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벌써 재롱을 다 피운 건가?”
라스푸틴의 얼굴엔 옅은 비웃음과 과장된 지루함이, 인호의 얼굴엔 식은땀에 젖어가는 희박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럴 리가.”
교전 방침을 중근거리 사격에서 초근거리 연속, 무차별 기습사격으로 변경. 교전거리는 제로에서 오 미터. 실내 전투에서나 감안해야 할 극단적인 근거리였다.
왼손의 유탄발사기를 놓아버린 인호가 그 자리에 오른손과 같은 Rsh-12 돌격권총을 장비했다. 비웃음 띈 적의 얼굴을 날카롭게 직시한 것은 잠시 뿐, 곧장 행동으로 돌입했다.
양자간의 거리를 쾌속하게 주파하며 여섯 번의 경로 수정을 겪은 인호의 등 뒤로 한 발짝씩 늦은 여섯 개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호오?”
삽시간에 오 미터로 압축된 간격.
코앞이라고 해도 좋을 거리로 쇄도해오는 인호의 푸른 안광과, 그 안에 내재된 광폭한 적의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라스푸틴의 입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호기심 섞인 여유였다.
그리고 그 순간.
──────── !
두 정의 권총이 기관총에 버금가는 연사속도로, 부위를 가리지 않고 열 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지는 총구에서 뿜어져 눈앞을 자욱하게 덮은 연기를 뚫고 전진하던 인호의 눈에, 단 한순간 당혹감이 스쳤지만 곧 날카로운 적개심으로 전환됐다.
“놀란 표정조차 안 보여주는군. 기특하다고 해줄까.”
라스푸틴의 웃는 낯 앞을 가리고 있던 주먹이 펴지고, 그 아래로 열 개의 탄두가 맥없이 떨어졌다.
아무리 음속보다 느린 탄이라지만 일 초당 삼백 미터를 돌파하는 속도의 탄두였다. 그걸 쉽게 잡아내기 위해선 반응 속도가 어느 정도여야 할지, 탄두에 담긴 이천 줄(J)이상의 운동 에너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내구성이 어느 정도여야 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인호의 그런 급박한 사고와는 별개로, 그의 양 손은 서로 다른 생물의 그것처럼 각각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권총집에 꽂혀 있는 USP를 뽑아 쥐며, 오른손으로는 파지법을 변경해 Rsh-12를 망치처럼 휘두른다.
하지만 2.2 킬로그램의 망치는 강철을 강타한듯한 굉음을 터트리며 적의 왼손에 가로막혔다. 뽑혀 나온 USP역시 손목을 으스러트릴것만 같은 힘에 가로막혀 있었다.
“…….”
하지만 인호의 입술 틈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두 손이 결박됐다면 다리로, 그마저 막힌다면 이빨로 목덜미라도 씹어 뜯을, 그야말로 싸우는 개의 각오.
하지만 단순한 각오는 물리법칙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내지른 발차기가 라스푸틴의 복부에 꽂히기 직전, 인호의 전신에 투사된 반발력이 그를 멀찍이 튕겨낸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에게 걷어차인 공처럼 날아가는 그의 핏발선 눈이 멀쩡히 서있는 적의 신형을 쫒았다.
그 필사적인, 어쩌면 초인적인 노력의 뒤를 두 번의 총성이 뒤쫓았다.
두 발의 납탄이 반투명한 벽에 튕겨 나가며 내지르는 비명을 허망하게 흘려들으며 몇 바퀴인가를 거칠게 구르다 멈춘 인호의 귓가를 라스푸틴의 목소리가 긁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를 무시하고 귀 옆에서 말하는 듯 또렷한 목소리였다.
“처절하군. 그야말로 처절해. 그런 꼴로 아직도 일어서는 건가.”
“크으…….”
입에 고인 피와 신음을 뱉으면서도 비칠비칠 일어서는 인호를 보는 라스푸틴의 눈에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도 않고, 그만큼 사소한 듯한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군. 네놈, 어째서 ‘이곳에서’, ‘아직도’, ‘스스로’ 찌그러지지 않는 것이냐?”
이곳……? 스스로……?
그런 것이 당연한데 그리 되지 않는 듯한 어투였다.
“뭐라는 거야…….”
그 석연치 않은 말의 전술적 용도를 검토하던 인호는 곧 폐기하고는 자세를 바로 세웠다. 한 줄기 혈선이 아래로 그어진 파리한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효한 전술은 충분한 정보자산의 토대 위에 건설된다. 전투 이전, 혹은 전투 도중이라도 점차적으로 불안 요소를 제거해 나간다면 최종적으로는 어떤 뚜렷한 형상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이 곧 ‘유효한 전술’이었다.
“…….”
그리고 인호의, 공격성과 적대감이 거칠게 뒤섞인 눈에는 불확실하지만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전술행위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산송장’으로부터 얻은 교훈인 ‘기만’을 섞는다.
“뭐, 시간문제일 터다. 얼마든지 덤벼라.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만큼 달려들다가 지쳐 쓰러진 채 스스로의 무력을 통감해라.”
라스푸틴의 조소는 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도취적이고 오만한 성격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진득하고 불쾌한 조소.
방법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어려워 쉽게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성격’이라는 무형의 요소는 간혹 화력이나 기동력보다 크게 활용될 수 있었다.
“쿨럭…….”
선명하던 푸른빛이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 퀭한 눈이 라스푸틴을 향하고. 인호의 오른 손 안에 다시 한 번 XM-25유탄발사기가 자리 잡았다.
“음? 그건 방금 봤던 것 같은데? 한 번 더 해볼 생각인가?”
비아냥 섞인 목소리를 무시한 채 인호는 조용히 적을 겨눴다. 그의 왼손은 유탄발사기에 달린 몇 가지의 버튼을 힘겹게 조작하고 있었다.
“뭐든 좋지만 지루하게는 하지 말…….”
라스푸틴이 과장스런 몸짓으로 하품을 뱉으려던 때였다.
“……!”
시들어 가는 듯 보이던 인호의 안광이 다시금 타오르고, 두 발은 지면을 박차 인호의 거뭇거뭇한 신형을 앞으로 내던졌다.
[콜드 스틸 M1860 중기병 세이버(Cold Steel M1860 Heavy cavalry saber)]
“호오?”
시시각각 접근해오는 인호와 그의 왼손에서 형태를 갖추는 세이버를 쳐다보는 라스푸틴의 눈에 얄팍한 실소가 서렸다.
“그래, 그쪽이 차라리 살벌해 보이는군.”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도달한 검광엔 서슬 퍼런 살의가 담겨 있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은 무신경한 태도로 펼친 손바닥이었다.
중세 귀족들의 결투에서 볼법한 고상함이나 기품 따윈 일절 없지만, 그 대신 군용 교범의 공격성과 실전성, 그리고 무게가 담긴 검이었다. 그런 검을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간단히 막아낸 라스푸틴은 그대로 주먹을 쥐어 검신을 붙잡았다.
“……!”
하지만 마치 바이스에 넣고 조이기라도 한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검에 대한 당혹감의 시간은 ‘순간’의 이하였다. 냉각된 이성으로 ‘보험’을 들어 두며 곧이어 온 몸을 강타할 충격에 대비한다.
출처를 짐작하기 어려운 찰나간의 파공음 후, 두 번째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충격이 인호의 신형을 뒤로 떨쳐냈다.
지면에서 발이 떨어진 채 내팽개쳐지는 와중에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누르고 있던 인호가 오른손의 유탄발사기를 전방으로 지향했다. 터프하면서도 동시에 섬세한 그 유탄발사기는 곧이어 두 번의 폭음을 연달아 터트리며 두 발의 유탄을 토해냈다.
음속을 넘는 속도로 날아오는 두 탄두의 궤적을 간단히 읽어낸 라스푸틴은 떠오르는 웃음을 구태여 참지 않았다. 그 궤적은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머리 양 옆으로 빗겨 지나가고 있었다. 막을 필요도 없는 공격이었다.
“슬슬 제…….”
‘대로 쏘기가 어려운 모양이군.’이라는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양쪽 귀 부근에 도달한 두 발의 유탄이 아무것도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중에서 폭발한 탓이었다.
XM-25.
대 엄폐물 교전 시스템(Counter Defilade Target Engagement System)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반자동 유탄발사기는 내장된 레이저 거리 측정기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측정, 유탄에 폭발 거리 정보를 입력해 발사한 유탄을 원하는 위치에서 폭파할 수 있었다. 설령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라 하더라도.
‘무슨……!?’
라스푸틴은 눈앞으로 덮쳐오는 살상 파편지대의 사이로 인호의 신형을 볼 수 있었다.
양 발을 어깨보다 넓게 벌린 채 힘겹게 서있는 그에게선 위태로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왼 팔 만큼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져 단순해 보이는 기계 장치를 쥐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전체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팔에서는 어떤 준엄한 선고를 내리는 듯한 단호함이 풍기고 있었다.
“설치 방향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클레이모어는 항상 당신을 향하고 있다.”
영인호 식(式)의 지극히 건조한 농담.
피에 젖은 인호의 입술이 아슬아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달싹거렸다. 그리고 라스푸틴은 그제야 자신의 발 앞에 놓여 있던 상자를 발견했다.
M-18A1 ‘클레이모어’ 지향 지뢰.
도시락 통 정도의 크기에 칙칙한 초록색이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는 그 플라스틱 상자는 인호가 한손에 쥔 격발 스위치를 작동시키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폭발했다.
클레이모어에 내장된 칠백여개의 볼 베어링은 C4폭약의 통렬한 폭발에 떠밀려 음속의 세 배 속도로 순간 가속됐다. 살상거리 오십 미터, 살상각도 전방 백 이십 도의 강철 폭풍이 라스푸틴의 턱을 향해 휘몰아쳤다.
* * *
2차 세계대전 당시 쓰이던 길다란 총검 끝에는 변색된 심장이 내걸려 있었다.
유령 병사가 총검을 땅에 꽂아 발로 심장을 밟고 총을 들어 올리자 심장은 간단하게 빠져 홀로 지면에 남았다.
“이만하면 됐어.”
눈앞에서 움직이는 적이 사라지자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김한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와 함께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한 아흔 아홉 명의 유령 병사가 사라진 후, 주변에 남은 것은 피와 살점, 부서져서 굴러다니는 뼛조각뿐이었다.
“워, 이건 못 봐주겠구먼.”
참상(慘狀).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을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김한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이었다. 그 모습에서 고개를 저으며 내숭을 피운 김한철의 골전도 이어폰에 신경을 돌렸다. 들리는 상황을 보아하니 다른 쪽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김한철은 운동장 부근에서 피가 튀어 있지 않는 장소를 찾는데 어렵사리 성공 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반쯤 휴식 같은 사주경계 넘어갔다.
죽었다가 일어선 시체가 사람을 냅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인질극 같은 섬세하며 진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벌여대다니. 이상하긴 했지만 그는 함정이 아니었음에 일단 감사했다. 함정이라도 안에서부터 깨부수지 못할 건 없었지만.
- 6423호 차량이 빠져나가고 있다. 저게 마지막이다.
부청장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 3002호 전차장 뭐하는 놈이야? 왜 포탑에서 상반신 내밀고 춤을 추고 있어?
DOGS 조용준이 이상한걸 보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나 그놈 알아. 꽤 오래전에 같이 작전 했는데, 약간 정신이 이상한 놈이야.
역시나 DOSG대원인 박지건이 잘 안다는 듯 설명해주며 낄낄거렸다.
- 정신이 이상한 놈인데 SOG에 왜 남아 있어? 어, 이제 각기춤 춘다.
- 전차도 미친놈처럼 잘 타거든. 궁금하면 돌아가서 작년 작전 서류 뒤져봐. 저 자식은 저거 타고 고질라도 잡을걸.
- 고질라 좋아 해? 무슨 시리즈 봤는데?
- 아니 안 좋아해. 그냥 적당히 주워 섬겼어.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통해 진행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에 더해서,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비로소 한 숨 돌렸다는 여유도 읽을 수 있었다.
“흐아암.”
하품을 쩍쩍 해대며 적당히 흘려듣고 있던 김한철의 귓가에 플레임 베이스(Flame Base) 염윤정이 의문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 그런데 인호는 왜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