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장
생일 축하
그 맛이 끝내 주었다. 입에서 톡톡 터지는 밥알들이 혀를 자극했다. 특별한 맛 없이 고소하기만 한데도 아주 맛있었다.
[맛이.. 괜찮니?]
난 대답 대신 엄지 하나를 척 들어보였다. 지젤리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구나. 그럼 구절판 먹는 법을 알려주마.]
지젤리 씨는 두개의 막대기로 힘겹게 구절판이라는 것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하얀색 무언가를 집으려고 했다.
[아무래도 어려운걸.]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새로운 로봇을 불렀다.
[원, 어서 와봐.]
완전 구식으로 생긴 로봇 하나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슈그라햄 지젤리 씨?]
얘네는 하나같이 풀네임으로 부른단 이야.
[원, 이 '젓가락' 이라는 건 도저히 쓸 수가 없군. 다른 걸 좀 가져다 주겠어?]
[네, 슈그라햄 지젤리 씨.]
원이라는 그 구식 로봇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다시 순식간에 나타났다. 막대기 두개는 맞는데 손잡이랑 고리가 달려있고 두 막대를 붙여놓은 걸 들고 왔다. 위에는.... 큰 하트가 달려있었다. 푸흡, 저게 뭐야? 완전 어린애 거 같잖아.
[이건 뭐야.]
[젓가락입니다, 슈그라햄 지젤리 씨.]
[젓가락 말고 다른 걸 달라니까?]
[아닙니다, 그 고리에 손가락을 끼우시면 훨씬 편하실 것 입니다, 슈그라햄 지젤리 씨.]
[그래?]
지젤리 씨는 귀를 쫑긋 세우고 원의 지시를 따랐다.
[이제 다시 집어보세요, 슈그라햄 지젤리 씨.]
지젤리 씨는 다시 그 하얀색 무언가를 집었다. 이번에는 아주 잘 집어졌다. 지젤리 씨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그 하얀색의 무언가를 자신의 접시로 옮겼다.
[이건 밀떡이라는 거야. 음, 이 젓가락 아주 좋은 걸. 이 젓가락 이름이 뭐야? 여러 개 사두어야겠군.]
['어린이용 젓가락-하트 장식: 별장식, 자동차 장식, 꽃 장식 도 있어요!' 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슈그라햄 지젤리 씨.]
어린이 용이라니, 푸흐흡. 지젤리 씨는 꽤나 부끄러운 모양이다. 얼굴이 토마토가 되었네.
[흠, 흠.... 한국의 어린이들의 수준이 아주 높나보군....]
지젤리 씨는 애써 변명했다. 괜찮아요, 웃지 않을게요. 이미.. 웃고 있지만..
[계속 설명을 하도록 하지.... 이 밀떡 이라는 것에 이 구절판에 놓여진 재료들을 올려서 먹으면 되. 파프리카, 당근, 오이, 계란, 소고기.. 다양하게 준비해 놓았으니 취향껏 골라 먹으렴. 이렇게.... 재료를.... 올려서... 돌돌 말고... 먹으면...]
그는 입에 그 밀떡과 재료들을 넣고 우물우물 거렸다. 나와 태일러, 앨리샤 까지도 아무말도 없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로봇 '원'이 침을 삼킨 것 같기도 했다.
[된단다! 맛이 아주 환상적이구나! 모두 먹으렴.]
[아빠, 잠깐요.]
태일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태일러, 나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단 말이야. 밥 다먹고 이야기하면 안될까?
[우리, 울프 생일 축하 해줘야죠.]
[아, 그래. 이 멋진 케이크를 앞에 두고 그냥 밥부터 먹을 수는 없겠구나. 자, 그럼 다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보자!]
지젤리 씨가 그렇게 외치고는 손벽을 치며 박자를 맞췄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앨리샤가 입을 열었다.
[저.. 아빠..? 우리, 로봇도 불러서 해봐요. 온 식구 다 불러서.]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우리 가족들 생일일 때는 모두 그렇게 했으니.]
그는 그런 말과 함께 큰 소리로 외쳤다.
[기념일 3번, '생일날'입니다, 모두 모여주세요!]
그러자 그 수십 개의 로봇들, 음식하는 아주머니들, 집사까지 모두 왔다. 이런... 너무 쑥쓰럽다. 이렇게나 큰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아니, 이런 생일 축하를 받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같이, 생일 축하 노래. 시작!]
태일러가 즐겁게 말하자 갑자기 떼창이 시작되었다. 로봇들은 자기들만의 로봇음성으로, 집사는... 푸하하, 완전 열심히 부르시네. 감사해요, 아저씨! 뭐니뭐니 해도 앨리샤가 짱이었다. 저렇게나 잘 부르다니. 저건 그냥.... 이건 정말로.... 그냥 천사 그 자체 아닌가?
[사랑하는 우리 울프, 생일 축하 합니다!]
가장 크게 들렸던 집사의 목소리가 끝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어서 초를 불어!]
태일러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난 초를 후, 불어 껐다. 생일 케이크에서 분명 초를 꺼본 적이 없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초를 불었다. 내가 초를 불자 모두 박수를 쳤다. 로봇들은 박수를 안치고 하나같이 입으로 '짝짝짝'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너무 귀엽다.
[이제 소원 빌어!]
태일러가 또 다시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소..소원?]
[응, 어서!]
소원이라니, 참.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일단은...
'태일러랑 앨리샤랑 지젤리 씨랑 다 같이 언제나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 소원을 빌면서 자꾸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에라, 모르겠다.
'잭 아저씨도요.'
으아아.... 해버렸다!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네....]
앨리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앨리샤가 저렇게 말을 하다니!!
[아니야, 언니. 저건 분명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어서 한 표정이야.]
무슨 소리람... 하지만 저건 분명 내 심정이야...
[내가 심리학 책을 많이 본 건 언니도 잘 알잖아?]
태일러가 덧붙였다. 기승전 자랑이라니, 역시 너답다, 태일러.
[자, 이제 모두 가보아도 됩니다!]
지젤리 씨가 크게 소리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고보니, 태일러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모두 나오라고 했는데도 안 나오시네... 어.... 설마....
[케이크는 잠시 넣어두고, 이 만찬을 모두 만끽해보자!]
지젤리 씨가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지젤리 씨는 항상 누군가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 이 정도로 잘 살고 영향력 있으니, 연설도 많이 하고.. 그러니 항상 저렇게.... 저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까? 아냐, 나 따위가 뭔데 남이 행복하고 말고를 따져. 그보다 난 지금 세계최고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뭐하니, 울프? 어서 먹어!]
지젤리 씨가 내 생각을 끊어버렸다. 뭐, 고마운 걸지도. 난 어서 그 끝내주게 맛있는 밥과, 끝내주게 맛있는 구절판이라는 것과 끝내주게 맛있는 잡채라는 것을 끝내주게 많이 먹었다. 엄청 맛있다고 태일러가 먹으라고 했지만 끝까지 그 미역국이라는 건 손도 대지 않았다. 다음... 기회에.... 그리고 케이크도 먹었다. 맛이 끔찍했다. 아니, 그 끔찍하다 말고. 맛이 죽여준다는... 가장 놀라웠던 건, 케이크를 자르자 그 안에 선물이 들어있었다는 것! 어쩐지 케이크가 거대하더라. 태일러의 선물은 '과거 생태계의 구성원이 '었던' 생물들에 관한 책' 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런 말을 했구나... 솔직히, 썩 마음에 드는 선물은 아니었다. 앨리샤의 선물은 바로... 엥, 이게 뭐야. '치카포카 세트'? 완전.. 어린애 거 같은데... 그래도, 선물을 두 개나 받다니! 완전 대박 진짜 정말 기분 좋다!
[맘에 드니?]
앨리샤가 나에게 물었다. 그녀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준 건 처음이다. 전에 가게에서 말 걸어준 것이 있었지... 물론 진짜 앨리샤가 아니었던 아주 큰 흠이 있었지만....
[네.. 맘에 들어요..! 아주, 아주 맘에 들어요..!]
앨리샤는 방긋 웃었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 빛이!
[내 선물도 맘에 들지?]
뭐지, 이 초특급 뻔뻔함은. 어쨋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응, 맘에 들어.]
[그럴 줄 알았어!]
태일러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밥을 다 먹었으면 모두 양치합니다!]
지젤리 씨가 말했다.
[네!]
[네, 아빠.]
[네, 아빠!]
나와 태일러 앨리샤가 모두 동시에 말했다. 지젤리 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항상 우리 두 공주님이 네, 하는 소리만 듣다가 남자애 목소리가 섞여있으니 기분이 묘하네. 어쨋든 어서 가거라!]
우리 -태일러와 나, 앨리샤- 는 다시 계단을 올라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이를 닦았다. 이를 다 닦자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잭 아저씨와 있을 떄는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그리운 건 아냐. 맛난 음식, 예쁜 태일러... 아니, 앨리샤, 친절한 지젤리 씨, 새롭고 편리한 기구들... 얼마나 좋아...! 절대 돌아가고 싶은 마음 없다. 1퍼센트도. 아니... 0.5퍼센트 정도..?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서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