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안 들키려고 했는데, 결국 알아챘구나.
“ 이 상처, 왜 생긴 거예요? “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가능한 한 환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추임새를 넣어가며.
“ 어, 어제 수박 썰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을 썰었어요. 바, 바보 같죠? “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긴장해서 인지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서툰 변명을 시작하자, 옥 선생이 머리를 흔들었다.
“ 아닌데? 아까 낮에만 해도 왼손에 아무 상처도 없었는데. “
내 왼손은 언제 봤냐.
“ 정말인데요. 어, 어제 난 상처예요. “
옥 선생이 설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의 눈동자를 꿰뚫어 보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옥 선생이 조심스레, 그녀의 상처에 붙어있던 밴드를 뜯었다. 약간 아팠지만, 부드러운 손길 때문인지 참을 만했다. 옥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 유설희씨, 날 바보로 알아요? “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무언가 체념한 말투에 설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수의사지, 아무리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새로 난 상처를 못 알아 볼 리는 없었다. 거기다 칼로 자른 것과 동물에게 물긴 것은 상처의 모양도 전혀 다르다.
“ 사실은, 아까 개한테 물려서. “
어차피 혼날 꺼면 그냥 혼나자. 더 거짓말 하다가는 일만 커질 뿐이었다.
“ 언제요? “
“ 아까 치와와… 말라세지아 약 가지러 가셨을 때요. “
옥 선생이 혀를 찼다.
“ 소독은 했어요? “
그럴 시간이 없었다. 설희가 고개를 흔들자 그녀의 왼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 그냥 오라 하믄 되지 왜 손을 잡지.
그의 손에 그녀의 벌어진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그가 무서워서인지 손을 잡혀서인지 긴장해서 나오는 땀이 묻었다. 옥 선생은 화를 내지도 않고, 잔소리를 하지도 않고, 그저 작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그녀의 상처를 소독해 주었다. 상처를 다 닦아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긴장이 되었다.
손까지 잡혀있고, 무서워서 인가? 심장이 덜덜 떨려.
“ 파상풍 예방 주사 맞은 적 있어요? “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 얼른 가서 병원 닫기 전에 예방 주사 맞고 와요. 상처가 커서 꿰매야 할 지도 모르겠네. “
옥 선생의 말투는 부드럽고 걱정하는 느낌이었다. 잔소리가 쏟아지며 정신을 어디 뒀냐는 둥 혼이 날 줄 알았던 설희는 의외의 말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왜 이렇게 친절하지. 혹시 이대로 퇴근하면 더 혼나는 거 아니야?
“ 아직 퇴근 시간 아닌데요. “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는 설희에게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거의 다 끝났으니 가보세요. 부원장님께는 내가 말씀 드릴게요. “
옥 선생이 설희의 손을 놓아주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감, 감사합니다. “
“ 병원에서 일하다가 다친 건데, 누가 다쳐도 해줬을 겁니다. “
퉁명스러운 말투에 설희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웬일로 상냥하게 대한다 했다. 어쨌건, 잔소리는 안 들어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원을 나섰다.
*
“ 설희씨 연락 다시 안 왔어요? “
설희가 병원을 가고 나서 30분. 옥은우 선생은 초조했다. 다들 마감 정리 중인데, 왔다갔다하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은우의 그런 행동에 채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아까 병원 도착했다고 연락왔잖아요. 그리고 나서 15분 밖에 안 지났는데. “
15분? 기분 상으로는 한 1시간 지난 것 같은데.
“ 그, 그렇지만 그 사이에 뭔 일 생겼을 수도 있잖아요? “
은우의 말에 뒤에서 매니저가 장난감을 정리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손 다친 거 가지고 15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겠어요. 옥 선생님, 그렇게 걱정 되시면 전화 한번 해보시던지요. “
“ 아니, 난… “
내가 걸면 티가 나잖아. 걱정하는 지 눈치 채면 어떻게 해.
은우가 그렇게 정신 없이 병원 안을 헤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병원의 모든 스탭들은 웃음을 머금고 은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 옥 선생 완전 이성을 잃었네. “
“ 나 지난 번에 다쳤을 땐, ‘ 조심 해야죠. ‘ 한마디 하고 말더니, 오늘은 저 난리네. “
그렇게 스탭들이 은우 이야기를 하건 말건, 은우는 아까 설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처가 상당히 커보였는데.
“ 그러고 보니 설희씨, 오늘 가디건 입고 왔는데, 안에 휴게실에 두고 갔더라. “
누군가가 말한 소리에 은우의 목이 휙 그 쪽으로 돌아갔다.
“ 어디요? “
바라보자, 진영이 가디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설희의 가디건이었다.
“ 내일 오면 주죠, 뭐. “
심드렁하게 진영이 가디건을 가지고 들어 가려 하자, 은우는 손을 뻗었다.
“ 제, 제가 가져다 줄게요. “
“ 아니, 내일 주면 되지 않을까요? 굳이 지금 가져다 줄 필요까지야… 오늘 날도 따스한데. “
진영이 그렇게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 혹시 가디건이 그거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 가디건이 엄청 중요한 물건 일 수도 있잖아요. “
은우의 말에 순간 병원 안에는 정적이 돌았다. 숨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영이 당황해서 은우에게 가디건을 건네 주었다.
“ 여… 여기요. “
“ 네, 그럼 저 퇴근 해보겠습니다. “
“ 네. 들어가세요. “
은우가 병원을 빠져 나가자 마자, 병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던 입을 열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우는 달려서 설희가 갔다는 병원 앞으로 뛰어갔다.
벌써 집에 갔음 어쩌지.
병원 앞으로 가자, 앞에서 걸어가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작은 키는 흔치 않았다. 한참 뛰어와서인지, 심장이 벌렁댔다.
은우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유설희씨. “
앞에 걸어가던 여자의 어깨가 움찔, 하고 흔들렸다. 천천히 몸이 돌아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향했다. 역시나, 걸어가던 여자는 설희였다. 늦지 않았구나.
“ 어… 옥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설희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그녀가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체구, 하얀 피부에 동그란 눈, 귀여운 볼 살까지.
그녀의 가디건을 쓱 내밀었다.
“ 이거, 놓고 갔길래. “
“ 아아… “
그녀의 눈이 가디건을 향했다. 성한 오른 손으로 가디건을 설희가 받아 들었다.
“ 병원에 놨두셨으면 내일 가져갔을텐데.. “
“ 혹시 중요한 걸지도 몰라 가져왔어요. “
이상한가? 가디건이 중요한 물건일 리 없겠지?
사실 은우는 그녀의 가디건 따윈 어찌 되도 좋았다. 다친 곳이 어떻게 되었는 지 궁금했다.
에이, 참. 변명이 너무 구질구질하다.
“ 가디건 필요 없음 버릴까요? 줘요. “
. 은우의 말에 설희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 필요 없는 건 아니구요. 고맙습니다. “
은우의 날카로운 말투에 설희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눈 꼬리도 뾰족해졌고. 또, 또 이런다. 은우는 답답한 일이 있으면 말이 헛 나가곤 했다. 그냥 걱정해서 왔다고 했음 좋았을 걸.
“ 손은 괜찮아요? “
은우의 질문에 설희가 왼 손을 들어 보였다.
“ 네, 몇 바늘 꿰맸고, 선생님이 말씀 하신 대로 파상풍 주사도 맞았어요. “
다행이다. 별 일 없었던 모양이었다. 상처가 어떻게 된 지를 물어보고 나니 이제는 설희에게 할 말이 없었다. 둘은 인도에서 말도 없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뭔 말을 하지? 저녁이라도 먹고 가자고 할까? 아니면 데려다 준다고 할까?
은우의 머릿속을 여러가지 생각이 채웠지만, 튀어나온 건 엉뚱한 말이었다.
“ 그럼 갑니다. “
아악, 또 왜 그런 말을 하냐고.
“ 네.. 안녕히 가세요. “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 입 때문에 결국 은우는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뒤돌아 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