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후.
에세이를 쓰라고 했지만 아무리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공이 아니라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 내가 그걸 쓰라고 했었나?”
‘얘가…….자기가 말 한 것도 잊고 있었네.’
“내 정신 좀 봐. 아하하. 에세이 퇴짜 먹은 지가 언젠데,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뒀었나보네. 아냐! 네게 시키려던 건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 쪽이야.”
“소설?”
“그래.”
“나보고 소설을 쓰라고?”
“가장 우울하고 힘들었던 때의 일들을 생각하며 쓰든, 이별을 주제로 연애소설을 쓰든 일단 써 봐. 어차피 며칠 후에 출판사 담당자님도 만나야 하니까.”
“……알았어.”
자유롭게 마음 닿는 대로 쓰라고 해도 중학생 때부터 한 길만 걸으며 전공으로까지 발전시킨 친구와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모든 것에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이 결여되어서 친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친구는 그것도 곧바로 눈에 보였는지 어깨를 아프게 한 번 꽉 쥐고는 친구가 비워 준 손님 방 한구석에 아예 노트북과 대용량 믹스 커피 한 박스를 올려주었다.
“이게, 뭐…….”
“넌 이제 우리 집에 갇힌 거야. 말이 되던 말이 되지 않던 무조건 일단 한 달 동안 초고를 마련 해 봐.”
“하, 한 달?”
“응! 너, 학교 다닐 때도 그랬잖아. 평상시엔 아무것도 안 하고 잘 놀다가 숙제 검사 맡을 때쯤 되면 거의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숙제 더미를 일주일 안에 해치우기도 하고…….와, 나 그때 너 보고 무지 감탄 했다. 심지어 국어 선생님은 살짝 똘끼까지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주제를 갖고 작문 검사를 맡기도 했잖아.”
‘그랬었나?’
“뭘 갸우뚱 하고 그래. 내 말이 맞으니까, 괜히 기억 더듬는 시늉은 하지 마! 아하하하.”
“악-!”
“헉! 아파?”
“어. 무슨 애가 어깨로 사람을 후려 치냐. 무슨 흉긴 줄 알았다. 얘.”
정말 많이 달라졌다. 볼수록 많이 달라진 친구의 모습이 낯설지만 그만큼 점점 더 편해진다.
헌데 좀 이상한 일이다.
난 오래 됐다면 오래됐지만 그다지 오래 됐다고만 볼 수 없는 시간동안 이 친구를 까맣게 잊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애를 그때의 그 친구와 매치 하는 것부터가 기적이라고 느끼는데…….이 앤, 날 어떻게 알아봤던 거지?
“뭐야, 궁금한 게.”
‘귀신.’
“내가 옛날이랑 똑같아 보여?”
아니란 건 나 자신이 더 잘 알지만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그러자 친구는 장난하지 말라는 듯 ‘낄낄.’ 아저씨 같은 웃음을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옛날이랑 똑같으냐고? 넌 사실 어벙하던 옛날 모습이 더 나았어. 예전엔 몽실몽실 살도 보기 좋게 붙어서 얼마나 예뻤다고. 무슨 말만 하면 양 볼이 붉게 변하는 것도 좋고, 겨울에 인간 난로가 따로 없는 것도 좋았지.”
‘아...맞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평상시엔 데면데면 한 주제에 숙제로 곤란해질 때마다 슬쩍 처치 곤란한 숙제를 내게 미루기도 하고, 겨울엔 꼭 짝꿍을 바꿔 가면서까지 옆에 딱 달라붙어 지냈던 아이였다.
매주 마다 수학 담당이었던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짝꿍이 겹치지 않도록 홀수와 짝수끼리 번갈아 바꿔 줬는데, 유독 우리들만 항상 똑같은 짝꿍으로 있어서 계산이 안 된다고 뭐라 그러셨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선생님이 서 계신 곳까지 걸어가 제 손을 다짜고짜 담임선생님 볼에 대곤 했었다.
선생님. 차갑죠? 제가 이래서 쟤랑 못 헤어져요.
그땐 그냥 평범한 모범생이었다고 넘겼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볼수록 이 친구. 그때부터 보통 아이는 아니었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네가 다시 보여서.”
“왜? 예쁘냐?”
“뿔테 안경잡이 모범생이 뭐 예쁘다고.”
“어허, 너…….이 대작가님을 비하 하고도 살아남을 자신은 있는 거냐?”
“나 죽으면 대필 작가 또 구해야 하는 건 알지?”
“올~ 너, 너무 큰 거 같다? 옛날엔 말대답도 못하고 더듬거리던 게. 무지 발전했어. 재수 없게.”
“재수 없어도 참아. 나도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처세술이었으니까.”
내가 시니컬하게 대꾸하자 친구도 기분 좋게 웃으며 양 손을 들어 항복 선언을 한다.
“그래. 사람이 변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긴 힘든 거지. 특히 우리 같은 보통의 존재들은 더 까칠하게 살아야 이 세상 살기가 편해.”
“후훗.”
쓴 웃음을 삼키며 수긍하고 있는 내게 친구는 방심을 틈타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픈 이별 때문에 힘든 거라면…….차라리 소설 속에서라도 사랑을 이뤄. 그러면 상처가 다소나마 추슬러질지도 모르니까.”
“…….”
며칠 동안 모르는 척 하던 친구였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나보다.
그래. 그랬겠지.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유난스럽고 떠들썩하게 공개 연애를 했던 동창을 몰라본다는 게 무리였다는 것을, 간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년이나 지났으니까. 사람들이 약간은 잊었을 거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었던 건가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