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이 왔다.
아빠는 다행히도 이렇게 따뜻할 때 가셨구나..
부산에 내려오는 기차에서 시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드라마 준비로 바쁜 동원보다 며칠 먼저 부산에 내려가고 있었다.
기차에 벌써 에어컨이 나오는 걸 보니 날씨가 정말 따뜻해졌다.
아니, 이제 덥다고 해야 하나?
부산역에 내리면 주스부터 하나 사 마실까?
아니다.
아이스크림?
시인은 혼자 어떤 간식을 먹을까 생각하며 들떴다.
친정에 가는 건, 언제라도 참 설렜다.
부산역에 내려서 결국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샀다.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출구로 나오는데 어떤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시인을 툭 쳤다.
“어머, 큰 오빠! 오빠가 여기 어떻게?”
“데리러 왔다. 짐도 없나?”
“없어요. 없어. 어떻게 알고..”
“어제 기차 시간 말했잖아. 니가. 가자.”
가수는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나갔다.
잠시 멍하게 있던 시인이 신나는 표정으로 달려가 오빠에게 팔짱을 꼈다.
“오빠야, 근데 우리끼리 지내는 첫 제산데 어떻게 준비하지? 언니는 그날 시간 낼 수 있어요?”
“우리끼리니까, 알아서 지내면 되겠지. 아버지 좋아하시는 음식 놓고. 아버지 생각하면서 보내면.. 아름이는 그 날 오전 진료 보고 나올거다.”
“응, 그 날은 아빠 이야기 하루 종일 해야지. 호호호.”
“시인아..”
“응?”
“얼굴 보니.. 좋네.”
가수는 시인을 집에 내리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시인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났다.
평생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애지중지 할 수 있게..
늘 애쓰시던 아버지..
이미 사랑하고 있는데도 뭘 그렇게 노력하며 사셨을까..
아름과 퇴근하며 집으로 가면서 시인이 있는 집이 오랜만에 무척 시끄러울 것 같다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가씨 오니 그렇게 좋아?”
“뭐?”
“얼굴이 달라. 혼자 웃기도 하고.. 나 질투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너랑 있을 때 내가 제일 말 많아. 니가 독보적이야.”
“몰라, 오늘 너무 좋아하면 아가씨 구박이다. 각오해.”
가수는 또 피식 웃었다.
“형.. 얼굴보니.. 좋네.. 크크크크크. 으.. 닭살!”
선수가 가수를 보자마자 느끼하게 말을 하며 뭐가 그리 웃긴지 난리였다.
수철이 음식을 내오며 또 말했다.
“가수 형님, 얼굴보니 좋으네요? 풉. 흐흐흐. 얼른 앉으세요. 형수님 좋아하는 샐러드 대령입니다.”
“왜 그래요? 다들?”
가수는 시인을 쳐다보며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아름은 분위기가 이상해서 궁금해졌다.
“언니, 우와, 언니는 결혼하고도 몸매가 그대로예요. 다들 살 찌던데. 호호호. 아니, 오빠가 오늘 나 보고 얼굴보니.. 좋네.. 이런 이상한 말을 해서 오빠들한테 말했더니 다들 놀려먹는 거예요. 울 큰 오빠야 늙은 거 같아서.. 호호호호.”
아름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여동생을 애틋해하던 오빠는 온데간데없고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방으로 들어간 가수의 뒷모습이 너무 웃겼다.
‘아가씨 구박은 안 하는 걸로.. 호호호.’
시인은 은화와 며칠 동안 장도 보고 음식 준비를 했다.
튀김에, 전에.. 그런 제사음식은 아니지만 아빠가 좋아하시던 밑반찬부터 간식까지 이것, 저것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또 그 음식 대부분이 가족들이 다 같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다들 제사 지내고 그 음식을 먹을 생각에 설렜다.
어제 내려 온 동원은 선수와 한 잔 하느라고 시인이랑 제대로 이야기도 못한 게 아쉬워 부엌에서 졸졸 시인을 따라다니며 조수를 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아기를 안은 치수네와 기훈과 영현이가 갓난쟁이를 안고 도착했다.
제사상에는 갖은 반찬들과 불고기, 도미탕, 흰밥. 그리고 치수, 기훈, 수철이 정성들여 만든 초밥 한 접시씩. 이렇게 올라갔다.
남들이 보면 웃을지 몰랐지만 일부러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으로만 차렸다.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다들 아버지를 생각하며 조용히 제사를 지냈다.
“아빠 와서 드시고 가셨을까?”
“안 올 수가 없지. 아버지 오빠들 초밥 검사한다고 무조건 온다. 호호호.”
“수철이 제법 늘었네. 기훈이 따라 갈라면 아직 멀었지만..”
“치수행님, 내 꺼 이제 제법 사장님 티 나지?”
“어. ‘티’만 난다.”
“쳇..”
“하하하하.”
기훈과 치수의 대화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조금 늦은 저녁이었지만 왁자지껄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들 모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콜록 콜록
감기 기운이 있던 시인은 계속 기침을 했고 동원이 계속 신경을 썼다.
“행님아, 시인이 괜찮나? 감기가?”
아름이 시인이 체온을 재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38도 넘는데요? 아가씨, 해열제 먹어야겠다. 다른 증상은요?”
“아니요, 언니, 괜찮아요. 그냥 감기 왔나 봐요. 어제 에어컨 틀어서 그런가?”
“이제 곧 여름인데 무슨 감기고? 니는! 하여튼, 약해 빠져서..”
선수가 걱정 겸, 핀잔 겸 말을 이었다.
“시인씨, 병원 갑시다.”
동원이 일어섰다.
“아니요, 아니요. 나 괜찮다니까요. 콜록콜록. 자면 된다니까 그래요.”
“아니, 애도 아니고 넌 왜 병원에 안 가려고 그래? 좀 있으면 다 문 닫아서 응급실 가야해. 빨리 다녀와.”
“은화야, 그게 아니고.. 콜록콜록.”
가수가 손전등을 가져오더니 시인의 목을 살폈다.
“목이 좀 부었네. 일단 해열제 먹고.. 굳이 병원 안 가도 된다. 다른 증상 없으면. 아름아, 해열제 좀..”
“아니, 아니. 필요 없다니깐.. 나 잠 와서 그래.”
“아니 넌 무슨 임산부도 아니고 왜 약을 안 먹으려고 그래!”
영현이가 걱정스런 맘에 소리를 팩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시인이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동원을 보았다.
걱정하던 모습으로 시인을 보고 있던 동원은 다들 아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멍해졌다.
뭐지? 왜 다들 쳐다보지?
“하하하, 아직 우리는.. 아직.. 시인씨?”
동원이 시인을 쳐다보자 다시 다들 시인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내가 약 안 먹는다니까..”
시인이 동원의 등 뒤로 숨으며 부끄러워했다.
입을 아 벌리고 있던 동원의 어깨를 아름이 툭 쳤다.
“축하해요.”
방에 들어 온 동원은 멍하니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바라보았다.
임산부가 먹어도 되는 진통제가 있어서 시인은 그걸 먹고 방으로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테스트기를 건넸다.
그리고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말했다.
“이번 달은 좀 늦나보다. 그랬는데.. 혹시나 아까 마트갔다가 약국에서.. 감기약만 살라고 했는데.. 약사샘이 혹시나 해서.. 그런데 두 줄이면.. 임신이래요.”
“병..병원 갑시다. 이거 100% 맞아요? 맞는 거래요?”
“지금 병원 문 닫았구요. 그건 거의 맞대요.”
“......”
동원이 아무 말이 없자 시인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동원을 살폈다.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반응이 없자 좀 서운..
응?
울..울어?
“자기 울어요?”
“훌쩍.. 아.. 아기가 생기다니.. 훌쩍..”
“어머어머, 부끄럽게 왜 이래요? 오빠들 알면 어쩌려고?”
시인이 벌떡 일어나 동원의 눈물을 닦았다.
그런 시인을 동원이 와락 안더니 또 놀래서 다시 밀었다.
“아.. 이제 이렇게 세게 안으면 안 되죠? 어떡하지? 방금 너무 세게 안았어요?”
“풉..”
시인이 웃었다.
머쓱해진 동원도 눈물을 그치고 미소를 지었다.
시인을 안으며 동원이 말했다.
“아기가 생기면 기분이 엄청 좋을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해요. 좀 울컥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기도 하고..”
“그러니 나는 어떻겠어요? 아직 뱃속에 아무 느낌이 없어요. 임신인데.. 내 배속 어딘가에 아기가 생겼다는데.. 겁나서 화장실도 못가겠다니까요.. 우리가 엄마, 아빠가 되다니..”
“일단 내일 병원부터 갑시다.”
“서울 가서요. 계속 다녀야 할 텐데.. 하나만 갈래요.”
“그..그게 낫겠어요. 시인씨, 얼른 자요. 애기가 늦게까지 깨어있음 안 될 것 같아요. 자요. 얼른.”
“헉.. 맞다. 내가 자야 아기도 자는 거겠죠? 나 빨리 잘래요.”
급하게 자는 시인만큼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동원이었다.
초보엄마, 아빠는 나중에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아직 세포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기는 그렇게 처음부터 사랑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