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와 그녀의 거리
민이 ‘정민아’라 말하는 순간, 윤은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보는 중이야. 정민아가 어디 한 둘이야? 기다려봐. 아직 확실한 건 없어.”
민은 말없이 윤을 쳐다보았다. 민의 굳은 표정에 그제 서야 윤의 표정도 달라졌다. 예상 못했던 게 아니다.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정민아에게서 승아의 모습을 봤다. 바로 어제만 해도 정민아 목에 걸린 펜던트 이니셜을 떠올라 서계장님께 정민아라는 이름 쪽으로 조사해 달라고 얘기 해놓았었다. 그 순간 왜 정민아의 팬던트가 떠올랐을까. 어쩌면 승아 동생은 아주 찾기 어려운 곳에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민과 윤의 마음에 있는 승아의 모습처럼 나타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오늘 승아 납골당 다녀왔다.”
“그런데 가보니까 정민아씨 언니가 승아였다는 거지? 박 씨 보살님한테 확인한 거야? 확실해?”
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민의 앞에 놓여있던 잔을 들어 남아있는 진토닉을 그대로 들이켰다. 이상하다. 안 좋은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좋은 예감은 늘 어긋났는데.
“승아가… 승아가 한 쪽 눈이 잘 안 보였단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만져봐야 할 정도로… 난… 그걸 지금 알았다, 윤아.”
윤은 민을 쳐다보다가 부엌에서 까뮤쥬빌레 한 병과 잔 하나를 더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민과 자신의 앞에 잔을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윤아, 난 날이 밝으면 몇몇 임원들이랑 서울로 올라갈 거다. 아버지가 회사를 비우셨고 임직원도 모두 내려와 있어서 회사에 들러 몇 가지 좀 둘러보고 병원으로 가려고. 여긴 다른 의사 보낼게.”
“원래 일정 그렇게 잡았던 거야? 정민아 때문 아니고?”
“나머지 하루는 잘 부탁한다.”
민은 윤의 물음에 말을 돌렸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과 윤이 각자의 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 밖에서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3355 모여 식당에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직원들도 있었고, 식사를 끝낸 직원들은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거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공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민은 그 소리에 잠깐 들었던 잠에서 깼다. 테라스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볕에 닿은 물결은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처럼 싱그러웠다. 직원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민아가 보인다. 웃기도 했다가 굳은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곳에 더 머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민은 인터폰을 들어 2층 윤의 방으로 눌렀다.
[응.]
“윤아, 나 지금 서울 간다.”
[알았어, 인마.]
민은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민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된 박상무와 김비서가 VIP룸 건물 앞에서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박상무는 민이 탈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었다. 바다를 보고 있던 민아가 임원들과 VIP 건물 앞에 서있는 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젯밤 자신과 절까지 동행한 사람이 맞을까. 자신을 품에 안고 토닥여 주던 사람이 맞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민이라는 사람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문득 아주 어렸을 적 얼핏 스쳐지나간 서늘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자랐다면 지금 저 사람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을까. 민이 차에 오르자 검은색 차 두 대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정문을 빠져 나갔다.
* * *
오후 2시, 민이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으로 들어서는 민을 보자 선미는 팔짱을 끼었다.
“워크숍 중 아니야? 갑자기 어떻게 왔어?”
“남 교수님은? 오셨다 가셨어?”
“아니, 지금 미팅 중이신 것 같은데?”
“그래.”
민은 곧장 미팅이 진행되는 소회의실 쪽으로 갔다. 선미는 그런 민과 동행했다.
“미팅 하는 데 가보려고?”
민은 대답 대신 소회의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민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회의실 안에 있던 5명의 시선이 민에게 모아졌다. 그 중 한 의사가 일어나 민에게 다가왔다.
“어, 어서와! 소개할게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안과 부분을 맡아줄 강민 닥터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들 아실 거고, 강 닥터 남소현 교수님과는 초면인가요?”
“아니요, 병원 복도에서 한 번 마주쳐 인사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민이 회의실에 들어설 때부터 굳은 표정이었던 남소현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굳은 표정은 좀체 펴치지 않았다. 무엇이 저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강 민입니다.”
“남소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하게 되어 영광이네요.”
민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자리에 앉았다. 남소현 교수에게는 그 전에 봤던 잔상과 동일한 잔상이 보였다. 바다를 보며 울고 있고, 그 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박씨 보살이 있었다. 그 잔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회의는 3~4시간 정도 지속되었고, ‘시신경과 뇌, 말초신경의 기능과 감각구조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프로젝트 초반을 다지는 회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남소현 교수는 현저히 대화가 줄었다. 다른 박사님들이 ‘오늘 남교수 컨디션이 안 좋아?’라고 여러 번 물을 정도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남소현 교수는 진박사님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민은 두 사람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민이 따라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비상구 계단 안으로 들어서자 남소현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프로젝트에 강민 닥터가 합류한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실력이 좋은 친구가 함께 하는 것은 이번 프로젝트에도 분명 좋은 일입니다.”
남소현 교수는 50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들이 죽고 혼자만의 긴 시간이 외롭고 힘들었는지 미간의 주름이 깊었다. 말하는 동안, 미간의 주름은 더 깊어졌다. 민은 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 그들이 이야기 하는 쪽으로 갔다. 민의 모습을 보자, 남소현 교수는 등을 돌렸다.
“본의 아니게 두 분의 대화를 듣게 됐습니다. 남교수님은 제가 합류하신 게 영 불쾌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죠. 괜히 엄한 박사님 난처하게 만들지 마시고.”
남소현 교수는 얼굴을 붉혔다.
“지금… 하려는 프로젝트는… 케이스를 많이…본 연륜 있는 박사님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남소현 교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제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거라면 전 세계에서 공증 받은 자료로 입증하겠습니다. 그게 아닌 이유라면 저랑 잠시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진박사님, 남교수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러게.”
진박사가 자리를 떠났다. 민과 남소현 교수는 1층에 있는 조용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 6시가 넘는 시간이라 퇴근하는 인파가 빠져 나가고, 조용한 편이었다. 차가 나오고 남소현 교수와 민은 25년 만에 마주 앉게 되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25년 만이죠.”
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남교수는 민을 쳐다보지 않은 채 연기가 올라오는 머그잔만 바라보았다.
“저를 피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남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도 아무런 말없이 커피 한 목음 마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민은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오늘은 이대로 남교수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는 본의 아니게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전… ”
남교수가 입을 떼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지나간 일입니다. 지나간 일은 세월 속에 묻어두시지요.”
“묻을 수 없는 기억도 있는 법입니다. 덮을 수 없는 기억도 있는 법입니다!
민의 어떤 말이 남교수를 자극했는지는 모르지만, 남교수의 주름이 깊어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교수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묘해서 덮고 싶으면 덮고 싶을수록 더 깊어졌다. 덮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 아프게 되새김질 되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은 일입니다.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민은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눈에서… 또 무엇을 봤습니까?”
어쩌면 남교수는 이것이 가장 궁금했는지도,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알 수 없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민은 되도록 솔직하게 말했다.
“혹시 지금 제 눈에서 본 잔상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민은 자리에 다시 앉아 남교수를 바라보았다. 남교수는 민의 눈을 피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민은 남교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25년 만에 자신을 만나,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그 순간의 고통이 떠올라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 외에 남교수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아픔의 순간은 있는 법이다. 민은 더 이상 그것을 아무렇게나 남발하는 8세 소년이 아니었다.
“잘 자랐네요. 아무 탈 없이. 아무 일없이. 충분히 힘들고 아팠을 텐데.”
민은 살짝 미소 지었다.
“저라고 왜 아무 탈이 없겠습니까. 그러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살아갈 뿐입니다.”
“의사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다음에 뵐 땐 좀 더 편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은 남교수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정문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선미가 민에게 다가왔다.
“너 전화가 왜 이렇게 안 돼?”
“왜 무슨 일 있어?”
그제 서야 민은 자신의 정장 자켓 안쪽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회의 들어가면서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 놓는 바람에 전화가 오는 줄 몰랐다. 부재중 통화 28통. 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윤과 아버지, 선미가 번갈아 있었다.
“강원도 리조트에서 사고가 있었나봐.”
“무슨 사고? 다친 사람은? 병원내부에 연락해서 방송이라도 하지!!!”
민의 목소리는 다소 높아졌다.
“부상자가 있어. 사망자는 없고. 생일축하파티 중에 화재사고가 있었대.”
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깊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네, 아버지.”
[연락이 안 되더구나. 무슨 일 있었니?]
“아닙니다. 회의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리조트에서 사고가 있는 모양이다. 얼른 가봐야겠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라고 한다. 얼른 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민은 차키를 들어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자꾸 빗나갔다. 다시 한 번 차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선미가 그 손을 잡고 차키를 뺏어 들었다.
“내가 운전할게.”
“내가 해! 넌 들어가.”
“너 이상해. 화재사고라 그러면 매번 이렇게 예민해서 불안해. 내가 할게.”
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차 키를 선미에게 맡겼다. 민이 화재사고에 예민한 건 사실이었다. 매번 화재사고라고 하면 늘 악몽 같은 그 날이 떠올랐다. 더구나 워크숍 중이다. 회사에서 생긴 화재사고라 더 예민해졌다. 민은 보조석에 앉아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차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윤아.”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사고는? 부상자는? 민아는?”
윤의 한숨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져왔다.
[정민아가 좀 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