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옥 선생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설희의 눈이 커졌다. 뭔 말이지?
" 데이트 할 때 와보려고 알아둔 곳이에요. "
라는 말은 지금 이게 데이트란 소린가? 아니면 뭐지? 데이트 할 때 와보려고 알아둔 곳인데 그냥 오늘 한번 와봤다 이건가?
옥 선생의 말에 혼란에 빠진 설희였지만, 옥 선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패닉 상태의 설희도 조심스레 그를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어색하여 마주 앉았지만 옥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머릿 속에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둥실둥실 떠다녀서 긴장 이 되 말도 안나왔다.
모르겠다. 나는 포기야.
옥 선생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가도 곧 또 뭔 말을 하는 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 뭐 먹을래요? "
" 아무거나... "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지만, 아까 옥 선생이 말한 발언 때문인지 식욕이 영 없었다. 메뉴를 멍 하니 쳐다봤다.
" 전 그냥 추천메뉴 먹을래요. 여기 이거. "
" 그래요, 그럼 여기 게살 파스타 하나랑 카르보나라 하나 주세요. "
주문을 마치자,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다. 설희는 잔뜩 긴장을 한 상태로 바닥만 보고 있었고, 그런 설희의 긴장이 옮았는지, 옥 선생도 말이 없었다.
얼른 메뉴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먹는데 집중해서 이 분위기가 좀 날라갈 텐데. 아까 옥선생이 말한 데이트란 말에 정신이 쏠려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옥 선생님은 여자친구가 있나? 여자친구랑 오겠다고 알아 본 곳은 아니겠지?
설마, 없겠지?
딱딱한 얼굴로 물잔을 바라보던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물어볼까?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설희가 입을 열었다.
" 저어. "
" 네? "
설희의 말에 은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희는 눈을 내리 깔고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 옥 선생님은... "
그 때,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다. 점원이 두 개의 파스타를 들고 와, 둘에게 물었다.
" 게살 파스타 어느분이시죠? "
그러자 설희가 작은 손을 들었다.
" 저요. "
설희가 하던 말이 궁금했다. 자신에게 뭘 물어보려던 걸까?
" 설희씨, 아까 하려던 말 뭐였어요? "
은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무것도 아니예요. "
설희가 어색하게 웃고는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럴 때마다 은우는 조바심이 났다. 병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소곤소곤 조용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설희였다. 하지만 은우에게는 수다도 떨지 않았고 때때로 말하다가 입을 닫기도 했다.
결국 식사가 끝날 때 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옥 선생이 틀어놓은 라디오만이 울려 퍼질뿐, 둘 사이에는 거의 대답이 없었다.
같은 오피스텔 입구를 지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이라는 버튼을 눌러, 같은 층에서 내렸다. 가구점에서 산 작은 화분이 달랑달랑 옥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었다. 설희의 집 앞에 도착하자, 옥 선생이 화분을 내밀었다.
" 여기요. "
" 감사합니다. "
옥 선생이 화분을 건네 줄때, 둘의 손이 살짝 스쳤다.
두근두근.
옥 선생님과 있으면 자꾸만 이상해 지는 것 같아. 밝은 편인 설희였지만, 자꾸 긴장이 되었다. 워낙 혼나서 그런지, 아니면...
어색하게 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옥 선생이 뒤에서 말했다.
" 가구 오면 조립해 줄게요. "
그 말에 설희가 몸을 돌렸다.
며칠 전 부터, 옥 선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곰곰이 때문이건, 설희가 못 미더워서건, 옥 선생은 설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집값도 싸게 방을 빌려줬고, 가구도 알아봐 줬고, 이사까지 도와줬다. 심지어, 찬정이 설희를 때리려 했을 때, 구해주기까지 했다.
한번도 제대로 고맙다고 말 한적이 없는 것 같아. 옥 선생이 평소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그건 일때문에 그런거였고, 사적으로는 많이 도와줬는데...
병원에서의 옥 선생이 무섭다고 설희는 그저 옥 선생곁에서 도망가기만 했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눈을 들어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웃음기 없는 옥선생의 얼굴. 딱딱하고 긴장된 표정. 날카롭고 조금 예민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야.
" 저어... "
" 네? "
괜한 소리를 했다가 핀잔을 받을 까봐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설희가 말했다.
" 감사합니다. "
" 뭐가요? "
" 이사 도와주신 것도, 집 빌려주신 것도... 지난 번에 전 남자친구 일도 그렇고. "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의 귓가가 아주 살짝 발그레 달아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그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왜 저렇게 무섭게 보지.
" 집세 안낼꺼예요? "
" 네? 물론 내야죠. "
" 근데 뭐가 고마워요. 집 주인이 집 빌려주고 돈 받는건 당연한 영리활동인데. "
옥 선생의 핀잔 섞인 말에 설희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씩 웃자, 옥 선생이 당황해 물었다.
" 왜 웃어요? "
" 옥 선생님은 안 그런척 하시지만 좋은 분이세요. "
옥 선생이 순간, 말을 잃었다. 언제나 톡톡 쏴대던 옥 선생이 말을 잃는 것을 보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설희는 더욱 밝게 웃고는 허리를 숙였다.
" 그럼 들어가볼게요. 감사합니다. "
" 그, 그래요. "
그리고 방 문을 닫았다. 텅 빈 방에 아까 던져 놓은 짐만 덩그러니 있었다. 설희는 신발을 벗고 캐리어 옆에 쪼그려 앉아 벽에 몸을 대었다.
이 벽하나,
그리고 그 뒤에 벽 하나 더.
그렇게 벽 두개만 지나면 옥 선생의 방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희는 쪼그려 앉은 채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콩, 콩. 머리로 벽을 쳤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시, 시끄러웠나?
서둘러 일어서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 누구세요? "
" 옥은우입니다. "
옥 선생이었다. 다행이다. 옆 집 사람은 아니었구나. 뭘 놓고 갔나? 문을 벌컥 열자, 옥 선생이 서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옥 선생을 설희가 올려다 봤다.
" 뭐 잊으셨어요? "
" 할 말이 있어서요. "
" 뭐... "
옥 선생이 할 말이 있다고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설희를 내려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옥 선생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 설희씨가 오해 하는게 있는데, 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
뜬금 없는 소리에 설희가 눈을 깜빡였다.
" 네? "
" 난 좋은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잘 해주고, 도와주고,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
옥 선생이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내린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설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옥 선생이 말을 이었다.
" 유설희씨. "
이상하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뿐인데 심장의 고동소리가 커졌다.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심장이 이리 저리 팔딱거리며 날뛰었다. 옥 선생은 여전히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얼굴로 설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 네? "
설희의 질문에 천천히 느릿느릿 옥 선생의 입술이 열렸다. 그의 얇고 붉은 입술도 설희의 입술 처럼 떨리고 있었다.
" 좋아합니다. "
나즈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떨리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설희가 아무 말도 못하고 옥 선생을 바라만 보자, 옥 선생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 유설희씨, 당신이 너무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