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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The Sky Is Filled With Clouds
작가 : ssssss
작품등록일 : 2017.7.30

여느 때처럼 구름이 가득한 영국 Norwich의 한 해변가. 그곳에는 어릴 적 불의의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한 소녀의 피아노 소리가 매일 울려 퍼진다.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슬픔에 빠져 살던 그녀는 15살이 되는 해, 희망을 찾으러 뉴욕으로 떠나는데… 수 년이 흐르고 여전히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구름 속에 있는 한 남자를 본다. 그녀는 환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도착한 날 저녁, 그녀의 집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The Present (Love) - 8화
작성일 : 17-07-30 20:07     조회 : 271     추천 : 1     분량 : 2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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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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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하루를 준비했다.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았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볼에 따뜻한 키스를 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는 그 키스를 매일 아침 잊지 않았다. 가끔씩 그녀가 그의 키스에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면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한 번 짓고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침을 준비했다. 비록 그의 아침은 그녀의 것보다는 맛이 떨어졌지만 나름 먹을만했다. 정성이라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갔으니까 말이다. 그와 그녀는 부부였다. 둘은 가게를 하나 장만해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바다 항구 앞 작은 음식점이었으나 그곳에는 그들의 믿음이 있었고 소망,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젊은 날 그 둘은 고향을 등지고 런던에서 서로 고생을 하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고생은 젊은날에 해보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는가. 처음에 그들은 각자 다른 대학교에서 공부를 할때 그는 글쓰기를, 그녀는 불어를 전공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열정을 가지고 공부했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두드러진 재능은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그 역시 대학교를 졸업하자 글쓰기는 취미생활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좀 더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실력을 닦아 나가고 싶었지만 수년 동안 아무도 그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자 스스로 한계라는 벽을 만들어 자신이 그리던 꿈을 서서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어에 대해서 수년 동안 공부했지만 나름 열심히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평판은 그저 그랬다. 그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얻은 것은 단지 프랑스의 역사와 불어에 대한 언어 장벽이 없어진 정도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평생직업이 되기에는 무리였고 돈이 되기에도 부족했다. 열정은 있었지만 특별이란 수식어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녀도 스스로 한계라는 보이지 않는 차가운 벽을 만들어 열정마저 식어버렸다. 차츰 그렇게 그들의 꿈은 멀어져갔으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왕 런던이라는 대도시에 나온 만큼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보고 싶었다. 소위 말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직업과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회사의 말단직으로, 그녀는 프랑스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 몇 년의 생활은 그들의 과거 대학 생활을 사치스럽게 느끼게끔 해주었다. 월급도 기쁨도 적었다. 매년 매달 매일의 생활이 그들의 꿈을, 그들의 젊음을 갉아 먹었다. 그는 매일 같이 일이 끝난 후 집 근처의 펍에가서 맥주를 마시거나 매 주말 클럽에 가서 세상의 고난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했다. 그나마 그녀는 피아노라는 새로운 취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매 주말 교회에 가서 헌신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허기진 삶을 달랬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믿음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어서,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데서 교회를 선택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런던이라는 공간에 지쳐버린채 마침내 현실을 직시했다. 먼저 지쳐버린 것은 그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에게 남아있는게 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런던에 오고, 이곳에 남아있던 세월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절망은 곧 우울증을 불러왔고 우울증은 곧 두려움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좌절에 빠진 날도, 직장을 잃은 날도,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바로 그 날도 세상은 똑같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평소와 똑같은 술집, 똑같은 가게들, 그리고 똑같은 교회가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을때 들어오십시오.’

 이미 한잔한 상태였기에 정신상태는 그리 맑지 않았지만 그는 교회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그 글씨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평소 그에게 이곳은 길에 장식된 인테리어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길에 난 잡초라도 움켜잡고 싶었다. 일을 구하지 못해서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이런 모습으로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무덤 앞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일날 그 교회에 나갔다. 비록 교회의 문지방을 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지만 그는 그곳에 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도 그때 런던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래도 그녀는 처음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오던 교회에서 어느새 믿음과 소망을 알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교회는 힘든 이 곳에서의 생활에 유일한 빛이었다. 게다가 피아노라는 새로운 취미 덕분에 그녀는 주일날 반주를 섬기며 더욱 보람찬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외 그녀의 생활에서는 아무런 낙도 희망도 없었다. 매일 같이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싫어하는 이탈리아 매니저와, 어떤 남자와 데이트를 했고 그 남자가 어떤 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을 사주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직장 동료들 속에서 그녀는 소외감을 느꼈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들에게서 가끔씩 기분나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인종차별의 선두주자인 영국에서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는 꼴이었다. 결국 얼마전부터 그녀는 다른 직업을 알아보았지만 경기가 어려워 인터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그녀는 그를 보았다.

 예배 후 교제의 시간에 그는 목사의 요청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소개 도중 그가 고향이 어딘지 말할때, 홀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고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의 그들의 만남은 마치 고향의 그리움이라는 냄새, 향수라는 이름의 향수 같았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잃어버렸던 설렘을 되찾아갔다. 그들은 이야기했다. 식당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그리고 런던 안에서. 고통의 고리에서 해방되고 싶은 둘의 간절한 바람은 자연스레 그들이 이야기하게 하였고 만나게 하였고 가까워지게 하였다. 그들은 점점 교회 밖에서도 만나기 시작했고 오래 지나지않아 그들은 자연스레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 사랑한지 1년 조금 더 되었을 때 그들은 결혼했다. 그 둘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인 그레이트 야머스로 돌아갔다. 이미 익숙해진 이곳에서의 삶이었지만 그들은 고향에서의 또 다른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여태까지 조금씩 모은 돈에 은행에서 대출한 돈으로 작은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떠나기로 한 이유는 이뿐 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한 아이를 위해서였다. 런던에서의 삶은 힘듦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은 믿음과 소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 아이는 믿음이자 소망이요 사랑이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이 될 아이. 너무도 사랑하는 그 아이와 함께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녀가 아이를 임신하고 낳기까지 그 10개월간, 그 해 영국, 그레이트 야머스에는 이례적으로 햇살이 가득했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축구 광팬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밖에 나가서 펍이나 축구장에 앉아 경기를 보는 것 대신 집에 앉아 엄마와 축구를 보곤 했다. 그는 경기를 볼 때면 늘 맥주를 두세 파인트씩 마셔대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엄마의 옆에 꼭 달라붙어 평소와는 달리 다소 거칠어진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금발의 짧은 곱슬머리, 구부러지지 않은 오똑한 코, 새하얀 피부, 그를 보는 각도에 따라 연하게도 진하게도 보이던 신기한 그의 하늘색 눈동자,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감싸고있는 긴 속눈썹, 그 위로 연한 금발의 눈썹, 적절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벌어진 어깨, 고향에서는 꽤 큰 축에 속하는 그의 키, 맥주로 인해 튀어나온 뱃살… 이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 사건이 있기 전의...

 

 그 사건 후 그는 변하였다. 많은 것이 변하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의 숱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흰머리가 여러군데 나있었다. 입에서는 더 이상 성경구절을 읊거나 온화한 말을 하는 법 없이 욕설만이 난무했다. 그가 가장 많이 쓰던 말은 불행과 버려짐, 저주, 고난, 슬픔 등이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이 아니었다. 전에 가끔씩 마시던 술은 이제 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되어버렸고 얼마 후 그는 급기야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그는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 기간은 점차 길어졌다. 반나절은 하루가 되었고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었다. 그의 어깨는 왜소해졌고 배는 점점 더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는 상앗빛으로 변해갔고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사나워졌다. 눈 밑은 어두워졌고 그의 신기하고도 매력적이었던 하늘색의 눈동자도 색이 바래 탁해졌다. 그는 이제 탐욕스러운 돼지 같이 보였다. 그는 닥치는대로 삼켜버렸다. 음식도 술도, 그리고 슬픔도. 결국 그는 자기 자신마저 삼켜버렸고 그녀를 떠났다. 이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모습이었다. 오늘 바로 이순간 까지의...

 

 지금 그녀앞에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낯익은 남자가 서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예전과는 또 달랐다. 그는 가장자리가 헤어진 가죽벨트에 깔끔한 흰색 면바지를 입고 낡은 갈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 튀어나온 배 덕분에 깔끔하게 다린 하늘색 셔츠는 터질듯이 빵빵했다. 빳빳한 소매 사이로 가죽시계가 보였다. 지금 그에게서 딱히 이상한 것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전체적으로 제법 남아있던 금발의 머리칼은 이제 가운데 부분이 휑했다. 양 측면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흰머리인지 금발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오로르의 얼굴이 하얀 것처럼 과거 그의 얼굴도 하얬으나 지금 그의 얼굴은 상앗빛을 넘어 황색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의 피부는 굽다 말은 반죽처럼 탄력 없이 늘어져 있었다. 얇지만 선명했던 그의 입술은 보라색으로 거무튀튀했고 하늘색 눈동자에는 후회와 실패, 그리고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그마저도 쳐진 눈꺼풀과 눈두덩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예전 아름다운 보석을 감추는 꽃잎처럼 그의 하늘색 눈동자를 덮고있던 속눈쎂은 이제 눈꺼풀 힘없이 아래로 축 쳐져있었다.

 오로르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간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들은 아무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로르는 볼 수 있었다. 딸을 버리고 좌절과 고통 속에 살아온 한 남자를…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몸 구석구석에는 후회와 두려움이, 그리고 슬픔이 베여있었다. 마치 지금 그의 몸에 베어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떨어져있던 그에게 이제와서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낸단 말인가. 십 수년전부터 그는 그녀에게 있어 남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불타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알 수 없는 깊은 한 숨이 올라왔다. 그녀는 고통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니, 할 수 없었기에 분노와 고통을 느꼈다. 오로르는 그의 얼굴을…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녀와 비슷하게 어색함, 그리고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그도 분명 변해버린 그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지독하게도 독한 냄새를 말이다. 마치 그녀에게도 어느새 베어버린 담배 냄새 처럼... 그 둘은 계속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 속에는 수십가지의 질문들이 떠올랐으나 입으로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에서 서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간 밖으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았다.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듣고 싶었다. 오랫동안 만나지도, 그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문간에 서 있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버지라고 불리던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두 발자국, 아니 단 한 발자국만이라도 그녀를 향해 내딛으면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도 그에게 그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옷을 적시고 흘러내린 빗물은 그의 소매를 끝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말투에 후회와 슬픔이 베여있었다. 그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너를 차마 쳐다볼 용기조차 들지 않는구나.”

 그의 입에서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로르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이 쥐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이 사람이 주는 부담감이 싫었다. 자신의 평화를 짓이기고 있는 이 사람이 미웠다.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이가 저절로 악물어졌다. 그녀는 마음 속의 말을 던졌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당신에게 미안할 용기는 있어요? 나를 찾아올 권리가 있나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미안하다. 사실… 너를 오래 전부터 보고싶었다. 그러나 매일 망설였다. 너에게 나타는게 옳은 것인지 아닌지. 또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과연 너를 쳐다볼 수 있을 것인지를 말이다. 3년 전에 너를 만났을때도 그랬다. 과거에 내가 한 바보같은 짓에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정말이다. 너에게는 이미 수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정말이다.”

 그는 말을 끝마치며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선 들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그의 앞 머리카락을 훑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집 문 앞 바닥, 그리고 그의 발 옆으로 물이 고이고 있었다.

 "당신은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당신이 3년전에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던 것처럼… 당신은 또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군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3년전, 당신이 나타나고난 후 당신이 이제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그러기를 바랬죠. 내가 당신의 면전에 욕을 외치고 저주를 하고 눈물을 흘릴 때 당신은 뒤돌아서 가버렸어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어린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 사람이 태연히 돌아와 다시 내 앞에 서 있었으니 말이예요. 거기서 용서를 구하고 있으니 말이예요! 그때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편히 죽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죠? 나는 그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지만 지금 이야기 할게요. 당신은 그때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였죠.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아버지!"

 오로르가 숨을 헐떡였다. 입 안에서 밖으로 분노가 흘러나왔다.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를 상처입히기 시작했다.

 "당신은 크게 베인 내 몸의 상처를 다시 후벼 파기 시작했어요. 내 피가 묻어 녹이 슬어버린, 그 무뎌진 칼로 당신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또 나를 희생양 삼아 상처를 내기 시작했어요. 내 인생에서 사라졌던, 사라져야만 했던 당신이 또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내 삶에 개입하려고 하잖아요!"

 그녀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오로르의 아버지는 아직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 옆으로 고인 물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너에게는 정말 할 말이 없구나..."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빗소리 사이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에게는 정말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 정말 할말이 없구나..."

 그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땅을 향해 목을 쳐박은채 흐느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후회와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못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속에서 뿜어져나오는 분노를 내뱉지 않는다면 그녀 스스로 망가져버릴 것만 같아 참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할 말은 무엇이죠? 용서를 구걸하려구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것인가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져있는 가시는 그대로였다.

 "그래, 줄 것이 있단다.”

 그가 여전히 고개를 내린 채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선 아무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을때 그녀는 그 눈에서 느껴지는 간절한 애절함을 느꼈다.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그 표정이 그녀의 눈에 남아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이 숨이 막혔다.

 "룻, 나는 변했단다. 너는 안 믿을지 모르지만 이 삼 년동안 나는 변했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는 빗속에 온몸이 젖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눈물처럼 보였다.

 "나는 요즘 행복하단다. 더 이상 술도 담배도 마약도 하지 않는단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내 손으로 돈도 벌고있어. 그동안 내가 해온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의 결과로 아픈 곳도 있고 아직 낫지 않은 곳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작은 미소였지만 여태까지 그의 얼굴에 베여있던 후회와 슬픔이 모두 날아갈 만큼 밝은 미소였다. 그 표정속에서 그녀는 어머니를 잃기 전의 그의 얼굴을 조금 볼 수 있었다.

 "너는 내가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위해 너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너의 말,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너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야.”

 그가 말했다. 그가 천천히 손목을 올려 문 앞의 난간을 잡았다. 이미 다 젖어버린 그의 셔츠 소매 사이로 앙상한 손목이 보였다. 과거 잔근육이 잘 자리잡혀있던 그의 팔이 그 앙상한 손목 위로 겹쳐보였다. 손목 부근에는 불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핏줄이 여럿 보였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가능하면… 나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겠니? 아버지로서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죄인으로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나에게 딱 한번의 기회만 주지 않겠니?"

 그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손잡이에 기댄 그의 몸이 물에 쫄딱 젖은 생쥐 같았다. 빗물이 그의 몸 위로 떨어질 때 그의 몸이 떨리는 듯 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렸고 그렇게 그 곳에서 수 분이 침묵속에서 흘러갔다...

 "싫어요..."

 오로르가 짧게 대답했다. 자꾸만 속에서 올라오는 그리움이 미웠다. 계속해서 예 라고 대답하려는 자신이 미웠다. 끊임없이 그를 용서하고 이 끝없고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평화를 얻고 싶은 자신이 미웠다.

 “… 싫어요... 싫어요..."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생각이 바뀐다면..."

 그가 바지 안 주머니에서 두꺼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녀에게 주기 전, 종이를 한 번 살펴보았다. 종이는 빗물에 젖어 잉크가 번져있었다. 다행히 겨우 글씨를 알아볼 정도였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에게 종이를 건넸고 그녀는 말 없이 그를 쳐다보다 잠시 후 종이를 받았다.

 "그곳으로 찾아오려무나. 기다리고 있겠다. 너가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줄 그날까지..."

 그가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선 거리를 걸어갔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비오는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빗줄기는 다시 많이 굵어져 있었다. 그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몰라보게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녀의 마음 속으로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오로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그자리에 서서 그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희미한 시야 속에서 그는 골목을 돌기 전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시야가 온전했더라도 잘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그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가 양육권을 포기하고 집에서 떠난 날, 바로 그때처럼… 그녀는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5th Day (다섯째 날)

 

 거리에는 또 비가 쏟아졌다. 파도는 사납게 울어대었고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거의 매일 같이 비가 오는 영국이지만, 노르위치지만, 그레이트 야머스지만, 이렇게 굵은 빗줄기가 하루종일, 그리고 매일 같이 내려댄 적은 거의 없었다. 뉴스에서는 최근에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이상 기후 현상 중 하나라고 했다. 우산이 바람에 흔들렸다. 빗줄기가 이 땅에 몸붙이고 있는 모든 것을 향해 거칠게 부딪혔다. 그녀는 대로까지 그대로 걸어나갔다. 꽤 오래 기다려 겨우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고 하얗게 닳아버린 검은 가죽시트에 기대 편히 앉았다. 그녀는 빗소리에 집중했다. 눈을 감았다. (미정) 교회. 어릴적 그녀가 양손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한쪽씩 꼭 잡고 예배를 드렸던 그 곳. 지금 그녀는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오로르의 아버지는 그녀를 버리고 나서 단 한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그랬다. 아버지가 그녀를 떠난 이후로 이 교회는 그녀에게 있어 고통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미정)교회 목사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도 한 몫 했다. 어제 아버지가 건넨 종이에는 교회의 이름과 약도가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그녀는 교회에 어떻게 가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훤하게 잘 알고있었다. 오로르는 시내 한 가운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근처까지 가야했기에 그녀는 교회에 들른 후 제인을 보러가기로 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택시는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또 달려 시내로 향했다.

 

 '내가 왜 그곳에 가야하지?'

 젖어있는 팜플렛을 손에 든 순간부터 침대에 누워 잠 들기까지 그녀는 이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스스로 정한 답은 나와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답의 예외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안 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고개를 돌렸다.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오늘 아침부터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도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면서 그녀는 그를 만나면 어떠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머리와는 달리 그녀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발을 보면서 그녀는 구름치기를 생각했다. 그가 처음 왔을 때도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따랐다. 그 결과에 그녀는 후회하지 않고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대답은...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 고민했다.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에게 혹은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녀 안에서 요동치는 알 수 없는 무언의 메세지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집을 나왔을 때 문 앞에는 구름치기가 서 있었다. 그는 빗 속에 쫄딱 젖은채 서 있었다. 오로르는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지금 상황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밝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왠지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완전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그를 향한 믿음이 생겨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믿음은 말이나 이성으로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믿음은 점이 아닌 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딜가나요?"

 그가 무척이나 친근한 미소를 띄며 물었다.

 "제인을 보러가요.”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나도 같이 가도 되나요?"

 그가 약간 까치발을 들며 말했다. 약간 흥분한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요."

 그녀는 무심결에 나온 그녀 자신의 대답에 놀랐다. 아무런 의심이나 저항없이 그녀는 그의 요구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랬다. 몇일 전에도 오늘 아침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며 그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마음의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작은 희망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작은 희망...

 

 어제도 그녀가 침대에 누워 불면증에 괴로워할 때, 아버지를 만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는 서재쪽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들었다. 낮에 들었던 그의 연주였다. 조금은 달랐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함이 느껴졌다. 가슴뛰는 설렘이 느껴졌다. 그녀는 일어나 소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그냥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그 풍성한 음에 자신을 맡겼다. 곧 긴장이 풀리고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분좋게 눈을 감았고 잠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기분좋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연주 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연주 소리가 멈추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르의 눈 앞에서, 꿈 속의 오로르는 계속 연주하고 있었으나 거기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꿈 속의 그녀는 연주를 멈추었고 그녀는 곧 잠에서 깨어났다. 텅 빈 방 안에서 새벽의 파도 소리와 함께 그녀는 꿈 속의 그 연주 소리를 다시 기억해보려 애를 썼다. 새벽의 한기가 잠기운을 물리치자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의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고 그곳에 놓여진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피아노는 커버가 닫혀있었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애초에 아무도 없던 것 처럼... 방에서 나가려 할 때, 오로르는 악보 앞에 놓여있는 조그마한 종이를 발견했다.

 '오늘은 중간에 대화가 끊겼군요. 내일 또 이야기해요. 당신과의 대화는 늘 기분 좋아요. 행복을 느껴요. 행복을 어떻게 찾는지 묻고 싶었나요? 행복은 어쩌다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 종이 쪽지 처럼 말이예요.’

 '행복은 우연한게 아니라고?'

 그녀는 그의 말을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도대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나와의 대화가 기분좋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과의 대화에 기분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잠시 그곳에 서서 그가 말한 행복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피아노에 대한 불안과 아버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새벽 중순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녀는 시내에 다가갈수록 점점 긴장되었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택시는 이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시내 초입에 들어섰다. 그리고 시내의 골목들을 돌았다. 다닥 다닥 붙어있는 영국의 오래된 집들이 보였다. 오래된 것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풍겼다. 뉴욕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큰 도로와 골목을 서너번 정도 더 돌자 오래된 한 교회가 나왔다. 동네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교회였다. 그녀가 어릴 적 그녀의 가족은 매 주일마다 이곳에와 예배를 드렸다. 이곳의 목사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녀는 격식없이 편하게 대해주는 목사가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녀를 떠난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이곳에 온적이 없었다. 그가 아버지 친구여서일까, 아니면 신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앗아간 것 같아 그를 원망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교회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멋진 곳이로군요.”

 구름치기가 교회의 첨탑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땅에서 볼 때 교회란 이런 느낌이군요. 구름에서 볼 때는 모든 것들이 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래서 당신들이 왜 이런 조그만 땅을 놓고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교회의 십자가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그를 덮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빛에 반사되며 반짝였다.

 "그렇다고 이제 다투는 것이 이해간다는 뜻은 아니예요.”

 그가 덧붙였다.

 “그렇군요."

 그녀는 눈 앞에 그려지는 과거 따뜻했던 시절에 마음을 빼앗긴채 대충 대답했다.

 "이곳에 아버지를 보러 왔죠?"

 그가 여러 성자들의 모습이 새겨져있는 철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게 아버지와의 일을 모두 털어놓기가 내심 마음에 걸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오로르였다.

 "어제 우리의 대화를 들었나요?"

 “네, 오로르. 어제 대화를 들었어요.”

 그가 짧게 대답했다. 오로르는 놀랍지 않았다.

 "들어가서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일단 들어가죠. 항상 해야할 말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가 손으로 문고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안쪽으로 밀었다.

 

 교회 안은 깔끔했다. 맨 앞쪽으로는 강단이 있었고 그 뒤로는 한번에 여럿이 앉을 수 있도록 긴 일자형의 나무 의자들이 두 열로 놓여 있었다. 강단에는 작은 강대상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거기에는 십자가를 주위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비추는 곳에 한 남자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오로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남자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굽 소리가 교회 안에 울렸다. 그는 굽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 그녀는 교회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를 알아봤다. 그의 머리는 이미 희어졌지만 뒷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로르는 그의 옆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렸다. 구름치기도 아무말 않고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수염이 수북한 얼굴에 밀가루처럼 흰 백색 피부, 아버지처럼 오똑한 코에 갈색의 짧은 곱슬 머리, 그리고 깡마르고 키가 큰 선한 얼굴의 이 남자는 이 곳의 목사 요셉이었다. 그는 기도가 끝나자 오래 앉아있었는지 다리를 주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주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르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발견하였다. 그는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도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어떤 것으로 그녀를 알아보았을까.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예전의 행복한 모습은 남아있지 않는데… 이제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으나 그의 선한 표정과 미소는 여전했다. 그는 목사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고서는 한 사람의 친구로서 머리를 숙여 친구의 딸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구나, 룻. 몰라보게 컸구나.”

 그는 그녀의 본명을 불렀다.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서가 너가 올 거라고 하더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가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사라나 택시기사와 마찬가지로 구름치기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나요?"

 둘 사이에는 이미 어떤 말들이 오간 상황임을 알 수 있었기에 오로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볼 수 없을것 같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오로르는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지나가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서는 너가 자신을 보러 올 것이라고 했어. 언젠가는 보러 올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번에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아서는 처음부터 너와 다시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단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오로르는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죠?"

 오로르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땅을 향해 내려갔다. 그와 함께 그녀의 고개도 땅을 향해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목사와 구름치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때 아서가 한 말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무슨일인지는 대충 알았지만… 그가 자네에게 주라고 나에게 건네준 것은 도통 뭔지 모르겠더군. 그는 그 말 이외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네.”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말도 없었다. 마치 땅에서 무슨 시원한 대답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에게 주라고 건네준 것?'

 오로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네에게 주라고 나에게 맡겨둔 물건이 있네.”

 그는 말을 마치고나서 교회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로르는 구름치기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그를 따라 교회 안을 걸었다. 어릴 적 그녀가 돌아다니던 곳들이 보였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한 장소들도 있었고 예전 그대로인 곳들도 있었다. 그를 따라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그의 사무실이 나왔다.

 "뜯어보지 않았어.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어. 너만이 알 수 있겠지.”

 그가 문 앞에서 말했다. 손잡이가 돌아갔고 그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뒤로 그녀와 구름치기도 들어갔다. 목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랍에서 서툴게 포장되어있는 주먹만한 꾸러미 하나를 꺼내었다.

 "이거야. 자네가 뜯게.”

 그가 꾸러미를 건네주며 말했다. 오로르는 그 꾸러미를 받았다. 그리고 그대로 가방에 넣어버렸다. 목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로르는 가방의 클러치를 닫아버렸다. 타인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혼자 보고 싶네요. 이것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그녀는 인사와 함께 재빨리 사무실에서 나왔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지만 걱정과 연민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와 더 이상 같이 있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 꾸러미를 빨리 열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교회를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구름치기가 따라왔다. 곧 영국의 명물 블랙캡 한대가 그녀 앞에 멈추어섰다.

 "그레이트 야머스요. 역 근처에 가면 자세한 길은 그때 설명해드릴게요.”

 택시기사가 도착지를 묻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택시기사는 미러로 뒤를 한번 쳐다보더니 아무말 없이 차를 출발했다. 그녀 역시 아무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의 벌어진 틈 사이로 꾸러미를 쳐다보았다. 종이로 포장되어있는 그 꾸러미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너무 궁금했지만 지금 이곳에서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안전한 공간에서 그 꾸러미를 열고 싶었다. 그녀는 꾸러미에서 시선을 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선을 창문밖으로 던졌다. 그녀가 다녔던,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다녔던, 그녀가 방금까지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최근에 왔었던 그 교회가 이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잠시 후 골목을 꺽자 교회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모든 것들을 잊어보려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아직 남아있는 교회의 잔상에서 아까 전 목사의 사무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목사의 서랍 안에 놓여있던 꾸러미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차라리 창문 밖을 바라보는게 낫다는 생각으로 다시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 옆에서 그녀를 멀뚱이 바라보고 있는 구름치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로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네,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혼자 이야기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대답했다.

 "제인에게는 안가요? 그리고 그 꾸러미… 무엇일까요?"

 그가 조용히 물어봤다.

 "제인에게 가고 싶었지만 지금 너무 피곤해요. 그리고 그 꾸러미는… 나도 모르겠어요. 정 원한다면 나중에 같이 보죠.”

 그녀가 대충 대답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둘러댔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스트레스에 온 몸 전체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깊은 한 숨이 나왔다.

 "오로르,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의 의미를 말한거예요.” 그가 그녀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고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단순히 그녀를 쳐다보았던 것일테지만 그녀는 택시기사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수화기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들었다.

 "미안해요. 나를 좀 내버려둬줘요. 지금은 정말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네요.”

 그녀가 계속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의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 진지한 초록색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는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러나 곧 묘하게도 급격히 지치는 기운이 들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그레이트 야머스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에서 나오는 짙은 흰색의 연기들이 이층의 발코니 위로 올라가며 힘없이 흩어졌다. 담배를 다 피우고 집에 들어온 그녀는 기운 없이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꾸러미를 풀렀다. 그녀 옆에 구름치기가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나비 모양으로 메어진 실을 잡아당겨 풀자 안에서 비디오 하나와 편지 하나, 그리고 작은 상자 하나가 나왔다. 그녀는 먼저 비디오를 틀었다. 비디오는 한참을 지직 거리더니 이상한 소리와 함께 재생되었다. 그것은 홈 비디오였다. 오로르가 처음 피아노를 칠 때로 클라라가 심심해 할 때면 아서는 늘 이 비디오를 틀어 오로르까지 셋이 모여 같이보았다. 오로르는 클라라가 까르르대며 좋아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미소가 떠오르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비디오를 틀어놓은채로 편지를 펼쳐 읽어내려갔다.

 

 룻에게.

 룻, 어쩌면 이 편지를 읽을때 내가 오라고 해놓고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 궁금함과 함께 원망과 분노가 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다. 너를 볼 낯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너를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를 버린 내가 이만큼 시간이 지나간 후에 용서해달라고 다시 나타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나라도 그럴 테니까 말이다. 나도 사람이다. 그래서 너가 나를 용서하고 만나주겠다면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당장에라도 너를 보러 뛰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너를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너의 집에 불쑥 찾아가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해해다오. 최소한 단 한 번 만이라도 너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보지 않은채 이 편지를 전달했다면 너가 읽지도 않고 버렸을지도 모르기에... 그래서 그랬다.

 어느새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내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안 너는 훌륭하게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되었구나. 너무 멋지게 자라서 몰라볼 뻔 했다. 사실 이번에 너를 찾아갔을 때와 3년 전 너를 만났을 때를 빼고도 나는 너를 본 적이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의 회사에서 너를 바라보았다. 물론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나는 거기서 청소를 하며 잡일을 했다. 너가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노력하면서... 그랬다. 다행히 너의 상관들이 나에게 참 잘해주더구나. 너에게도 잘해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안심이라니... 부디 편지 너머로 나를 상상하며 속이 쓰릴 정도로 고통스럽고 밉더라도 이해해주렴. 내가 정신차린 후로부터 단 하루도 너를 버리고 살았다는 고통에서 편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항상 고통속에서 살았다. 정말 너무 큰 죄책감이 밀려왔다. 너가 너무 보고싶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망가져 있었고 너에게 너무나 큰 상처만 주었다. 하지만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더구나. 내가 유일무이하게 사랑했던 사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 뿐만이 아니라 정말이란다. 그것은 다른 사랑이었기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처럼… 말이야. 내가 그때는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구나. 내가 그때는 고통 속에서 눈을 돌려 나에게 남은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볼 지혜가 없었구나. 그래서 너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놔두었나보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죽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루 하루를 거지처럼 살았다. 살인마처럼 살았다. 도둑처럼 살았다. 내 행동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갔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게서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 이 오기 전까지 나는 나의 더럽고 추악함에 고통을 울부짖으며 살았다. 그러나 이런 내게 ‘그날' 이 왔다. 더러운 내게 봄의 햇빛처럼, 이제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에 더러웠던 나는 깨끗하게 씻겨졌고, 그날에 어둠이 가득하였던 나는 고통의 족쇄를 벗고 풀려났다. 나는 자유함을 얻었다. 그 속에서 나는 유일하고도 너무도 강력한 한 줄기의 희망을 얻었다. 그 후로 나는 변했다. 모든것이 바뀌었다. 나의 골수부터 생각의 뿌리까지… 나의 삶 자체가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용서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나는 그럴 가치가 없었지만 신은 나를 용서했다. 모든 것의 왕이신 그분이 나를 용서했다. 그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사실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하였다.

 룻, 너가 들으면 말도 안되는 사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너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가 남은 인생 전부를 나를 저주하고 욕할며 보낼지 몰라도… 너에게 이것만은 꼭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지금 너에게 사이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있던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너에게 내가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 잘못된 과오가 씻겨진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싶다. 나는 용서받았다. 그리고 너에게서도 용서를 원한다. 하지만 룻, 만일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만일 너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너를 잊지 않고 나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다. 너가 원한다면 내 목숨이라도 주겠다. 그것이 너가 원하는 것이라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 룻, 사랑한다. 이 사랑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정말로 이 마음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물건은 없더구나. 그래서 작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 많지 않더구나... 작지만… 비싸지 않은 것이지만… 너가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구해보았다. 나의 마음을 담아 너에게 건넨다. 사랑한다, 룻. 못난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내 딸… 사랑한다.

 

 그녀는 편지를 왼편에 내려놓고 조용히 상자를 풀렀다. 상자 안에는 종이가 한 겹 더 있었다. 조용히 풀렀다. 그리고 상자 안을 한 참을 바라보았다. 아무말 없이... 그러나 곧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콧등을 타고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 슬픔의 눈물도, 고통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녀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낡고 해진 머리끈을 꺼냈다. 그것은 닳고 닳아 군데군데 벗겨진 은색의 피아노장식이 달려있는 고무 머리띠였다. 원래는 빨강색이었으나 끈의 색도 바래 다홍색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상자 안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은색의 피아노장식이 달려있는 빨강색 고무줄의 머리띠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머리띠와 똑같은 것이었다. 어릴적 그녀가 늘 하고 다니던, 어머니가 죽고나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행복한 가정의 유산이었던, 그리고 그녀가 첫 데뷔 무대 때부터 매 공연마다 꼭 몸에 지니고 있는 바로 그 머리끈 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흐느꼈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거칠게 내리치는 빗줄기 소리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덮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나서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오랫동안 울어서 그런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저녁 먹을 힘도 없어 잠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눕기 전에 코트에서 핸드폰을 체크했다. 뉴욕에 있을 때 그녀는 매 순간마다 핸드폰을 체크했지만 이곳에서는 거의 하루에 한번만 체크했다. 핸드폰에는 문자 한개가 와 있었다. 사라의 메세지였다. 내용은 제인과 자신이 보고 싶다고 시간이 되면 들르라는 것이었다. 답장을 보내야겠다 싶어 뭐라도 쓰려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내일 꼭 가겠다고만 답장했다. 방의 불을 끄기전에 침대 옆 램프를 키려고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스위치 옆으로 접혀진 쪽지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가녀리고 아름다운 사파이어보다 고통을 참고 견딘 다이아몬드가 더욱 단단하고 빛이 난답니다.’

 오로르는 그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몇일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저기요, 거기 있어요?"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구름치기와 말하고 싶었다. 오늘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어제말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시 뒤척이다 곧 잠이 들었다. 이렇게 일찍 잔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꿈을 꾸었다. 다만 오늘은 꿈 속의 그녀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다르지만 어제의 것 처럼 멋진 피아노 소리도 들렸다. 아니, 어제보다 더 멋진 소리였다. 그녀는 그 소리를 더 자세히 들으려고 천천히 손가락을 멈추었다. 연주를 멈췄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가 연주를 멈추자 소리도 멈췄다. 그녀는 다시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소리가 났다. 너무나 멋진 소리였다. 오로르, 그녀의 슬픔의 멜로디와는 달랐다. 그녀는 신이나서 계속 피아노를 연주했다. 멋진 연주가 이어졌다. 그녀는 치고 또 쳤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피아노를 이렇게 재미있게 치기는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이런 멋진 멜로디까지… 비록 꿈 속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의 전율을, 환희를 느꼈다. 슬픔의 늪에서 벗어나 행복의 구름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다시는 슬픔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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