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이 나에게 갈 데가 있다며, 나를 끌고 나왔다.
“그럼 윤은?”
“잠깐이면 돼. 어린애도 아니고 잠깐은 혼자 가만히 있겠지.”
“그런가?”
혼자 두고 온 윤이 걱정이 됐지만, 원래 땅의 악마를 관리하는 자이기도 했으니 괜찮으려니 하고 넘어갔다.
“근데 어디 가는데?”
“그냥. 요즘 들어 우리 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서.”
언제나 지선이와 단 둘이었다. 그 둘이 오고나서부터 단 둘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혜영이가 혼이랑 둘이 있고 싶다고 하더라고. 근데 나도 오랜만에 순 너와 둘이 있고 싶어졌어.”
“아...”
혼과 윤이 없을 때는 늘 단 둘이었지만, 지금은 뭔가 그전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는 없었지만, 확실히 달랐다.
“진짜 놀랐어.”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길을 걷던 지선이 입을 열었다.
“나랑 나이가 같을 줄은 생각 못했거든.”
“아니 그건...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지선이 또 화를 낼까. 변명부터 하려했다. 그러자 지선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변명 안 해도 돼!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 했거든!”
“다행?”
“사실 조금 기뻤어. 나는 내가 죽어서도 혼자 남아있을 줄 알았거든. 오래오래 말이야. 지금까지도 그렇게 혼자 살았을 너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기도 했고, 앞으로 나처럼 너와 얘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네가 불쌍하기도 했고.”
지선이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난 그런 지선의 두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나랑 같이 살다가 나랑 같이 죽는 거지? 천사와 악마는?”
“응. 그게 맞아.”
“그럼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외롭게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가 아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에서 끝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왜 행복한 동화 보면 항상 이렇게 끝나잖아. 그런데 나는 항상 그 뒤가 궁금했었거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누구 한 명이 죽게 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만큼 외로움이 커질 것 아냐? 난 그래서 그 결말 뒤에 ‘그리고 한날한시에 같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를 그 뒤에 썼었어. 그게 내가 원하던 사랑의 결말이기도 했고.”
“사랑?”
“응! 사랑. 있잖아...”
그리고 지선은 우물쭈물 했다. 약간 볼이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
“나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누굴?”
“순! 너를.”
“...”
상상을 한 적은 있었지만,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인간이지만 천사이다.
그리고 지선은 내가 담당하는 인간이었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끝은...? 나는 두려웠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끝이 어떻게 될 지... 그게 인간사이의 사랑과는 다른 것은 분명 했기에 더욱 불안했다.
“지선아. 나는...”
“알아. 넌 천사고 난 인간이라는 거.”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해?”
“그렇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 걸?”
지선의 얼굴이 약간 시무룩해 졌다. 그래도 내 반응을 조금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난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
“나 몰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거였어?”
“왜 꼬집어!”
그리고 잡아당긴 손을 지선의 머리로 올려 쓰다듬었다.
“난 너의 선함과 행복을 책임지는 천사야. 인간에게 사랑으로서 가장 큰 행복은 그에 맞는 인간과 사랑을 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 인간이 아닌 난 너를 사랑 할 수 없어.”
“알아. 그래도.”
“알았으면 됐어.”
내가 단칼에 잘라버리니 결과를 예상 했더라고 해도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알았어. 이제 가자.”
“그래.”
우리 둘은 그렇게 어색하게 발걸음을 돌려 호텔로 돌아갔다. 사실 나도 지선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아예 품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래도 이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될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그녀에게 매정하게 말해야 했다.
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지선의 행복을 위해서... 혼자 바라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운 건 나 혼자이길 바랐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잠깐의 착각이었길 바랐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길...
어느새 우리가 걸어온 길의 가로등이 모두 켜졌다.
그러나 고장이 났는지 중간 중간 꺼져있는 가로등이 보였다.
지금까지 환했던 나와 지선사이에 있던 몇 개의 가로등이 고장이라도 난 듯 듬성듬성 어두워 졌고, 남아있던 불빛마저 깜빡깜빡 위태로웠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로 돌아가니 윤은 없었고, 차도 역시 없었다.
아마 혼이 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풉” 얼떨결에 웃음이 터져 나 왔다.
“왜?”
지선이 내가 웃음이 터진 이유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아니 너랑 처음만난 날 생각나서.”
마침 그 버스도 그날처럼 사람이 가득 차있었다. 자리도 똑같았다.
“지선아 오늘은 내 위에 앉으려는 사람 있으면 막아도 돼.”
“뭐야 네 위에 사람이 앉든지 말든지.”
장난스런 분위기로 넘어가려 했던 내 노력은 그렇게 차가운 대답으로 돌아왔다. 뭔가 더 어색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우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지선양! 순 씨!”
집 문을 여니 혼이 화가 났는지 우리를 크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