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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49일,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7.20

평탄한 성공 가도를 걷다 한 순간에 실패자로 전락한 승완. 삶을 포기한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악마라 칭하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 망자를 앞에 두고 엉뚱한 말만 한다. "새 인생은 즐겨. 날 유혹하는 건 대환영이고." 49일간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인물이 된 그녀. 게다가 전생의 인물들까지 엮여버린 상황에서 승완은 자신과 관련된 무서운 비밀을 발견하는데... (autor_ester@naver.com)

 
011. 네 몸은 너만의 것이 아니니까
작성일 : 17-07-29 20:14     조회 : 246     추천 : 0     분량 : 7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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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 - 33)

 

 "황금 같은 토요일에 등산이 웬 말이야?"

 "내 말이! 아, 오늘 소개팅 들어왔었는데."

 

  기획 1팀과 2팀의 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위가 만들어낸 계단을 올랐다.

  금쪽 같은 토요일, 황금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태양,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종적을 감춘 미세먼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사내 등산대회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승완 씨는 오늘 계획 없었어요?"

 "특별한 계획은 없었어요."

 "어머, 왜? 남자친구 없어요?"

 

  사내 행사는 이게 문제다.

  공개하고 싶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을 캐묻는 상사들은 눈치가 없는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승완은 몸의 주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에서 적당히 선을 그어 답했다.

 

 "네, 당분간은 누굴 만날 생각이 없네요."

 "에이, 그럼 안 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만들어 놔야지, 안 그럼 우리처럼 돼요."

 

  아마도 이번의 경우는 전자였나보다.

  기획 2팀 최 주임의 자조적인 말에 함께 걷는 여자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승완도 그녀들을 따라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에서 멈춰줬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최 주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기 수빈 주임처럼 예쁘고 능력 있는 사람 아니면 솔로로 죽는다고."

 

  1절만 했으면 좋았을 것을. 간혹 눈치 없는 사람들은 2절, 3절까지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물론, 여기서 눈치의 대상은 승완 한정이다.

 

 "수빈 주임님은 남자친구 있으신가 봐요?"

 "있는 걸로 모자라, 남자친구가 이 아가씨한테 목을 매잖아."

 

  당사자인 수빈은 가만히 있는데 되려 최 주임이 나서 설레발을 쳤다. 수빈은 그저 난감한 듯 가만히 눈웃음을 칠 뿐이다.

  승완은 은근히 상황을 즐기고 있는 수빈 몰래 하, 웃음을 흘렸다.

  어쩌지? 네게 목을 맨다는 그 남자 눈에는 벌써 너보다 젊은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러나 승완은 모른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머, 좋으시겠어요. 비결이 뭐예요?"

 "비결이랄 게 있나요. 그냥 서로를 믿고 사랑하면 되죠."

 "여러분, 우리 수빈 좀 봐요. 요즘 세상에도 이런 순애보가 있어요."

 

  흥, 눈물겨운 순애보 납셨네.

  승완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무리에서 조금 뒤처졌다. 앞서 걷는 수빈의 뒤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 등반이라 해도 쉬운 코스라 수빈은 사내에서 유명한 패셔니스타답게 청바지와 운동화로 가볍게 코디해 선글라스로 포인트를 줬다.

  동료 주임들과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앞서가는 뒷모습이 유혁의 집에서 보았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과 겹쳐졌다.

 

 '날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너는, 너희는 잘도 처 웃는구나.'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아올랐다. 승완은 짜디짠 눈물인지, 비릿한 핏물인지 모를 덩어리를 억지로 삼켰다.

  그러나 분노가 눈앞을 뒤덮은 나머지 그녀는 미처 발치의 돌부리를 보지 못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승완의 시선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으앗!"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는 데 실패한 승완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땅과의 접견 시각을 줄이려 애썼다.

  이대로라면 최소한 다리를 접질리거나 젖은 흙바닥 위를 구르는 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승완의 몸은 절반이나 앞으로 기울어져 승산이 없다. 눈에 선한 미래에 승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조심."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승완과 달리 지극히 일상적인 톤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단단한 팔이 승완의 팔 아래로 들어와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승완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기도 전에 뒤로 훅 잡아당겨 졌다.

  등 뒤로 딱딱한 몸체를 느낄 찰나, 잠시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두 다리가 사뿐히 땅에 닿았다.

 

 "아, 고맙..."

 

  감사의 말을 전하려 뒤로 돌리던 승완의 고개가 뻣뻣하게 굳었다.

  구겨진 소매를 잡아당기며 싱긋, 미소 짓는 이는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검정 바람막이는 과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스타일의 이준과 딱 어울렸다.

 

 "간밤에 비가 와서 경치는 좋아도,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요."

 

  조이준 대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성으로 승완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에서 구해준 것도 모자라, 미소 띤 얼굴로 부하 직원을 살피는 상사의 모습에 뭇 여성들의 눈에 하트가 떴다.

  이준은 무심한 듯 승완의 곁을 지나치며 여성들 몰래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네 몸은 이제 너만의 것이 아니니까."

 "으, 으익!"

 

  후우, 귓가의 솜털 하나하나를 스치는 바람이 승완의 감각 세포를 자극했다. 그녀는 황급히 귀를 두 손으로 가리고 바르르 떠는 몸을 숨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준의 발등을 힘껏 밟아주고 싶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불가능했다.

 

 "어머, 대리님. 지금 승완 씨랑 썸타시는 거예요?"

 

  최 주임의 설레발에 승완은 고개를 있는 힘껏 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도리도리, 간절함마저 밴 적극적인 부인에 이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장난 한번 쳐볼까, 잠시 고민한 그는 귀엽기까지 한 도리질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번만 특별히 봐주는 거다.

 

 "승완 씨가 넘어지면 우리 팀과 회사의 손해가 크니까요."

 "에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최 주임의 거듭된 의심에도 이준은 그저 싱긋, 올라간 입술 끝에 걸린 해사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30대가 가까워져 소개팅 가뭄을 맞이한 최 주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럼, 저희랑 같이 가요!"

 "아니, 저는..."

 

  부임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이준 자신은 모르지만, 그는 이미 회사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했다.

  너른 대서양만큼 딱 벌어진 어깨와 잔근육으로 남성미를 흘리는 팔뚝, 복근이 잡힌 게 분명한 탄탄한 상체와 흠잡을 데 없이 쭉 뻗은 두 다리는 물론이요.

  보라색이 감도는 흑발은 한쪽 눈을 가려 신비감을 더해주었으며,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헤픈 미소는 여심에 단비를 내려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최 주임이 애정하는 건 이준의 눈 아래에 자리한 작은 점이었다. 그가 눈웃음을 칠 때마다 매력을 100배 증폭시키니, 화룡점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대리님, 오이 드세요. 올라가면서 수분 공급해줘야 해요."

 "고맙습니다."

 

  최 주임 곁에서 마찬가지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른 박 주임이 틈새를 공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 사원들까지 나서기 시작했다.

 

 "대리님 피부 너무 좋으시다!"

 "혹시 피부 관리 하세요?"

 

  이준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이자 승완은 그녀들의 어깨와 등에 치여 뒤로, 뒤로 물러났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건 분명 그녀였는데, 지금은 가장 먼 사이가 되었다.

  이준과 그녀 사이에 두꺼운 벽이 생긴 기분이다. 어쩐지 속상해진 승완의 입술이 삐죽, 속살을 드러냈다.

 

 "흥! 나도 동기 있다, 뭐."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 했다.

  예전에는 동기들마저 승완을 시샘해 따돌렸다. 물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도, 해명하지도 않은 그녀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들도 승완을 좋아해 주고, 그녀 역시 마음을 열고 다가가고 있다.

  어느새 제 팀을 벗어나 삼삼오오 모인 동기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유환이 두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짹짹! 넘어질 뻔한 거 내가 다 봤지!"

 "기획부 왕자님이 구해주셨는데 소감이 어때?"

 "왕자님은 무슨."

 

  승완답지 않은 삐딱한 대꾸에 피식, 웃은 유환이 그녀의 머리에 손바닥을 올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저 앞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뒤통수만 빼꼼 올라온 남자를 본 승완의 입술이 다시 한번 속살을 내비쳤다.

  남자의 실상을 알면 저 여자들은 아마 까무러칠 거다.

 

 '저 녀석은 스킨십 중독에 뽀뽀만 좋아하는 능글맞은 악마라고, 악마!'

 

  승완은 저어기 멀어지는 잘생긴 뒤통수를 향해 베에, 혀를 내밀었다.

  그때, 유환이 승완의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유환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동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여어. 신입 동기들끼리 같이 가는 건가?"

 "안녕하세요, 구 부장님."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승완이 눈썹을 대놓고 찌푸렸다. 물론, 아주 잠시였다.

  성추행에 꼰대 기질이 다분하기로 유명한, 총무부의 구 부장이었다.

  또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뭣도 모르는 신입에게 조언한답시고 실상은 꼰대질하러 오는 것이리라.

 

 "그래. 동기들끼리 서로 도와야지."

 

  다 벗겨져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쓸어넘긴 구 부장이 하필이면 승완과 세찬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어때, 회사는 다닐 만한가? 쉽지 않지?"

 "아직은 초반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처음이라 기합이 팍 들어가 있겠지.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에 비하면..."

 

  승완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지겹고 불합리한 설교 타임의 시작을 알리는 단어, '그때에 비하면'이 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영자의 마인드로 생각하고 일할 줄을 몰라서 문제야."

 "그, 그렇군요."

 "내 회사다,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바칠 생각을 안 한단 말이야."

 

  승완과 눈이 마주친 동기들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승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으니 당연히 올해의 희생양은 세찬이었다.

  구 부장은 아예 세찬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소리를 높였다. 보다 못한 승완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말씀하신 그 마인드로 일하면 월급도 저분만큼 받나요?"

 "누구?"

 "그렇다면 기꺼이 이 한 몸 부서지라 일할 의향이 있습니다만."

 

  승완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무리의 맨 앞줄,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구 부장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괜히 이런 말하는 줄 아나? 다들 내 딸 같고, 아들 같아서 그렇지."

 "어머, 딸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아들 하나 있는 게 아버지 백 믿고 설치는 한량이란 것도 다 아는데, 어디서 구라를 쳐?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깐 승완이 싱긋, 미소 지으며 구 부장을 응시했다.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기 편이 되어줄 사람 역시 찾지 못한 그의 귀가 빠른 속도로 익어갔다.

 

 "흐, 흠흠. 아, 오 대리가 저기 있었네! 오 대리!"

 

  생각지 못한 신입사원의 반격에 당황해 재빨리 후퇴하는 구 부장은 농익은 토마토와 흡사했다.

  뒤뚱뒤뚱 팔자걸음으로 빨리도 뛰어간 구 부장이 멀찍이 떨어지자 숨죽이고 있던 동기들이 쿡쿡, 승완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오, 짹짹! 사이다 작렬이고요!"

 "역시 짹짹이야. 남달라!"

 "괘, 괜찮겠어? 그, 그래도 부, 부장님이신데."

 "괜찮아. 어차피 창피해서 소문도 못 내실 걸."

 

  찬사와 걱정이 섞인 동기들의 반응에 승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한 달 뒤면 안 볼 사람들인걸.

  이 몸의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거침없는 말투 역시 그녀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기에 승완은 그리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 속 시원하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구 부장이다. 노골적인 성희롱을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곤 했기 때문이다.

  수빈과 유혁에 이어 구 부장까지. 예전의 그녀였다면 꿈도 못 꿨을 통쾌한 한 방을 먹인 승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49일이니, 기도니 하는 건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과 전혀 다른 성격의 몸과 지낸 지난 2주 동안 그녀는 변했다.

  그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아서 승완은 사는 게 즐거웠다. 물론,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드디어, 정상이다!"

 "으아아아! 죽을 것 같아."

 

  승완과 무리는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사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이미 일찌감치 올라와 명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상에는 간밤에 내린 비의 여파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자연이 깎아놓은 거대한 절벽은 제 밑으로 아찔한 장관을 선사했다.

 

 "경치 하나는 좋다니까."

 

  6년째 억지로 끌려 올라온 이 산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 경치다.

 

 "그러게."

 "어, 엄마야!"

 

  승완은 쿠웅, 하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려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았다.

  그녀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목소리를 낮춰 갑자기 튀어나온 상대방에게 항의했다.

 

 "제발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좀 마. 너 지금 인간이거든!"

 "난 널 한참 찾았거든."

 "왜?"

 

  이준이 씨익, 날카로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몸을 승완에게로 숙였다.

  승완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듯,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날 저 시끄러운 여자들 틈에 버려두고 잘도 가더라?"

 "너야말로 저 여자들 틈에서 싱긋싱긋 잘만 웃더라. 흥, 아주 좋아죽던데?"

 "어라, 방금 그거 질투야?"

 

  제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비죽거리는 승완을 보는 이준의 눈에 즐거움이 빙글빙글 어렸다.

  승완은 뜨끔, 가슴이 데인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질투라니!

 

 "아니거...!"

 "짹짹!"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장난 기 어렸던 이준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유환이 이준과 승완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승완이 좀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이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유환은 승완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밀었다.

  유환의 등장으로 이준과 떨어진 승완은 크게 안도하면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끼리 단체 사진 하나 찍자!"

 "나, 나, 난 모, 못 하겠어."

 

  동기들이 모인 정상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유환이 나서서 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멀찌감치 서 있던 세찬이 손을 저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얀 백지장과 다름없었다.

  며칠 전, 세찬이 털어놓은 고소공포증을 기억한 승완이 그의 곁으로 갔다.

 

 "다 같이 찍으니 아무 일 없을 거야."

 "그, 그, 그렇지만..."

 "괜찮아. 너무 뒤로 가지 말고 앞쪽에서 찍자."

 "어이, 두 사람! 얼른 붙어!"

 

  승완이 하얗게 질린 세찬을 토닥이며 그의 팔을 강하지 않게 잡아당겼다.

  유환의 재촉에 세찬은 눈을 질끈 감고 게걸음을 걸었다.

 

 "으, 으아아..."

 "세찬아, 잠깐. 뒤로 가지 마. 여기서 더 움직이면..."

 

  불안한 듯 자꾸만 움직이던 세찬은 그의 의지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등에 치여 뒤로 밀려났다.

  승완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겁에 질린 세찬은 되려 그녀의 팔을 당겼고, 승완의 몸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라?"

 

  순식간이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미끄러운 바위 위를 밟은 운동화가 그대로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쑥 빠졌다.

  비에 젖은 바위도 문제였지만, 등산을 가볍게 여기고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은 게 화근이었다.

 

 "스, 스, 승완아!"

 

  세찬이 급히 팔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승완은 세찬의 눈이 한계치까지 커지는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늘도 없이 높은 고도에서 태양을 마주하려니 눈이 시렸다.

 

 "어? 짹짹!"

 "꺄악, 승완 씨!"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승완을 부르는 사람들의 소리가 귓가에서 아스라이 번졌다.

 

 "백승완!"

 

  신기하게도 이준의 다급한 소리만큼은 멀리서도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승완은 목구멍이 꽉 막혀버려 그에게 답할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보라색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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