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인가?'
은재는 파묻었던 얼굴을 슬쩍 들어 올리며 책상에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손으로 더듬거렸다.
애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애석하게도 책상위의 콘셉트 시안 종이만이 은재의 손에 스칠 뿐, 그 흔한 사무용 칼 이라든지 가위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뚜벅뚜벅 거리는 남자의 구둣발소리가 점점 은재의 책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재는 아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행동에 대비해, 가까스로 아까 자신이 똑딱 거리던 볼펜을 찾아 꽉 쥐고 엎드려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은재의 책상 앞에서 멈췄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적당히 그을린 손가락 하나가 엎드려 있는 은재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일어나요, 악!”
찰나의 순간, 은재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쥐고 있던 볼펜으로 의문의 남자의 팔등을 콱 찍었다.
“이…, 이 여자가. 미쳤어?”
은재의 기습공격에 놀랜 남자가 들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위로 툭 떨어트리며, 볼펜에 찍힌 팔등을 감싸 쥐었다.
은재는 아파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기양양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자신의 책상위로 떨어진 갈색 서류봉투에 눈길을 돌렸다.
“이게 뭐야. m&m? 어. 이거 우리 회사 서류봉툰데….”
은재가 홀린 듯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어 제일 앞장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렸다.
“m&m과 s기획 모델 계약서…, 모델 계약서?!”
글씨를 읽어가던 은재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앞을 바라보았다. 은재의 눈앞에는 자신의 볼펜에 찍혀, 팔등을 감싸고 씩씩대고 있는 모델 김 환이 떡하니 서있었다.
“허…, 헐….”
“헐? 허얼? 이 여자가 진짜.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 되는 소리야?”
“미, 미안해요. 난 진짜… 몰랐어요. 진짜. 그 쪽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어요.”
은재는 지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 죽을 맛 이었다.
김 환이 회사로 직접 찾아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틀이 지나도 연락 한 통 없어 사실상 90프로 이상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근데 그 싸가지 만땅 자식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건 횡재였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다.
분명히 계약서를 들고 자신을 찾아 온건, 계약을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저 변덕쟁이 자식이 이 일을 빌미삼아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면 자신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은재의 속마음을 모르는 환은, 지금 일어난 일이 황당하기만 했다.
처음 계약서를 자신이 가져다준다고 했을 때, 망희는 그럴 필요 없다며 전화한통이면 그쪽에서 다시 찾아 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환은 자신이 가겠다고 꾸역꾸역 우겼다. 차라리 자기가 대신 가져다주겠다던 망희를 제치고 m&m 회사 앞에 왔을 때, 환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다.
자신이 왜 그 여자를 위해 이까지나 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틀 동안 연락 한 통 없이 은재를 골려준 뒤 계약서를 들고 온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회사에 들어와 복도를 지나다니던 수많은 여자직원들의 눈빛을 받으며 마케팅홍보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환은 텅 비어버린 사무실 한 편에서 작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 여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어투로 뱉어내는 단어들은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이마에 살짝 힘줄이 솟아났지만 꾹 참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좋게 생각하면 자신의 밀당 방법이 그 여자에게 먹힌 것이니.
조금 씩 책상으로 다가가자 책상에 엎드려 움찔거리는 은재의 실루엣이 가깝게 보였다. 이윽고 책상 앞에 다다른 환은, 은재를 일으키기 위해 그저 어깨를 톡톡 두드렸을 뿐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다. 은재가 쥐고 있던 볼펜이 자신의 팔등을 세차게 찍어버린 것.
환은 들고 있던 계약서를 떨어트리며 팔등을 감싸 쥐어야 했다, 허나 더 기가 막힌 건, 자신이 누굴 찌른 건지도 모르고 의기양양해 하는 은재의 모습이었다.
환은 아릿해져 오는 팔등을 감싸 쥐고 은재의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서류봉투 겉면을 확인한 은재가 봉투 안을 열어 서류를 읽어 내리고, ‘모델 계약서?’ 라고 소리치고, 자신을 본다.
그리고 나오는 말이 고작 ‘헐?’
이 여자 맛이 간 게 분명하다.
아니고서야 이 상황에서 저딴 소리가 제일 먼저 튀어 나올 리가 없지.
상황 파악이 안 되냐고 물어보자 그제야 미안하단다.
진짜 이 여자를 죽여 살려?
‘뒤 늦게 사과 한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은재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고개를 살짝 틀었다. 환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따끔따끔한 시선이 은재의 목덜미로 자꾸 내리 꽂혔다.
몇 분 동안의 조용한 정적이 사무실에 맴돌았고, 결국 참다못한 은재가 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미,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사람이 사과를 했으면 받아준다, 싫다! 노선을 정확히 해줘야죠.….”
자신의 잘못에 한껏 움츠려 있던 은재가 용기내서 던진 말에 환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피식 웃었다.
“하―. 지금 당당할 때가 아니잖아, 이 여자야.”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어, 어쩌자고 여기까지 찾아 온 거예요?”
환의 말에 아까의 볼펜사건이 다시 떠오른 은재가 울상을 지으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더니 화제를 돌렸다.
“계약서 보고도 내가 온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 m&m이랑 계약하러 왔다. 근데 그렇게 말 돌리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본데…, 그렇겐 안 되지.”
“무…, 무슨 말이에요.”
“계약서 다시 줘봐.”
환의 손이 은재의 얼굴 앞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적당히 그을린 까무잡잡한 손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와 자신의 코끝을 스쳤다.
순간. 향기가 너무 좋아 환의 손을 잡고 싶다고 느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은재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 다 읽어봤어. u&c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여기가 훨씬 더 좋더라고. 계약 조항도 맘에 들고.”
환의 입에서 긍정적인 문장이 흘러나오자 계약서를 넘겨주고 어두워졌던 은재의 표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티는 안냈지만 은재의 속은 지금 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좋나? 얼굴이 갑자기 피네 펴. 그런데 한 가지 더.”
“……?”
“계약 조항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생겨서.”
“그게 뭔데요.”
왠지 불길하다, 불길해.
환의 얼굴에서 잠시 악마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금방 사그라졌다.
은재는 초조하게 환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6조항, m&m 마케팅홍보팀 이은재는 본인 김 환과의 계약이 끝날 때 까지 무조건 내 지시를 따른다. but, 토 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