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의 농담에 왁자지껄했던 자리가 순간, 옥 선생이 정색하고 한 말에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싫다고? 왜 싫어? 뭐가 싫은데? 물, 물론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저런 말 듣는 건 싫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단호한 옥 선생의 말에 당황한 건 설희 만은 아니었다. 옆에서 매니저도 거들었다.
“ 아이참, 옥 선생님도... 원장님이랑 설희 씨 민망하게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면 어떻게 해요. ”
매니저의 말에 옥 선생이 매니저를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 뭐가 민망하죠? 원장 선생님도 잘 아셔야죠. 전 개원할 생각 없습니다. 평생 봉직의(월급 받는 의사)로 살아 갈 겁니다. 경영은 잘 안 맞아서요. ”
옥 선생의 말에 설희를 제외한 모두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렇구나! 옥 선생, 그래그래, 옥 선생은 정말 개원의는 안 어울려. ”
설희조차, 안도의 한숨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내, 내가 싫다는 말이 아니었구나. 눈치 없이 계속 말을 하던 외삼촌 조차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 뭘 걱정이야, 옥 선생! ”
거기서만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외삼촌은 엄마의 오빠 답게, 쓸데없는 말 한마디를 더 붙였다.
“ 우리 설희가 경영에는 소질이 있을 꺼야. 회사도 다녔었고 말이야. ”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설희가 소리를 질렀다.
“ 삼촌! ”
왜 옥 선생이랑 나랑 결혼하는 걸 전제로 말하는 건데? 우리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당황한 설희와 달리 옥 선생은 느긋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설희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설희씨가 잘 할 수 있을까? ”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귀지도 않는데, 다들 결혼했을 때 병원이 어떻게 되는 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내, 내가 옥 선생을 좋아한다고 한 건 아닌데, 저렇게 미래의 부인 보듯 당당하게 말하는 옥 선생은 도대체 뭐야?
옥 선생이 밉살스러워 그를 설희가 노려보자, 옥 선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두근. 그의 미소를 보고 설희의 심장이 날뛰었다.
얄...얄미워.
설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에 앉아 소주를 입으로 들이 부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럴 때는 역시 알싸한 소주가 최고였다.
*
“ 설희씨, 너무 많이 마신거 아니야? ”
“ 그...런...가...요? ”
젊은 사람들 끼리 놀라며 외삼촌과 최선생이 빠지고 간 2차에서도 설희가 술을 마시는 속도는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안주를 안 먹어도 옥 선생 얼굴을 보면 술이 먹혔다. 가슴이 답답해서 자꾸만 맥주를 들이켰다.
“ 설희씨, 그만 마셔. ”
옆에서 매니저가 말리자 설희가 베시시 웃었다. 설희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앞에서 묵묵히 술을 마시던 옥 선생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전 가보겠습니다. ”
옥 선생이 일어난 걸 보고 설희가 비스듬한 상태로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가는 구나. 그래, 차라리 잘됐어. 사람들이랑 신나게 놀아야지.
그러나 설희의 예상과는 달리 옥 선생은 맥주잔을 꼭 잡고 있는 설희의 손을 잡았다.
“ 그만 마셔요. 유설희씨도 갑시다. ”
“ 으응? 아니요... 싫어요. 전 더 마실래요. ”
“ 이미 엄청 취했습니다. 더 마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예요. ”
“ 싫은데... ”
더 놀고 싶었지만 옥 선생의 단호한 말투에, 민폐라는 말에 결국 옥 선생에게 손이 잡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흔들리는 설희의 어깨를 옥 선생이 감싸 안았다.
“ 괜찮아요? ”
“ ...네. ”
술집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불어 설희의 앞머리를 붕 띄웠다. 시원해서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 안 괜찮은 것 같은데? ”
평소와 달리 많이 웃는 설희가 이상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옥 선생이 물어봤지만, 설희는 다시 웃으며 옥 선생의 긴 팔에 매달렸다.
“ 아닌데, 괜찮은데! ”
설희의 하이톤의 목소리에 옥 선생은 말이 없어졌다. 그녀를 거의 질질 끌 듯 오피스텔로 데려갔다. 가는 내내 신난 설희와 달리 옥 선생은 침묵을 지켰다. 건물에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여전히 설희는 옥 선생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신나서 소리를 지르던 설희는 밀실에 단 둘이 남자, 어색한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 이제 술 좀 깼어요? ”
설희가 조용해지자 옥 선생이 물었다. 그러나 설희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고있었다. 말만 안할 뿐이지, 여전히 그녀의 입에서는 알싸한 알콜 향이 났다.
“ 괜찮습니까? ”
설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모습에 옥선생이 빙그레 웃었다.
“ 속이 안좋아요? ”
설희가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그럼요? ”
옥 선생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뉘집 아들인지 참 잘생겼다.
그리고 귀여워.
나한테 떽떽거리면서 화 낼 때는 정말 무섭기도 하지만, 이렇게 걱정해주기도 하고, 배려있고 귀여운 남자야.
근데 이런 옥 선생이 나를 좋아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설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바라보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의 팔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그런 설희가 몸이 안좋아서 그런 걸로 착각한 옥 선생이 뒤에서 설희를 쫓아왔다.
“ 설희 씨, 괜찮아요? ”
그러나 설희는 말 없이 집 쪽으로 가서 번호키를 눌렀다. 번호키는 이사오고 나서 아직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전 세입자가 정한 비밀번호가 번호가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났다.
3910이었나? 3920이었나?
설희가 마구잡이로 번호키를 눌러대자, 옥 선생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 번호가 뭐예요? ”
“ 모...모르겠어요. ”
“ 전 번호 그대로예요? ”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옥 선생이 번호를 대신 눌러주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옥 선생이 문을 열어주었다.
“ 들어가요. ”
그가 하는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설희의 어깨를 옥 선생이 잡았다.
“ 설희씨. ”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너무 많이 마셨어. ”
조용하게 읍조리는 그의 말에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긴 뭘 아니에요? 체구가 작은 사람일수록 술에 쉽게 취한단 말입니다. 몸무게와 근육이 적을수록... ”
술 마시고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옥 선생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설희는 볼을 부풀렸다. 듣기 싫었다. 지금 듣고 싶은건, 옥 선생의 다른 모습인데. 날 좋아한다고 하던 그 진지한 눈빛, 술 마시고 키스 했을 때 나에게 다가왔던 색기 넘치는 입술, 그런게 보고 싶은데.
설희가 말 없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옥 선생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작은 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고, 앙증맞은 입술은 반쯤 열려있었다. 그를 점점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던 그 순간, 설희의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촉촉하고 따스한 입술이 아닌 딱딱한 관절. 눈을 떠보니 옥 선생의 손등이 그녀를 막고 있었다.
뭐, 뭐야?
옥 선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 안돼. ”
“ 뭐...가요? ”
당신 나 좋아한다며. 우리 키스 이미 해본 사이인데, 안될게 뭐람?
그러나 술에 취해 이성이 날아간 설희와 달리 옥 선생은 냉정했다.
“ 설희씨 지금 만취했어요. 비겁하게 이 상황을 틈타, 설희 씨한테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취하고 했는데, 두번째 마저 그렇게 될 순 없어. ”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다가간 건 나인데.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당신이 싫대.
옥 선생이 설희를 부드럽게 밀어낸 뒤. 그녀의 뺨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 다음 키스는 사귀고 나서. 제정신으로. ”
그리고 그가 설희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멍하니 서있는 설희 앞에 현관문이 닫혔다.
*
다음날 아침, 엄청난 두통 속에 설희는 눈을 떴다. 바닥이 딱딱해... 울었는 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떠보니, 설희는 아직도 현관 맡에서 자는 중이었다.
얼마나 취했었는 지 신발도 아직 신은 상태였다. 화장은 당연히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병원! 지각인가?
그 와중에도 병원 생각이 나 가방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충전 시키지 않은 핸드폰은 이미 방전이 되어 꺼져있었다.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후덜 거려 앞으로 기어가서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6시... 살았다.
설희는 긴장이 풀린 탓에 바닥에 벌렁 드러 누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가 욱신 거렸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데, 문득 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옥 선생을 당겨 키스를 하려 했다.
그리고 옥선생의 한마디.
“ 안돼. ”
번뜩 눈을 떴다. 진짜 있었던 일인가? 실화인가? 설희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내가 정말 저런거라면... 그런거라면...
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