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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공작부인 클로에
작가 : 봄고양이
작품등록일 : 2017.7.25

죽은 남편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 사생아의 후견인은 데온 파이어. 한 번도 남자에게 빠진 적 없는 공작부인 클로에의 앞에 나타난 그가, 클로에는, 진심으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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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29 00:02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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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깨시죠. 아이는 흥정의 도구가 아니에요! 이봐, 그 방에 내 아들이 있으니 마차에 데려다 놓도록 해.”

 

 마부가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데온은 말없이 클로에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의 눈초리는 그녀로 하여금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만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당신 아들이란 말이오? 내 아들이라면 모를까. 피 한 방울 안 섞이지 않았소.”

 

 “현실적으로 피가 섞이고 안 섞이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는 세이비어 가문의 안주인이고,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로빈이야 말로 아들인 셈이죠.”

 

 “그런 식이라면 그대도 상당히 타산적이라 할 수 있겠군.”

 

 데온이 엄지로 입술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클로에의 눈이 홉떠졌다. 즉흥적인 행동이었음에도 몹시 색기가 있었다. 아마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여자 앞에서 행동하는 듯했다. 틈만 나면 유혹하는 듯한 눈빛과 포즈를 취하면서 상대방을 부추기는 짓. 점점 더 그녀는 그가 경멸스러웠다.

 

 “부인이라고 정확히 불러주세요. 나도 당신에게 머저리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순간 데온이 눈을 크게 뜨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무심코 클로에를 미망인이나 유부녀가 아닌, 여자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쉽게 보내줄 수 없다는 건 알거요. 공. 작. 부. 인.”

 

 갑자기 심술궂게 공작부인이라며 데온이 표현을 바꾸자 클로에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한 음절 한 음절 딱딱 끊어 말하는 말투도 몹시 짓궂게 느껴졌다. 역시 기분 나쁜 남자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준비되었나? 가도록 하지.”

 

 마침 마부가 돌아왔기에 클로에는 데온을 무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다음 그를 등지고 저택을 나가려는데 손목이 휘어 잡히고 말았다. 남자에게서만 발산되는 엄청난 힘에 그녀는 오싹해졌다. 데온은 그저 잠시 붙들어 두었을 뿐인데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느껴졌다.

 

 클로에는 공작의 사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한순간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경호원 명목으로 그녀가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기사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나마도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으니, 모든 권리와 권한이 남편이나 부친에게 주어져 있는 탓이었다. 혼인을 했건 하지 않았건 여인에게 권리 따위는 없는 세상이니까.

 

 이제 아들이 생겼으니 로빈이 정식으로 공작가를 잇게 되면 조금 나아질지도 몰랐다. 로빈이 의붓어머니의 편을 들어준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클로에게는 거기까지 걱정할 틈이 없었다. 일단 하인 하나 없는 깡촌 마을 작은 저택에서 어떻게 아이의 교육을 보증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로빈을 돌보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 보상하시려고.”

 

 클로에를 벽에 밀어붙이며 데온이 나직이 말했다. 그녀는 이런 남자에게 면역이 없었지만 남편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장사치들을 믿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파이어 가문도 언급이 되었던가? 작위도 없고 혈통도 모자란 그들에게 돈은 곧 신이어서 입만 열면 동전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데온에게서 동전 굴러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했던 것과 약간 달랐다. 비록 여전히 계산적인 말들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가령 로빈이 태어날 때 두 손으로 직접 받아냈다는 것이 그랬다. 단추를 벗겨내던 섬세한 손길은, 시중을 받는데 익숙한 클로에를 잔뜩 긴장시키기도 했다.

 

 깊게 생각할 필요 따위 없잖아. 클로에는 스스로를 채근하며 데온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유혹하는 거요? 그대의 손은 간지러운걸. 손가락은 이렇게 길고 고운데 말이오.”

 

 클로에의 손을 덥석 잡아 올리며 데온이 짓궂게 대꾸했다. 그는 여전히 냉담한 얼굴이었으나 클로에를 괴롭히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발끈했다. 힘이 없고 약한 여인이라는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이 감미로운 음성이나 상대편에서 스스럼없이 단단한 육체를 들이 밀 때마다 움츠러든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표현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죄 없는 여인을 괴롭히는 게 좋은 건가요?”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겠지. 그대가 로빈을 훔쳐 가면 그건 도둑질이니까.”

 

 “내 애를 내가 데려가겠다는 건데……!”

 

 그때 데온이 클로에의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아까 자신의 입술을 훔치던 그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당장이라도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올 듯한 손가락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부터 보였다. 얄궂게도 데온의 입술이나 손가락, 그것들은 전부 매력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데온은 순식간에 가면을 쓰고 사람 좋은 미소를 억지로 쥐어짜냈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껄떡대는 가벼운 장사치에서 갑자기 얼음왕자처럼 미끈하고 차가운 협상가로 돌변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그의 변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화가 치밀게 만드는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저리 가.”

 

 클로에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데온이 두려웠다. 그와 밀착해 있는 것도 무섭고 정작 달콤한 말과 유혹하는 듯한 행동에 비해 두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이 없어 소름이 끼쳤다.

 

 “……이런 때에 절실히 협상이 필요한 거요. 얼어붙어서 나를 빤히 볼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죠? 난 협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순간 오싹해져서 클로에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혹시 육체관계를 요구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클로에는 남편에게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고 초야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은 적도 없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면에서 틀림없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었다. 단지 겁박하기 위해서라면 이 남자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도.

 

 “로빈을 데려가는 대신, 공작부인께서 여기 머무르시오. 이런 게 협상이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빼앗기는 거 말이지.”

 

 클로에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지만 데온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는 자신의 판정에 만족한 듯 미련 없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마부에게 직접 공작령으로 떠나라는 지시까지 했다.

 

 “웃기지 말아요. 이유가 뭐죠? 나를 왜 가둬두려는 건데요?”

 

 “당신 방은 이쪽이야.”

 

 그대에서 당신으로, 표현이 몹시 거칠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조에 은근히 깔보는 구석마저 느껴졌지만 클로에는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데온이 그녀의 팔을 이끌어 작은 방에 밀어 넣는 동안 단 한 번도.

 

 “아앗!”

 

 클로에는 내팽개쳐지듯 침대로 떠밀렸다. 매듭이 헐거운 나이트가운은 자극적인 방향으로 풀어헤쳐졌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가슴을 가릴 생각조차 못한 채 데온을 응시했다. 배신감과 분노가 커다란 두 눈동자에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

 

 “이 늦은 시각에 달려 온 만큼 여독을 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이렇게 비좁은 침실에서 말인가요?”

 

 “한 번 누워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느긋하게 대꾸한 데온이 클로에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클로에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두꺼운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만약 죽임을 당하더라도 알아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물론 판이 어떻게든 찾으러 올 테고, 그 때문에 과감히 여행길도 나설 수 있었지만 막상 참극이 벌어지고 나면 너무 늦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클로에의 공포심을 달아나게 만드는 데온의 손길이 또 한 번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뒷목을 가볍게 주물러 주더니 베개를 끌어왔다. 정말 그 말 그대로 쉬게 해 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행동이 왜 이렇게 위협적이람? 클로에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데온은 침대에서 떨어져 문을 닫고 나갔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고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야.”

 

 확실히 침대 매트리스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 뻔했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태평하다고 할까 대범하다고 할까 하는 성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가 잠을 잔 것은 한 시간 남짓도 되지 않았다. 일단 피로가 풀리고 나자 클로에는 의욕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옷장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어보니 징 박힌 부츠와 여성용 링메일, 그리고 단검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사용한 흔적이 역력했기에 클로에는 경외심에 사로잡혀 그것을 어루만졌다. 어떤 여인이 이것을 사용했을까? 그녀는 남자 형제들보다도 훨씬 더 말을 잘 타고 목검도 곧잘 휘두르곤 했으나 결국엔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죽은 남편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워야 하는 신세였고.

 

 삶이 참 거지같다는 상스러운 표현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클로에는 기품 있는 미소로 자신을 단속했다. 거짓 웃음이었고 단 한 번도 자유롭게 웃어본 적 없는 그녀였으나 어떤 감정이 터질 듯 치밀어 올라올 때, 억누르는 효과는 있었다.

 

 클로에는 부츠에 발을 꿰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에 딱 맞았다. 다리 보호대는 가죽 끈으로 고정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도 꼼꼼히 다리에 묶고, 박차도 달았다. 입고 있는 옷은 나이트가운밖에 없었으나 단검으로 길이를 줄여 할 수 있는 한 몸에 딱 맞게 고정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링메일 갑옷을 입고 허리띠를 단단히 맸다.

 

 이제 남은 것은 마구간을 찾아 세이비어 공작령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머저리 같은 남자. 얌전히 갇혀있을 줄 알았나보지? 클로에는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 어제 마부가 복도에서 나타났을 때, 어디로 돌아가는지 주의 깊게 봐 두었던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나가면 마구간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샛문도 찾아낸 그녀인데, 그 정도 일에 육감을 발휘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정말로 클로에는 어렵지 않게 마구간을 발견하고 마음에 드는 말까지 만났다. 돈이 많기 때문인지 명마가 한둘이 아니어서 고르기가 미안할 정도였는데, 양끝이 루비로 장식된 재갈을 물고 있는 백마가 먼저 신호를 보내 왔다. 그녀가 앞을 지나가자 콧김을 푸르르 푸르르 내뿜으며 주둥이를 툭툭 부딪쳤던 것이다.

 

 “내가 널 좀 빌려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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