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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평행관계
작가 : 헤르쯔
작품등록일 : 2017.6.25

특별한 능력을 가진 너, 그런 능력을 잡아먹는 나, 그런 우리가 연인.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평범한 인간인 노만, 노만의 신체조건과 그들이 가진 시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인 에이블, 그리고 그들의 능력을 중화하는 동시에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펜들럼. 손바닥 위 문양과 멈춰있는 손목의 시간은 각 종족을 상징한다. 서로의 파장이 맞는 에이블과 펜들럼이 만나면 안정적인 'M의 관계'가 형성되며, 그들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에이블의 시간을 비정상적으로 잡아먹는 암세포와 같은 새로운 종족 말레타가 나타나게 되고, 서로의 파장이 맞아 M의 관계가 형성되어도 시간 조절이 불가능하여 결국 둘 다 사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해버린다.
말레타를 배척하는 사회로 변해버린 현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던 말레타인 겨울은 어느 날, 손목에 새겨진 숫자가 바뀌어버린 것을 보게 되는데….

 
기계 인간
작성일 : 17-07-31 12:26     조회 : 256     추천 : 0     분량 : 9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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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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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게도 남자에겐 '당황'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 같다. 느닷없이 맞닿은 겨울의 입술마저도 저만의 여유로움으로 부드럽게 승화시키는 무서운 놈이다. 밀어냄 한번 없이 순순히 입맞춤을 받아낸 그가 반쯤 감은 눈을 떠 지그시 겨울의 눈을 응시했다. 여전히 두 입술이, 아니, 이제는 아랫입술이 먹잇감인 양 맹수에게 붙들려 알싸한 아픔을 빚어내고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다는 듯 일관된 표정으로 임했다.

 

 겨울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를 오래 마주하지 못했다. 제 속내가 훤히 그에게 들킬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겨울은 말려들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힘없이 넘어가 주는가 싶던 그가 오뚝이처럼 다시 다가와 겨울의 양손을 저지했다. 꽉 잡힌 손목에 풀지 못할 수갑이 채워진 기분이다.

 

 "놔."

 "더 세게."

 "뭐하자는 거야. 좀 놓지그래?"

 "놓길 바라는 애 힘이 이것밖에 안 돼? 힘줘. 더 세게 밀어 봐."

 

 뿌리칠 수 없는 악력에 손목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일치감치 포기했다. 겨울은 붙잡힌 채로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살짝만 뒤로 밀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품새에는 마치 밀릴만한 힘이 아닌데도 밀려준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역시 재수 없다. 에이블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짜증이 홍수인 양 밀려오는데 하는 짓마저도 미움투성이다. 언젠가 저 개 같은 여유로움이 화를 불러올 것이다. 오지 않는다면 겨울 스스로 만들어서라도 그에게 불바다를 선사할 것이다.

 

 "이래서 DNIPM 문턱에나 가 보겠어?"

 

 DNIPM 소리에 열이 확 뻗쳐 겨울은 줄곧 밀어대기만 했던 팔을 홧김에 당겨버렸다. 예상치 못한 반동에 남자가 그대로 겨울 쪽으로 넘어왔다. 당황했다. 의심의 여지 하나 없이 확신하건대, 아주 조금일지라도 남자는 겨울의 돌발행동에 놀란 것이 틀림없다. 겨울은 남자가 드러낸 찰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철통같던 남자가 드디어 허점을 보인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겨울은 심지어 짜릿하기까지 했다.

 

 열일곱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처음 갔던 백화점 입구에서 문 하나로 승강이를 벌이고 있던 때가 생각났다. 'PULL'이라는 뜻을 몰라 미련하게 밀어만 대다가 뒤따라온 영하가 제 앞으로 팔을 불쑥 내밀어 문을 겨울 쪽으로 잡아당겼었다. 쪽팔림은 고사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더 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신에 확신을 더해 바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답이 아니었을 때의 느낌.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를 이상한 배신감. 영하가 그때 뭐랬더라.

 

 "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영하를 미워해야 하는 겨울이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추억에 반쯤 잠겨 있고, 버릇처럼 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허름한 매트리스 위로 야릇한 자세를 취한 두 남녀가 공간을 차지한 채 멈춰 있다. 순간 대처 능력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에이블 아래에 깔린 말레타 신세를 면치는 못한다. 여전히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고, 남자는 겨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당긴 것도 그다지 좋은 능사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짜증 난다."

 "네가 이렇게나 약하다는 게?"

 "그냥…다."

 

 꾸역꾸역 때를 놓치지 않고 북받쳐 오르는 눈물마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꽉 잡힌 팔마저 주인인 제 마음대로 쓸 수 없어 답답하다.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눈치 없이 치고 나오는 눈물을 말리는데, 순간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겨울은 저도 모르는 사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와 얼굴을 마주한다. 다시 피할 수가 없다. 그가 내뱉는 열기마저도 '나 에이블이오. 그것도 알파.'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비단 겨울의 손목을 그러쥔 악력만이 아니라 남자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에이블의 기운에 맞서려 했던 자신이 미련해질 정도였다.

 

 남자는 멀뚱히 겨울을 내려다본다. 마치 넓디넓은 길을 짧고 작은 다리로 헤쳐 나가며 제집으로 돌아가려는 한 마리의 개미를 관찰하는 사람처럼. 열성 인자의 미개함을 구경하는 우월한 존재의 눈에 갇혀버린 듯하다.

 

 남자는 나른하게 내리깐 눈으로 계속해서 겨울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디 한 번 나를 재밌게 해 봐. 굳이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그의 의중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제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 준 것에 가까웠다. 겨울은 그의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제 몸뚱어리는 아니었나 보다. 기어코 눈가를 비집고 흘러나온 눈물이 보기 좋게 관자놀이 아래를 타고 흘러내린다. 남자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다. 남의 나약함을 즐기는 진정한 사디스트의 기질이 보인다.

 

 "미친놈들 참 많아."

 "……."

 "숫자 하나 팔에 박혀있다는 이유로, 손바닥에 나침반을 담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서슴 없이 칼 쑤셔 박는 사람 넘쳐나. 그게 네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세상이야."

 "……."

 "특히나 말레타라면 더더욱."

 "……."

 "숨만 쉬어도 잘못했다 할걸?"

 "…다 아는 소리 주절주절 늘어놓지 마."

 "알면 이렇게 멍청하게 행동 못 하지."

 "내 딴엔 똑똑하게 한 거야."

 "그럼 더 똑똑해져. 당장 내일 시체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게 짝이 없으니까."

 

 말하는 꼴이 꼭 다 잡은 제 먹잇감에게 다신 붙잡히지 말라 훈수를 두는 맹수 같았다. 짜증 섞인 말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다. 참 아이러니하다. 언제는 제가 먼저 죽일 것처럼 굴더니만, 또 돌아서면 덮고 자라며 이불을 가져다주질 않나. 남자의 속을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이제는 헛물켜는 짓거리인 것 같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겨울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참 이상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안정감을 느낀다. 남자도 저와 똑같은 상태일까? 가까이 붙어있는 둘의 손목엔 각기 다른 숫자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겨울의 눈에는 방금 막 데칼코마니를 끝낸 도화지의 양면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아 보인다. 빌어먹을 M의 관계가 지금 같은 때에도 눈치 없이 끈끈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에 열중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지던 찰나, 겨울은 손목에 닿는 무언가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네 멍청함의 일부는 내가 거두어 갈게."

 "……."

 "그러니 앞으로는 나의 M에 걸맞은 똑똑함을 선보여 봐."

 "……."

 "기대하고 있을게."

 

 가시 돋친 차가운 말투와는 다르게 닿았던 입술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종잡을 수 없는 미친 놈. 겨울이 생각하기를, 그에게서 안락을 느낀 자신도 어쩌면 미친년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새겨진 숫자 '14'가 그의 팔목 언저리에서 구김 없는 선명함을 선보이며 점차 멀어져간다. 괜스레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가시지 않은 열기를 털어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남자의 흔적이 쉽사리 사라질 생각을 않는다.

 

 M의 관계가 이렇게나 대단하다. 치가 떨릴 만큼 혐오스러운 에이블이다가도, 그런 자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실로 깊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끌린다.

 

 그렇게라도 합리화하고 싶다.

 

 **

 

 "잠 좀 자자, 좀. 할배라서 잠이 없는 거야?"

 "두 시밖에 안 됐는데?"

 "두 시나 됐는데."

 

 공감 능력이란 조금도 없는 선데이 놈이 겨울의 말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새벽이라 칭하기에도 모호한 오밤중에 다짜고짜 방문을 미친듯이 두드리던 놈이 뜬금없이 '나와, 계획 짜게.' 하는 말을 내뱉으며 겨우 잠이 든 겨울을 깨웠다. 심히 언짢았다.

 

 "피곤해 죽겠는데 갑자기 무슨 계획이야, 계획이."

 

 연이은 하품으로 의도치 않게 눈물까지 또르르 흘려버렸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노친네가 아니었다. 두 시인 게 그렇게나 슬퍼? 너는 이런 판국에 잠이 오나 봐? 하여튼. 약해빠져서. 겨울은 쉬지 않고 나불대는 목소리를 자연스레 흘려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눈물을 닦아낸다. 하품이 쉴 새 없이 나온다. 선데이의 1인용 안락의자 옆에 기역 모양으로 길게 뻗은 소파 위에 쓰러지듯 앉자 끝자락에 죽은 듯이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또 구시렁거린다.

 

 "요란하게도 앉는다."

 "이젠 앉는 거로도 뭐라 하네."

 "잔소리로 들렸어?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기분 나빴다니 다행이네."

 

 쌍욕을 내뱉으려다 저런 놈에겐 욕도 아깝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선 머리를 반쯤 기울여 턱을 괸 남자의 눈에도 역시나 피로가 가득하다.

 

 "그쪽도 피곤하신가 봐요?"

 "누가 전날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서 잠을 좀 설쳤거든."

 "제대로 못 주무셨다니 참 다행이네요."

 "하, 참."

 

 제 말에 제가 된통 당해버린 남자가 어이 없는 실소를 내뱉다 곧 이마 위로 손을 뻗었다. 손틈 새로 보이는 그의 감은 눈을 보고 있자니 또 묘한 측은지심이 밀려와 겨울은 선데이를 힘껏 노려보았다. 저 할배도 할배 나름이다마는, 겉보기엔 끽해봤자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도 깨나 나이를 지긋이 먹은 에이블일 테니까. 제때제때 숙면을 해줘야 나중에 탈이 없을 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기다란 유리데스크 앞에 종이를 쫙 펼쳐놓고서 박수를 두어 번 치던 선데이의 행동에 잡생각을 털어냈다.

 

 "자자. 족치기로 했으면 제대로 족쳐야지. 자는 시간도 아까워요, 이것들아."

 "제대로 족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잘 땐 좀 자면 안 될까? 나는 보시다시피 너 같은 에이블이 아니라서."

 "그런 걸로 핑계댈 거면 여기서 나가는 걸 추천할게."

 

 선데이는 웃으면서 촌철살인 날리는 실력이 참으로 남달랐다. 지긋한 연배가 뿜어대는 노련미엔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볍고 장난스럽게 짝이 없으면서도 말 그대로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파에이블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눈빛부터가 사뭇 평소때보다 진지 했으니까. 무어라 토를 달 수 없는 진중함에 겨울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며 토 달기를 멈추었다.

 

 앉으라는 눈짓을 대강 흘려보내던 선데이의 말에 겨울은 밀려오는 하품을 애써 삼키며 비어있는 소파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서류도 겨울 자신의 상태만큼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을 줄 알았으나 놀랍게도 삐져나온 곳 없이 정갈하게 줄지어 나열되어 있다. 에이블은 종이를 던져도 이렇게 완벽하게 던지나 싶었다.

 

 "우선 윈터 네가 DNIPM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대강 파악을 해야 개요를 잡던가 할 테니까.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해 봐."

 "에이블 정부."

 "…다야?"

 "피스메이커즈."

 "진심이냐."

 "DNIPM에 대해 말해 보라며. 그래서 말한 것뿐인데?"

 

 뻔뻔해 마지않던 태도에 선데이는 한동안 벙찐 얼굴로 멍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남자는 어쩌면 저들에겐 어처구니가 없을지도 몰랐을 대답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연신 하품을 해댔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인데. 겨울은 순식간에 치밀어오른 울화에 표정이 굳다가도 머릿속에서는 쉴 새 없이 DNIPM과 에이블을 배웠던 고등학교 시절의 수업을 기억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급을 겨우 면했던 그녀가 수확을 낼 만했던 거리는 딱히 없었지만.

 

 "XX. 답이 없다, 답이 없어. 해체하자, 오늘부로."

 "나 자러 간다?"

 

 선데이는 답답함에 얼굴을 구기고, 남자는 심각한 상황에서 눈치 없는 말을 잘도 꺼낸다. 정말 눈칫머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얄미워 맞기 싫은 예방접종 주사를 맞아 주인에게 토라진 강아지처럼 있었더니 남자가 결국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몸을 고쳐 앉는다. 보기 좋게 꼰 다리를 겨울 쪽으로 향하게 둔 그가 덩달아 팔짱까지 끼고선 여전히 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엔 이제 조금 무뎌진 것 같다.

 

 "르얀에 자치구역이 총 아홉 개인 건 알고 있지?"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네."

 

 남자는 친히 눈높이 교육에 앞장서 주기라도 하려는 양 겨울이 발 디디고 서 있는 나라의 기본적인 정보부터 입을 떼기 시작했다. 다만 그 눈높이가 여섯 살짜리 유치원생 수준인 것이 문제였지.

 

 "A 구역부터 I 구역까지 분류된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어. 르얀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것도, 구역이 나뉘고 자치기관이 생겨난 것도 그렇게 긴 역사를 거친 건 아니니까."

 "7~800년이 에이블한테는 꽤 짧나 봐?"

 "…길지. 너무 긴 시간이지…."

 

 남자는 잠시 사색에 잠긴 듯 싶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신인류의 등장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강대국을 일으켜 세운 곳이 이곳이고, 그 모든 것들의 중심이 바로 DNIPM이라는 게 핵심이니까."

 

 여태껏 알려진 전 세계 종족 중 가장 굳건한 시스템을 유지해 온 르얀과 그곳의 핵심인 DNIPM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관이었다. 에이블의 성지이자 문명의 발전을 최단시간 내에 가장 최고조로 이룩한 곳. 낙원이라는 뜻의 르얀은 수 세기 전 존재한 전(前) 지구의 발달한 문화에 근접한 나라라고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남자의 말대로 체계적인 시스템과 과학의 발전, 첨단 시설이 완비된 르얀은 정보국의 관리하에 일정 비율의 에이블과 노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한다. 그들 위에 군림한 자들이 바로 DNIPM인 것이다.

 

 "DNIPM에 속한 일원은 많아. 실력 있는 에이블은 물론이고 노만의 주요 인사급들까지 세어본다면 아마 C 구역까지 합한 인구수는 가뿐히 넘을 거야. 중요한 건, 그들을 통제하는 소수의 알파지."

 "저번에 얼핏 말한 거로는 알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안 했어?"

 "그래. 지금 내가 아는 DNIPM의 알파는 영하를 포함해서 총 넷밖에 없어. 그들의 수장이 선우해진이라는 ㄴ,"

 "그 개새끼 이름은 되도록 꺼내지 말자."

 

 가로채듯 남자의 말을 끊어버린 선데이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낮게 대답했다. 애써 지어낸 억지스러운 미소에 바라보는 상대방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선우해진이라면 아무리 에이블에 무지한 자라도 안다. 현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정부와 비등한 협회까지 꽉 잡고 있는 르얀의 일인자인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 박혀있었으니까. 거기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꽤 다양했다. 가령,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가장 최초의 알파에이블이라던가, 수려한 외모가 미디어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막대한 규모의 지지자들을 얻어냈다던가, 하는 별의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위상만은 그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르얀의 막대한 인구를 통제하고 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부터가 보통 에이블이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많이…강하겠지?"

 "미친놈이야, 그냥."

 

 그냥, 존나게 미친놈. 선데이가 중얼거리듯 먹어 드는 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것을 잃고 길가에 나앉은 부랑자의 눈빛도 지금 선데이의 것보다 한참은 모자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상대적인 감정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했지만…. 실의에 찬 선데이의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와 선우해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간다.

 

 겨울 자신의 계획은 허황을 넘어선 미련함 그 자체라는 것을.

 

 **

 

 겨울은 도저히 넘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고서의 책장을 팔랑이며 멍하니 눈만 깜빡인다. 방에서 읽다가는 그대로 꿈나라로 갈 게 눈에 훤하다 싶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어째 피로가 더 심해지는 게, 생전 들리지도 않던 환청까지 들리는 기분이다.

 

 '선우해진을 이겨야 해. 네가 무너뜨려야 해. 그 대단한 알파에이블을 네가 대적해야 해.'

 

 시끄럽게 조잘대는 목소리의 출처가 겨울 자신임을 알면서도 통제할 수가 없어 내리 한숨만 쉬었다.

 

 르얀과 DNIPM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으라는 충고하에 영감한테서 잔소리와 함께 받아낸 책이 여러모로 버겁게 느껴진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아프게 누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 외에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천하 태평하게 잠을 잘 수만은 없었다. 조금 전, 회의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운 만남 뒤부터, 정확히는 알파에이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걷잡을 수도 없이 제 몸집을 불려 나가 겨울을 억눌러온 뒤부터 잠을 잘 수가 없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

 

 반쯤 넋을 놓아버렸다. 앞뒤로 흔들 때마다 들리는 종이 소리를 음악 삼을 만큼 꽤 깊이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이제 막 르얀의 발전을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려던 책 위의 검은 글씨에 눈을 고정한 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길고 어려운 문맥에서도 다행히 겨울의 시선을 사로잡는 문단이 있기는 했다.

 

 『초결정 합금을 원료로 매우 정교하고 까다로운 공정과정을 거쳐 인체의 뼈와 가장 흡사한 구조의 부품을 만들어낸다.』

 

 몸 일부분이 기계로 이루어진 인간. 강한 힘과 더한 신체 능력을 위해 제 팔다리를 자르는 것쯤이야 하나의 당연한 의식쯤으로 생각하는 괴물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 크루세이더의 나라가 그러했다.

 

 르얀 외에 알려진 몇 없는 나라 중 꼴에 문명에 가장 근접한 나라랍시고 르얀 바로 뒷부분에 나오는 게 참 웃겼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 외에는 문명보다 문맹에 가까운 곳이면서. 게다가 괴팍하기로는 황야의 사냥꾼들보다도 더한 악질이었다.

 

 [무슨 상처냐고. 솔직하게 말해, 영하야. 다 엎어버리기 전에.]

 [무슨 말을 꺼내도 다 거짓말인 줄 알 것 같은데.]

 [분명히 출장 다녀온다고 그랬잖아. 도대체 어느 미친 회사가 사람 몸뚱어리에 구멍 뚫리게 하는 곳으로 출장을 보내냐고!!]

 [만났거든. 크루세이더.]

 […뭐?]

 [상체가 온통 기계로 이루어져 있었어. 길 가다가 봉변 맞은 거지.]

 [크루세이더…? 기계 인간이 정말 존재했던 거야?]

 

 싫다. 겨울에게는 생전 만나보지도 못한 크루세이더라는 존재가 이미 무자비하고 잔혹한 자로 낙인 찍혔던 터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영하의 덜 아문 옆구리만 생각하면 목 뒤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윈터야."

 "아, 놀랐잖아."

 

 사색이라 쓰고 추억이라 읽는 생각의 파도에서 불현듯 겨울을 잡아 끌어낸 것은 진지함으로 범벅이 된 영감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선데이는 웬 생뚱맞은 안경을 쓰고 있다. 시력도 좋은 주제에 왜 쓰고 있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보려고 해도 목소리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에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선데이는 동그랗고 테가 두꺼운 안경을 콧잔등에 얹은 채로 멍하니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니, 시선이라기보다는 정신을 집중한 듯해 보였다. 이따금 약하게 터져 나오는 탄식에 이유 모를 불안이 커질 즈음, 양쪽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 때문에 어깨가 말려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선데이가 이내 한 손을 빼내어 안경 코다리를 들어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선데이의 이상 행동에 답답함이 겨울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왜. 뭔데 그래."

 "아…미친놈."

 "뭐냐고."

 "TV."

 

 TV라고 소리 낸 주인공은 마치 영감과 약속이라도 한 듯 짜 맞춰 방에서 기어 나온 이연호였다.

 명령조 같은 그의 말이 있자마자 벽난로 위에 붙어있던 커다란 대형 스크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돌연 빛을 내며 화면을 띄웠다. 때마침 아침을 알리는 뉴스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던 찰나였다. 평소라면 그랬어야 했다. 아침 날씨, 돈줄 조이기, 툭하면 나오는 말레타 검열 프로젝트 개정안이라든지.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뭐야, 저게…?”

 “쳐 미친놈. 진짜 쓰레기 같은 놈.”

 “팀, 해체하는 게 나을지도.”

 

 화면 하단에는 시선을 앗아가는 강렬하고도 위압적인 붉은 칸 위로 믿을 수 없는 내용의 헤드라인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 금일 크루세이더 측과 평화협정 개시 합의】

 

 숨이 턱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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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상한 팀 2017 / 7 / 31 258 0 10340   
6 배신 2017 / 7 / 31 278 0 7507   
5 애증 2017 / 7 / 12 270 0 7373   
4 믿고싶지 않은 (2) 2017 / 7 / 10 262 0 6877   
3 믿고싶지 않은 (1) 2017 / 7 / 10 261 0 7444   
2 피할 수 없는 2017 / 7 / 7 287 0 11536   
1 변화의 시작 2017 / 7 / 6 470 0 6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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