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닐 거야, 안 탔을 거야.”
계속 소리 내어 말 하며 시인은 빗속을 뚫고 계속 달렸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동원의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시인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쾅쾅쾅!
“작가님! 작가님! 안에 있죠?”
쾅쾅쾅!
“작가님, 대답 해 봐요! 안에 있죠? 배 안 탔죠?”
시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쾅쾅쾅!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어흐흑.”
시인은 현관에 기대어 털썩 주저 앉았다.
집 안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없었다.
시인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도 데려가고, 지금 엄마도 데려가고! 너무 하잖아요! 나한테 너무 하잖아요! 이제 너무 사랑해서 행복한 사람 만났는데! 그 사람은 데려가지 말아요. 그 사람은.. 흑흑..!”
우르르르릉 쾅쾅! 콰광쾅쾅!
시인의 머리 위로 억수같은 비가 내리며 무시무시한 천둥이 계속 울려 퍼졌다.
하지만 시인은 마치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소리 내어 울 뿐이었다.
시인의 세상이 또 한 번 무너지고 있었다.
**
동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빗소리가 너무 컸을까?
천둥소리 때문일까?
마치 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동원은 자다 깨서 거실로 나왔다.
큰 천둥소리가 나니 시인이 걱정 되었다.
마지막 배에 오르기 전, 시인이 가지 말라고 애절하게 보았던 눈동자가 계속 마음에 남아서 배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팅이 있었던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국을 다녀와서 만나기로 했다.
다시 집에 왔을 때는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혹시나 이장님 댁까지 걸어가서 시인의 방을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잠을 못 잘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며 동원도 집으로 들어와서 바로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시인에게 가서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이 깨는 바람에 설레던 기분이 확 달아났다.
거실 창으로 바다를 보면서, 위험하게 넘실대는 파도를 보니 긴장이 되었다.
보지 않으려고 커튼을 치는데.. 현관 밖에 시인이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동원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현관 계단에 쓰러져 있는 시인을 안아 올렸다.
“작..가님? 작..가님 안갔구나.. 다행이다..”
“시인씨! 정신 차려요! 시인씨!”
**
“이장님, 시인씨 여기 있습니다. 제가 배 타고 갔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비 맞고 여기까지 온 건가봐요. 네네. 의사선생님 왔다 갔습니다. 네네. 잠시 탈진 한 거라고 하니 걱정 마십시오. 네, 아침에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네.”
동원은 급하게 동해랑도 병원 의사에게 전화를 했다.
서해랑도에 급한 환자가 생기면 왕진 의사가 진료를 직접 올 수 있어서 다행히 금방 시인의 상태를 의사에게 보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인을 보며 동원은 가슴이 무너졌다.
시인은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진흙 투성이 발에는 곳곳에 찍힌 상처가 있었다.
동원이 시인의 발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작..가님.."
시인이 깨어났다.
“시인씨, 미안해요. 흑.. 아침에 놀래켜 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아무 문자도 보내지 않았어요. 나 때문에..”
동원은 눈물이 났다.
시인이 힘없이 웃더니
“진짜 다행이다. 작가님 배 안타서.. 내 말 너무 잘 들어줘서 고마워요. 참 보내기 싫었거든요.”
라고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울먹이는 동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행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 물 한잔만 줘요.”
동원은 알았다며 부엌으로 뛰어가서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젖은 옷을 급하게 벗긴다고 시인이 속옷차림이었지만 둘 다 그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근데 배는 아직도 발견이 안 된 거예요?”
“좀 전에 부산항에 도착했어요. 엔진이랑 연락장비가 고장이 나서 연락이 두절 되었나봐요. 다행히 부산항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아, 부산 앞바다는 잔잔했답니다. 지금 부산항에 도착해서 상황 종료 됐어요. 걱정 말아요.”
“아..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에요.”
시인과 동원은 둘 다 눈물 섞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어루만졌다.
시인은 잠시 그렇게 있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이 따끔따끔 거렸다.
자기 발을 보고 놀란 시인이 말했다.
“나 발이 왜 이렇죠?”
“신발을.. 안 신고 왔습니다. 맨발로 여기까지.. 뛰어 왔어요.”
시인은 놀란 듯이 자기 발을 보다가 씨익 웃었다.
“나 작가님 장난 아니게 좋아하나 봐요. 호호호.”
동원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시인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발 아픈데 욕실까지 좀 옮겨줘요. 옷이.. 축축해서 안 되겠어요. 씻고 나올게요.”
“혼자 씻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동원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못 씻겠음 부를게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동원은 말문이 막혔다.
“욕실 의자 있던데요. 뭐. 앉아서 씻고 잘 닦고 나올게요. 지원씨 옷 좀 빌려줘요.”
“찾.. 찾아 오겠습니다. 천천히 씻어요. 힘들면 나 불러요. 눈 감고 들어가서 도와줄게요.”
동원은 시원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시인은 그런 동원의 뒷모습을 바라 보다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착하게 살게요. 감사합니다.’
다 씻고 나온 시인이 절뚝절뚝 거리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동원은 어떻게 도와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며 시인 주변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시인이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작가님, 나 처음 여기서 씻었을 때도 그 표정이었는데, 변함이 없네요.”
“그랬습니까? 그냥 어떻게 쳐다봐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나 와인 한 잔 줘요. 맥주는 추워서 못 먹겠고 와인 먹고 싶어요.”
동원을 시인을 말 없이 바라보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지하 창고에 들어갔다.
와인 저장고가 따로 있을 만큼 동원은 와인 광이었다.
“저번에 지원씨가 창고 보여줬어요. 작가님 몰래 둘이서 한 잔 했죠. 호호호.”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동원의 귀에 시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동원도 긴장이 풀렸다.
역시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와인 같은 여자였다. 정말.
동원이 잔을 가져와서 시인에게 한 잔 따라주고, 자신도 한 잔을 부었다.
둘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거셌다.
“일부러 이런 옷 가져 온 거 아니에요?”
동원은 의아한 듯이 시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지원이 잘 때나 입는 면원피스였다.
분명히 시인에게는 클 테니.. 편안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시인의 몸이 다 드러나 있었다.
봉긋한 가슴 선부터, 잘록한 허리, 허벅지까지 모든 것이 얇은 면원피스 위로 드러났다.
“게다가 나는 지금 속옷도 안 입고 있는데.. 이런 옷을 주면 어떡해요?”
동원은 와인 잔을 들고 얼음이 되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온 몸의 피가 한 곳으로 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시인은 와인 한 잔을 천천히, 우아하게 마시더니 바닥에 잔을 놓았다.
그리고는 얼음이 되어 있는 동원을 잡아 당겼다.
“이번에 알았어요. 사랑하는 데 다음은 없어요. 우리 지금 사랑해요. 다음에 말고. 오늘이 아니면.. 안되는 것 처럼 사랑할래요.”
동원과 시인의 눈이 마주쳤다.
시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동원이 말했다.
“시인씨 좀 전에 실신했었어요. 그 상황 다 알면서도 가슴이 뛰는 나는 도대체....”
“그냥 안아줘요. 지금 내가 정말 안기고 싶으니까..”
시인이 동원에게 키스했다.
동원은 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명령했지만 이미 몸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쓰러진 시인위에 몸을 덮으며 손으로 시인의 가슴을 더듬었다.
입술에서 목으로 가슴으로 부드럽게 애무해 나갔다.
"하아아.."
동원의 손길이 시인의 허벅지에 닿았을 때, 둘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으며 숨을 골랐다.
곧 둘 사이에는 실오라기 하나 없었다.
시인의 손이 동원의 탄탄한 등을 강하게 쥐었고, 동원은 시인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달렸다.
동이 터 올 때까지 그렇게 둘은 끊임없이 사랑했다.
시인의 귀에 더 이상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천둥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폭풍우 보다 더한 숨결이 서로에게 닿았을 때 누구라도 먼저 할 것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