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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달의 마리아
작가 : 해우Manatee
작품등록일 : 2017.11.3

"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 찰리 채플린

 
6화~10화
작성일 : 17-11-03 03:23     조회 : 284     추천 : 0     분량 : 1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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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작은 양치기

 

 어린 목동은 울타리 넘어로 테움군이 데려온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흘긋 봤다가 이내 눈을 돌린다. 옥수수로 줄기로 엮어 만든 울타리가 겨우내 제 수명을 다해 북부의 군인들은 목동들에게 이를 보수하라고 명령해 그는 아침 일찍부터 평원 곳곳에 있는 관목들을 주우러 다닌 참이었다.

 

 "머튼, 오늘도 나무하러 가나?"

 

 나무하러 간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테움군이 평원을 장악한 이후로 이 지역 사람이 랜다 마야크에 오르는건 총살 당해 마땅한 일이 되었고 그나마 아이들을 시켜 평원에서 관목을 주워오게 할 뿐 베르체인이 지정구역 밖으로 나갔다간 취조 당하기 일수였다. 양들의 목초지를 찾아 끊임 없이 이동하는 목동들은 배짱좋게 군인들에게 대들었지만 군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지정구역에서 키울 수 있을만큼만 남기고 양을 모두 죽여버렸다. 양들의 시체는 근 6개월간 지속된 산악 쟁탈전에서 참호 대용으로 쌓아두고 써버렸고 모래부대와 대충 섞인 수만마리의 양의 시체들은 다시 수십명의 목동들이 죄책감에 스스로 목을 매달게 했다.

 

 '빌어먹을 군인들 빌어먹을 양들이나 옥수수나'

 

 '오늘도 나무하러 가나.'

 

 당연히 암구호다. 땀에 젖어 가슴과 겨드랑이에 축축한 얼룩을 만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 혹 수상한 티를 일부러 내려는게 아닌가 싶을 만큼 부주의한 늙은 목동이 우유병을 내민다.

 

 "금방 다녀올게요. 아저씨"

 

 어린 목동들이 관목들을 주우러 나간다. 군인들은 아직 반도 크지 않은 아이들을 발가벗겨 팔소매를 검사한다. 필기구와 종이를 압수하고 가방 주머니를 뒤져 빵을 쪼개보고 우유를 다른 컵에 담아본다. 발가벗은채 떠는 아이들에게 총검을 들이대며 어른들이 내린 명령을 이제라도 실토하면 용서해주겠다고 어설픈 베르체어로 윽박지른 뒤 다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이나 항문 구석을 살핀다.

 

 "다음. 산 근처에 얼쩡거리다가는 총에 맞을 수도 있다."

 

 이미 많이도 겪은 일이다. 머튼은 어린 목동들 중에서는 관목을 주우러 제일 많이 나간 소년이고 한스의 우유병은 이정도 난관에 제 정체를 들킬만큼 허술하지 않다. 병 안쪽에 섬세하게 말린 새우껍질과 접착제로 쓴 글씨는 병을 불 속에 넣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내용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머튼군, 혹시 목동들중에 도시에 다녀오곤 했던 사람이 있나?"

 

 뭐든 금방 배우는 소년들은 지루한 유도심문에도 금방 익숙해진다. 전달된 명령만 받는 군인들은 아이들에겐 너무 어수룩하다.

 

 "제가 태어나기 전이나 되는 일이라 몰라요. 예전에는 양이 필요한 사람들이 직접 트럭을 보냈었죠."

 

 한스씨는 고르돈에서 유일하게 당원인 목동이었다. 농부들은 당원인 목동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목동들은 누구나 그들이 계절을 따라 산과 평원을 오가듯 트럭을 여러대씩 끌고 도시와 평야를 오가던 한스씨를 전설의 목동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말이야."

 

 그가 마지막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소년인 듯 수색을 끝낸 수염난 하사는 옷무더기에 턱짓을 준다.

 

 "여기 애들은 야망이 좀 있어야 해. 소년군으로 공을 세워서 제복을 입고 탱크를 지휘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인 시대란 말이야. 줄을 잘 잡아야해."

 

 소년은 바지에 맨다리를 쑤셔넣고 가방과 손수레를 챙겼다.

 

 "좋아, 4시간 안에는 들어오도록."

 

 그로부터 약 40분 후 조국과 귀 당을 존경하던 전설의 목동은 그의 불같은 충성이 다음 세대에 까지 이어져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제복이라는 유혹에도 조국의 용감한 소년 머튼은 한번에 도시락을 먹을만한 자리까지 내달았으며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누가 모아놓은 듯 한 나무줄기 묶음을 손수레에 싣고 그 자리에서 식사를 마쳤다. 묶음 아래에는 여느 때도 그랬 듯이 우유가 들어있는 평범한 유리병과 쪽지가 있고 소년은 자신의 빈병을 새로 얻은 우유병과 바꿔들고는 쪽지의 짧은 내용을 외우고 종이는 먹어버린다. 돌아가야할 시간이 많이 남은 어린 목동은 들판에 주저앉은채 한스가 준 유리병에 대해 생각한다.

 

 '너처럼 영리한 아이는 군인이 되고 공을 세운다면 또 당원도 될 수 있을 거다.'

 

 '소년군으로 공을 세워서 제복을 입고 탱크를 지휘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인 시대란 말이야.'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소년에게 똑같은 충고를 하고 똑같은 일을 요구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한스와 북부의 군인이 토론을 벌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주장이 똑같은 말이라는걸 모른채 상대를 깎아내리기 바쁘다.

 

 '당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머튼은 당원이라는 말의 울림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원인 한스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고 산에 있는 2천명의 군인들과 마치 비밀작전처럼 연락한다. 수도에서 온 사람들이니 그들 중에는 아마 당원도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년은 더 늦기 전에 기쁘게 그의 노고를 인정하고 산에있는 당원들에게 그의 무용담을 얘기해줄 어른들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7) 달의 노래

 

 고르돈 평원에서 두 번째 밤이 지나갈 무렵 도르테 저택의 여인들은 그들의 처우가 생각보다 괜찮음에 놀라고 있었다. 수만 명의 군인들 사이에 있지만 젊은 여인들을 그들의 노리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으며 오히려 일부러 찾아와서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물으러 오는 병사들이 귀찮을 지경이었다. 노동에 투입되었지만, 그저 목동들이 가져다주는 옥수수와 양 기름으로 통조림을 만들 뿐이었다. 해가 떨어지자 모닥불 주위에서 고르돈의 비옥함과 똑똑한 양치기 개들에 관해 토론을 나누며 깡통을 땜질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틸리아는 테움에서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아이들의 민요를 루안 노파의 품에서 부른다.

 

 미움에 덴 가슴은 집고양이를 죽이죠

 대왕님이 미워한 그 까만 물에 죽었는데

 여항의 끓는 미움은 대왕님도 죽였죠

 

 꼬마가 목청을 있는 대로 돋운 하지만 되는 데로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의 오색 향기가 젊은 청년들을 홀린다. 귀족의 의무를 위해 참전한 젊은 중위는 그가 어렸을 적 끝없이 시끌거렸던 저택의 주방을 생각했다. 저녁준비가 한창일 때 당근 상자가 가득 차 한껏 좁아진 주방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고, 나무국자를 든 주방장이 쿵쿵거린다. 벽난로 앞에 앉아 수프를 젓던 노파는 뛰어다니는 남작 도령이 위험할까 한 컵 크게 떠주고는 그녀의 무릎에 앉히고 옛 노래를 불러준다.

 

 욕심 많은 하인은 둥그렇게 살찌고

 인자하신 남작님은 왜 그럴까 고민하네

 어찌 알까 인생이란 본디 욕망인 것을

 

 밤이 깊어가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늙은 일병은 고향에 놓고 온 자신의 딸을 떠올린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그녀가 사는 동안 세 번이나 전쟁을 겪게 만든 아비는 죄책감에 몸서리친다. 옷자락에 검댕을 안 묻힌 사람이 없는 탄광촌에서 평생을 탄을 캐며 살았고 그의 투박한 손으로 만든 남자애들 장난감은 그의 딸을 모험심 강한 다부진 아이로 키웠다. 그녀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 첫 번째 전쟁이 터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젊던 일병은 여느 저택의 가솔이 될까 고민하다 자기 딸아이가 부엌일을 하며 살아갈 걸 생각하고는 그저 시골로 숨어 들어갔다. 세 번째 전쟁이 터지자 이제 조국은 남자라면 누구든 필요로 했고, 그를 끌고 가려 한 병사들에게 주먹을 날린 그의 딸은 군인들의 배낭을 만드는 공장에 가 매달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이다지도 못산다고 탓하기만 하는 무능한 아비는 뜨거운 눈물을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을 때 마냥 옷자락에 적신다.

 

 우리 아씨 할아버지 달에 갔다 돌아올 때

 조약돌을 가방에다 가득 담아 왔다지요

 달에 있는 바다에는 초록색 파도가 친다고

 우리 아씨 저택에는 달 바다색 돌이 있죠

 

 목청을 얼마나 돋웠는지 목동들도 울타리에 기대 소녀의 노래를 감상한다. 어린 목동인 머튼은 북부인들의 흑발 사이에 샛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꼭 모닥불 같다고도 생각하고 군인들 수십명이 노랫소리 하나를 들으려 저렇게 몰려있는게 붉은 머리를 한 소녀는 꼭 목동들을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그녀가 목동이었다면 피리 대신 노래를 불러줬을 것도 같다.

 

 이젠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사람들 모두 잠을 청한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늙은 목동 한스만이 깨어 북부에서 온 여인들의 캠프를 바라본다. 머튼은 그에게 그 작은 소녀가 목동같아 보인다고 했지만, 그는 소녀가 정말 목동이 될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8) 잃은 것과 잃을 것

 

 고르돈 남쪽 평원 끝에는 거인이 밭을 갈고 살았었던 듯한 모습의 거대한 참호들이 전선이 고착되는 지점마다 늘어서 있다. 권총으로 쏴도 맞을 거리에서 총을 겨누고 있지만, 각자의 이유로 이들의 총구는 반년 가까이 멈춰있었다. 이 오래된 고요함 때문에 예전이었다면 자살하려 하거나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생각할만한 지점에 절름발이 병사와 그의 친구는 태연히 앉아 있다.

 

 "자유민이 되고 나면 제일 먼저 뭘 할 텐가?"

 

 절름발이 병사는 침묵한다.

 

 '처음부터 국경을 건넜었더라면 저쪽 구덩이에서 자네 골통을 제일 먼저 쏴 부쉈겠지.'

 

 절름발이 병사 슈 텐 높은 머는 이 말이 웃긴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말을 꺼내 머릿속 저편으로 밀어 놓는다.

 

 "난 백작님께 다시 돌아가겠네."

 

 "자유민인 적도 있었다면서 자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군. 이봐, 난 귀족령에 대한 법이 있다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봐. 세상 잘나게 사는 인간들이 자기네들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 더러, '이젠 너희는 내 영지에서 일하게 됐으니 내 하인이다. 허락 없이 너희는 절대 이 땅을 떠나지 못한다.' 이러는 게 말이 되나? 그러면서 자유민에 대한 건 또 어떻고, 난 자유민 출신 정치인은 본적도 없네."

 

 "그럼 아예 귀족이 되지 그런가."

 

 "얼른 돌아가서 백작님 엉덩이나 핥게."

 

 참호 이랑에 앉은 두 남자는 킬킬거리며 뒤를 돌아본다. 붉은 머리의 군인들도 최소한의 인원만 총을 겨눌 뿐 대부분은 안전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들은 자네더러 전향한 개자식이라고 생각하겠어."

 

 절름발이 슈 텐 높은 머는 자기 친구를 돌아본다.

 

 "저놈들이 망할 귀족 놈들 숫자 좀 줄여주면 전쟁도 감수할 만 하겠어."

 

 그가 기억하기로 이 귀족 싫어하기로 유명한 친구 베릴은 도르테 저택에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노복으로 원래는 계급해방운동을 했다고 들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그를 꺼리기 마련이었지만 다리를 저는 그를 전선이 움직일 때마다 부축해 데리고 다닌 건 이 친구였고 슈 텐 높은 머는 이자를 꽤 괜찮은 친구라고 결정 내렸었다.

 

 같은 시각 베르체군 일개 대대의 주임원사는 공적으로는 그의 상관이자 개인적으로는 후원자인 로페르트 대령과 면담을 하고는 막사로 돌아왔다. 연대 단위의 낙하산 부대가 땅이 녹을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고르돈 안쪽의 이름만 당원인 양치기는 테움군의 군사시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내주고 있다.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당 내에서도 유명한 로페르트 대령의 군 내에서의 영향력이 없었으면 테움의 두 개 사단은 진즉에 고르돈 평원을 건너 베르체의 서쪽 땅을 유린했을 것이다. 장성급이 되고도 남을 능력을 가지고 이 불리한 전장에서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낭비하는 이유는 하얗게 센 주임원사의 늙은 심장을 한번 더 뛰게 했다. 당원도 아닌 그저 일개 부사관이었던 그는 대령을 만난 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유명한 대대중 하나의 주임원사가 되었고 전쟁터에서 그의 부대는 필연적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젊은 대령은 이제는 당원 자리를 약속하며 그가 믿어 의심치 않는 유능한 주임원사에게 작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라 명령 하였다.

 

 '아파트 거주권, 사병, 개전 초 동쪽의 기관총 대대. 생애 이토록 충만했던 적이 있던가.'

 

 권력을 처음 맛본 황혼의 남자에겐 한 때의 성욕도 이보다 더 자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거래의 냄새는 북쪽의 소식에 마비된 노견의 코를 찌르지 못해 허공을 맴돌다 흩어지고, 추한 늙은이를 매료시키는 보석은 그의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그를 유혹했다.

 

 

 (9) 위식가

 

 아직 쌀쌀한 계절, 도르테 백작의 성탑에는 차가운 침묵이 흐른다. 레몬차를 즐겨 마셔 저택의 화단 한 켠에 스스로 레몬과 만다린을 기르는 로벨리아 부인은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정신을 맞은편의 남자에게 찻잔을 집어 던지지 않는 데 집중한다. 건방진 남자는 귀족원 당하 가문을 방문할 때의 예절도 지키지 않고 갑자기 영지에 찾아와 말도 안되는 협박으로 그녀의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각하께서 요구하신 물건이 뭔지 저는 알 수가 없군요."

 

 키올 공작은 완벽하면서도 섬세한 태도로 면장갑을 낀 채 찻잔을 들어 레몬티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반대편 손의 컵 받침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완벽하게 귀족적인 공작 테이블 예절과는 다르게 그의 눈은 그들이 주인에게 대드는 노복을 보듯 고압적이면서 동시에 경멸적이다.

 

 "자작 부인께서 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 하니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의도적으로 강조된 자작의 호칭에 레몬 부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비록 그녀가 로벨리아 자작 가의 안주인이라 해도, 예의 바른 손님이라면 그녀에게 도르테가의 영애로서 백작의 예를 갖추기 마련이다. 작은 승리를 쟁취한 공작은 적당히 예의에 맞는 미소를 띈 채 각설탕을 몇 개를 집어 그녀의 앞에 늘어 놓는다.

 

 "여기 각설탕 하나에는 싸움 하나의 가치가 있습니다. 자작 부인"

 

 로벨리아 부인은 참지 못하고 이마 주름을 확 구기지만 언제든 그 자리를 지키는 흰 아얌은 그녀의 표정을 감췄고, 키올 공작은 속으로 그녀의 자제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가운데 있는 제일 작은 싸움은 토프탈입니다. 귀댁의 백작께서 통솔관으로 계신 싸움이자, 여기 이 동쪽 고르돈의 싸움만큼이나 개전부터 지금까지 균형이 깨지지 않은 싸움이죠."

 

 "군의 장성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 치고는 물린 편이군요. 혹여 공작가의 여인이라도 이러한 시국에 야업에 관심이 없다면 그런 자는 귀족이라 할 수 없겠죠. 누구든 귀족의 의무는 착실히 지켜야 할 시대 아닌가요?"

 

 전쟁에 나가지 않는 장교의 표정은 변함없이 고압적이지만 졸렬한 승리에 취해 그의 이야기짝을 무시했던 게 부끄러운지 공작의 귀밑이 조금 붉어진 채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말입니다. 여기 가장 서쪽의 싸움은 바하에서 일어납니다. 아직 벌어진 싸움은 아니지만, 군의 장성으로서 보장해 드리죠."

 

 "저희 시가가 있는 곳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 미리 말씀해 주시다니, 군 장성을 지인으로 둔 게 새삼 감사해지는 하루군요."

 

 베르체 군이 바하에 들어 온다니, 놀랄만한 이야기지만 부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공작의 허술한 언변을 공격한다.

 

 "저희 군 장성께서는 남쪽의 부랑아들이 바하에 들어오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나보군요."

 

 공작의 입꼬리가 지긋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간다.

 

 "그건 저희도 어쩔 수 없어지요. 고르돈에 있는 리오 중장이 곧 패퇴하게 되면 동쪽에서 군대를 보충해야 할테니까요."

 

 부인의 머릿속에 수십가지 질문이 떠오르지만 애써 진정시키고 그녀는 한가지 생각에 집중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유품을 빼았으러 왔어. 그게 우리한테 없다고 믿게하면 돼."

 

 "부인, 도르테는 고르돈과 닿아있습니다."

 

 '고르돈은 이미 우리나라에 복속되었어.'

 

 "보병전에서 고지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저 남쪽에 옥수수밭에는 산이 하나밖에 없는데 리오라는 친구는 남부군에 두배나 되는 군대로 그 작은 산 하나 점령 못하고 있죠. 그 친구가 자유민 출신이라 사령부에 인망이 없어서 아무도 공군지원을 안해주더군요."

 

 어떤 말을 하고싶어하는 것인가. 미친 공작이 나라를 팔아 그녀를 협박하고 있다는 걸 알게된 부인은 더이상 놀란 표정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여기 계신 군 장성께서 친우분을 도우시면 해결될 수 있겠네요."

 

 최대한 돌려서 말해보지만 부인은 대화에 더이상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책임지기엔 그녀의 친가가, 혈육이, 의미 없는 전쟁에 희생될 사람들이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에 희생될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또 우리 사랑스런 조카도.'

 

 "그저 고르돈의 일일 뿐입니다. 동부전선이 안정화되면 두나라 모두 토프탈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군을 새로 편제하겠군요."

 

 부인은 이제 공작의 눈에 보이도록 어금니를 악문다. 지금 찻주전자를 들어 공작의 머리통을 부순다면 이 불행이 그녀를 떠나주지 않을까 상상하지만, 그녀는 남은 자제력을 동원해 스스로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도록 팔다리를 통제한다.

 

 '정신적으로 버티는건 끝났군.'

 

 키올 공작은 그가 찾는 보석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일개 소대는 저택을 철거하다싶이 모든 것을 부수고 찢고 버렸지만 끝내 보석은 찾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와 조카의 안전, 그녀의 오라비이자 조카의 아버지의 안전에 시가의 안전까지 걸었지만 그녀는 월석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보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설마 직접 가져 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패닉에 빠진 여인을 군인들이 부축해 데려가고 키올 중장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본다. 귀족원 출신 장성들은 리오 중장의 실패에 매우 관심이 많은데, 자유민 출신 권력자란 적에게 한번 승리를 허용해서라도 제거해야 할만큼 위험한 싹이다. 이미 테움군의 주력병력은 중부지역에서 베르체를 압도하고 있다. 바하와 고르돈 지역을 내주면서 베르체군이 양동작전을 펼치게 만들고, 토프탈을 돌파한 기동대가 고르돈으로 들어간 적의 주력의 보급을 끊을 것이다. 그리고 토프탈에 투입될 그의 부하들은 겁도 없이 전쟁터에 인류의 보물을 가져간 자유민의 백작아들을 치우고 그 유명한 에메랄드를 그에게 가져올 것이다.

 

 그날 밤 라렐리 도르테 백작 아가씨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깨우는 고모의 손길에 정신없이 일어났다.

 

 "조용히 일어나렴 아가"

 

 그들의 삶에 밀려오는 계속되는 불행에 지친 아이들은 더이상 칭얼대지 않는다. 시련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평생을 미움에 차 원수를 증오하게 한다.

 

 "어제 생각해 본 일인데, 우리 같이 바하로 여행을 떠나면 좋겠더구나. 거기엔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고 백화점도 있지. 백화점에 가보고 싶어했지 않니?"

 

 아이는 스스로 꿰맨 곰인형을 품에 꼭 껴안고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바느질을 처음해봤을 아이의 손이 반찬고로 덕지덕지하고 잠옷을 입혀줄 사람도 없어 드레스 차림으로 침대에서 나온다.

 

 '불쌍한 아이'

 

 여느 때처럼 노란 아얌을 머리에 두른 로벨리아가의 안주인 이자벨라 로벨리아는 그녀의 조카를 한팔로 안아들고 다른 손에는 손가방을 하나 든채 도망치듯 밤길을 떠났고, 백작이 모두 떠나버린 백작가의 성탑에는 이를 지켜보며 늦은 티타임을 갖는 신사와 그의 병사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정황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녀가 밖에서 증거를 남길 때 조용히 끝내도록 하라."

 

 턱수염을 기른 하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분대는 남아서 저택을 마저 조사한다. 또 남은 소대는 도르테 놈과 편제될 것이다. 그가 달의 바다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으니 전황이 긴박할 때 반드시 수거해야 한다."

 

 그의 부사관들은 간단하게 경례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공작은 저택 주인의 자랑인 차향을 음미하며 떠나는 이들이 더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좇는다.

 

 

 (10) 도시와 피난민

 

 사람들의 자유가 만드는 도시의 소음이 거리로 쏟아져 내린다. 라렐리 도르테 백작은 그녀의 침실을 쪼개놓은 듯한 빌라에서 비좁게 사는 사람들에 놀란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얽혀있는 빨랫줄에는 온갖 옷가지가 하늘을 가릴 지경이고 가뜩이나 좁은 길 한편에는 손수레에 기름때가 까맣게 탄 튀김기계를 넣어둔 뜨겁고 눅눅한 튀김을 파는 노파들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봉투를 쥐어주려 한다. 라렐리는 번화가를 빠져나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처음보는 풍경에 넋을 놓고 구경한다.

 

 이자벨라 부인은 영지를 벗어나 자유민들의 번화가로 들어서자마자 저택에서 가져온 백작가의 보석들을 다 팔아 치웠다. 4캐럿짜리 사파이어가 박힌 백금 반지, 도르테 가문의 문장이 섬세하게 새겨진 금잔, 옛 왕가의 보물이었던 붉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상은 모든 물건을 확인했고 하나하나의 진품들이 갖는 가치에 놀랐다.

 

 "모든 물건을 다 살 만큼 저희 가게가 크지 않은게 안타깝군요."

 

 지금 거래하는 양도 그의 사업에 유례없는 성공이다.

 그가 가져온 현금이 귀부인이 가져온 가방에 넣기엔 너무 많아 기꺼이 그의 배낭을 제공하고, 돈을 셈하는 동안에는 그가 점심으로 싸 온 도시락을 귀족 아가씨가 먹게 한다.

 

 "각하, 전시에는 가끔 현금의 가치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도르테가의 진품이라면 현물로라도 얼마든지 준비해 놓을테니 혹여 다시 보석상을 찾게 되거든 저에게 들러 주십쇼."

 

 보석들을 조심스레 발포지에 싸 금고에 넣고, 그는 손님들을 마중나가며 한마디 덧붙인다.

 

 "혹시 각하께서 '달의 바다'라는 보석을 거래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다리를 놓아드리거나 고문 역할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보석상의 투박한 야욕을 우아하게 거절하고 거리로 나선 이자벨라는 하늘에서 졸음이 쏟아진다고 느끼지만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잠으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토프탈에 있는 오라비는 나라 하나를 살만한 가격의 보물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고 공작의 부하들이 그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로벨리아 저택의 가족들은 바하에 군인들이 들어오면 도르테가로 피난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연락해 위험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가 라렐리.'

 

 일찌감치 아이를 낳았다면 그녀의 불쌍한 조카아이와 슬픔을 나누지 않았을까. 그녀만큼이나 이 상황이 힘들고 불편할텐데도 라렐리는 그저 이자벨라가 이끄는데로 걸을 뿐 배고프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군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바하에만 도착하면 가족들과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이 그녀를 통해서만 열려 있다.

 

 '휴식 하는 것도, 자조 하는 것도 지금은 그저 사치일 뿐이구나.'

 

 배낭에 짊어진 돈이 빠르게 가벼워진다. 라렐리를 병원에 맡기고 그녀는 우편국으로 간다. 전보를 부치고 자동차와 운전기사를 수소문하고 길거리의 부랑아들에게 편지를 부탁하고는 돈다발을 건넨다. 편한 옷을 사고 배낭을 통조림으로 채운다.

 

 그렇게 그녀의 바쁜 하루가 흘러갈 때, 도시의 한편에서는 오늘 열병이 있는 병사처럼 깔끔한 제복을 차려입은 하사와 그의 부하들이 도시의 보석상마다 들렀고 오늘 유래없이 일찍 문을 닫은 보석상에도 곧 군인 열댓 명이 들어 왔다.

 

 "에메랄드는 없었습니다. 거기 있는 물건들이 거래한 전부입니다. 나으리. 저 같은 자유민이 어떻게 그런 보석을 그자리에서 매매했겠습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사는 거래 장부의 이름을 확인한 후 몇가지 질문을 더 하고는 가게를 나섰고, 그와 그의 분대원들은 곧바로 보석상이 오늘의 특별한 손님에게 알려준 장소들로 향했다.

 

 라렐리는 그녀의 고모와 함께 말 한마리가 끄는 짐마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자유민들이 만든 도시는 좁은 땅에 비해 과하게 많은 인구가 응집 되어 위제된 활력을 가지고, 그들 한명한명이 가지는 방종은 거대한 폭발력을 가진다. 그들의 사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처음 보는 꼬마아이에겐 아무 것도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거대한 슬픔 한가운데에 표류하게 된 작은 소녀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에게 그녀가 새로 알게된 비밀을 속삭였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서로를 미워한데. 다스씨"

 

 그녀는 하루 밤낮을 들고 돌아다니는 동안 본인의 엉성한 바느질 사이로 솜이 새어나간 곰인형을 껴안았다. 붉은 머리의 틸리아, 그녀에게 항상 자상했던 아버지, 모르는게 하나. 없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던 할아버지. 항상 그녀를 아껴주던 사람들었지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다스씨에게 남아있는 미약한 온기에나마 위안을 받다 이내 잠이 들었다.

 

 그녀의 꿈에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조국의 어두운 이야기가 그녀가 무의식으로 빠져드는걸 방해했다. 자유민들의 미움으로 만든 독배를 들고 왕은 죽었다. 도시 귀족들은 그들을 기만하고, 도시의 자유를 짓밟힌 민중의 미움은 거대한 잔에 찰랑거리는 물 같다. 자유민들은 신사들을 미워하고 신사들도 그들을 미워한다. 미움은 자유를 감염시켜 폭동을 만들고 질서를 감염시켜 억압을 만든다. 분노는 스스로 탐욕스러워 누구든 남들보다 많이 가지지 못해 애쓰고, 그 독성을 품은 자들은 평생을 미움에 받쳐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가 끝내 제 독에 못이겨 죽어버린다. 그녀의 꿈마저 잠들어 버리기 전, 그녀는 단두대에 힘없이 매달린 왕에게 다가간다.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왕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거기엔 라렐리 본인의 얼굴을 한 여인이 혈루를 흘리며 그녀에게 소리친다. 새된 비명에 뒤로 물러서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핏빛 머리칼이 출렁인다. 그녀가 된 왕을 틸리아가 된 그녀가 바라보자 뱃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미움이 욕지기친다. 어느 순간 검은 머리의 소녀와 붉은 머리의 소녀는 다시 하나가 되어 작은 그녀로 돌아갔고 한참을 뒤척이던 꼬마 라렐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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