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난 후, 욱과 함께 나란히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은재가 말했다.
“강 대표님 감사해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욱이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깐 은재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이내 호쾌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전 사실 바람 맞을 각오도 했었습니다. 은재씨가 나와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뜬금없었을 텐데.”
“조금 그런 감이 없지 않았지만, 뭐 오늘은 혼자가 아닌 금요일 저녁이라 좋았어요. 영화도 물론 재밌었구요. 그런데 왜….”
“왜…?”
영화관 바깥으로 부지런히 걸어 나오던 은재가 인도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욱에게 쪽지를 건네받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던 의문을 결국 그에게 던졌다.
“왜 저한테 연락하신 걸까 해서요. 강 대표님 정도면 주변에 왠지… 꽤 많을 것 같은데.”
은재의 물음에 욱이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진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여자, 없습니다.”
욱의 단호한 대답에 은재가 화들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은재씨는 그게 제일 궁금했나봅니다?”
“…네. 사실 궁금한 건 많았어요. 아니 지금도 많아요. 저에게 왜 잘해주시는지, 왜 관심을 가져주시는지. 오늘도 이런 호의 감사하지만…….”
은재가 욱의 물음에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말을 마구 쏟아냈다. 그런 은재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욱이 호의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호의 아닙니다.”
“네?”
“아주 천천히, 그리고 한 발짝씩 가고 싶으니 질문은 여기서 그만.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아, 아뇨 전 버스를….”
“사양 말고 타요. 오늘 제 초대에 응해준 은재씨에게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까요.”
용기 내어 한 은재의 질문에 알쏭달쏭한 대답을 남겨 준 욱이 멍하니 서있는 은재의 손을 잡아끌고 자신의 흰 색 벤틀리로 향했다. 영화관 근처 노상주차장에 주차 된 차 앞으로 다가 선 욱이 조수석 문을 열고 은재에게 손짓했다.
“타시죠. 팔이 곧 아파 올 것 같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욱에게 끌려 온 은재는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연 욱의 능청에 얌전히 그의 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주소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아! 화정오피스텔이요. 오늘 너무 신세만 지네요. 영화부터 시작해서 집까지….”
고마움과 미안함에 은재의 목소리가 모기만 해졌다. 그런 은재를 곁눈질로 훑어본 욱이 조심스레 애프터 신청을 했다.
“그럼 다음엔 은재씨의 초대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대표님만큼의 스케일은 아니겠지만, 밥 한 번 살게요.”
은재의 긍정적인 대답에 욱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늦은 밤, 욱과 은재를 태운 차가 도심을 시원하게 갈랐다.
욱의 배려에 집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은재가 샤워가운을 걸치고 나와 침대에 턱하고 엎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욱이 한 말이 해석이 되지 않아 침대 위를 뒹굴뒹굴 거리던 은재가 핸드폰을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통화연결음이 채 세 번도 울리기 전에 무심한 정아의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야, 강 정아.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 치곤 너무 무뚝뚝한 거 아니야?”
그런 정아의 무심함에 은재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징징거리지 말고 요점만 간단하게.
“응?”
-너 그 ‘남자들’이랑 뭐 있는 거잖아. 요점만 간단히 브리핑해. 나 울 자기랑 전화해야 돼서 바쁘니까.
“치사한 년.”
-그냥 끊을까?
“말해 말한다구!”
여하튼간에 절친 이라곤 저 한 명뿐이면서 배짱을 부리는 정아에게 수화기에 대고 몰래 알밤을 한 방 먹여준 은재가 입을 뗐다.
“나 오늘 강 대표랑 영화 봤어.”
-호오. 데이트라?
“이게 데이트야?”
꿈속의 남자랑 영화를 봤다는 은재의 말에 수화기를 귀 옆으로 바짝 당기던 정아가 은재의 멍청한 대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의 친구지만 이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럼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친구가 아닌 성인 남녀가 저녁에 만나 단 둘이 영화를 보는 것. 그게 데이트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로 규정할 수 있는 거란 말이냐!
정아가 또박또박 따져묻자 은재가 ‘으음…, 강 대표는 초대라고 하던 걸?’이라는 같잖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정아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쓴 소리를 꿀꺽 삼켜냈다.
-그건 네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돌려 말한 거고. 그래서 뭐래, 진도는 좀 나갔어?
“아-아니. 진도는 무슨. 아 내가 물어보긴 했어. 왜 굳이 나한테 영화표를 보냈냐고. 여자 꽤 있으실 것 같은데, 호의냐고.”
-이런 멍청이. 그걸 곧이곧대로 다 물어봤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그 사람이 뭐래?
“…어, 여자 없다고.”
-그리고? 또!
“호의 아니라고 하던데….”
-그게 끝이야?
“으응. 그리고 다음번에 내가 초대하기로 했어.”
-푸하하하! 이 은재, 너 땡 잡았다.
친구의 말을 하나씩 귀담아 듣던 정아가 은재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대차게 웃었다. 이 바보같이 순진한 친구는 아직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 강 대표라는 남자가 저렇게 대놓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제 친구는 아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땡이라니?”
-너 계 탔다고. 기다려 봐. 조만간 입질이 올 테니. 꿈·남·사 대작전은 접어도 되겠는 걸?
제 친구는 아직 감이 잘 안 오는 모양이었지만 정아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 대표라는 남자가 은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은재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려 한다는 걸 말이다. 10년 동안 꿈속의 남자에 대해 들어오며 그 남자에게 시집가라고 놀려댄 것이 수백 번은 되었지만, 실제로 이뤄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비록 그 남자가 은재를 알아보진 못했어도, 운명의 끈이란 것은 있는 것일까.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정아의 생각을 꿈에도 모르는 은재가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똑바로 이야기해보라고 수화기너머로 닦달을 해댔다.
“아 이 계집애야,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길 해!”
-아 기다려보라니까? 곧, 푸흐흐. 좋은 소식 기대할게. 어? 우리 자기 전화 온다. 야 끊어!
“이 계집애! 다신 전화 안 해!”
뚝 하고 매정하게 끊겨버린 핸드폰을 바라보는 은재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통화가 끝난 핸드폰의 하얀 액정이 한 톤 어두워지더니 곧 까만 어둠으로 덮여졌다. 그런 핸드폰을 가만히 쳐다보던 은재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금 액정을 터치하더니 문자메세지 버튼을 조심스레 눌렀다.
* * * *
은재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 온 욱이 고요한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오며 타이를 풀어헤쳤다. 막혔던 숨통이 그제야 트이는 것 같아 큰 한숨을 내쉰 그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왜 저한테 연락하신 걸까 해서요’
은재의 물음이 욱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정확히 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급하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재에게 스며들고 싶었기에 욱은 입을 닫아야했다.
그래도 ‘이런 호의 감사하지만’ 이라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하하….”
욱이 귀엽기도, 어이없기도 한 은재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언젠가부터 자꾸 생각나고, 눈에 밟히는 그녀가 아무래도 단단히 자신을 옭아맨 것 같아 욱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로 했다.
‘호의가 아니라 호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당신을….’
욱이 미처 은재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기대한 제가 잘못이겠지만, 역시나 은재에게선 한 통의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그래서 쪽지와 함께 명함을 동봉했건만 보기보다 어리숙한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욱이 그렇게 한참을 핸드폰만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서둘러 재킷과 와이셔츠를 벗어내며 욕실로 향했다. 그가 욕실로 사라지고 몇 분 후, 탁자위에 놓아 둔 그의 핸드폰이 반짝 빛을 내며 한 통의 문자메세지가 날아들었다.
한 편, 욕실의 물소리에 선 잠이 들었다 깬 환이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잠에서 깬 김에 물이나 한 잔 마실까 하며 부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환이 현관을 슬쩍 곁눈질 했다. 까만 구두 한 켤레가 환의 스니커즈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욱이 돌아 온 모양이었다.
“퇴근이 좀 늦었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던 방향 그대로 걸음을 옮기던 환이 소파 위 탁자위에 놓아 둔 욱의 핸드폰을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욱의 핸드폰이 번쩍하며 하얀 빛을 뿜어내더니 저를 쳐다봐 달라 유혹하고 있었다.
평상시엔 관심 없는 형의 핸드폰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환의 발길을 자꾸 붙들었다. 못 본척 저만치 지나쳐가던 환이 ‘에라 모르겠다.’하며 발길을 돌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결국 열어 본 욱의 핸드폰 메시지함에서 한자 한자 글자를 읽어 내리는 환의 얼굴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