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발자취의 한 시점, 그 남자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소식이 적힌 메일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민은 메일을 읽으며 맥주 한 모금 넘겼다. 의자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온사인 불빛이 반짝이는 뉴욕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민아는 언니 승아가 죽은 뒤, 한 스님을 따라 미국으로 넘어왔다. 텍사스 인근에 있는 절에서 뉴욕대학교 교수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 도시 뉴욕에서 대학교를 나오고 대학원을 나왔다. L그룹 막내아들 서동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첫사랑은 치명적이라고. 순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아무것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첫 발자국 내미는 것처럼 깨끗한 기억이라고. 민도 그 첫사랑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실패한 첫사랑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버려지지도 버릴 수도 없기에 그저 다른 이름으로 가슴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민은 살아 있다면 승아의 삶이 됐을 민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 시점 어딘가에 있었다.
“사장님, 서동현 씨 도착했습니다.”
“네, 모셔요.”
민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탁자에는 맥주 2캔과 양주 1병, 치즈와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동현과 어떤 말을 할지 아직 판단이 안 선다. 그저 민아가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서동현이 그 키를 갖고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서동현입니다.”
“네,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김비서가 안내한 서동현이 거실로 들어섰다. 민이 서동현에게 자리를 안내하자, 김비서는 거실에서 나갔다. 민은 서동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끔하고 깨끗한 얼굴이다. 한없이 밝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저 어리지도 지긋하지도 않을 정도의 딱 그 나이로 보였다. 머리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스포츠머리. 면바지에 폴로 티셔츠.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고가 시계를 찼을 뿐 특이한 점은 없었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우선 무작정 연락드렸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뵙자고 한 이유는 정민아 때문입니다.”
민의 입에서 ‘정민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서동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동현은 무슨 얘기든 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CV 그룹 사장님께서 정민아에 대해 왜 저에게…?”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L 그룹 막내아들인 서동현 씨가 아무 것도 아닌 정민아를 이 바닥에 들여 놓았다는 소문이 무성하던데. 무슨 이유에서 왜 그 아이를 이 험하디 험한 정재계 바닥에 들여 놓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민은 맥주 한 캔을 따 서동현 앞에 놓았다. 양주잔에 양주도 따라놓았다. 서동현은 맥주 캔을 들었다. 서동현은 민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한 눈빛이다.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라 눈을 더 이상 맞추고 있을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강 사장님은 어디까지… 얼만큼… 알고 물으시는 건가요?”
“추측만 할 뿐 어떤 것도 알지는 못 합니다.”
민은 서동현의 눈에서 L 그룹 회장과 같이 있는 서동현을 보았다. 대강당 끝자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서동현에게 닿았다. 서동현에게 닿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L 그룹 회장은 그 자리에서 “회사 지분의 10% 서동현에게 양도한다."라고 했기 때문. 또렷이 보였다. 서동현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 막내아들이면서 저렇게 자신감이 없는 것을 보면 집안의 영향 혹은 성취감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제가 그 어떤 것도 말씀드리기 어렵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말씀하시게 될 겁니다. 오늘 얘기하기 어렵다면 그저 술 한 잔 하고 가시죠. 오늘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건 아닙니다.”
민은 양주 한 모금을 마시고,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긴 야경이 참 좋습니다. 뉴욕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요. 전 어렸을 때 네온사인이 아닌 바다를 보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촌스럽고 투박합니다. 오늘 서동현 씨를 당황하게 한 것도 제 성격이 그래서 일겁니다. 서동현 씨를 취조하거나 나무 나려고 부른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잠시 후 L 그룹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김비서와 함께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동현과 약속된 시간은 1시간이었다. 1시간이 지났나 보다. 동현은 민의 뒷모습을 보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사람의 뒷모습이 서늘했다. 언젠가 그 서늘한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동현아, 난 성공하고 싶다. 너는 날 도와줄 수 있니?’ 대학원을 졸업하고 민아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동현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민아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서동현이 민에게 질문을 하자, 서동현의 비서와 김비서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서동현은 뭔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 그와 민아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졌다. 민아가 성공하고 싶다면서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던 간절함의 이유를 저 사람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아는… 제가 사랑한 여자의 동생입니다.”
민은 미국으로 올 때 결심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CV 그룹을 맡아야겠다는 것과 민아를 자신과 엮지 않는 것. 그녀는 승아가 아니니까 승아와 그녀를 같은 존재로 보지 말아야 했다. 다만, 승아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 이상 하지 못 했던 것을 민아에게 최선을 다해 지원할 생각이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마음을 갖게 된 동지 윤이 형제가 된 것처럼.
“민아한테 언니가 있었습니까? 전 민아와 7년을 알고 지냈지만 민아의 가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민아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제가 답은 드린 것 같은데 그럼 저도 다시 묻겠습니다. 왜 이 바닥에 민아를 들였습니까?”
서동현은 맥주 한 캔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맥주 캔을 뜯었다.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민아는 책상 서랍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서동현 앞에 내려놓았다. 서동현은 그 문서를 보자, 얼굴이 질렸고 손이 떨렸다. 민아가 CV 그룹 내 정보를 서동현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문서 내용과 동일한 문서였다.
“다시 묻겠습니다. 민아를 왜 이 바닥에 들였습니까?”
민은 떨리는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서동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가 하는 말이 민아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말을 해야 내가 민아를 돕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서동현은 고개를 들어 민을 쳐다보았다. 강민이라는 사람이 CV 사장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이 바닥은 소문이 빨랐다. 사람들의 움직임만 지켜봐도 정치나 경제가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었다. 경영에는 관심 없어 의사를 한다던 사람이 갑자기 경영을 하겠다고 선포 했을 때 사람들은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서동현은 그 사람의 갑작스런 물음과 행동에 그가 생각보다 큰 목적을 갖고 이 바닥에 들어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를… 돕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저 허물만 좋은 재벌 자재입니다. 제가 가진 허물로 민아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이쪽에 발을 들여 지인을 늘려가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정재계 인사들에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민아를 소개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공식적인 자리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
“예를 들면 술자리 같은 비공식적인 자리?”
민은 창밖을 향했던 몸을 소파 쪽으로 돌려 서동현을 바라보았다. 서동현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민은 그대로 서동현의 멱살을 잡아 세웠다.
“그 방법은 안 되는 거 아닌가? 민아가 어떤 마음으로 너한테 부탁했는지 몰라? 술자리에서 몇 마디 거드는 거라면 너한테 부탁하지 않았겠지! 다른 방법을 찾아서 도왔어야지!”
동현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숨만 쉬었다. 비겁하지는 말자고 했던 민아와의 다짐이 누군가의 앞에서 처절히 무너져 내리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제겐… 최선이었습니다.”
“최선이라는 핑계 대지 마! 그런 자리 만들어 준 대가로 회사 문서까지 빼돌리게 해놓고 최선?”
서동현은 민을 쳐다보았다. 민은 그대로 서동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소리에 서동현 비서와 김비서가 거실로 들어왔다. 서동현 비서가 서동현에게 다가서려 하자, 서동현은 손을 저었다. 비서진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민은 서동현의 멱살을 잡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서류에 대해 몰랐을 것 같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다 모른 척 넘어간 것뿐이라고! 알아들어?”
민은 서동현을 다시 한 대 때리려다가 쥐었던 주먹을 내리고 서동현을 소파 쪽으로 풀어냈다. 민은 머리를 깊게 쓸어내렸다. 답답한 머리를 여러 번 쓸어내렸다. ‘정민아 씨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일주일 전부터 회사로 정상 출근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별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오전 10시에 출근에 오후 3시에 퇴근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늦게까지 야근하셨습니다. 회사 소등해야 한다고 얼른 퇴근하시라 말씀드렸더니 사장님을 만날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사장님은 현재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 만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엊그제도 사장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잘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일 다시 메일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버지 비서인 김비서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민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메일은 끊을 수 없었다. 메일로 그녀의 소식을 받는 건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걱정되고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제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어리석은 방법으로 민아를… 힘들게… 했을 수도 있다는 거… 사장님을 만나게 하는 방법부터… 처음부터 모든 게 다…”
민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무슨 말이지? 나를 만나게 하는…방법?"
“민아는 사장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회사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사장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면접 자리뿐이라고 민아에게 CV 그룹 면접을 추천했습니다.”
* * *
뉴욕의 거리는 화려했다. 민은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지금 상황에 20대였다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걸었을 길이다. 뉴욕에서 대학생활을 했을 무렵, 이 거리 어디쯤에서 민아를 스쳐 보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의미가 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누군가는 의미 없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테니. 김춘수 작가는 그 의미를 ‘꽃’에 비유했다. 승아라는 이름을 알기 전까지 그 아인 ‘분홍색 꽃신’이었다. 이름을 알고 부르고 부터는 분홍색 꽃신을 신은 수많은 사람이 아닌 단 한 명의 ‘승아’가 되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없다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 승아가 죽지 않았다면 승아와의 사랑이 영원했을까. 절을 떠나고 나서 승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다시 만났다면 그래서 연인이 되었다면, 안 싸우고 행복했을까. 마음이 안 맞아 싸우고 헤어지지는 않았을까. 결국, 수많은 연인처럼 의미 없이 헤어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전에, 그 어떤 것을 해보기도 전에 승아가 떠났다. 그때와 연관된 모든 것을 놓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꽃’이었던 승아를 기억하는 어린 강 민이 자꾸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