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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그것은 흩날리는 벚꽃처럼
작가 : 제이J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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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한 여자가 기억을 잃은 이유이자,
한 남자가 그 기억을 필요로 하는 이유였다.

그날 밤,
그녀는 살인자를 보았다.

 
프롤로그 '이제 교토'
작성일 : 17-10-30 13:39     조회 : 555     추천 : 1     분량 : 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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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한 여자가 기억을 잃은 이유이자,

 한 남자가 그 기억을 필요로 하는 이유였다.

 

 그날 밤,

 그녀는

 살인자를 보았다.

 

 ----------------------------------------

 

 프롤로그

 ‘이제, 교토’

 

 2017.03.14 AM 08:20 교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도시, 천년고도 교토의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키 낮은 목조건물들 너머의 긴카쿠지(은각사 銀閣寺)도 안개 속에서 그 형체가 흐리했다. 희붐한 하늘을 등지고 선 채로 여자는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매끈한 질감의 사진이 봉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하얗지만 그보단 선명한 꽃. 흐드러지게 핀 작은 몸뚱이를 날려 봄의 절경을 이루어내는 꽃. 사진은 언제나처럼 벚꽃이 저무는 마지막 찰나를 담고 있었다. 작은 꽃잎들의 비행은 너무도 생생했다.

 

 “보라! 미역국 식겠어, 어서 들어와. 생일날 감기 걸리겠다.”

 “알았어요. 하나.”

 

 나직하게 내뱉은 답이 스산한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얀 이마를 덮은 흑갈색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떠나온 나라를 스쳐온 바람일터였다.

 

 올해도 모든 것은 어김없이 같았다. 축복받기엔 너무 많은 상처가 새겨진 날. 미소된장을 옅게 풀어 끓인 하나의 일본식 미역국도, 발코니 너머 철학의 길을 덮은 희뿌연 안개도, 벚꽃이 흩날리는 한 장의 사진도.

 

 ‘언젠가 우린 만나야 합니다.’

 

 꽃 보라 사진 뒷면에 적힌 메시지마저도.

 

 *

 

 일본에서 꽃이 가장 빨리 피어나는 곳, 가고시마에서 만들어진 불단은 고급 흑단나무에 옻칠이 되어 있었다. 빛바랜 사진과 위패가 그 위에 오도카니 놓여있었다. 납골함은 없었다. 숨이 끊긴 육체는 바다 건너 고인들이 나고 자란 땅에 남겨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사진 속 얼굴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기라의 콩쿠르 우승 날, 남매가 팔짱을 낀 채 찍은 사진이었다. 조만간 닥쳐올 불행의 존재를 둘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때였다.

 

 “생일 축하해.”

 

 검은 투피스 차림의 하나가 향에 불을 붙이고 돌아서며 말했다. 깔끔한 올림머리와 화장까지, 언제나처럼 출근준비를 모두 마친 모양새였다.

 

 “매년 느끼는 건데, 이 분위기에 그 멘트는 정말 안 어울리지 않아요?”

 

 연필을 캔버스 위로 분주히 움직이며 보라는 대꾸했다.

 

 “오빠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을 거야.”

 “염치가 있으면 못 그러겠죠. 동생 생일날 젯밥 얻어먹는 오빠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가혹한 운명을 실감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엔 미역국을 먹고 밤에는 제를 지냈다. 은은한 향내가 거실 공기 분자 사이를 파고들었다. 보라는 불단의 국화다발을 바라보았다.

 

 “이 계절에도 국화가 예쁘게 피었네요.”

 “꽃은 보기보다 강해. 늘 어디에선가 부지런히 피어나거든. 저것 봐.”

 

 거실 창밖을 보며 하나가 말했다. 울타리너머 벚꽃나무들은 어느새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었다. 볕이 닿지 않는 거리구석의 지저분한 눈들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 누구도 더 이상 두껍고 칙칙한 겨울옷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기어코 또다시 새 봄이었다.

 

 “교토에서 맞는 열 번째 봄이네요.”

 

 십년 전 보라의 일본행은 도망에 가까웠다. 끔찍한 땅을 떠나면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해질 거라 생각했다. 웅크리고 지내다보면 모두에게 잊혀지고, 모든 걸 잊게 되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 기대가 아니고서야 버틸 수가 없는 날들이었다.

 

 “봄이 어김없이 또 오는군요.”

 “어김없이 온 게 여기 하나 더 있네.”

 

 테이블위의 사진 봉투에서 시선을 거둔 하나가 잘 우러난 꽃차를 머그잔에 따라내기 시작했다. 게이샤 출신다운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10년. 그것은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지우기엔 부족한 시간일지도 몰랐다. 하나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사진은 교토에서 맞은 5번째 생일날 처음 도착했다. 보라는 그 생일을 병실에서 맞았다. 붕대로 칭칭 감겨진 손목위로 창을 통과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스로가 남긴 자해의 흔적을 그녀는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실패했다는 자괴감도, 언젠가는 꼭 성공하리라는 다짐도 없었다. 그것은 의지영역 밖의 일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밤의 행적을 더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다. 하고 싶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보라한테 이런 게 왔어.]

 

 침대위에 누운 채로 사진을 받아들었던 그 순간을 보라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눈보라인가 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몽글몽글한 흰 뭉치들이 설마 팝콘은 아니겠지 했었다. 사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흩날리는 벚꽃이라는 걸 알아차린 후 그녀의 입술사이로 탄식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벚꽃의 도시라는 교토에 살면서도 지금껏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던 꽃.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을 모두 누리고 살았던 시절의 상징인 바로 그 꽃.

 

 보라에게 봄은 더 이상 꽃피는 계절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 그 언저리를 위태롭게 맴돌아야 하는 힘겨운 시간이 그녀의 봄이었다. 그녀가 잊고 살던 계절을, 사진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괜찮아.’

 꽃잎이 속삭였다.

 ‘괜찮아 질거야.’

 꽃잎들을 떨구는 나뭇가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살아.’

 파란 봄 하늘이 외쳤다. 가슴속 무언가가 후드득 떨어졌다. 링겔이 꽂힌 야윈 손으로 그녀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누가 보낸 사진이야?]

 [……모르겠어요.]

 [생일 축하하려고 보낸 걸까?]

 [그럴만한 사람, 없다는 거 알잖아요.]

 

 보라는 사진 뒷면에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언젠가 우린 만나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왜 그 사진이 반가웠을까. 왜 그것이 위로로 느껴졌을까.

 

 “누군지 몰라도 고마워. 사진을 받은 다음부터 보라가 그림을 다시 시작했잖아.”

 

 캔버스 가득 꽃송이가 채워졌다. 흑백의 질감으로 이루어진 벚꽃들은 사진 속의 그것들 만큼이나 생생했다. 언제나처럼 보라는 그림의 구석에 날짜를 새겼다.

 

 “때가 됐네요.”

 “무슨 소리야?”

 “드디어 나타날 건가 봐요. 오늘은 없거든.”

 

 테이블에 놓여진 사진 봉투를 보라는 가만히 응시했다. 없었다.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내 든 순간 보라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봉투의 질감부터 전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숱한 손길이 닿고 여러 공간을 거쳐 바다를 건너온 흔적, 조금은 닳고 나긋나긋해졌어야 할 그 느낌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없었다. 이 사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상대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유일했던 단서, 우편소인. 그 위에 흐릿하게 찍혀있던 대한민국이라는 필체.

 

 “그 사진, 오늘은 한국에서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일본 역사의 자존심. 매년 5천 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도시. 콧대 높은 장인들의 문화가 이어져오는 곳. 과거의 모든 것이 현재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 하여 오래 전의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는 지난 시간을 묻은 채 숨죽여 살아가고 있는 곳.

 

  “……직접 놓고 간 거예요. 여기 교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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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4 AM 10:40

 교토 요지야 긴카쿠지젠 카페

 

 무료하게 잡지를 뒤적이던 남자의 손이 흐드러진 벚꽃 사진에서 멈췄다. 기모노차림의 여인들이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전형적이고 진부한 설정이었다. 창의력도 재치도, 하다못해 노련함도 없었다. 아무리 한낱 잡지 배경 사진이라지만 그라면 적어도 이렇게 빤한 구도를 앵글에 담지는 않았을 거였다. 남자는 체념한 듯 잡지를 덮었다.

 

 낮은 1인용 칠기 소반을 앞에 둔 채 다다미방에 앉은 사람들은 일제히 창밖의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일행과의 담소가 아니라 정원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해있는 사람들. 일본이 아니라면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타국에 와있다는 실감이 제대로 들었다. 그는 허공으로 길쭉한 손을 들어올렸다. 차라도 한잔 마시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겉도는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니니 마사이 마스까?”

 

 낯선 이국어지만 당황스럽지 않았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회화책 어느 구석에선가 보았던 문장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듯 발음도 유난히 느렸다. 명찰에 음각으로 새겨진 매니저라는 필체를 동냥질하듯 살피며 그는 아이스 녹차 라떼 사진을 손으로 짚었다. 같은 책에서 보았던 ‘이걸로 주세요.’라는 문장을 기억해내는 것도, 짧은 찰나에 여자의 이목구비를 눈에 담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레오 구다사이.”

 “하이.”

 

 예의바른 몸짓으로 돌아서는 여자를 힐끗 살피며 휘경은 지갑 속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백지처럼 하얀 얼굴과 갸름한 눈매, 날렵한 콧날과 붉게 칠해진 입술. 사진 속 여자는 게이샤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김박사 정부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첫사랑.]

 [뭐? 첫사랑?]

 

 공항에서 사진을 받아든 휘경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모델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게이샤를 피사체로 두고도 사진은 초점조차 제대로 못 맞추고 있었다. 그를 어이없게 만든 것은 형편없는 사진실력이 아니었다. 바로 대상의 인물에게 붙여진 대명사가 문제였다. 첫사랑.

 

 누구에게나 여리고 순수한 시절은 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고 꽃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때. 구름 위를 걷는 것 마냥 몽롱한 시절. 그러나 그렇게 로맨틱하고 아련한 것들은 이 바닥에 어울리지 않았다. 작업의 대상은 언제나 뻔하고 통속적인 것들이었다. 배신과 불륜, 숨겨진 정부 혹은 숨겨둔 자식.

 

 [김박사와 그 여자가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아내면 돼.]

 [그러니까 첫사랑이 숨겨둔 정부인지가 궁금하단 소리인 거네.]

 

 상기된 표정으로 출국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여행객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휘경은 말했다. 그것은 자신이 순수의 시절이 아니라 통속의 시대에 속해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었다.

 

 작업을 의뢰한 인물은 늘 그렇듯 플라워투어 대표 강익환이었다. 강은 오래 전부터 대주주들의 사생활을 캐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 년간 휘경과 민철은 그 은밀한 일의 뒤처리를 맡아왔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강의 그것과는 달랐다. 의뢰를 빌미로 세상을 떠난 플라워투어 창업자인 화문철의 주변 인물들을 파헤쳐 온 세월이 이미 오래였다.

 테이블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벨을 울려댔다.

 

 [어딘데 로밍이야?]

 “적어도 한국은 아닌 거겠지.”

 [민휘경!]

 

 은주의 목소리는 제 몸의 털을 모조리 세운 고슴도치마냥 날카로웠다. 떠나기 전 언질이라도 줘야 했나 싶었지만, 그랬다면 공항을 샅샅이 뒤져 괘씸한 친구를 찾아냈을 거였다. 핸드폰 너머의 심상찮은 오로라로 보자면 그보다 더한 짓도 했을 게 뻔했다. 엉뚱한 누명으로 지명수배가 내려져 출국정지가 됐을지도 몰랐다. 휘경은 새삼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절감했다.

 

 [이런 식으로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여행사 촬영 다음 주 인거 몰라?]

 “네 멋대로 잡은 스케쥴이잖아. 나는 안 하겠다고 분명히 얘기한 걸로 아는데.”

 [또 흥신소 일이야?]

 “문제해결사나 탐정 같은 격조 있는 단어 좀 사용하지? 잘 나가는 슈퍼모델 말뽄새가 너무 싼티 나는데.”

 

 부러 태연한 척하며 휘경은 면박을 보탰다. 얼굴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걸 상대가 모를 만큼 능청스러운 말투였다.

 

 [넌 사진작가라는 사람이 불륜사진이나 찍고 다니고 싶어?]

 “민철이가 뒷조사는 잘하는데 사진 실력은 형편없거든. 직업 윤리상 두고 볼 수가 없더라고. 이런 재주 뒀다 뭐하겠어? 재능기부라도 해야지.”

 

 사진의 포인트는 구도다. 스치듯 짧은 찰나의 순간, 배경과 인물을 적당한 비율로 프레임에 담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다. 상대가 불륜남녀라면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눈빛. 서로를 보는 끈적하고 아련한 눈빛이 담긴 사진 한 장은 알몸으로 엉켜있는 직설적인 사진만큼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농담이 나오니, 지금?]

 “농담으로 들려? 난 몹시 진지한데.”

 

 기다렸던 교토에서의 작업이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김박사였다. 의학박사 김협재. 십년 전 진해 살인, 방화사건의 최초 발견자이자 신고자. 유일한 생존자인 조카를 데리고 떠나버린 사람. 지금껏 그의 주변을 맴돌아야 했던 휘경에게 이번 기회는 적진의 심장에 다가설 절호의 찬스였다.

 

 [지금 넌 천하의 고은주 화보를 포기한거야. 민휘경.]

 “알지. 스타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는 것도.”

 [넌 야망도 없니?]

 “야망?”

 

 어이없다는 듯 휘경은 그 단어를 되물었다. 지금껏 꿈이나 야망 따위를 품어본 적은 없었다. 형을 대신해 카메라를 잡았고, 형을 잃은 이유를 알기위해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 그가 속한 세상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늘 과거만을 붙들고 살아야 했다. 휘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막하지만 결의가 느껴지는 어투였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다시 다가온 매니저가 길쭉한 유리잔을 칠기소반에 내려놓았다. 날렵한 턱선과 기름한 눈매, 동그란 이마, 그리고 코 끝에 진하게 박힌 점. 그녀는 사진 속 게이샤가 분명했다. 게이샤. 이름도 신분도 철저히 감춘 채 그로테스크한 화장 아래로 숨어사는 사람들. 전해 듣기로 그녀는 십년 전 돌연히 그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를 떠나와 이 곳에 정착했다고 했다. 한 여자가 이 곳에서 과거를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또 다른 여자를 휘경은 만나야했다.

 

 [내가 너랑 작업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면서 이래? 당장 돌아와.]

 “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돼. ……10년을 기다렸거든.”

 

 그것은 상대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다짐처럼 들렸다. 휘경은 새치름한 여자 얼굴이 거품으로 그려진 아이스녹차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고집스럽게 작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 은주의 표정 또한 그럴 거였다. 어쩌면 근처에 있을 또 다른 한 여자도 같은 표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난 너 예쁘게 못 찍어.”

 [난 원래가 예뻐.]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휘경은 싱싱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내는 일이 생래적으로 불편했다. 찬란히 빛나는 것들보다 잊혀지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에 마음이 갔다. 새해 첫날의 일출대신 한해의 마지막 태양이 저무는 모습이 좋았고, 모두의 카메라가 만발한 꽃에 초점을 맞출 때 그는 저물어 떨어지는 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애당초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휘경은 믿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들의 최후를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럼 언제 올 건데? 촬영 미룰게.]

 “곧 꽃이 필거야. 꽃이 지기 전에 찾아야할 게 있어.”

 [뭘 찾아?]

 

 조만간 꽃피는 계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씨는 스산했다. 창 밖 정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10년 전 그 날도 오늘마냥 시린 바람이 불었다. 굳이 기억해내려 애쓸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 마냥 생생했다.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파트너 민철은 언젠가 물었다. 흥신소 인력다운 통속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생각해놓은 마지막 결말은 없었다. 이 일의 끝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추측할 수도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 거야. 복수는 그 다음.]

 

 진실과 복수. 휘경은 두 개의 단어를 머릿속에 나란히 세우며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어느 것이 좀 더 큰 부피의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도 명확치 않았다.

 

 쌉쌀한 녹차가 입안에 번졌다. 동시에 싸늘한 무언가가 가슴을 스쳤다. 그것은 또 한 번 모두가 아파질 거라는 슬픈 예감이 분명했다.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에 대한 직감이기도 했다. 그는 헝클어진 녹차 위 얼굴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누군가의 모든 것이 이렇게 헝클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를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다.

 

 [듣고 있어? 대체 뭘 찾으러 어디까지 간 거냐고.]

 “……누군가의 ……기억.”

 [……기억?]

 “그걸 찾으러 왔어. 여기 교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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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4 AM 9:00

 십년 전 서울

 

 눅눅한 습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비라도 내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코끝을 스치는 쾌쾌한 느낌이 비오는 날의 전형적인 공기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저 밀폐된 지하공간의 특성인지도 몰랐다. 그 차이에 몰두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도 않았다. 다만 엉뚱한 생각이라도 하면서 현실을 조금 잊고 싶은 것뿐이었다. 저음의 목소리가 축축한 공기를 갈랐다.

 

 “김박사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수사에 협조를 해주셔야죠.”

 

 상대는 그의 말대로 곤란한 표정이 역력했다. 습기에 구겨진 종이박스처럼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 답답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속을 시원하게 해주자고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출국입니다.”

 “미루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이를 여기에 둘 수 없어요.”

 

 서너 평 남짓한 조사실의 분위기는 실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테안경너머 날카로운 협재의 눈초리와 그런 그를 질세라 매섭게 바라보는 수사관의 시선이 허공에서 쨍하니 부딪쳤다. 네모반듯한 공간. 책상과 의자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실내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한기는 썰렁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온몸이 덜덜 떨려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땀방울이 옆머리를 타고 흘러내릴까봐 그는 몹시도 조마조마했다. 손을 올려 닦고 싶지만 자신에게 집중된 상대의 시선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절대로 초조해보여서는 안되었다.

 

 그날 아침 세상은 떠들썩했다. '진해 저택 살인, 방화사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주요 일간지들은 비슷한 제목으로 이를 대서특필 했다. 뉴스는 물론이고 주부들이 즐겨보는 아침 토크쇼마저 숨진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는 멘트로 시작됐다. 화마가 삼켜버린 저택의 잔해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매스컴 화면에 등장했다. 소년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저택이 화재로 무너지기 까지의 시간들이 분, 초 단위로 쪼개어 생생하게 재구성됐다. 얼마 전 사망한 화대표의 사진과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아들의 사진이 나란히 등장하기도 했다.

 

 기다렸다는 듯 세상은 소란을 떨었다. 충격적인 사건 없이는 사는 것이 불안한, 때문에 남의 불행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위로받는 이시대의 자화상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오빠를 잃은 아이입니다.”

 

 협재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허벅지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온몸이 후들거릴 것 같았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이기도 하죠.”

 

 목격자. 형사의 느릿하고 무심한 발음이 김박사의 가슴을 후벼팠다. 날카로운 꼬챙이가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협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두 소년의 몸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선혈이 발을 축축하게 적시는 기분이었다. 테이블 밑의 발끝이 틱처럼 자꾸 움찔거렸다.

 

 “유일한 생존자일 뿐입니다. 보라가 목격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자고 있었어요.”

 “그건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알지요. 그 집에서 살인과 방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박사님.”

 

 어떤 사건이든 수사의 원칙은 주변의 모든 인물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협재 또한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운 형사는 아까부터 그를 날카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다.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기엔 신경이 너무 곤두서있었다. 어쩌면 이미 상대에게 수상하다는 빌미가 잡혔을지도 몰랐다. 협재는 마른 침을 조심스레 삼켰다.

 

 “화보라양은 사건이 일어난 시간, 그 집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범인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증인이기 이전에 피해자입니다.”

 “범인을 잡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곡법을 이용한 기습공격이었다. 방심한 사이 날렵한 펀치가 무방비 부위를 파고들었다. 협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새벽의 기억을 외면하려는 듯 그는 고개를 휑한 벽으로 돌렸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신없이 피를 닦았던 손이 바지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 게 우선입니다. 보내야겠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떠났어야 했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하나의 치료에 그렇게 몰두해있는 게 아니었다. 그간의 모든 징후들을 간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소년들은 무사했을까. 그러나 후회는 이미 부질없었다. 혼란과 막막함이 서늘한 공기와 함께 그의 뺨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체념하듯 읊조렸다.

 

 “교토, 교토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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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8부 <마지막 인사> #2 (완) 2017 / 11 / 26 229 0 6630   
27 8부 <마지막 인사> #1 2017 / 11 / 25 209 0 4575   
26 7부 <판도라의 상자> #3 2017 / 11 / 24 216 0 6408   
25 7부 <판도라의 상자> #2 2017 / 11 / 23 197 0 6298   
24 7부 <판도라의 상자> #1 2017 / 11 / 22 198 0 4544   
23 6부 <번 아웃> #2 2017 / 11 / 21 208 0 6556   
22 6부 <번 아웃> #1 2017 / 11 / 20 204 0 8063   
21 5부 <소년이 있었다> #4 2017 / 11 / 19 197 0 6968   
20 5부 <소년이 있었다> #3 2017 / 11 / 18 204 0 6918   
19 5부 <소년이 있었다> #2 2017 / 11 / 17 212 0 9666   
18 5부 <소년이 있었다> #1 2017 / 11 / 16 206 0 6979   
17 4부 <꿈속을 걷다> #4 2017 / 11 / 15 219 0 6505   
16 4부 <꿈속을 걷다> #3 2017 / 11 / 14 210 0 3853   
15 4부 <꿈속을 걷다> #2 2017 / 11 / 13 221 0 4997   
14 4부 <꿈속을 걷다> #1 2017 / 11 / 12 218 0 5469   
13 3부 <너를 기억해> #6 2017 / 11 / 11 196 0 8892   
12 3부 <너를 기억해> #5 2017 / 11 / 10 196 0 5109   
11 3부 <너를 기억해> #4 2017 / 11 / 9 210 0 4606   
10 3부 <너를 기억해> #3 2017 / 11 / 8 205 0 4980   
9 3부 <너를 기억해> #2 2017 / 11 / 7 209 0 4074   
8 3부 <너를 기억해> #1 2017 / 11 / 6 213 1 7932   
7 2부 <야수의 성> #3 2017 / 11 / 5 234 0 6586   
6 2부 <야수의 성> #2 2017 / 11 / 4 200 0 6851   
5 2부 <야수의 성> #1 2017 / 11 / 3 245 0 6928   
4 1부 <재회> #3 2017 / 11 / 2 299 0 3697   
3 1부 <재회> #2 2017 / 11 / 1 275 0 5666   
2 1부 <재회> #1 2017 / 10 / 31 294 1 6777   
1 프롤로그 '이제 교토' 2017 / 10 / 30 556 1 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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