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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공작부인 클로에
작가 : 봄고양이
작품등록일 : 2017.7.25

죽은 남편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 사생아의 후견인은 데온 파이어. 한 번도 남자에게 빠진 적 없는 공작부인 클로에의 앞에 나타난 그가, 클로에는, 진심으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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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29 00:01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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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하는 거야?”

 

 “이 저택에는 하녀 따위 없소. 그런 건 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줄 모르는 귀족들 나으리에게나 필요한 거지.”

 

 “손가락을 아무리 잘 써도 단추는 못 풀어. 보면 몰라요?”

 

 데온의 시선이 클로에의 늘씬한 등에 머물렀다. 매끄러운 뒤태는 남자들을 깨나 울렸을 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검지를 세워 단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느릿느릿 더듬었다. 그 행동에 그녀는 말을 잊었다. 몹시 관능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구료.”

 

 약간 허스키하게 잠긴 데온의 음성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주지.”

 

 젖은 단추를 푸는 것은 능숙한 하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데온은 1번 단추부터 50번 단추까지 막힘없이 술술 풀어냈다. 틀림없이 많은 여인들의 옷을 이렇게 벗겼을 남자였던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이걸 허락하고 있지? 그의 섬세하지만 아니꼬운 손길이 코르셋 매듭에 닿자, 그런 생각은 하얗게 타들어가 버렸다.

 

 클로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을 고르는 것이었다.

 

 “이, 이제 됐어요.”

 

 겨우 데온을 말릴 수 있게 된 순간, 클로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그때 코르셋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그는 예상치 못하게 신사적인 대응을 했다. 올바른 처신은 아니었지만. 클로에를 품에 안아버린 것이었다.

 

 클로에는 헐떡거리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기침이 목 깊은 곳에서 터졌다. 그녀는 데온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몇 번 콜록거렸다. 그의 몸이 단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기침이 잦아질 때쯤이었다. 그리고 체취도. 어째서인지 카밀라 꽃향기가 났다. 남자들에게는 땀 냄새나 진득한 수컷의 향기만 날 줄 알았는데.

 

 “됐다고, 콜록, 했잖아요.”

 

 데온이 양손을 들어 클로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는 기침마저 낼 수 없게 되었다.

 

 “확실히 이래서는 씻을 수 없겠군.”

 

 귓가에 속삭이는 데온의 음성에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치명적인 독 같은 것을 내뿜고 있거나.

 

 “비켜드리겠소. 그런 다음에는 로빈을 보게 해 드리리다.”

 

 “정말인가요?”

 

 “보는 것 정도가 무슨 죄가 되겠소. 앞으로 협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음성, 눈빛, 몸, 촉감. 많은 것들을 이용해 클로에를 흔들어 놓고 데온은 무책임하게 나가버렸다. 그가 떨어졌을 때 그녀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클로에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자존심이 상한다든가, 황당하다든가 하는.

 

 협상이라니. 따뜻한 물에 몸을 풀면서 클로에는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쪽에 뭘 요구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이윽고 클로에가 나이트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밖으로 나오자, 데온은 그녀를 또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바로 그 문제의 ‘사생아’, 로빈이 자고 있는 침실이었다.

 

 “세상에.”

 

 어둑어둑한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로빈의 얼굴이 천사처럼 예뻤기 때문이다. 잠든 아이는 그 존재 자체로 그녀로부터 없던 모성애를 끌어냈다. 정확히는 클로에가 자신의 안에 있을 거라고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감정이었다.

 

 “이 아이인가요?”

 

 확인할 필요도 없지만 클로에는 물었다. 슬쩍 올려다 본 데온의 눈빛이 예상 밖으로 따스해서 놀랐다. 아이를 군식구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내 누님을 퍽도 고생시킨 녀석이오.”

 

 데온이 손을 뻗어 로빈의 이불을 고쳐서 잘 덮어주었다. 드레스 단추를 벗기던 손길이 떠올라 클로에이 뺨이 조심스럽게 달아올랐다.

 

 “누님이라면……”

 

 “죽었소. 이 녀석을 낳고 이 년 뒤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클로에는 겁에 질렸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데온은 몹시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공작님이 잘못하신 건가요?”

 

 “흠?”

 

 “……내 남편 말이에요. 당신 누님이 세상을 떠나는 데 일조했냐구요.”

 

 “혹시 대신 사과라도 하려고 묻는 거요?”

 

 허를 찔린 듯하여 클로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지나친 간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속사정을 깊게 알 필요는 없었다.

 

 “아이가 깰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침대 모서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데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홱 당겼다.

 

 “데려가겠다는 거요? 안 될 말이오.”

 

 “이 아이는 세이비어 가문의 아이입니다. 부계의 피를 따라야죠. 당신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어요. 내가 주교님을 모셔 와야 하나요?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 피해를 꽤 입을 텐데요?”

 

 귀족의 족보는 주교를 거쳐 정식 등재되며, 최종적으로 황제의 승인을 받는 구조였다. 그러나 사생아는 인정받기가 힘들었다.

 

 “황제와도 친분이 있다? 과연 공작부인이군.”

 

 비꼬는 건가?

 

 “그래도 못 보내오. 내게도 양육권을 주장할 근거가 있고.”

 

 “뭐죠?”

 

 “로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나요. 그것은 내 미들네임을 딴 거지.”

 

 “미들네임도 있다구요?”

 

 미들네임을 가지고 있는 평민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머릿속으로 데온 R. 파이어라는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어감이 퍽 괜찮았다. 물론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인상은 착각이겠지? 그녀라고 제국의 모든 귀족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미들네임에 로빈이 들어가는 가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비웃는 표정이군.”

 

 데온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클로에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법에 대해 잘 모른다면 상기시켜 드리지. 제국법에 따르면 미들네임을 준 부모에게 우선적으로 양육권이 주어지오. 다시 말해, 그대보다는 내게 우선적으로 권리가 있단 뜻이지.”

 

 이런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클로에는 난감한 듯 손톱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군요.”

 

 “협상을 원하는 거요. 나는 장사치이니까, 그런 것에 익숙하지. 도리니 윤리니 노블리스 오블리주니 하는 고상한 잣대를 들이대 보았자 대화는 안 될 거요. 무엇보다 로빈이 따라가지 않을걸. 나는 녀석이 태어날 때 이 두 손으로 직접 받아낸 사람이오.”

 

 협상? 그런 것에는 자신이 없는 클로에였다.

 

 “무엇보다 당신이 아이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순간 클로에는 발끈하여 데온을 쏘아보았다.

 

 “내가 어째서 아이를 괴롭힌다는 거죠?”

 

 “제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유모에게 맡기고 다 자랄 때까지도 외면한 채 사는 귀족부인들이 어디 한둘이오?”

 

 “나는 아니에요!”

 

 커다란 목소리에 로빈의 눈썹이 움찔했다. 클로에는 절로 드는 미안한 마음에 “세상에.”라고 탄식하면서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옳지. 계속 꿈을 꾸고 있으렴.”

 

 클로에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상냥한 어투가 로빈의 잠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데온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나가서 이야기해요.”

 

 데온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클로에는 밖으로 나갔다.

 

 “비켜요.”

 

 클로에가 사납게 데온을 밀쳤다. 그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었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데온과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좁히는 게 두려웠다.

 

 “나도 그대와 닿는 게 썩 유쾌하진 않소. 귀하신 몸이니까. 임자도 있고. 여하간 서재로 갑시다.”

 

 데온은 귀족을 싫어하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서로 싫어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어. 속이 좁은 인간으로 살다가 낭패를 보는 건 어차피 그쪽 사정 아냐.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남편은 죽었어요. 그래서 로빈이 필요하고요.”

 

 클로에가 힘주어 말하자 데온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마부가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고 있는 게 보였다. 충분히 쉬고 나서 주인을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그쪽을 향해 손짓을 하면서 약속했다.

 

 “괴롭히지 않겠어요. 그러니 협상 따위는 접어두고 데리고 가게 해 줘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양육비를 내는 게 어떻소?”

 

 데온이 무뚝뚝하게 제안하자 클로에는 가느다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산산 조각나고 갑자기 그가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장사꾼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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