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내 생일은 말이야..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 없는... 진수상추라는 거였다.
[어서 앉아!]
태일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르켰다.
[어..응]
어느새 블로어는 앨리샤 옆의 자리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누웠다.
[완전 진수상추다..]
내가 태일러에게 속삭이자 태일러가 물었다.
[진수상추가 뭐야?]
태일러가 모르는 게 있다니, 심지어 내가 아는 걸! 태일러를 좀 놀려볼까나?
[진수상추를 몰라? 에이, 설마~]
태일러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모를 수도 있지. 어서 말해봐, 뭔데? 듣고 나면 알지도 몰라.]
설명은 솔직히 자신 없었지만 지금 제대로 설명을 못하면 도리어 놀림을 당할거야.
[진수상추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진 거야.]
태일러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잭 아저씨에게나 볼 수 있던 표정을 태일러가 지으니 좀 웃겼다.
[혹시 말이야..]
태일러는 물었다.
[너 진수성찬 말하는 거야?]
[그게 뭔데?]
갑자기 태일러가 푸하하 하고 웃었다. 앨리샤도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젤리 씨는 웃지 않기 위에 얼굴의 모든 근육에 힘을 주어 경직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 진수성찬을 진수상추로 알았던거지? 그런거지? 푸하핫!]
태일러는 날 막 놀리기 시작했다. 아차! 내가 또 말 실수를 했구나... 아, 부끄러. 앨리샤도 있는데 무슨 꼴이람.
[태일러, 그렇게 놀리면 못써.]
지젤리 씨는 웃지 않으려고 너무 노력한 탓에 힘이 다 빠져버렸는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빠..]
태일러는 대답했다.
[하지만, 진수상추라니. 너무 웃기잖아요!]
그녀는 덧붙였다. 이봐,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부끄럽거든?
[미안, 놀려서. 하지만.. 너무 웃겼어.]
그래, 알았어. 난 마음속으로 답하고 다시 식탁을 둘러보았다. 우와.... 스프와 생선구이, 스파게티도 있네? 내가 제일 좋아하지만 비싸서 못 먹었던 토마토 스파게티. 그 옆에는 빵인데... 이 빵 이름이 뭐더라...
[울프, 저건 치와바타라는 건데, 우리 가족은 항상 저 빵을 먹어. 끝내주게 맛있거든.]
내가 이름을 '치와와'라고 잘못 떠올리기 전에 태일러가 나에게 빵 이름을 말해주었다.
빵 옆에는.. 폭립! 스테이크! 우와, 우와, 우와!
[자, 먹자구나.]
지젤리 씨가 말을 꺼내서 내 정신을 찾아주지 않았더라면 침을 흘릴 뻔 했다. 사실, 먹을 엄두가 안 났다. 어떻게.. 먹어야하지? 저기요들, 어서 드세요! 왜 저만 바라보고 계시는 거죠? 난 예의라는 걸 알았기 떄문에 가장 어른인 지젤리 씨가 드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햇다. 아무도 행동하지 않은지 1분 쯤 지나자, 태일러가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왜?]
[왜 안 먹어, 빨리 먹어!]
[아직 너희 아버지가 안 드셨잖아!]
[우리 가족은 원래 손님이 먹은 다음에 먹어.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해주자면, 어른께는 '가' 말고 '께서'를 쓰는거야.]
아, 날 기다리고 있던거구나.. 먼저 먹기 부담스러운데.. 난 어쩔 수 없이 빵 한 조각을 떼어왔다. 그제서야 앨리샤와 태일러, 지젤리 씨는 포크를 들고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빵을 한 입 베어물자, 감탄사가 나왔다.
[이어 엄텅 마이따!]
난 빵을 입에 가득 넣은 채로 태일러에게 말했다. 태일러는 약간 불쾌한 것 같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줄래?]
난 빵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태일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엄청 맛있다고.]
태일러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지? 사실, 우리 집에서 로봇이 하지 않는 유일한 일이 바로 요리야. 우리 아빠는 로봇은 절대로 사람의 섬세한 손맛을 낼 수 없대. 그래서 아주머니 3분이 일하셔.]
그녀는 소근소근 덧붙였다.
[아빠는 아직 '인간 손맛 복사기'라는 별명을 가진 쉐프 로봇이 나온 걸 모르시나 봐!]
난 빵을 한 조각 더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빨리 폭립 한 조각도 떼어왔다.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눈치가 보여서랄까? 직접 만든 폭립은, 캡슐로 조리해서 만든 폭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맛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이나 보다. 진짜, 맛있다.. 맛있어!
[어..때?].
태일러는 물었다.
[끔찍해.].
내가 답하자 갑자기 태일러와 앨리샤, 지젤리 씨의 표정이 굳었다. 난 당황했다.
[끔찍하다고?]
지젤리 씨가 물었다.
[아뇨, 아뇨! 잭.. 아저씨와 정말 끝내주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끔찍하게 맛있다고 했었어요... 절대 끔찍하다는 뜻이 아니구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역시, 잭 아저씨와 있을 때 한 모든 것들은 예의에 어긋나는 거였군. 물론 잭 아저씨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지만.
[그래? 그렇구나. 난 또, 우리 집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줄 알았네.]
지젤리 씨가 말했다. 그럴리가요!
[정말 네가 좀 그렇긴 하구나? 그래서 잭 아저씨가 너한...]
태일러는 갑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지젤리 씨와 앨리샤는 태일러를 째려보고 있었다. 태일러의 손틈새로 흘러나온 소리.
[난 아무 말도 안했어!]
뭐야.... 역시 숨기는 게 있구나?
[울..프..? 어서 먹으렴!]
지젤리 씨가 친절하게 말했다. 어쨋든 이 불편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다.
[저기있는 스프도 먹어보거라, 맛이 끝내줄거다!]
어느새 난 진수상추..아니 진수성찬을 맛있게 먹어치우고 남은 건 소스가 약간 묻은 그릇 뿐이었다. 태일러는 그릇 하나를 집어들고는 나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우와, 이게 바로 그 먹는 그릇이란 말인가? 개인적으로 삶은 설탕 감자 맛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베어무려는 순간! 태일러가 접시를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야, 지금 놀리는 거야?
[워워워.. 장난친거야! 우리 집에서는 먹는 그릇을 사용하지 않아! 그게 비위생적이기 때문이지.]
아..뭐야... 괜히 기대했네. 일반 접시를 베어물려고 한 내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난 무의식적으로 앨리샤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태일러는 책 얘기를 하기 전에 나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설마 또?
['푸어족을 위한 발명품들, 정말 효율적인가?' 라는 책에서 '태이스티 디쉬즈라고 불리는 먹는 접시는 가난해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2084년에 만들어진 에쉬드 박사의 발명품이다. 접시를 먹는 것이 야만적이어 보이지만, 이 덕분에 그 당시 아사하는 사람들이 30%나 줄었다. 그러나, 먹는 접시에 영양소가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캡슐 음식의 발명 이후에는 아사하는 사람이 정말 극소수이고, 접시가 비위생적이기도 하여, 23세기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나와있었어. 그래서 나도 그 먹는 접시에 대해 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물론, 이 책은 아주 재미있어.]
[다 먹었으면, 양치하고. 침대에 눕도록! 공주님들, 굿나잇 인사하러 갈게요. 뽀뽀도 해주구요.]
으아...오글오글.. 그나마 지젤리 씨가 해서 저 정도 오글거림이지, 잭이 했다면... 고막 수술을 하러 병원을 가야했을 수도 있겠다.
[네, 아빠.].
앨리샤는 이렇게 대답한 반면에,
[아빠,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굿나잇 인사하러 와서 뽀뽀도 하지 말구요.]
태일러는 얼굴을 붉히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뭔 5살 짜린 줄 아나 봐..]
지젤리 씨는 허허 웃었다.
[뭐야, 다 컸다 이거냐?]
지젤리 씨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태일러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몇 살이야..?]
나보다 어리기만 해봐라! 아, 나 내 나이 모르지?
[난 열네 살이야. 앨리샤 언니는 22살.]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앨리샤의 나이까지 알려주었다.
[넌?]
태일러가 물었다. 나? 난.. 모르는데? 하지만 모른다고 하면 무시당할 터..
[나도.. 열 네살이야!]
얼떨결에 말해버렸다! 갑자기 내 나이가 열 네살로 정해지다니...
[어, 동갑이네? 난 네가 오빠일 줄 알았어.]
태일러는 말했다. 그럼 내가 오빠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그랬다고? 허, 참.
[너 생일은 언제야? 난 11월 11일. 옛날에는 이 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막대과자를 주는 날이었대. 물론 그건 '기념일 변천사' 라는 책에서 읽었어. 에르지아 행 작가님의 책이지.]
[내 생일은 말이야...]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3월 38일이야..]
[뭐어?]
태일러가 놀란 듯이 말했다. 왜, 그날은 무슨 날인데, 알려줘!
[38일..?]
[응.].
[정말 38일이라고?]
[으..응..].
[뭐야.. 농담하지마...]
그녀는 갑자기 뒤를 돌았다.
[투? 투? 어서 와봐!]
로봇 하나가 태일러 앞으로 왔다.
[투 오라니까.]
[저는 쓰리입니다.]
로봇이 말했다. 저 로봇, 완전 귀여운걸?
[아니, 투를 데려와!]
[전 쓰리인데요?]
[그러니까, 투를 데려오라고!]
[전 쓰리입니다.]
[휴, 아니야. 가봐.]
[네, 태일러민트 양.]
태일러는 다시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봤지? 쪼오끔 멍청한 구석이 있어. 귀엽긴 하지만.]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서 '투'라는 로봇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 그 멍청한 '쓰리'와는 약간 다르게 생긴 로봇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응, 투. 얘는 울프야. 저장해둬. 울프의 생일이 3월 38일이라는데, 그 날 어떻게 태어날 수 있어?]
[3월 38일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로봇이 너무나 간단하게 말했다. 이런, 거짓말이 들켰네... 이를 어째...
[울프 군, 이리 와 보시겠습니까?]
난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투'에게로 다가갔다. '투'는 내 팔목을 꼭 잡았다. 아주 차가웠다.
[울프의 생일은 3월 38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런... 어떻게 말하지?
[울프의 생일은 4월 7일입니다.]
[정말? 투, 이제 그만 가도 되. 고마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
투는 멀어져갔다. 얘는 정말, 썩 괜찮은 로봇이군.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좀 당황스럽지만..
[울프!].
태일러가 나에게 소리쳤다.
[태..태일러... 미안..]
그녀는 갑자기 말했다.
[너, 장난친 거였구나? 3월이 31일 까지 밖에 없는 걸 알고 말한거지? 3월 38일이 바로 4월 7일이었어!]
딱히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말하진 않았는데..어쨋든..
[응, 맞아.]
[그렇구나~ 그 퍼즐을 나 혼자 풀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의도치 않은 퍼즐을 풀지 못해 분한 것 같았다.
[자자... 이제 자러가지 않겠니?]
지젤리 씨가 말했다. 아차, 완전히 잊고 있었네!
[네!]
[네, 아빠!]
나와 태일러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또 서로를 보며 동시에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