 홀짝이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적을 동의할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가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서부영화 주인공가 마지막 결투의 권총을 꺼내듯이, 변호사가 재판장에게 재판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자료를 꺼내듯이, 섬세하고도 비장하게 밀이다.

 

 그건은 또 다른 여행 안내서였다, 아니, 아니다. 그는 안내서 사이에 끼여 있는,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12페이지에 눌러진 자그마한 가루봉지를 꺼내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새 여행안내서는 도로 집어넣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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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어쩌다, 세상이 미치게 됐는지 그는 전혀 … 2016 / 8 / 30 343 0 7018   
3 3. 그래서, 그는 눈을 맞으며 꿈틀대고 있었다 2016 / 8 / 28 313 0 9230   
2 2. 다행히, 계단에 딸린 승강기에는 담요가 있… 2016 / 8 / 26 310 0 7471   
1 1. 그럼에도, 그들은 110번 국도를 타고 말았다 2016 / 8 / 26 556 0 6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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