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이 통신사 대리점 사거리로 왔다. 그리고 흰둥이와 눈물의 조우를 했다.
"으악, 이게 뭐야? 이런 노랑 딱지 따위!"
조수석 창문에 붙어있는 딱지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그러다 트렁크를 열어 전용 왁스를 꺼내 딱지 위로 잔뜩 문질렀다.
"의인이 이렇게 홀대받는 세상이라니...쳇, 나 뭐한 거야?"
환자를 구한 보람을 느끼기엔 아직 자신의 소유물이 더 소중한 그였다. 그제야 그는 여기에 차를 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가 파랑과 시아인 줄 알고 도로로 뛰어든 기억도 나고 교수님을 보았던 것도 생각이 났다.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벌써 노화인가? 아...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젠장."
그가 변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본래 남일에 관심을 갖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점점 아줌마처럼 오지라퍼가 되는 것 같아 그게 불안하고 싫었다. 그 불안의 뿌리에는 시아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진짜 괜찮을까? 뇌진탕은 아니었을까? 아, 몰라. 지가 괜찮댔어. 난 분명 다 검사하자고 했는데 본인이 거부한 거야. 가린이 증인이야. 이제 관심 안 가질 거야. 아, 귀찮아. 걔 귀찮아. 아, 그래 수리비고 뭐고 이제 엮이지 말자. 피곤해, 아주 피곤해. 이런 노화도 다 걔 때문이야. 내 평온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다니. 아, 짜증나. 그래, 이제 진짜 쌤쌤이다. 갚고 뭐고 할 것 없이 제로셋이라고."
수다스럽게 혼잣말하는 것도 늘었다.
***
학원으로 온 파랑은 누가 볼세라 사탕바구니를 사물함에 쏙 집어넣었다. 잠시 후 로사가 교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요?"
"네, 뭐..."
같이 한방에서 밤을 보낸 사이임에도 친밀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인사였다. 내숭으로 철벽을 치고 있었다.
"저기...전에 로사샘이 저한테 양주 산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언제에요?"
"양주?"
마치 처음 듣는 단어인양 그녀가 되물었다.
"기억 안 나요?"
"아, 나요. 나. 그래요, 언제가 좋을까요?"
"전 뭐 아무때나..."
파랑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다가도 이미 꺼내버린 말, 주워담을 수는 없으니 직진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갈까요?"
"오늘이요?"
그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 때나 된다고는 했지만 당장 오늘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설마 자신과의 술자리를 기다렸던 걸까? 아니면 정반대로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헷갈렸다. 자고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 하였으므로.
"어디 잘 아는 데 있어요? 마침 오늘 학생들이 한꺼번에 어찌 그리 아픈지...하완씨도, 시아도, 린이도 다들 결석이라 파랑씨밖에 없네요. 얼른 하고 가죠."
"오늘 저 혼자 수업해요?"
"네, 자기 얼굴에 하는 거라 빨리 끝날 거에요."
"아, 네..."
"오늘 펑키스타일 하는 날이죠? 자, 해보세요."
그리고 그녀가 교실 밖으로 나갔다. 파랑은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가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이벤트를 준비해야하나? 아님, 파티룸? 아, 그건 너무 오버인가? 커플도 아닌데 방을 잡긴 그렇지...아, 분위기 좋은 술집이 어디더라? 비싼 데를 안 가봐서 잘 모르는데...."
문득 같은 크루의 친구가 운영하는 골목 안 대포집이 떠올랐다. 그도 가끔 알바하러 가주던 곳인데 거기를 빌려볼까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야, 너네 다락방 룸 나 좀 쓰면 안 되냐?"
"거기? 왜? 지금 짐이 잔뜩 쌓여있는데..."
"좀 치워줘. 오늘 중요한 손님 좀 데리고 가게."
"중요한 손님?"
"제수씨가 될지도 모르는 분이다."
"어? 진짜? 언제부터야?"
"오늘부터."
"엥?"
"아, 암튼 내가 오늘 1일로 만들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거기 좀 비워줘. 아, 니네 집에 제일 비싼 술이 뭐지?"
"우리 막걸리 집인데 제일 비싼 거라니?"
"양주 한 병만 갖다놔줘."
"양주?"
"땡큐, 이따 봐."
지극히 용건만 간단히 한 그의 주문에 친구는 얼떨떨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혼자 된 파랑은 안절부절 못 했다. 오늘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뭐라고 말을 해야 넘어올까? 마침 바이크도 놓도 왔으니까 나도 확 취해버려야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라도 바구니 안에 넣을 걸 그랬나? 아직 그건 좀 이른가? 하긴 핸드폰 개통 때문에 돈도 없구나."
그러고 있는 사이 로사가 다시 들어왔다. 그가 허둥대며 메이크업 박스를 열어 화장품을 꺼냈다.
"베이스, 파운데이션, 매트하고 약간은 창백해보이게 베이스를 까세요. 그러면 얼굴 반쪽에 데모 들어갈게요."
"아, 네..."
그가 그렇게 고대하던 둘만의 시간인데 막상 둘만 있으니 꽤 어색했다. 게다가 여긴 엄연한 배움의 터전이었으므로 여자와 남자는 없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신분만 존재하지 않은가. 그가 베이스를 깔고 그녀를 봤다. 로사 역시 아닌 척 해도 이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브러쉬를 들고는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아주 정숙한 차림이었다. 철벽을 옷으로 표현한 듯 목폴라 스웨터는 한껏 귀 밑까지 치켜올린 채 였다. 그렇게 단단히 입어도 벗은 몸이 상상되는 것 파랑도 어쩔 수 없었다. 문득 그녀의 가슴골에 있던 검은 점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그의 배꼽 아래가 뜨거워졌다. 그녀 가까이에서 냄새만 맡아도 이런 신체 반응이 나타나니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창백히 칠한 메이크업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이 가려지는 건 참 다행이었다. 그의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어쩐 건지 오늘은 콧김도 뿜지 않고 숨을 꾹 참은 채 그의 얼굴에 화장을 했다.
"눈썹은 날렵하고 진하게 표현하구요. 아이 홀은 흰 색으로 채워 넣으면 돼요. 볼터치는 검붉은 색으로 강하게 터치하고, 입술 역시 진한 빨강으로 입술 산을 뾰죡히 드러내고..."
그가 눈을 감자 설명하는 그녀의 입김이 그제야 훅 다가왔다. 그녀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단어 하나 하나가 혀끝처럼 그의 입술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입속에서 멸치처럼 헤엄쳤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비어져나왔다.
"으, 으흠...아..."
로사는 멈칫했다. 그녀의 붓끝을 그가 이렇게 관능적으로 느낄 줄은 몰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관자놀이에 성감대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귓속에 바람을 불어넣었다거나 귓볼을 잘근잘근 깨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더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혹시 이 남자 변태는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