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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The Sky Is Filled With Clouds
작가 : ssssss
작품등록일 : 2017.7.30

여느 때처럼 구름이 가득한 영국 Norwich의 한 해변가. 그곳에는 어릴 적 불의의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한 소녀의 피아노 소리가 매일 울려 퍼진다.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슬픔에 빠져 살던 그녀는 15살이 되는 해, 희망을 찾으러 뉴욕으로 떠나는데… 수 년이 흐르고 여전히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구름 속에 있는 한 남자를 본다. 그녀는 환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도착한 날 저녁, 그녀의 집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The Past (Faith) - 6화
작성일 : 17-07-30 19:44     조회 : 293     추천 : 1     분량 : 2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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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사라가 제인에게 밝은 미소를 보냈다.

 “잘...가. 고…마워.”

 사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라는 어렵게 말을 마치는 제인을 보며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금 3년동안 많이 늙어버린 서로였지만 미소는 예전의 그것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최근 이 둘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 이 둘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오로르에게 상처받은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무슨 비밀이 있는거냐며 수근거리기도 했지만 정작 그 둘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오로르에 대해 말하고 걱정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둘에게있어 오로르는 사랑하는 친구의 딸이며 어린 시절부터 불쌍하리만큼 슬픔에 빠져살아온 가엾은 소녀로 그들의 피붙이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와 만 3년동안 연락을 할 수 없으니 늘 그녀에 대한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둘은 오로르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연락할 때 마다 매니저란 사람이 번번히 바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해도 3년 동안 잠깐 전화할 시간이 없을까? 지난 6년 동안도 비슷했다. 회사는 일방적으로 거절했다. 몇 번을 거절당한 후, 그들은 노골적으로 안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들을 초지일관 그들을 무시한 채 함구했다. 심지어 상관이란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는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단어를 열거하며 사라와 제인을 사업방해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놨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실망해있을 오로르가 걱정되면서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문명의 발달로 인터넷을 통해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방법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예외였다. 그들은 번번히 거절당할때마다 자신들이 마치 일급 비밀문서라도 캐내려는 형사가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때는 정 답답해서 사라 혼자서라도 뉴욕에 다녀올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것이 힘든 일이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로르가 떠난 뒤 경제는 불황의 새로운 역사를 썼고 그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채 마을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가에 대한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노르위치의 관광수입도 감소하였다. 특히 이런 해변 마을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는 장사는 최악의 판매고를 올리고있었다. 뉴욕으로 떠날 만한 자비도, 거기서 감당해야 할 돈도 없었다. 제인의 상황도 그보다 더 나빴으면 나빴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사라는 오로르에게 다 설명해주고 싶었다. 왜 그날 제인과 그곳에 갈 수 없었는지를. 늘 연약한 아이, 울음이 많던 아이, 상처가 많아 슬픈 아이… 그 아이가 그날 우리가 그 자리에 없던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라는 그 아이에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3년동안 연락하지 않는 그녀에게도 섭섭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럴때면 그녀는 오로르가 자신이 말했던 믿음과 소망은 찾았는지 궁금하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고 분명 크게 상처받았을거라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다. 마치 의식처럼 매번 반복되는 이 과정을 거치고나면 그녀는 마지막에 꼭 그녀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위로 후에 반드시 뒤따라오는 질문은 그녀의 눈가 주위를 촉촉히 적셨다.

 '그럼에도 전화 한번은 할 수 있을텐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그 정도도 되지 못했던 건가?'

 이런 회의섞인 생각과 위로를 반복하다보면 서운함이 밀려오며 그리움과 후회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라는 이런 자신이 마치 속 좁고 못난 어른 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녀가 3년동안 이런 끝없고 반복되는 생각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제인과의 우정도 돈독히 쌓아가고 있었고 이 어려운 경제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생각과 고찰도 했다. 게다가 여러가지 좋고 나쁜 일들도 있었다. 나쁜일이라 하면 오로르를 추억하고 사랑해주었던 그레이트야머스의 동네주민들이 그녀에게 적지않게 실망했다는 점이었다. 만 6년동안 떨어져 있다가 홀연히 돌아와 친할머니처럼 길러주던 할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나서 다시 3년동안 연락한번 없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럴때 마다 사라와 제인은 그들에게 그녀를 믿으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그들은 언제나 확고한 오로르의 편이었다. 반대로 좋은 일은 제인이 1년전부터 조금씩 얼굴 근육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의사는 그녀가 바로 언어 재활훈련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현재까지 그녀는 기적이라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최선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보았으나 그들은 오로르에 대한 애정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제인이나 사라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오로르에게 계속 사랑을 주는 일에는 손을 놓았다. 결국 제인은 그런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에게있어 오로르는 이제 사랑했던 마을 주민 클라라와 아서의 딸일 뿐이었다. 지금의 오로르는 그들 사이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혹은 떠나버린 사람이었다. 떠나버린 사람을 10년동안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일은 해보지 않더라도 꽤나 어려운 것임에 분명했다. 사람들은 마음이 떠난 그녀를 다시 데려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 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들의 삶에서 오로르를 차차 지워나갔다. 하지만 다행히 몇몇에게는 나중에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때 그녀를 안아줄 정도의 애정이 남아있었다.

 

 사라가 이제 문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많이 희끗해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노을지는 햇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사라가 제인에게 다시 한 번 짧은 인사를 건넨 후 병실을 나갔다. 그녀는 병실에서 나와 간호사 캐런을 만나러 갔다. 전에 일하던 수잔은 태도 불량과 경고 누적으로 이미 1년전 병원에서 잘렸다. 캐런은 수잔보다 훨씬 다정하고 마음이 깊었다. 40대 후반의 그녀는 늘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미소로 대했다. 그녀를 만날때면 사라는 병원이라는 딱딱하고 시들어가는 생명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예외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캐런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사라는 알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감에 심장이 뛰었지만 그녀는 이내 별일 아닐거라며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사라는 캐런의 딱딱한 표정을 보자 다시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데스크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아주 작은 공간이 보였다. 거기에는 의자 두개가 있었다. 딱 두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었다. 작은 선반에는 차와 커피가 있었다.

 "근무가 힘들어질 때면 잠시 의자를 놓고 이렇게 쉬기도 해요. 오늘 병문안은 어땠나요?"

 두리번거리는 사라에게 캐런이 말했다.

 "괜찮았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캐런?"

 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덜컥 겁이났다. 사라와 캐런의 대화에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제인에 대한 것 뿐이었다. 사라가 짧게 한 숨을 쉬었다. 갑자기 겁이 날 때면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때문에 생긴 버릇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말 드리기 어렵지만... 이번주 들어서 제인의 건강이 계속 나빠지고 있어요.”

 사라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막연히 느껴지던 두려움의 실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 중 하나였다.

 “무… 무… 죄송해요."

 사라는 문장을 끝마치지 못한채로 연이어 쉼호흡을 했다.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일이죠?"

 잠시 후, 사라가 간신히 문장을 끝마쳤다. 캐런이 그녀를 걱정했지만 사라는 아무일 아니라며,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심장 박동이 많이 약하고 음식도 잘 못드세요. 이 상태가 지속되면 힘들수도... 있어요.”

 캐런이 말을 흐렸다. 사라는 이제 등 뒤에서도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는 아직 쌀쌀했고 사라는 코트도 입지 않았지만 땀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의사선생님께서 곧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저에게 말씀 해주셨어요. 아직 당신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휴가다녀와서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하셨지만 어제와 오늘, 기운 떨어지는 속도가 범상치 않아서요. 그래서… 그래서 사라에게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어요.”

 두려움이 사라를 감쌌다. 어두움이 그 위로 그녀를 덮었다. 고통과 좌절과 혼란이 또 그 위에 있었다. 그녀는 죽음이 제인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또다시 그녀에게서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려고... 그렇게 그녀의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오는 암살자처럼. 오싹함에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계속 괜찮았었는데요?"

 사라는 최대한 또박또박,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사라가 오지 않을때는 밥도 안드세요. 먹어도 대게 토하시구요.”

 사라는 최근 제인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최근 조금 여윈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눈에 뛸 정도는 아니었다. 한번은 그녀에게 살이 빠지는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늙으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고 대충 받아넘겼었다. 그러고보니 가끔 밥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에 워낙 정정한데다 몸의 기능도 호전세를 보이기에 전혀 그런 의심은 품지 않았었다.

 “그러면... 언제쯤?..."

 사라는 확실한 대답을 물어보면서도 절대로 그 확실한 대답을 듣고싶지 않았다.

 "그건 알 수 없어요. 다만 제 간호사 경력으로보면 이정도 속도라면… 오늘 당장에 돌아가신다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드리는 거예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를 원하니까요. 저도 소중한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기에..."

 캐런이 말을 흐렸다. 그러나 사라는 캐런이 오늘 당장이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사라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의 죽음은 아니었지만 죽음은 이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캐런이 사라의 시선을 피했다. 간호사로 있으면서도 아직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에는 익숙치 않음이 분명했다. 면회시간이 끝날 때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데스크에서 캐런을 부르자 그녀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그 무거운 자리를 떠났다. 사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홀로 그 딱딱한 의자 위에서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두려움에게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후 그녀는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다. 그녀는 병원을 나가는 길에 제인을 한 번 더 보고갈까 했지만 혹시라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제인을 상상하자 그만 두기로 했다. 두려움과 싸우며 안 아픈척 하는 그녀를 마주볼 용기도, 자신감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사라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병원 밖으로 나갔다. 가로등과 달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은 길게 늘어져 슬픔이 되어 사라의 뒤를 쫓아갔다. 밖은 서늘했고 사라의 마음속도 그러했으나 그녀의 눈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랑색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는 달랐다. 과거 공연을 위해 수많은 공항들을 지나다녔지만, 특히 뉴욕의 공항은 지겹도록 지나다녔었지만, 오늘은 왠지모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조금 전 일 때문이겠지만 그녀는 애써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 애를썼다. 하지만 평소에 타던 재규어 대신 노랑색 캡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단념한 채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저녁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대는 뉴욕에서 빠져나와 교외에 들어서자 거리위의 사람 수가 현격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채, 로그가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미안해 오로르, 오늘은 사장님이 중요하게 말할게 있다고해서 아무래도 공항까지 데려다주기는 힘들 것 같아. 대신 이 카드로 택시비며 음식이며 회사 경비로 쓰고와. 휴가는 1주니까 오랜만에 고향에 간 김에편히 쉬다가 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순진한 웃음이 베어있었다.

 '연기였겠지.'

 욕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노가 아닌 공허와 무력감이었다.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그녀는 자신이 단지 상품이었다는 생각, 자신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버려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제 곧 주인의 손에서 쓰레기통으로 던져질 깡통이 연상되었다.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이미지 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꽤나 강렬하게 그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급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옐로우 캡이 잘 포장되지 않은 아스팔트를 지나갈 때마다 충격이 자동차 내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콘서트 장을 떠날 때 조금씩 오던 부슬비는 이제 제법 굵어졌다. 리듬을 타듯이 빗방울이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빗방울의 연주를 보고 들었다. 빗방울은 차창에 떨어지고 바람에 날려갔다. 수많은 빗방울이 차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렇게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고 차위로 떨어지며 한바탕 연주를 한 뒤, 또다시 바람에 날려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도 저 많은 빗방울들처럼 도로 위를 달리는 음악이라는 이름의 차 위에 떨어져 잠시 연주하다가 다시금 날아가버리는 그런 존재일 뿐인가?'

 좌절과 무력감을 느꼈다. 적어도 빗방울들은 바람에 의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날아간 빗방울들은 도로위로, 나무위로, 건물위로, 그리고 다른 차 위로 떨어지겠지. 그러고나서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가겠지. 빗방울들은 그렇게 지쳐 잠들 때 까지 놀다가 잠이 들어버리면 다시 하늘에 있는 구름이라는 이름의 집으로 돌아가겠지. 구름이라는 집… 나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싶다.’

 교외에서 더 멀리가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도로와 나무, 그리고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어느것도 생각하지 않기로했다. 지금은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최근 몇주간 나아지지 않는 그녀의 피아노 실력은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되었고 그것은 그녀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게 하여 몸을 혹사시켰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깊은 불면증에 빠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다가 공연이 끝나서야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가 스스로 채점하는 공연의 결과에 따라 달랐는데 만족하지 못할때면 이 불면의 고통이 한동안 더 이어지곤 했다. 죽고싶을 만큼의 고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만두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의 일상을 반복하며 연주에만 몰두해 왔다. 연주를 통해 얻게 될 새로운 인생을, 믿음과 소망을 찾는데에 집중했다. 오로르는 육체의 고통이 극심할때, 정신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발견한다면… 이 시궁창같은 밑바닥에서 저 하늘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알게된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녀가 하늘에서 하늘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클 것이며 육체와 정신이 이미 아름다울때 얻는 행복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망가져가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둔채 오로지 피아노를 통해 믿음과 소망을 찾는 일에 전념했다. 오늘도 공연을 마친 그녀는 공연 전 쌓여왔던 피로를 회복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쳐 어느때보다 더 심한 체력의 고갈과 스트레스가 뒤따랐다. 그녀는 수면에 대한 욕구를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잠들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잠들지 않은채로, 모든 것을 거부한 채로 해결책부터 찾고 싶었다. 이제 곧 공항에 도착하는 일도, 택시비를 내려고 돈을 꺼내는 것도, 공항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체크인을 하는 것도, 비행기를 타는 일도,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그런생각을 할 때 즈음 택시의 라디오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듣는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끔 의도하여 제작된 유니세프의 광고였는데 피어스 브로스넌(007의 주연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진심이고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멘트 만큼은 꽤나 그녀를 자극했다. 지금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는데...

 "......당신은 늘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좋은 차를 몰지 못해서, 영화에 나오는 좋은 집을 갖지 못해서, 영화에 나오는 멋진 연인이 없어서, 그런 영화를 찍을 만한 돈이 없어서.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에 1달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아이들, 그럼에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요. 당신은 불평하면서 1달러짜리 피자조각을 먹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그 1달러짜리 피자조차 사치입니다. 평생 원하지만 먹을 수 없어요. 행복은 먼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원하세요?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돕지 마세요. 당신의 행복을 위해 도와주세요.”

 '행복이라...'

 광고를 들은 후 그녀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이 단어가 맴돌았다. 브로스넌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 단어를 끝없이 반복하며 읽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녀 머릿속에서 단지 떠오를 뿐, 전혀 의미있는 무언가가 되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꽤 의미있는 질문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깊게 나아가기엔 지금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눈을 감았다.

 

 “일어나요."

 짜증섞인 택시기사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뉴욕 존.F.케네디 공항이 보였다. 아직 잠에 취한 상태로 오로르가 지갑에서 택시비를 제법 두둑하게 꺼내주었다. 너그러운 팁에 택시기사는 공손한 태도로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줬다.

 

 숲 속의 그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방향을 바꿔 숲의 더 깊은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로르는 트렁크를 끌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공항이 너무 넓어보였다. 갑자기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아물지 않은 상처위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회사가 그녀를 버렸다. 그리고 사라와 제인도 그녀를 버렸다. 그런 최악의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 외로웠다. 슬펐다. 이런 감정들은 그녀에게 있어 어둠이었다. 아닐거라는 작은 희망을 남겨두었지만 오로르는 만약에라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버려지는 그 아픔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설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가시방패에 누군가가 다치더라도 말이다. 애같이 유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 그녀를 사랑해주던 그들이었기에… 하지만 그녀는 제인과 말다툼을 했던 그날의 사건을 잊을 수 없었다. 의도치않게 자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사건이 벌어진 이후로 한 번도 그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오로르 역시 그들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물론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3년전 그녀가 그레이트 야머스를 떠나던 날 밤, 불행히도 흠뻑 젖은 코트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가 그녀의 핸드폰은 고장났다. 비는 그렇게 제인과 사라의 전화번호를 빼앗아갔다. 3년 정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연락마저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오로르는 그들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간절히 하려고만 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 역시 연락도, 방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상처입은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제인이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워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뷔 무대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녀는 더 바쁘게 움직여야했고, 이런 와중에 그들에 대한 생각은 그녀가 견딜 수 있는 짐, 그 이상이었다. 이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으나 그녀는 그들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간은 그녀에게 망각을 불러왔고 그녀는 차차 그들의 소중함을 잊어갔다. 시간은 그녀에게 벽을 만들었고 궁색한 자기변명을 합리화시켰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기위안으로 삼는 동시에 그들이 그녀를 떠났다는 가정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렸다.

 ‘고향에 돌아갔을때 만약 그들도 정말 나를 떠난거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이제 나는 혼자인거군. 미국에서도, 그리고 영국에서도.’

 순간 뜨거운 감정이 받쳐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참았다. 주먹을 불끈쥐고 참아 내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흘리지는 않았다.

 '울지 않을거야. 약해지지 않을거야. 이것이 인생이라면,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것이 나의 믿음과 소망이라면… 살아남을거야. 변하겠어. 달라지겠어. 그들이 나를 이용한다면 나도 이용해주겠어. 이것이 내 믿음이야.'

 그녀가 헐떡이며 자리에 멈추었다. 심장이 아팠다. 무거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심장이 철로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심장을 움켜쥐고 느껴지는 통증에 헐떡였다. 하지만 곧 모든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굳어버린 심장을 제외하고는. 어느새 눈물은 말라있었다. 헐떡임이나 통증도 사라졌다. 그녀는 꽉 쥐고있는 주먹을 풀었다. 자신이 마치 악역을 맡은 여주인공이 된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정의는 악에게 졌어. 그렇다면 이 악물고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 밖에.'

 오로르는 다시 트렁크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악에 돋힌 그녀의 발걸음은 쓰러질 것과 같던 이전의 연약한 것과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이것이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해답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두운 숲 속에서 정체모를 낯선 남자의 손을 잡은 그녀는 이제 습기 가득하고 안개가 자욱한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까지 그나마 그녀 주위로 존재하던 빛이 점차 사라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덮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심장이 점점 불안감으로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숲 속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때, 그녀의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하던 낯선 남자의 얼굴에 기분나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그녀는 믿음을 찾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평소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찾은 믿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믿음이니까. 그렇게 잘못된 발견은, 왜곡된 믿음을 낳았고 진실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공항을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 위로 그녀의 어둠이 짙게 깔렸다.

 

 "지금 타신 비행기는 앞으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가 곧 이륙하려고 날개를 삐쭉 세운채 으르렁 거리며 엔진을 가열하고 있었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곧 있을 이륙을 대비해 승무원의 안내를 듣고 있었다. 오로르는 창가쪽에 앉아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안전벨트를 매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을 덮은 어둠 사이로 공항과 비행기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명들이 깊게 깔려있는 어둠과 맞서고 있었다. 오로르는 그 모습에서 빛을 발하는 몇몇 천사들이 악마들과 싸우는 장면을 떠올렸다. 빛이 점점 흐릿해졌다. 천사들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이미 온 천지를 어둠으로 덮은 악마들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그녀의 귀에 들리던 승무원의 소리가 점점 작아져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몽롱해져왔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발 잘 수 있기를 바라면서...

 ‘'... 님?”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오로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손님?"

 누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오로르가 눈을 뜨자 한 승무원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승무원은 딱딱한 말투로 그녀에게 곧 이륙하니 의자를 젖히지 말라고 했다. 오로르는 의자를 곧게 세운 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행기가 움직이며 엔진의 거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망할! 젠장! 날 좀 내버려둬.’

 이루 말할 수 없이 짜증이 났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이제 사소한 모든것에 짜증이 일었다. 되는일이 하나도 없는것 같았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오로르는 활주로의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보면서 곧 비행기가 이 작은 빛들을 벗어나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서는? 그리고서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녀는 이 일주일이 그녀의 남은 인생을 통째로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우웅.’

 비행기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좌석 밑에서 엔진이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좌석이 덜컹거리자 그녀의 심장도 고동쳤다. 그녀는 자리가 없다는 로그에게 일반석이라도 예매하라고 부추겼던것을 후회했다. 의자는 딱딱했고 간격은 빌어먹게 좁았다. 그래도 예약할 당시에 그녀에게 일반석은 사라와 제인과의 개선시켜줄, 그리고 그녀를 슬럼프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이 여행의 상징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의 일반석은 단지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고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비행기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뼈만 앙상한 오로르의 등이 딱딱한 의자에 달라붙었다. 잠시 후 바퀴가 땅에서 떨어지자 커다란 소음도 떨어져 나갔다. 땅에 매여있는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악몽같은 오늘의 기억도 모두 여기에 버리고 가고 싶었다.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 공항과 건물들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신기하게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지만 마치 손에 잡힐듯이 보였다. 모든것이 손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한 순간 그녀의 문제들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아픔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어버린 그녀의 가슴안에서 분노와 슬픔이 다시금 새어나오는 것이 느꼈다. 그것들이 그녀를 잠식해갔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라도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똑... 똑… 후두두둑...'

 눈을 떴다.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로르는 멍한 상태였다.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산소가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크게 호흡을 내쉬어 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자고있었다. 승객들의 수면을 돕기 위해 비행기도 최소한의 조명만 켜둔 상태였다. 곳곳에서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복도를 천천히 지나다니는 스튜어디스들도 보였다. 오로르는 여전히 쏟아지는 피곤함을 느꼈지만 잠에서 깨는 순간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잠들지 않을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비행기가 이륙한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창문의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비행기는 자신 위로 떨어지는 비가 가려운지 몸을 살짝살짝 들썩였다. 창문 밖을 바라보던 오로르는 문득 비가 미웠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악몽같은 날들에는 여김없이 비가 내렸다. 어머니가 죽은 날도, 자신이 슬퍼하던 지난 과거도, 자신이 제인과 싸우고 노르위치를 떠난 날도,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지도, 사랑해주지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도… 그리고 지금 꿈 속에서도. 그녀가 자라온 땅에서는 비가 거의 매일같이 내리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비를 사랑했다. 뉴욕에 있을때 그녀는 영국에서 맞던 비가 그리웠다. 비가 땅에, 창문에, 건물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듣고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서질 줄을 알면서도 거세게 부딪혀 도전하는 비가 용기있어 좋았다. 때로는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리치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렇기에 그녀와 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다. 다만… 지금은 비가 싫었다. 비를 탓하고 싶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꿈도 비를 탓하고 싶었다. 그녀는 요즘들어 꿈을 자주 꾸었다. 특히 그녀가 오랫동안 잠을 못잤을때, 혹은 선 잠을 잘때 자주 꾸었다. 그녀는 매번 같은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거대하고 따뜻한 빛을 등지고 있었다. 빛에 가려 정확히 어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낯익은 거리에 서있는 남자는 키가 컸고 체격보다 약간 커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가죽끈으로 허리를 동이고 있었는데 짧은 채찍처럼 보이는 막대기가 가죽끈에 묶여있었다. 그의 어느곳 하나 멋스럽거나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등 뒤에서 비추이는 따듯한 빛이 그를 품은 것처럼 감싸고 있었고 그런 빛 앞에 당당히 서있는 그는 말로 하기 힘든 기품을 풍겼다. 꿈의 내용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성으로서의 설렘이나 그런 감정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 남자가 다가오면 오로르는 편안함을 느꼈다. 거기에는 단순히 편안하다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내심 그 남자가 더 다가와주기를 바랬다. 남자, 그것도 알수없는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편하게 느낀다는 사실이 왠지 부끄럽게만 느껴졌던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말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꿈에서 그녀는 늘 마지막에 등을 돌린채 도망쳤다. 그리고서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집 안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궜다. 그녀는 헐떡대는 숨을 고르고 현관문의 외시경을 통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빛나는 후광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조건이나 능력이 아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느껴졌다. 그 눈빛은 분명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것은 사실 외시경에 비치는 그녀의 눈물이었다. 자신도 모르는새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커져가는 빗소리와 함께 그녀는 곧 꿈에서 깬다. 곧 잊어버리곤 했어도 꿈에서 깰때면 그녀는 늘 무언가 죄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에게 더 다가가면... 더 편안해질까?'

 그것은 그녀가 여태까지 느껴왔던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흘러넘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느새 슬픔으로 가득차버린 그녀에게 이 꿈은 잠시의 평안과 위로가 되어주었다.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서. 그 꿈의 마지막 순간은 늘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늘 비가 내렸다. 꿈에서도, 그리고 꿈에서 깬 그때도. 특히 오늘같이 길고 끔찍한 하루를 보낸 후에도 비가 꿈에서까지 따라다니는 꼴을 보고있자니 그녀는 순간 비에 넌더리가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날씨가 점점 험악해지더니 저 멀리서 번개가 쳤다. 잠이 어느정도 깨자 그녀는 술이 생각났다. 사실 담배에 대한 갈증이 더 강했지만 비행기안에서는 금연이기에 술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잠시 잊게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오로르는 승무원에게 맥주를 부탁했고 곧 승무원이 시원한 맥주캔을 가져다주었다. 오로르는 조용히 캔뚜껑을 따고 한모금 들이켰다. 알코올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몸 속에 퍼지자 배신과 버려짐으로 인한 고통이 약간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사실 지금 그녀는 독기를 품을만한 힘도 증오심도 부족했다. 몸의 근육들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지고 입술은 저절로 닫혔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로르는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나니 어둠뿐이었다. 비록 잠들기 전 누구나겪는 과정이지만 오늘만큼은 어둠속에 홀로 놓여있는 것이 싫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 몸은 늘어지는데 잠이오지 않는것은 그리 좋은 증상이 아니었다. 맥주를 다 비우자 그녀의 머릿속이 점점 뿌애졌다. 하얀 안개가 낀 것처럼 점점 흐려졌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구역질도 나려는 것을 보니 멀미가 분명했다. 컨디션이 안좋을 때 그녀는 멀미를 잘하는 편이어서 콘서트 전후로 비행기를 탈 때는 꼭 멀미약을 챙겨먹었는데 오늘은 그만 까먹고 있었다. 안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가는데, 25m 남짓한 거리가 그녀에게 마라톤 코스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토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승객들 대부분은 자고있어 화장실을 기다리는 줄은 없었다. 오로르는 화장실 문을 세게 열어재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의 안도감이 오로르 긴장을 풀었고 그녀가 변기 뚜껑을 엶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토가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타이밍도, 각도도 완벽했다. 한참을 화장실 변기에 토하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녀는 일어나 아직 입 속에 남아있는 고통의 흔적들을 없애기 위해 구비된 칫솔을 집었다. 그녀가 양치를 하는동안 바깥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오로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밖의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스튜어디스임을 밝히며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오로르는 대답 대신 입을 헹군후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 문을 여는데 그녀의 손이 떨렸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 앞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오로르를 바라보는 스튜어디스가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아프신가요?"

 오로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려 했으나 떨리는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 네. 멀미인 것 같아요. 혹시 약 있나요? 그리고 수면제도 부탁해요. 강한 걸로요.”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약을 가지러 갔다. 오로르는 진짜 잠이 필요했다. 진짜 휴식이 필요했다. 이제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관 없이 지금은 머리부터 식히자고 결론지었다. 배신의 현장을 목격한 후 6시간만에 내린 결론치고는 형편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이 전쟁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휴전을 선포했다. 그녀가 화장실 문에 머리를 기댄채로 주저앉으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때, 스튜어디스가 커튼 뒤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4정의 알약과 물컵이 들려 있었다.

 "이 작은 흰색약이 멀미약이구요, 이 큰 흰색약이 수면제입니다. 각각 2개씩 드렸구요, 수면제는 약 성분이 독해 한알만 드시는게 좋습니다.”

 그녀가 나긋한 말투로 설명을 끝냈다. 오로르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르는 자리로 거의 기다싶이 돌아와 받은 4개의 약을 한번에 모두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알약을 먹은지 10분이 지나도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과 구토증상이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스튜어디스에게 다시 한번 약을 부탁하려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또 다른 10분이 지나도 그녀의 멀미는 그대로였다.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약을 제대로 가져다 준건지 의심스러웠다. 다행히 수면제는 그나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로르는 만약 멀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잠으로라도 잠시 잊기를 바랐다. 오로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면장애 때문에 평소에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는 편이었다. 그 탓에 그녀의 몸은 수면제에 점점 더 내성이 생겼고 결국 그녀는 잠들기 위해 더 강한 약을 많이 복용해야했다. 하지만 연약한 그녀의 몸은 이런 과도한 약물섭취를 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최근처럼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때는 수면제를 3~4알 먹어도 잠은 오지않는 반면, 몸에서 과민반응으로 인해 속이 뒤집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먹은 수면제는 2 알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수면제는 독하다고 설명하던 스튜어디스의 목소리가 그녀 귀에서 다시 들리는 듯 했다. 이 상태로도 가만히 있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의 뱃속에서 고동치는 고통에 오로르는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분명 내일 괴로움에 후회하겠지만, 내일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오늘일을 모두 잊고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로르는 스튜어디스를 불러 수면제 2알을 더 부탁했다. 아까와 다른 스튜어디스는 일절의 의심 없이 수면제를 가져다주었고 그녀는 수면제를 받아들자마자 2알 모두 입속에 쳐박아 넣었다. 종이컵의 물이 부족해 수면제 알이 목구멍에서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입천장과 목구멍을 쓸어내리며 넘어간 수면제는 몸 속에 도착해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을 만들어냈다. 5분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과 함께 몸 속의 고통이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로르는 그제서야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조만간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륙한지 3시간 만에, 드디어 그녀는 모든 고통을 잊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비행기는 아직도 어둠속을 날아가고 있었고 어느새 비는 그친 상태였다. 오로르의 얼굴에 맺혀있던 고통과 치욕과 분노와... 슬픔의 눈물도 잠시 멈췄다.

 

 눈을 떴을때는 바다 위였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창창한 하늘이 그녀를 눈부시게 했다. 눈을 찡그리며 구름 밑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 주위로는 섬도, 나라도, 배도 보이지 않았다. 망망대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제 저녁, 조금만 비행기가 공항 위로 올라갈때 그녀는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것들, 열망하고 고민하는 것들… 건물, 역사, 명예 같은 것들이 너무나 작아보였다. 한심하고 쓸데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토록 높이 올라와도 자연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제 있었던 절망과 고통도 약간은 수그러드는것 같았다. 오로르는 하품을하고 눈을 비볐다. 긍정적인 생각이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도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스튜어디스들이 음식을 가득 실은 카트를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저녁부터 먹은것이 거의 없었다. 위는 배가 고프다못해 아팠다.

 “잉글리쉬 블랙퍼스트와 팬 케익 중 어느것을 드시겠습니까?”

 스튜어디스가 물었다.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로 주세요.”

 평소 기내식은 잘 먹지않지만 지금만큼은 뭐라도 일단 먹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오로르는 음식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곧 배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양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스튜어디스가 오로르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오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디스가 오로르 자리에 직접 음식을 올려주었다. 오로르가 한 손으로 포크를 들어보았다. 포크가 심하게 떨렸다. 아니, 포크를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 복통은 가라앉을줄 몰랐다. 위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식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제 먹은 수면제가 생각났다. 달콤했던 음식의 냄새는 순식간에 악취로 변했고 구역질이 나올것 같았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갈 용기조차 내지 못한채 자리에 앉아 몸을 웅크린채로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 속에 신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기도할 뿐이었다. 고통은 수 분이 흘렀음에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약효에 비교해볼 때 이 정도 통증은 꽤 수긍할만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얕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위로 저글링을 하거나 장으로 줄넘기를 하는것 같았으니까. 보통 이 정도의 통증은 30분 정도 지속되었다. 이것은 평범한 증상은 아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의사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다만 수면제가 그녀와 잘 맞지 않는 것이라고, 그 뿐이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단정지었다. 아무리 뛰어난 약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맞지 않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니까 말이다. 그녀는 매번 통증을 느낄때면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문제는 이런 아픔을 느껴야하는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수면제를 먹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수면제를 먹으면 복통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이런 딜레마적 선택을 해야 할때면 그녀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마치 뾰족한 연필심처럼 부러질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휴식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 역시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찾아올 고통을 알면서도 매번 수면제에, 매번 더 강한 수면제에 손을댔다. 손님들이 기내식을 다 비우고 빈 플라스틱 접시를 반납할 때 그녀의 고통은 그제서야 진정되었다. 그녀는 몸을 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기내식은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그녀는 포크를 들었다. 아까 전 만큼의 식욕은 없었지만, 게다가 음식은 식어 맛없었지만 그녀는 고통에 시달리던 자신의 몸을 위로하며 음식을 넘겼다. 2개의 작은 소세지, 2개의 작은 토스트 조각, 메추라기 알로 만든 것 같은 스크램블 애그, 구운 토마토 반조각, 그리고 보통 사이즈의 버터 2통. 평소 남들의 반 밖에 안먹을 정도로 위가 작은 그녀였지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워내었다. 위가 적당히 채워지자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따뜻한 녹차를 받아 한모금 마셨다.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녹차 만큼이나 따뜻했다. 비행기는 다시 승객들에게 휴식과 취침을 위한 공간으로 변했다. 몇몇 승객들은 불이 꺼진 비행기 안에서 아직 덜 채워진 배를 아쉬워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몇몇은 조명을 키고 신문이나 잡지를 읽었고 몇몇은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앞좌석에 앉은 한 백인 남자는 노트북을 꺼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복도 건너 그녀와 같은 열에 앉은 중동인 부부는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둘의 덩치를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로르는 창문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제는 수면제의 힘을 빌더라도 잠이 오지 않을것 같았다. 다행히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숙면은 취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그녀는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이제 비행기는 구름이 가득한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해가 조금씩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따뜻한 햇빛을 마주하자 몸에 쌓여있던 피곤함이나 무기력함, 증오와 슬픔까지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 했다. 문득 어제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어제보다는 많이 담담했다. 이미 적응이라도 해버린 것일까?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한것이 떠올랐다.

 ‘현재 나는 믿음뿐이 찾지 못했어. 덤으로 얻은것은 배신과 치욕, 그리고 수치심. 1주 동안 사랑과 소망을 찾을 자신은 없어. 게다가 잘리고 싶지도 않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도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1주후에 잘리지 않는것. 저 빌어먹을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것을 보여주고싶어. 그러나 어떻게?…’

 그때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조용히… 속삭였다.

 '너가 더 슬퍼지면 되. 슬픔에 너를 맡겨. 내 손을 잡아. 나를 따라와.’

 그 목소리는 매혹적이었고 그녀를 구원해주는 듯 했다. 비행기 안에서, 런던 안에서, 뉴욕 안에서, 세계 안에서 그녀를 고민에서 건져내주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그래, 아마도 내 스스로가 더 슬퍼지는 방법.’

 그녀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찾기 위해 피아노를 쳤다. 그녀의 삶을 가득채운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지금 그녀는 피아노를 위해 더 슬퍼지려 하고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않는 믿음과 사랑 소망보다 지금 그녀가 가지고있는 이 지위, 슬픔의 피아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슬픔의 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는 그녀의 가치를 잃고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수단이 목적을 잠식해 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소녀는 낯선 남자의 손을 잡고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를 뒤따라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비행기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오로르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승객들이 모두 자고 있었다. 창문도 모두 닫혀있었다. 우연이라지만 보기힘든 광경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빛나는 것이라고는 몇개의 모니터와 금연 사인 뿐이었다. 비행기가 제법 덜컹거렸지만 승객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들은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로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고 비행기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저마다의 잠버릇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오로르는 이 신기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오로르는 깨지 않는 승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덜컹거림이 지속되자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장입니다. 지금 비행기가 대기가 불안정한 지역을 통과중입니다. 승객들은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그녀는 자신 외에 또 안내방송을 듣고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끝나자 비행기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보통같으면 스튜어디스들이 기내를 돌아다니며 승객들이 안전벨트를 맬 수 있도록 도와줄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기내 안에 스튜어디스들이 없는것 같았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신기한 광경이라도 계속 보고있자면 금세 지루해지기 마련이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밝은 빛이 들어와 비행기 안의 어둠속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혹시나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깨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여기저기 사방에 널려있는 구름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금색의 구름 앞으로는 마치 깨끗하게 빨아놓은 하얀 솜을 하늘에 잔뜩 걸어놓은것 같은 새하얀 구름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구름떼를 본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런던에 올 때도 구름 속을 지나가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잠을 오지 않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구름 바라보는걸 좋아했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갈때면 창 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어릴적 사라의 가게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도 생각났다. 이제 어머니의 죽음은 오로르가 노르위치를 떠나기 전만큼 슬픈 기억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우수를 가져오기에는 충분했다. 오로르는 그때 구름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던 구름 위의 존재를 기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그것이 지나친 슬픔에 의한 환각인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겨두었다. 오로르는 날개 너머의 넓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뻐근했지만 창 밖을 더 바라보고 싶었다. 특별히 바라볼 자연경관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이제 어둠은 너무 지루했다. 그녀는 맥주를 마실까 싶어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내 그녀의 간에게도, 스튜어디스에게도 잠시 휴식을 주자고 생각해 그만두었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이제 구름으로 가득한 기류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름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비행기의 흔들림도 줄어들었다. 비행기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제는 가끔씩 들리던 코고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비행기 엔진소리도 조용해진 것 같았다.

 

 구름이 거의 없는 푸른하늘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로르는 구름을 좀 더 보고싶었다. 그녀는 사라지는 구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창문을 활짝 올렸다. 창문이 올라가며 햇빛이 비행기 안쪽으로 금색의 줄을 길게 드리웠다. 그녀는 구름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행기 창문에 가까운 구름 무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 구름무리를 끝으로 푸른하늘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떼 뒤로 외로이 홀로 따라가는 구름 하나가 보였다. 그 구름은 햇빛을 머금지도 않았으나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푸른하늘 속 그 금빛의 구름 위로 그녀는 낯익은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구름위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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