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지만 진짜 자신의 집이 아님을 깨달은 은재가 머리를 감싸 쥐고 쓴 신음을 삼켜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왜 자신이 지금 대표님의 집에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상황을 모면 할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흐윽. 이게 무슨 망신이야. 망신, 망신, 개망신!”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쭈그려 앉은 그녀의 등 너머 거실에선, 욱이 우두커니 서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욱에게 은재는 정말 앞을 내다 볼 수 없게 만드는 여자였다.
어젯밤, 망희가 한 손엔 환의 멱살을 등 뒤엔 은재를 엎고 벨을 눌렀을 때 욱은 정말 놀라서 굳어버렸었다. 대문을 열어주자 낑낑대며 둘을 이고지고 온 망희가 환을 거실 바닥에 내팽개치고, 은재를 저에게 떠맡겼을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간신히 그녀를 받아다 자신의 방에 뉘이고 환을 환의 방에 끌어다 주고 다시 돌아왔을 땐, 망희는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욱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대며 부엌으로 가 아침에 사다 놓은 숙취 해소제를 꺼냈다. 그녀에게 물을 말이 많았다. 환은 아마 답해주지 않을 테니.
똑똑.
은재가 기대 있던 방문이 둔탁한 음을 내며 미세하게 떨렸다.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아마도 욱이겠거니 짐작한 은재가 빛의 속도로 일어나 옷매무새와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네! 들어오세요.”
달칵하며 손잡이가 돌아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이를 본 순간 은재는 한껏 끌어올렸던 애매한 미소를 거두고, 침대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베개를 의문의 남자에게 힘차게 던졌다.
“당신…? 이, 이 남자야!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 온 거야?”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색 메모리폼 베개가 날아가 누군가의 얼굴로 명중했다. 그 바람에 베개를 맞은 사람의 손에 들려져 있던 숙취 해소제가 툭하고 떨어져 은재의 발밑으로 또르르르 굴러왔다.
“아침 인사 치곤 과격하네요, 은재 씨. 이제 잠 좀 깨셨어요?”
“허억―. 대, 대표님…?”
욱이 자신의 얼굴을 맞히고 발치께로 떨어진 베개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살짝 웃었다.
“그 베개를 맞추려던 주인공. 설마 나는 아닌 거죠?”
“아, 아…. 저는 그, 그러니까. 분명 김 환씨를….”
은재가 당황해서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런 은재의 눈앞으로 밉상 맞은 얼굴의 환이 툭 튀어나왔다.
“뭐야. 진짜 날 맞추려고 했단 거야? 내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저 베개에 얼굴을 맞은 사람은 정말 나였을 거란 말이군. 난 손이 헛나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이이!”
환의 깐족거림에 또 다시 스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은재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제일 황당한 사람은 나일 텐데, 옆에서 이 상황을 이해시켜 주지는 못 할망정 까불거리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았다.
때마침, 욱이 환의 뒷덜미를 잡고 욱의 곁으로 질질 끌어다주는 바람에 은재는 말아 쥐었던 주먹을 쫙 펼쳐 탁탁 털었다.
“대표님이 말리셔서 산 줄 알아요. 내 옆에 1초라도 더 있었으면 진짜 한 대 콱! 쥐어박았을지도 모르니까.”
“뭐, 뭐? 하― 이 여자 보게. 어제 진짜 어떤 일이 있었던 줄 알고나 그런 얘기를 하는 건가?”
은재의 도발에 환이 버럭 대꾸를 하자, 은재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순진하게 환을 쳐다보았다. 환이 그런 은재의 표정을 보곤 헛구역질을 해댔다.
“어제 먹은 초록이 들이 올라오려고 하네. 당신, 어제 정말 기억 안 나?”
환의 물음에 애써 떠오르려는 몇몇 장면들을 억지로 지운 은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네.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그러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여긴 누구 집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은재의 뻔뻔한 대답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욱도 한 술 보태었다.
“그래, 김 환. 이야기해봐. 어제 그렇게 나간 뒤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두 명의 각기 다른 질문공세에 한 명씩 물어보라던 환이 일단 은재의 질문에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어제 8번째 소주병의 마지막 술잔을 마시고 화장실 갔다 온 뒤론 필름 끊겼어. 나를 이기니 뭐니 하더니, 당신이 먼저 잠들었다고. 싸장니임― 여기 쐬주 한 병 더어……, 읍!”
환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은재가 환이 자신의 주사를 흉내 내자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웁! 이어 앙 나?(이거 안 놔?) 퉤퉤!! 으윽 짜.”
갑자기 달려든 은재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환이 연신 침을 뱉었다.
“그만, 생각났으니 제발 그만 해욧!”
은재가 욱이 듣지 못하도록 환의 귓가에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떨어져 나왔다. 환은 그런 은재의 모습을 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큭. 이 은재. 약점 하나 더 잡았네?’
환의 불길한 웃음을 본 은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를 또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욱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순 없었다. 은재는 이어서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여기 이 집은… 누구 집이죠? 왜 김 환씨와 강 대표님이 같이 계시는지 납득이 가질 않아서….”
은재의 물음에 환과 욱이 서로를 짧은 시간동안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한 환이 우물쭈물 대는 순간 욱이 입을 열었다.
“음. 환이는 저랑 소속사 대표와 식구이기 전에 제가 아끼는 동생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이유로 같이 지내고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명의는 제 명의이긴 한데…, 누군가의 집이라곤 명확히 이야기해줄 순 없겠네요.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나요?”
욱의 조근 조근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은재가 조그맣게 ‘네’라고 읊조렸다. 욱의 설명을 듣던 환도 자신과 욱의 관계를 교묘하게 피해서 대답해준 욱에게 내심 고마웠다. 아끼는 동생이라는 것은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동생이란 단어 앞에 이종사촌이라는 말이 빠져있을 뿐.
은재의 질문이 끝나고 나자 이번엔 욱이 환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자 이제 그럼 나한테도 대답을 해줘야지 김 환? 어제 그 깽판을 치고 나가선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오고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솔직히 다 불어라.”
욱의 서슬 퍼런 눈빛에 환이 뒷걸음질 치며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어, 형…. 아니 대표님.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망희 형한테 물어보면 안 될까? 나보다는 그 쪽한테 듣는 게 더 알아듣기 쉬울 거야. 그럼, 난 이만!”
주춤대던 환이 찰나의 기회를 잡아 쌩하니 욕실로 도망갔다. 남겨진 욱과 은재가 휑하니 비어버린 환의 자리를 쳐다보다가 쑥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환이는 제가 따끔하게 혼낼게요. 혹시 어제 불편하신 게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욱이 따듯한 어조로 은재에게 사과를 건넸다. 은재는 그런 욱의 매너에 속으로 감탄하며 대답했다.
“아녜요. 실례라면 제가 많았죠. 남의 집에 술이 취해서 찾아와 잠이 들고, 아침부터 이런 난리까지. 폐만 끼치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은재의 눈에 아까 굴러 온 숙취 해소제가 띄었다. 그 모습을 본 욱이 성큼성큼 은재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떨어진 숙취 해소제를 집어 들어 은재에게 건넸다.
“속이 많이 안 좋으실 것 같아서…. 전 볼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봐야하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가세요. 아 저녁식사 대접은 오늘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살짝 목례를 하고 은재를 스쳐지나간 욱이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닫았다. 이윽고 모두 다 나가고 혼자 있게 된 은재가 무너지듯 침대로 내려앉았다.
‘이 은재, 이 바보. 병신, 머저리, 쪼다, 붕어! 어떻게 이런 사고를 치냐, 어떻게. 꿈속의 남자 사로잡기 대작전은 이미 물 건너갔네, 갔어.’
욱이 준 숙취 해소제병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은재가 침대 밑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자신의 클러치를 들고 일어났다. 욱이 천천히 준비하고 나가라했지만 더 이상의 민폐는 은재도 싫었다. 방문을 슬쩍 열고 둘러보니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살짝 든 은재가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욱과 환의 공동주택을 살며시 빠져나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 온 환은 가운을 걸친 채로 은재가 있던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살짝 열려있는 방문이 수상해 문을 열자 예상대로 은재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방문을 닫았다.
“이 은재. 그래 한 번 도망가 봐. 나도 조만간 너한테 물 한 번 찐하게 먹여줄게.”
환의 얼굴에 장난기어린 미소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