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종자들이란 인간의 몸으로 신력을 타고나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신력은 마기처럼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대신 신력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고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들에게 제힘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 신의 종자들은 그런 신력을 담을 수 있는 고귀한 정신력을 타고나는 아이들을 데려다 신력을 사용하고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계를 존속시키는 사명을 안고 살아가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마신이라면 누구든 인간계에 마기를 방출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신의 종자들에 대한 정보는 신들의 왕인 주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
일레인 역시 주신의 딸로서 왕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신들처럼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일레인이 인간들이 꾸며 놓은 화려한 방안에서 마기에 노출된 인간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 페니는 잠시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긴 복도를 빠른 걸음걸이로 달려 마틴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한참을 달린 페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갈색 문에 손을 올렸다. 똑. 똑.
-들어와라.
“집사님, 치료사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경박스럽게 그를 부르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던 마틴은 페니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블린 치료한 후 어린 시절 들었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일 레인을 애타게 찾아대는 두 주인 때문에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정말이냐? 어디 편찮으신 곳은?”
마틴은 일레인이 지독한 통증에 몸부림치던 이블린은 단번에 치료하고 쓰러진 모습을 지켜본 장본인이었기에 그녀의 상태에 대해 먼저 물었다. 피곤한 몸으로 무리해 이블린을 치료해준 치료사를 향한 고마운 마음과 제 주인들을 고통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되어버린 그녀는 현재 그의 두 주인을 제외한, 아니 오히려 주인들보다도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틀 만에 깨어나셨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당황해 하셨지만, 얼굴빛도 나쁘지 않고 제가 뵈었을 때 방안을 걷고 계신 것을 봐서는 불편한 곳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이틀 동안 주무셨다는 것에 조금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저, 치료사님께 음식을 준비해 드린다고 했는데 어떤 음식을 가져가는 게 좋을까요?”
“이틀을 굶으셨으니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준비해 드리는 게 좋겠구나. 내 이미 주방장에게 일레인 님께서 깨어나시면 드실만한 특제 수프를 항시 준비해 두라 일러두었으니 주방에 가서 그것을 내어 달라 해라. 아, 아니다. 음식은 내가 직접 챙길 터이니 너는 집무실로 가 이 소식을 백작님께 알려드리거라. 서둘러 가야 할 것이다.”
“네, 집사님. 바람처럼 달려갈게요.”
페니가 대답과 함께 몸을 돌려 복도를 타다닥 달려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마틴 역시 서둘러 집무실을 벗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장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에 하인들이 말한들 그가 원하는 수준 높은 영양가가 담긴 음식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자존심만 드센 주방장을 향해 불평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루카스는 평상시의 일과대로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가주의 전용 훈련실에서 아침 수련을 마친 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향했다. 진작부터 집무실 한쪽에서 그가 봐야 할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던 주도와 인사를 나눈 뒤 티 테이블에 놓인 샌드위치와 스콘을 접시에 담아 자리로 가져온 루카스는 오늘의 할당량을 마치기 위해 쉬지 않고 입과 눈을 움직였다.
약초를 구하기 위해 얼음산에서 열흘이 넘게 시간을 보냈던 터라 안 그래도 쌓여 있던 서류들이 일 황자가의 움직임으로 인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상태였다.
이제야 제대로 치료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 이블린이었기에 그녀를 이용하려는 일 황자의 움직임을 그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루카스는 밤잠을 줄여가면서도 주드가 던져 주는 서류들을 빠른 속도로 읽고 처리했다. 그런 와중에 일레인 마저 의식을 잃은 지 이틀이 되어가도록 깨어나지 못하자 안 그래도 예민하던 그의 신경은 가느다란 쇠 실처럼 가늘고, 날카로워져 갔다.
“이게 다 다리우스 황자의 지지 세력인가?”
“네, 가장 최근에 합류한 귀족들까지 모두 합친 결과물입니다.”
“그사이 많이도 모아댔군.”
“듀칸 공작이 그렇게 돈을 뿌려댔는데도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걸 보면 능력부족은 그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탐욕이 심한 것도 그 집안 내력이겠지.”
루카스 역시 이시스 후비의 아들인 다리우스에 대한 귀족들의 평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색을 밝히고, 의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 철부지. 성군의 자질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평가하는 능력도, 인재를 끌어들일 만한 배포도 포부도 없던 그는 그와 후비가 뿌려대는 돈을 보고 몰려드는 간신배 같은 무리에게 휘둘리며 입으로만 국정을 논할 인물이었다.
“그 중에 그나마 눈에 띄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샤누아 자작 가의 둘째인 테논 샤누아 입니다. 그런 놈이 왜 거기 가서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드가 그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를 건네며 못마땅한 말투로 제 생각을 피력했다.
제 수하가 오랜만에 보이는 투정에 그를 바라보던 루카스의 입가가 살짝 벌어지며 피식 소리를 냈다.
“그놈이 그렇게 마음에 드냐? 그럼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라.”
“정말이십니까? 정말 데려와도 되는 겁니까?”
“능력껏 해보래도. 대신 우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알려지면 안 된다. 그럴 자신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보든지.”
“정말이죠? 대신 월급은 두둑이 챙겨주시는 겁니다. 약속해 주세요…….”
루카스에게 확답받기 입을 열었던 주드는 집무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들어와라.”
루카스의 묵직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전달되자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가 가장 최근에 이름을 외운 하녀의 모습이 보였다.
“루카스 님, 치료사님이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
“그래? 기분은? 어디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다더냐?”
“네? 아, 네. 기분은 나쁘지 않으신 것 같았고, 움직이시는 데 불편해 보이지도 않으셨습니다.”
페니는 신비한 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방안을 걸어 다니던 일레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동작 하나하나에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움직임에 감탄하느라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몸이 불편했다면 그런 고운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모르니까 돌아가면 여쭤봐야지.’
확실한 일 처리를 좋아하는 루카스의 성정을 생각하며 속으로 다짐하던 페니는 오러를 운용하며 홀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루카스의 신형을 미처 보지 못했다.
주드는 오랜 눈치로 그런 낌새를 느끼기는 했으나 평범한 보좌관인 그가 마스터인 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간 바람을 느끼며 멍한 얼굴로 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페니와 보고를 마치지 못한 채 집무실을 벗어난 주인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드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