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과 고요, 그 어디 중간쯤에서 한 남자가 말했다.
“죄는 시대에 따라 그 무게를 달리하지요.”
중요한 몇 마디를 나누고, 소파에 몸을 기댄 차일이 고개만 조금 기울여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부드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차일은 도현에게서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상냥했고 동시에 오만했기 때문이다.
“학살과 혁명이 다르듯이.”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이는 군. 두 뜻이 애초에 같지도 않거늘.”
“그럼 이렇게 말할까요. 학살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
거북한 소리에 차일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도현은 단조롭게 이어나갔다.
“이후로 세상이 좋게 흘러갔다면 희생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비극이라며 일축할 겁니다. 그렇다면 전자에 대한 처벌을 어떠할 것이며, 후자에 대한 처벌은 어떠할까요.”
“영웅과 망종(亡種)의 차이군.”
도현을 노려보는 차일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학살자쯤 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아.”
얼어붙은 차일의 매서운 눈길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입가를 당겨 웃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웃음은 차일의 신경을 더욱 거스르게 만들었다.
“너와 내 시대가 같지 않다면 그 기준 또한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영웅이었습니까?”
“시대의 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혁명이었습니까?”
“그 땅의 주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랬을 테지.”
“주인들이라.”
도현은 다시 한 번 짙게 웃었다. 조금의 삐뚤어짐도 없는 가면 같은 웃음이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간혹 바람이 떠민 커튼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창가를 지나는 새의 날갯짓 소리, 바람, 커튼. 그 무엇으로도 적막을 막아선 두 사람의 고요를 깨뜨리지 못했다.
감정의 휘도는 차일과 다르게 도현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잔잔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띄운 돛단배도 언젠가는 닳아 부서지게 마련이다. 도현의 눈은 그런 것이었다. 그 작은 배마저 우습게 삼키는 잔잔한 바다였다. 천천히 가라앉혀 심연 속에 감추고 또 다른 먹이를 기다리는. 한순간 덮쳐 삼키는 파도와 달랐다. 아주 지독한 무언가가 그의 파도를 훔쳤다.
“하늘을 볼 줄 모르는 눈이군.”
도현을 응시하던 차일의 표정에 드디어 변화가 일었다. 그는 조소했다. 그럼에도 차일의 낮은 목소리는 짐승이 적의를 품고 으르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실례.”
“마음에도 없는 소리.”
“유감이지만 저 역시 망종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 시대에서는.”
“나쁜 놈이 스스로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아.”
도현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것은 적막을 깨뜨렸지만 동시에 고요에 잠겼다.
“우리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시대에 따라 죄의 무게가 다르다 말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웅과 망종의 차이는 한낱 기록 몇 장이 뒤바꾸는 것이고, 그것은 산 사람들의 몫이니까요.”
차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치가 대체 무슨 말을 떠벌리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마른 땅에 물이 들어차고 혹은 메말라버려도 바다는 줄곧 바다였다. 잔잔한 바다는 많은 것을 삼킨다. 그 안에 약동하는 수많은 생명들조차 심연 깊은 곳 아래로 끌어들이고 무엇 한줌 떠오르지 않았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있다 한들 줄곧 변하지 않은 가치는 있는 법입니다. 설령 그 무게가 시대에 따라 측량되었던들, 그건 모두 산 자들의 만행이죠. 그리고 이 세계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바다는 죄 또한 삼켰다.
“우리는 벌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새라새의 주인이 바뀌었다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루잠에서 한 탑의 사자가 차일의 건너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둠이었다.
차일은 잠시 ‘새라새’라는 이름을 더듬어봐야 했다. 그러길 마침내 기억해내고는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한 늙은이가 오래토록 보살핀다는 낡은 성을 가진, 마을도 도시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
“우리의 영역은 아닌 것 같은데.”
새라새는 지나치게 조용한 도시였다. 사람이 그다지 없었던 까닭이 가장 크고 감시자인 전령이 그곳의 낡은 고성을 사랑한 이유도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언제 부터였을까. 이런 지독한 일만 떠맡게 된 것은. 차일은 그렇게 만든 녀석을 저주하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이 지독한 일들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는 둠은 어서 움직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보였다.
“대체 그 이야기는 누가 퍼트린 건지.”
새라새뿐 아니라 요즘 도시 곳곳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면 사념이 강해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괴담이 떠돌고 있다.
“신체를 완전히 죽이면 지하에 가게 되니, 어떻게 하면 산 채로 전부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떠돌더군.”
돔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에 까슬까슬한 수염이 퍼렇게 자라난 수염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몰골은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여서 중년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다. 테이블에 팔을 얻고 삐딱하게 몸을 기울인 둠이 입매를 비틀었다.
“멍청한 녀석들. 씹는 순간 무(無)로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돔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힘이 강해진다니 뭐가 어쩐다느니 하는 소리는 다 같잖은 헛소리였다. 차라리 탑이 사자들을 강하게 해준다는 말이 더욱 신빙성 있을 지경이다.
물론 그것역시 전부 거짓말이지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식인(食人)이 있는 곳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제보한 전령이 종종 표시를 남기거나 근처를 머물며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번잡한 도시 한가운데였다면 감시자의 수도 많아 번잡했을 테지만 다행히 새라새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신 나간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먹이를 탐색하듯 사람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몰골은 어쩌면 둠보다 나은 듯도 했다.
그 녀석은 2층 자기 방에서 빛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여유로운 자세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 한가로운 오후의 독서라니. 누구나 한 번쯤 이뤄보고 싶은 광경이지만 그 아늑한 방구석 그늘에 먹잇감을 숨겨 놓고 있다는 걸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참으로 뻔뻔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둠이 마주 편 건물에 녀석을 훔쳐보고 몸을 다시 숨기며 말했다.
“번듯한 미친놈이군.”
“식사 전인가?”
“식사라니.”
“저 녀석에게는 적어도 식사겠지.”
“말 하고는.”
무심한 차일의 대꾸에 둠은 기가 질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한 그의 태도에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주섬주섬 엉덩이를 더듬어 은빛 총을 꺼냈다.
“여기서 끝내고 이동하지.”
둠은 창 옆에 등을 대고 서며 차가운 총을 코끝까지 올리며 대며 숨을 골랐다. 연사에 조준은 빗나감이 없어야 한다. 약한 녀석이면 총알 하나에도 옴짝달싹 못하지만 사념이 강한 녀석은 몇 발을 맞고도 버틴다.
“차라리 직접 가서 목을 따버리는 건 어떤가.”
그림자 속에 숨은 차일은 팔짱을 낀 채 총을 든 돔을 내키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 도망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건 육탄전에 강한 댁이나 하는 거고. 내키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대기하던가. 그 전에 쏴버릴 거지만.”
돔은 자신 있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차일은 커튼 틈으로 전망을 주시한 채 대충 총과 가까운 오른 쪽 귀를 한 손으로 막았다. 정신집중을 마친 돔이 한 손으로 총을 받친 자세로 활짝 열린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건너편을 살피고 있던 차일은 황급히 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탕!
목표물이 건너편의 유리를 부수고 밖으로 떨어진 것과 둠의 총이 발사 된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돔은 연사하려던 동작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제지해야만 했다. 그가 쏜 총은 정확히 녀석이 앉아있던 의자를 관통했다.
“와씨, 뭐야.”
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총을 쥔 손을 내리지 못한 채 굳어졌다.
“이것 봐.”
차일은 커튼 뒤에 숨겼던 모습을 드러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들린 건너편에선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불쑥 나타나서 목표물의 멱살을 잡고 바깥으로 집어던진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