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수평선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광안대교에 모인 많은 사람들 사이로 조금씩 기분 좋은 긴장이 퍼져나갔다.
구름이 낮게 끼어 있어 혹시나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다들 한 곳을 응시했다.
“우와! 해 나온다.”
누가 말했는지도 모를 소리에 다들 감탄하며 조그맣고 동그란 태양을 바라보았다.
노란 태양은 자석에 이끌리듯 순식간에 떠올라 사방을 밝게 비추었다.
“작가님, 이제 서른네살? 우와! 나이 많네요. 크크크크.”
“시인씨도 20대 마지막인데, 큰일났어요.”
“쳇.. 진짜 서른은 안 될줄 알았는데.. 올해 진짜 문란하게 보내봐야겠어요.”
“진짜! 확 잡아서 서울로 데리고 갑니다!”
“메롱!”
시인은 혀를 내밀며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다가 다시 동원에게 뛰어와 팔짱을 꼈다.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도망은 보류요. 호호호. 아빠가 아침 먹으로 오래요.”
“계속 지난번에 먹었던 해장국이 생각났어요. 빨리 갑시다. 너무 먹고 싶네요.”
**
“가수도 결혼했고, 이제 이번 주에 선수도 결혼하면 집을 좀 손 볼 생각이다.”
“에? 아빠! 행님은 처가살이 한다지만 나는요? 나는 내방에서 계속 살 건데!”
“헥? 오빠야 은화랑 여기서 살 거야?”
“그면, 내가 어디 가노? 은화 부모님도 좋아하시드라. 은화도 여기 너무 오래 제 집처럼 드나들어서 편안하단다. 내일 방 도배만 새로 할라고 했는데..”
“아빠, 어떻게 손 보실라고요?”
“옆집을 때마침 내놨길래 어제 복덕방 가서 샀다. 선수랑 은화는 한 층 다 내줘야 하고.. 우리 수철이 방도 줘야 하고.. 가수랑 시인이 집에 오면 잘 방도 있어야 하고.. 집을 아예 새로 지을 생각이다.”
“헉! 아빠 그런 큰일을 상의도 없이!”
시인이 서운한 듯 아빠에게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살짝 미소를 지으시더니 단호하게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가수랑 아름이가 건축회사랑 설계 시작한단다. 이참에 가게도 손 봐야겠다. 어쨌든 전부 다 자기 살 곳 빨리 찾아라. 몇 개월 간 집에 못 온다.”
“근데 아부지 전 재산 다 쏟는 거 아니예요?”
“당연히 다 쏟아 붓고, 대출도 받고.. 가수도 좀 도와주드라.”
“아, 진짜! 나는 아들 아니요?! 아부지, 나도 돈 많다니까요.”
“아빠, 나도 돈 많아요. 내 방 인테리어 비용은 될텐데..”
“선수랑 시인이는 결혼 준비나 잘 해라! 이상, 가족 회의 끝.”
“에이, 이게 무슨 회의야. 통보지.”
“시인아, 가수 행님한테 전화해보자. 새 집 어떻게 짓는지 완전 궁금하다. 그치, 은화야?”
“진짜 아버지.. 아버님 잘 만나서 저 좋은 집에서 살게 되고 너무 좋아요. 오빠랑 저는 몸으로 열심히 도울게요. 호호호.”
다들 이야기를 한다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동원과 영현은 도미살로 끓인 떡국을 바닥까지 긁어 먹고 있었다.
영현은 아기라도 있는데 동원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작가님, 며칠 굶었어요?”
“시인씨, 시인씨도 이거 끓일 수 있어요? 내가 태어나서 먹은 떡국 중에 제일 맛있어요.”
“영현이 주려고 기훈오빠가 있는 재료, 없는 재료 다 넣어서 이런 거예요. 저 오빠를 기분 좋게 해 보세요. 그럼 계속 먹을 수 있으니..”
“이서방, 많이 먹게. 안사돈께 좋은 날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시인엄마 자리가 비어서 안사돈이 욕보시겠네.”
“아닙니다. 아버님. 얼른 준비해서 다시 부모님들 만남 약속 잡겠습니다.”
“뭘 또 만나, 그냥 다 알아서 하시라 하게나.”
동원이 시인아버지와 이야기 한다고 숟가락을 놓자 각자의 대화에 빠져 있던 가족들이 다같이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새집이라니!
아무리 같은 공간이지만 다 허물고 새로 짓는다니 시인은 좀 섭섭하기도 하고, 또 평생 조금 허름한 주택에 살아서 새 집이 생긴다니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디서 지내실겁니까? 못해도 서너개월은 걸릴 텐데..”
동원의 질문에 다들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집인데 내가 감시해야지. 가게에 있는 쪽방에서 지낼 생각이네.”
“사장님!”
“말도 안돼요! 거기 얼마나 우풍이 심한데..”
기훈과 수철이 소리를 빽 질렀다.
기훈은 신접살림을 차렸고 수철은 임시로 머물 근처 원룸을 이미 계약한 상태였다.
“어허! 이 녀석들이 왜 이럴꼬, 여기 가게 위에 우리 집 짓기 전에는 거기서 가수랑 엄마랑 같이 살던 방인데! 군소리마라, 다들!”
선수는 머리를 쥐어 뜯었고, 시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님, 더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아.. 우리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 건 절대 안 바뀌어요. 그래서 선수오빠랑 저랑 아무 말도 못한 거예요. 저런 고집도 없으셨음 이런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시겠냐 하지만 진짜 이럴 땐 너무 답답하다니까요..... 별 수 없어요. 자주 찾아 와야죠. 뭐..”
동원을 배웅하며 시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우리는 2월에 결혼합시다. 날짜 최대한 빨리 잡아요. 어머니가 전화할 거예요. 시인씨한테.. 우리 둘이 잡으라고 하시던데 그냥 어머니한테 일거리 드리려구요. 요즘 좀 적적해하시는 것 같아서..”
“그럼 어머니랑 저랑 알아서 할게요. 무슨 2월이예요. 진짜 작년에 우리집에서 결혼식만 3번 했어요. 우리 좀만 쉬다가 해요. 알겠죠? 봄에 해요. 봄에.”
“아.. 그 때까지 시인씨랑 어떻게 떨어져 지내라고..”
“얼른 가요. 운전 조심하고요!”
마치 아이를 태우는 것처럼 시인이 동원을 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문까지 쾅 닫자 동원은 어쩔 수 없이 시동을 켜고 창문을 내렸다.
“방학이니까 시인씨가 서울에 와요, 우리 집에서 좀 부려먹게 얼른 올라와요. 알았죠?”
“알았어요. 얼른 출발해요.”
동원은 창 너머로 몸을 쭉 빼서 시인에게 뽀뽀했다.
‘아이, 귀엽단 말이지. 저 잘생긴 남자가 어찌 저래 귀여울까..’
떠나가는 차를 보며 히죽거리는 시인을 선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잘 지내다가도 시인이 저렇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이상하게 열이 받는 선수였다.
**
2주 뒤, 이삿짐차가 짐을 다 실어가고 가수, 선수, 시인이 안방에 모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
가수는 아무 말도 없이 아버지 옆에 앉아서 같이 사진을 보기 시작했고 선수가 시인을 쿡쿡 찌르며 어떻게든 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빠, 사람들 짐 빼면서 신발신고 있어서 여기 더러워요. 얼른 가게로 내려가요. 엄마 사진은 내려가서 또 보면 되잖아요.”
“이 사진이 말이다. 우리 시인이 대학교 졸업식 때 사진이제? 그 때 우리 다 사진관 가서 첨으로 찍은 가족 사진이제?”
“맞습니다.”
가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너거 엄마가 지금 보니 좀 아파 보인다. 그자?”
“뭘 아파보여요? 예쁘기만 하구만.”
선수도 시인을 데리고 바닥에 철퍼덕 앉으며 말했다.
“이때 알았으면 너거 엄마 아직 살아 있을까..”
가수의 심장 한 쪽이 아려왔다.
내가 좀 더 빨리 의사가 되었더라면..
엄마 병을 바로 알아챘더라면..
“아빠, 왜.. 오늘 엄마 보고 싶어요? 우리 내친김에 엄마한테 다 갔다 올까?”
“그라자, 아부지. 엄마한테 갔다 옵시다. 행님 시간 되제?”
“그래. 내가 운전할게.”
“아니다, 곧 설이다이가. 그 때 보러 갈긴데.. 새해 첫 날도 갔다 왔고.. 곧 볼낀데.. 여보, 가수 엄마. 우리 살던 집 인자 새로 지을끼다. 당신이 쓸고 닦고 했던 집인데 막상 부순다카니 인자 당신 진짜 보내는 기분이 드네. 새집 보고 놀라지 말고 잘 찾아오소. 다음 제사 때는 새 집에서 더 많이 차려 놓으께.”
삼남매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다 끝나실 때까지 그렇게 다들 함께 앉아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의 어깨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며칠 뒤,
시인은 식사를 싸서 가게에 왔다.
가게에서 머무르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가게까지 철거 후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공사소장님의 발언에 무참히 깨어졌다.
가수가 뒤에서 사주한 거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선수와 시인은 소장님께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오늘 아버지와 함께 근처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6개월치 월세를 아름이 한꺼번에 내 놓는 바람에 아버지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아빠? 어디 가셨지?”
가게 모퉁이의 작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가셨나?”
시인이 화장실까지 둘러 봤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곧 선수가 들어왔다.
“아부지는?”
“몰라, 안 계시네. 오빠야 오다가 아빠 못 봤지?”
“나 밑에 길에서 올라왔는데 아빠 없던데?”
“......”
둘은 문턱에 걸터앉았다.
“오빠야.. 이상하다. 그냥 아빠가 잠시 없는데 왜 불안하지?”
“이 새끼가 또 분위기 이상하게 모네. 괜히 니 때매 나도 불안하다이가!”
둘은 얼마 전 아빠의 쓸쓸한 어깨가 계속 생각났다.
“전화해보자.”
선수가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시인도 따라 나오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섰다.
뚜뚜뚜뚜
신호음이 울렸지만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둘은 계속 기다리자며 다시 가게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때,
“오빠야 다시 한 번 전화 걸어봐봐. 집에서 벨 소리 들리는 거 아니가?”
시인이 휑하게 열린 2층 안 방 창문을 쳐다보았다.
선수는 다시 전화를 걸고 둘 다 귀를 기울이며 방을 쳐다보았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희미한 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벨 소리였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떨어뜨린 선수의 폰 너머 응답 없는 신호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