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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공작부인 클로에
작가 : 봄고양이
작품등록일 : 2017.7.25

죽은 남편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 사생아의 후견인은 데온 파이어. 한 번도 남자에게 빠진 적 없는 공작부인 클로에의 앞에 나타난 그가, 클로에는, 진심으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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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29 00:00     조회 : 246     추천 : 0     분량 : 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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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아이를 내놔요. 한시가 바쁘니 차 대접은 사양하죠.”

 

 문 너머로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클로에는 발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세이비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내놓으란 말입니다. 후견인을 자처해서 뭘 얻어내려는 건지 모르지만 헛짓이에요. 친절하게 경고하는 것이니 이만 포기하세요.”

 

 연달아 엄포를 놓았지만 데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초조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클로에는 위협적으로 노커를 두드렸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조금 더 공손히 부탁하는 게 어떻겠소?”

 

 부탁? 부탁이라고?

 

 안 그래도 죽은 남편이 싸질러 놓은 똥을 처리해야 하는 이 판국에, 귀족도 아닌 자에게 고개를 숙이라니 클로에에게 먹힐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턱을 들고 상대방을 향해 깔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꿈 깨세요. 이미 충분히 존중해 드리고 있으니까. 내가 경어 쓰고 있다는 걸 몰라요? 교양이 없는 장사꾼이라 이 정도 품격 있는 표현은 어렵나요? 듣기로는 사채업도 겸한다던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데온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탁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순식간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다급해진 그녀는 다시 노커를 두드렸지만 반대편에서는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무식한……”

 

 꿩 대신 닭이라고, 마차로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클로에는 마부를 찾았다. 그러나 마차도 마부도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안내를 받아 마구간으로 피신한 뒤였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홀로 남아 무심히 쏟아지는 빗줄기에 오래도록 몸을 맡겨야만 했다.

 

 “이제 좀 공손해질 마음이 들었소?”

 

 비가 잦아들자 데온이 얄밉게도 물어 왔다. 클로에는 창문을 노려보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문 앞에서 죽치고 계셨나 보지요? 참으로 신사로군요.”

 

 저쪽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클로에는 움찔했다. 그녀가 빗속에서 불태우던 전의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뭐야, 이 남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발견하고 만 호감 가는 데온의 모습에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고집스러운 여자로군.”

 

 “나에 대해 뭘 알기에요.”

 

 클로에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것을 찾으러 왔다. 기 싸움에서 지면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젖은 채로 계속 있을 거요?”

 

 아직도 항복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인지 데온이 떠보았다. 클로에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물었다.

 

 “내 마부와 마차는 어떻게 했죠?”

 

 “물론 손님에게 걸맞은 곳으로 안내했소. 마부는 아마 마른 짚이 높이 쌓인 마구간에서 마구간지기와 포커를 치고 있을 거요.”

 

 “나는 손님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대는 세이비어 공작부인이겠지? 그렇다면 손님이 아니지. 우리 가문 남자를 빼앗으러 온 것이니. 하지만 마부나 마차는 죄가 없지 않소.”

 

 참 합리적이로군. 클로에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 아이는 우리 가문 남자에요.”

 

 “글쎄. 솔직해져 보시오. 세이비어 공작이 죽지 않았다면 이쪽에는 영원히 볼 일 없었겠지. 로빈은 영원히 사생아로 외면 받으면서 살았을 거고.”

 

 힘을 주어 단언했건만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나머지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또한 데온의 말 역시 사실이었다.

 

 “이름이 로빈인가요? 로빈 세이비어로군요. 이름을 바꾸지는 않겠어요. 귀족이니까 미들 네임 정도는 주어야겠지만.”

 

 데온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아니꼬운 남자였다. 클로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정돈하려다 재채기를 했다.

 

 “그렇게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거요.”

 

 무슨 상관이람. 클로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걸레 짜듯 거침없이 쥐어짜며 생각했다. 데온은 그녀의 금발머리에서 굵직한 물줄기가 주르륵 흐르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작 장본인인 클로에는 미친놈 보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요? 이번에도 감기에 걸릴 때까지 구경할 건가요?”

 

 “궁금하다면 만나게는 해 주겠소. 하지만 로빈을 데려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오. 그러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 드리지.”

 

 “퍽도.”

 

 이번에는 클로에가 콧방귀를 뀔 차례였다. 데온은 싫으면 관두라면서 창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저렇게 무식하고 신사도라고는 없는 남자는 처음이어서 그녀는 화 낼 의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경멸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냥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클로에는 낑낑대며 무거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도톰한 공단 소재는 물론 드레스 안쪽의 페티코트까지 물을 잔뜩 먹어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내 치마를 거침없이 구겨버렸다. 그러자 발밑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많은 물이 쏟아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클로에는 드레스 끝자락을 한 손에 말아 쥐었다. 허벅지가 드러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유부녀인데 어떠랴 싶은 생각도 있었다. 데온처럼 젊고 의욕적인 무역상이 음험한 생각을 품을 리도 없고 말이었다. 여하간 그녀는 그 상태로 저택을 빙 돌아갔다. 샛문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갈 작정이었다.

 

 마침내 클로에는 적당한 입구를 발견해냈다. 덩굴장미로 뒤덮여 있어 자칫 못 보고 지나가기 쉬운 문이었다. 크기도 몹시 작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는데, 마치 요정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요정 소로우들의 전용 입구처럼 보였다. 비록 동화 속에 나오는 존재이기는 하나, 그녀는 아직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보고 들었던 꿈결 같은 이야기들을. 모두에게는 비밀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지 않은 미망인은 공작부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었다. 클로에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과감히 문을 열었다. 오늘 그 로빈이라는 녀석을 반드시 데려가야만 했다. 다만 수수께끼 같기는 했다. 저택의 외견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밋밋하고 심지어 싸구려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토록 은밀하고 아기자기한 샛문이 있다니.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별 짓을 다 하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클로에는 몸을 잔뜩 구부리고 문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보기에는 예뻐도 확실히 불편하기는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드레스가 장미 가시에 할퀴어 애처롭게 찢어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 모습은 상당히 당당했다.

 

 “쥐새끼처럼 기웃거리다니. 공작부인 품위가 말이 아니로군.”

 

 클로에가 겨우 문을 통과하자마자,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남자가 데온이로구나. 그녀는 한순간 감탄했다. 그의 성격이 어떻게 생겨먹었건 간에 외모만큼은 준수한 편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압도적인 존재감일 터였다.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여서일까. 클로에는 데온의 키가 천정까지 닿을 만큼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고 보니, 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그는 훤칠하고 덩치도 좋았다. 배 나온 장사치를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기사로 보였다. 그것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자수성가형.

 

 “치마는 좀 내리는 게 어떻겠소.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면.”

 

 데온이 무심히 지적하자 클로에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아……”

 

 “자랑스러울 만은 하군.”

 

 클로에가 다급히 드레스의 길이를 조절하는 동안 데온이 또 한 번 지나가듯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들어 그를 직시했지만 이미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본 걸까? 클로에는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탄력적인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 안쪽으로 빗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뭐 어때. 클로에는 시원시원하게 생각했다. 아이만 없을 뿐, 그녀는 유부녀이고 미망인이었다. 저런 젊고 잘생긴 남자의 취향이 될 리는 없으니 민감하게 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데온이 껄떡쇠도 아닌 듯 보였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두 눈동자에는 약간의 경계심마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끼자마자 클로에의 입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허리를 접어가며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내는 동안에도 데온의 표정에는 약간의 변화조차 없었다.

 

 마침내 클로에가 진정하자, 데온이 냉정히 말했다.

 

 “일단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떻겠소. 배워먹지 못한 사내이기는 하나, 일단 여인이 이렇게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아프오.”

 

 한껏 친절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을 띠고는 있었으나 단어 하나하나를 쪼개보면 단면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클로에는 데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반가운 소리군요. 하녀를 보내줘요. 이왕이면 물을 따뜻하게 데워주고요.”

 

 “복도를 따라 세 번째 방으로 가면 되겠소. 그 안에 욕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지.”

 

 요구사항을 듣기는 한 것일까 염려하면서 클로에는 데온이 이야기 한 방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는 허름 없는 저택이지만 안은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욕실 같은 경우, 공작령보다 더 나은 것처럼 보였다.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는 확실히 없는 것이지만 더 놀라운 점은 불의 요정인 카쉬파의 조각이 유리 덮개에 싸인 채, 물을 데우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쉬파의 조각은 필요할 때마다 얼마든지 불을 쓸 수 있고 휴대까지 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확실히 돈이 많은 자임에 분명했다, 데온 파이어라는 남자는. 뭘로 해먹었건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 돈으로 주교나 황제를 사주해 로빈을 돌려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클로에는 염려 가득한 채, 허리를 젖히며 양손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윽고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도도하게 말했다. 늘 했던 것처럼.

 

 “드레스 단추를 풀어줘. 총 오십 개야. 하나도 빼먹지 말고. 아, 코르셋은 주의해서 벗겨야 해. 이건 구할 수도 없는 거라서.”

 

 피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손가락이 등 뒤에 닿았다. 직감적으로 하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데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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