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따뜻하게 웃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면 돼.”
시우는 전문지식이 풍부하지만 식견이 좁다. 오직 환자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고 이쪽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
연회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정오가 되어도 연회를 주최하는 주인인 18황자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본래대로라면 그는 이제 손을 씻고 창궁원을 방문해야 한다. 가만히 있지 못하며 틱 증상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스트레스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경련이라도 일으킬까 걱정이 된 소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잠시 호위에게 이르고 창궁원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흑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칠황자께 무례한 일이다.”
황제가 보낸 사신은 황자의 한 배 형제였다. 일곱 번째 황자라고 하였다. 지위가 높은 큰형이 교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 잔치 자리에서 자리를 뜨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다. 소희는 잠시 고민했다.
“황자께서 잠시 몸이 좋지 않아 쉰다고 하시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까?”
“창궁원에 가는 것이 그렇게 급한 일인가? 총관이 대신 식물을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예절에 대해서는 흑노가 자신보다 훨씬 잘 아는 것을 안다. 소희는 조심스레 흑노에게 속삭였다.
“이미 이틀간 일과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창궁원에 갈 시간입니다. 적단과 흑단을 돌보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소희는 힐긋 소군주가 있는 방향을 눈짓했다. 정말로 피곤할 때에만 나오는, 왼쪽 눈꺼풀을 실룩이는 틱 증상까지 나타난 상태였다. 양쪽 어깨를 계속해서 들썩이는 것은 이미 첫날부터 보여졌던 증상이다. 황자는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창궁원에 가지 않으면 곤란하게 됩니다.”
흑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린 황자의 뒤로 걸어갔다. 황자의 귀에 무어라 속삭인 후, 소년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연회의 상석에 앉아 있던 친형에게 다가가 예를 차린 후 자리를 떴다.
소희는 그 뒤를 좇았다.
###
흑의위가 내미는 황금 지팡이를 받아든 채 소군주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이미 두달 전에 지팡이를 짚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었으나 지금 퇴보하였다. 반년간 고생한 보람이 사흘만에 사라지다니! 소희는 안타까웠다.
희귀한 자색 작약의 꽃잎이 거의 다 떨어진 것을 본 소군주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의 형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왔는데 말 중 한 마리가 나무를 건드려 꽃잎이 바람에 날리게 되었다.
소년은 지나치게 일찍 꽃이 진 꽃나무를 보고 성을 냈다. 격렬한 틱이 어깨부터 시작해서 파도처럼 전신을 타고 움직였다. 입을 크게 벌리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충실한 흑노가 옆에서 소년 군주를 부축해 주었다.
“조심하십시오, 소군주.”
“작약 꽃이 졌다. 보름은 더 있어야 질 꽃인데.”
“창궁원에 오랜만에 오시지요? 자단 소엽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황자는 자단 소엽을 특히 좋아했다. 그 자그마한 분재를 매우 아껴 몇 시간이고 바라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지손톱만한 먼지털이개를 특별히 만들게 하여 작은 잎에 쌓이는 먼지를 털곤 했다.
그가 처음에 천하의 영물이라며 소희에게 소개했던 손가락 한 마디만한 분재다.
“보고 싶다.”
“그럼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소희는 능숙하게 황자를 달래었다. 항상 정통적으로 규칙을 고집하는 흑노가 제일 못하는 일이었다. 규칙보다 먼저 황자가 제일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여 그것을 이루게끔 돕는다. 쉽지 않은가? 이제 이것은 시우가 지시해주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것이다.
창궁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중정을 지나 계수나무를 지나자 바로 있다. 소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본래 다섯 개의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어야 할, 창궁원의 쪽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고리가 풀린 채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흑노가 자연스럽게 먼저 한 걸음을 옮기며 허리의 검집에 손을 댔다.
“임 의원. 소군주를 모시고 뒤로 물러나라.”
소희는 황자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절대로 당황해선 안 돼. 침착하게 말해. 저 안에 자객이 있을 수도 있어.’
아까까지 패닉에 휩싸여서 불행한 전망만을 이야기하던 시우가 다시 새로운 위협을 예고한다. 이제는 좋지 않은 예언만을 예기하는 마녀, 카산드라처럼 느껴졌다. 소희는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저와 함께 제 별채 앞의 정원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내 자단 소엽을 보고 싶다.”
“전부터 말씀드렸던 금붕어입니다. 아주 작은 금붕어가 조금 작은 연못안에서 헤엄치고 있지요. 잠시 보시기에 좋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듯 부드럽게 말하며 강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너를 존중하는 것이다.
“제가 연꽃의 꽃봉오리를 보여 드릴게요. 금붕어의 곁에 아주 작은 연꽃이 있습니다. 일 주일 정도 후면 만연히 개화할 겁니다.”
식물은 좋다. 자단이 더 좋지만 연꽃도 한 번쯤은 보는 것도 좋겠다.
대연회에는 여러 문파의 손님과 문벌이 높은 손님들이 많이 와 있다. 낯선 사람이 계속해서 다가오며 술을 권하는 연회석 자리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소군주의 틱 증상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소희는 최대한 서두르지 않으며 황자를 인도했다. 오동나무와 매화나무를 지나서 계수나무 앞에 서면 바로 그곳이 소희의 숙소다.
흑노는 따라오지 않았다. 창궁원 쪽에서는 불길하게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평소대로라면 서너 명의 흑의위가 따라다닐 텐데 오늘따라 인원도 적었다. 불안한 예감에 소희는 몸을 살짝 떨었다.
오직 제 방만이 안전할 것처럼 느껴졌다.
“네, 소군주님. 이쪽으로 조금씩만 더 오시면 됩니다.”
평소 가던 길이 아니라서 그런지 걸음이 느렸다. 18황자는 주변을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심겨져 있는 꽃과 나무를 살폈다. 소희는 창궁원에서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금속이 다른 금속을 튕겨내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ㅡ챙!!
흑노는 검술의 고수라고 했다. 무술 또한 뛰어나다고 들었다. 만일 흑노가 지면 어떡하지? 황자가 다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소희야. 네 방으로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시우가 속삭이는 말이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다. 황자는 걸음이 느렸고 태평하기만 했다. 오빠였으면 손목을 잡고 죽어라고 뛰었을텐데 황자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창궁원과 네 방은 너무 가까워.’
시우가 경고했다. 소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진에게 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시화와 초목에 재능과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적이 간세를 숨겨두었던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한 명을 발견해서 제거했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 짧은 평온은 이토록 깨지기 쉬운 것이었나.
‘차라리 연회석으로 돌아가자.’
시우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빨리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소희는 그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복면을 한 사내들 앞에 서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계집애가 그 꼬마 의원인가?”
“야들야들하게 생긴 것이 입맛 돋구는구만.”
음탕한 말을 지껄이며 다가오는 사내 둘 앞에서 소희는 이를 악물었다. 뒤에 선 황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황금 지팡이가 바닥의 반석을 때려 땅 하는 소리가 났다.
“다가오지 마세요. 이분은 황자님입니다. 예의를 지켜요!”
소희는 양팔을 벌리고 황자의 앞에 섰다.
‘미안해. 약속 지킬게. 내가 너랑 같이 갈게.’
시우가 주절거리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 환자야. 내 마지막 환자야. 지켜주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널 잃을 순 없어. 소희야! 혼자 도망쳐!’
사실은 들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진은 그냥 환자가 아니다. 정신 장애가 있는 십대 청소년이었다. 모두 그를 이용하고만 싶어하는 세상에서 너무 맑고 순진한 애.
소희는 그런 애를 혼자 방치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마! 나는 의원이야. 극독을 지니고 있으니 너희들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야!”
짜랑한 목소리가 새되게 울려퍼졌다. 위엄있고 당당하게 외치려고 했으나 어린애의 투정처럼 들렸다.
‘소희야. 제발! 여기서 죽어도 소용 없어! 제발!’
소희는 품속에서 남색 비단으로 싼 보자기를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그건 아까 잔치에서 얻은 과자 조각이잖아. 그런 어린애 같은 짓으로 어떻게 칼든 장정을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