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야누스 같은 여자
“나는 CV 직속 변호사나 할까봐.”
같은 시각, 윤도 차에서 내렸고 보디가드 4명이 윤을 감쌌다. 윤은 곧 민을 발견하고 다가오며 하는 말이었다.
“넌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 어려워?”
윤은 VVIP 룸에 들어서서야 민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민을 보자 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민이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민아, 승아는 정말 죽었다.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승아는 죽은 게 맞더라. 동생은 살아있는 것 같은데 행방불명이다.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민아. 너한테 얘기를 해야 하는데 얼굴 보면 이렇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피해 다녔다. 민이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윤은 얼른 민의 시선을 피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뻐. 무지 바뻐. 대한민국 공무원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얼굴도 못 볼 정도야?”
“바쁘다고. 국민의 혈세로 일하는 공무원이잖아.”
VVIP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사람들이라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하고 서로에게 들릴 정도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밝은 미소는 유지하며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아이컨텍은 하면서.
“그래, 알았다. 내가 낸 혈세로 일하는 공무원이니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해라.”
민도 윤의 둘러대는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른 회사 사장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외국 출장 관계로 윤과 민의 역할이 중요했다. 민의 시선 끝에 정민아 씨가 보였다. 경력사원 면접 때 같은 그룹이었던 장미희 씨도. 이민준 씨도 보인다. 민은 민아와 가벼운 눈인사를 하며 미소 지었다. 민은 민아를 잠깐이라도 보려고 화장실 쪽으로 손짓했다. 민은 화장실 앞에서 민아를 기다렸다. 일이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민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그 여자, 있던데?”
“누구?”
“그때 왜, CV 경력사원 면접 있다고 CV 정 이사도 빠지고, 우리 술 잔뜩 마시던 날 있잖아. 그 여자 술 진탕 취해서 2차 가고 그랬던 날.”
“아, 맞다, 맞다. 그럼 그 여자가 여기 직원이야?”
“그런 것 같던데? 그 여자 술도 잘 먹고, 진짜 잘 놀았잖아.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다던데. 미국에서 오고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마인드가 진짜 프리하다고 그랬었잖아.”
“아! 맞아. 맞아. 그래, 정민아! 이름이 정민아였다. 저기서 정장 입고 저렇게 서 있으니까 달라 보이던데?”
“그래, 정민아! 아마 청담동에 있는 무슨 바에서 L그룹 사장 만나서 이 바닥에 처음 발 딛었다 그러지, 아마?”
민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민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두 사람에게 주먹을 날렸다.
“누구? 정민아? 그래서 니들이 갖고 놀았어?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국회의원 두 명이었다. 민은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정민아가 아니라 생각하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정민아가 민이 아는 그 정민아였다. 화장실에서 나던 시끄러운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는지 직원 몇 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민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은 정민아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정민아는 입술을 꽉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은 민아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도 있고, 강민에게 물어봐야 할 것도 있다.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어. 대답해!”
정민아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꽉 깨물었다.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억울함과 답답함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노력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공을 드린 시간이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갈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 안다고 이상한 말 하던데, 당신은 몰라? 이 사람들 입방정이지? 그렇지?”
민이 다시 한 번 주먹을 쥐고 내리치려고 하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아는…사람들이에요.”
민은 쥐었던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민의 손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민은 있는 대로 차를 밟았다. 민은 사람을 늘 경계했다. 민아에게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던 건, 승아와 똑같은 잔상을 가진 여자라는 것과 강릉에서 자랐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승아와 너무 닮아 있어 단 하나도 제대로 짚어보지 못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경력사원 면접실에 들어왔을 때, 그녀를 쫓아간 건 자신이었다. 그 날 밤, 그녀의 집에 찾아간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목걸이를 찾으러 그녀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어 그게 더 답답했다. 그저 이 일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밤새도록 밟아 도착한 곳은 등명락가사. 온다고 온 곳이 등명락가사였다. 늘 그랬다.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이곳에 닿았다. 이곳은 늘 그랬듯 조용하고, 한적했다. 어렸을 적 자주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던 돌담에 앉았다. 멀리 집어등이 보인다. 민은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부재중전화 32건. 윤이 녀석이다. 걱정하고 있을 거다.
[야! 강민! 너 지금 어디야?]
신호음이 한 번도 채 울리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는 윤이었다.
“윤아.”
[그래, 지금 어디야?]
차분한 목소리로 민이 윤을 부르니 윤의 목소리도 두톤은 낮아졌다.
“내일 새벽에 갈 거야. 걱정 마.”
[오늘 일은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볼게.]
“그래, 고맙다. 네가 우려했던 일들이 자꾸 생기네.”
[나는 언제나 네 선택을 존중하지. 별 일 없을 거다.]
“그래, 그래야지.”
민은 윤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렇다. 그녀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민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민 입니다.”
[네]
그녀는 말을 잇지 않았다. 민은 그 침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은 늘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말하지 않는 것 속에 말함이 있다. 스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있다.
“내가 전화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것 같네요. 당신의 얘기를 들어보려고 전화했습니다.”
[이미… 다 들으셨습니다.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
민아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속일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까지 탄로 나면 지금까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덧붙일 게 없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민아 씨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들켜 굳이 변명하기 싫어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틀립니까?"
[그래요. 틀렸어요. 제가 한 말은 다 거짓입니다. 미국에 오래 있긴 했지만, 양부모님 같은 건 없어요. 그저 떠돌이 생활을 했을 뿐이에요. 강민이라는 사람한테는 강릉이라는 곳이 참 좋은 곳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텐 아픈 곳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딱 저예요. 더 이상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뭐든 그렇게 쉬워? 지금까지 그렇게 쉽게 쉽게 포기하고, 놓치고 후회하면서 지냈어요? 아니! 당신은 아직 나에게 말하지 않은 몇 가지 진실이 있어. 그걸 말해야 내가 당신을 놓습니다.”
[없어요, 그게 다예요. 그게 제 인생이에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알아봐야겠습니다. 당신이란 여자에 대해.”
민은 전화를 끊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일 이곳의 날씨는 맑을 건가보다. 하늘에 별이 참 많다. 저 많은 별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민은 어린 시절, 별을 보며 소설 소나기의 ‘소년’도 되었고, 알퐁스 도데 소설 별의 ‘목동’도 되었다. 그때는 뭐가 그리도 힘들었는지.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언제 왔니?”
주지스님이다. 주지스님은 절 내부에서 들리는 사람의 인기척에 민감했다. 민과 주지스님은 합장을 하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잠자리 봐놓으마. 쉬다 가거라.”
민은 돌아서는 주지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스님…. 얼마 전에 승아와 똑같은 잔상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지스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민을 향해 돌아섰다.
“잔상이 같다…? 아는 사람이냐?”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래.”
“스님, 지금 제 마음이… 그 사람한테 가는 중입니다.”
“힘들게다.”
“압니다.”
민은 마른 입술로 말을 이었다.
“제 잔상은… 그녀의 말과 맞지 않습니다.”
“두어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법.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지나가는 것이다. 억지로 맞춰지는 인연은 없다.”
스님은 다시 가던 길을 돌아보지 않고 가셨다. 민은 다시 휴대전화를 꺼냈다. 스님은 세속에 물들지 않아 도인같이 생활하시는 분이라 모든 것에 너그럽고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세속에 이미 많이 물들어 여느 속세인과 다르지 않은 자신은 뭔가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 비서님, 강민입니다.”
[네, 강닥터님. 말씀하세요.]
“정민아 씨에 대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알아봐 주세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미국에서는 뭘 했는지, 가족 관계, 친인척, 자주 만나는 사람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민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승아가 보고 싶다. 승아에 얽매여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25년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나, 아니 그럴 수 있나 바랐는데.
“승아야, 보고 싶다. 세상에 눈 뜨고 어머니 다음으로 본 여자가 넌데. 넌 어디 있니? 오늘은 더… 보고 싶다.”
민은 동이 트기 전에 절을 나섰다.
* * *
"강민! 강민! 들어왔어?”
윤은 민이 새벽에 도착한다는 말에 꼭두새벽부터 민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민은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절에서 30분 정도 쪽잠을 자고 바로 출발했다. 생각을 단순화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복잡한 머리로 서울에 올라왔다.
“일어났어?”
윤은 민의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살짝 걷었다.
“내려가.”
민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윤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영화 예약해 놨다.”
“윤아.”
“알아. 너 영화 볼 기분 아닌 거 나도 알아. 그래도 매주 했던 거잖아. 혼자 이런다고 답이 나오든? 안 나오지? 차라리 머리 비우고 다른 거 하면서 시간 보내자. 그게 나아.”
“넌 여자 없어?”
민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 윤 앞에 한 잔 내려놓고 자신의 것도 따랐다. 윤은 민이 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늘은 민에게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 있었으면 좋겠지?”
“그래, 당연하지.”
민과 윤은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영화관으로 들어서자 담당 매니저가 민과 윤을 안내했다. 담당 매니저는 매번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민에게 인사를 먼저 건넨다. 민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누군지 확인했다. 장미희. 경력사원 면접 때 마지막 그룹에 있던 사람. 정민아의 옆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이쪽으로 발령 났습니까?”
“일주일동안요. 새로 개봉한 영화 일반인 시사회 준비 때문에 마케팅 부서에서 지원 나와 있습니다. 정민아 씨랑, 이민준 씨랑 같이 와있어요.”
저쪽에서 정민아와 이민준이 걸어와 인사를 했다. 윤은 그들의 인사를 목례로 받았고, 민은 이민준과 간단한 눈인사를 했다.
“정민아 씨는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윤아, 10분만 있다 들어갈게.”
민은 정민아의 손을 끌고 그대로 VIP라운지 쪽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