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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반전을 사랑한 남자
작가 : 샤뚜르
작품등록일 : 2017.7.5

강지원, 29살의 젊은 사장은 얼음 왕자라는 별명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직원들도 피해가는 그에게, 회사의 햇병아리가 어느 날 찾아와 태클을 건다. 그는 그녀가 만만했었다. 이세희, 24살의 인턴 사원. 상상 속 50대 사장과는 다른 조각미남이 나의 상사라니! 사랑 때문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 남자와 귀엽지만 반전 있는 그녀의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

 
제 68 화. 사랑은 성숙하게 만든다
작성일 : 17-07-24 13:00     조회 : 291     추천 : 0     분량 : 1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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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을 사랑한 남자

 

 

 

 

 

 제 68 화. 사랑은 성숙하게 만든다

 

 

 

 “...... 저, 이 결혼. 하지 않겠습니다.”

 

 자석에 이끌리듯, 강 회장은 몸을 다시 지원이 있는 쪽으로 홱 돌려 앉았다.

 

 그래, 좋아.

 

 헛숨만 흘러나왔다.

 

 네가 원하는 그 결혼이라는 거, 이 아비가 시켜준다는데 뭐가 문제인 건가?

 

 “네 결혼은 민 지수 양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다. 혜빈이로도 충분하니 사랑 타령 그만 해라. 장차 기업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다 부질 없는 짓이야. 높은 곳에 있을수록 그 힘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이 필요한 법이라고, 내가 가르치지 않았더냐?”

 

 지원은 마주한 현실에 가슴이 울렸다.

 

 강 회장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롭게 찔러온다.

 

 무엇보다, 자식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의 욕심을 투영 시켜 보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아팠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저와 누나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 맞습니까?”

 

 망설임 없는 강 회장의 대답이 바로 이어졌다.

 

 “너희 셋 다 내 자식이다. 내가 날 위해서 이러는 줄 아나? 그리고 내가 지원이 네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냐! 이 결혼으로 얻게 되는 게 어디 하나 뿐인 줄 아는 거냐!”

 

 점점 언성을 높여가던 강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 번의 기회를 주마. 정신 차리고 지수 양과 결혼 진행하도록 해.”

 

 

 

 강 회장이 원하는 대로, 늘 그래왔듯. 영혼 없는 마리오네트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는 있다.

 

 지원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강 회장의 감정에 호소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보십시오. 아버지 들어오실 때까지 기다리시며 뜬 눈 지새웠던 날이 더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번이라도 돌아봐주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화려하지는 않아도, 어머니께서 손수 지으신 밥을 먹으며 가족끼리 모여 단란하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소박해도 좋으니, 전 제가 사랑하는 여자와 매 순간을 서로 아끼며 살겠습니다. ........욕심만 부리다가는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속이 망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듭니다. 여기서 멈춰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욕심을 내려놓으신다면 이번 일을 제외한 모든 일에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앞에서 진심을 내보인 아들의 모습은 강 회장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대 물러서지 않고 말에 힘을 주어 강압적이다 정도로 밀어붙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법이다. 투정 부릴 여유가 있거든 지수 양과 가까워질 방법이나 궁리해!”

 

 “기업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게 원하시는 게 기업이라면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게, 절 믿어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날 따르고 싶으면 회사를 지켜! 그게 정답이야!”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가치관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너무 확고하고 아집이다 싶을 만큼 단단한 강 회장의 어긋난 사랑은 지원을 지치게 했다.

 

 세희가 힘들어하지 않게 지켜주겠노라 스스로와 약속하며 마음먹은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자신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는 걸, 저 역시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민 걸음이었다.

 

 

 

 지원은 고개를 숙이며 강 회장의 눈을 피했다. 마치 자신이 엄청난 죄를 저지른 사람 보듯 보고 있었다.

 

 남들 보기에는 완벽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런 삶은 더 이상 살기 싫었다.

 

 처음에는 가족이지만, 나중에는 강 회장마저 잡아먹을 수 있는 게 욕심이었기에. 아버지가 그렇게 망가지는 모습은 보기 싫다.

 

 그래도 여태껏 존경해왔던 아버지, 강 회장.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 걸까.

 

 “.......가보겠습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 높고 두꺼워 한 걸음 더 떼기도 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지원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른 채,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더 있다가는 강 회장에게 눈물이나 흘리는 약한 모습을 보일 게 뻔했다.

 

 

 

 지원이 방을 나간 후, 강 회장은 옆에 있는 내선 전화로 최 실장에게 연락했다. 어떤 아가씨인지는 몰라도 꼭 한 번 만나야겠군.

 

 “최 실장, 지원이가 최근에 만나고 있는 여자에 대해 조사해보게. 빨리.”

 

 

 

 

 

 ***

 

 

 

 

 

 지원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집에 들러 스포츠 웨어로 갈아입은 뒤,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스쿼시 장으로 내려갔다.

 

 “......”

 

 안으로 들어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지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멍하게 서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지원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손에 들고 있던 라켓에 힘을 주고서.

 

 탕!

 

 지원의 힘이 실린 공이 벽을 때리며 소리가 퍼져나간다.

 

 통. 통. 통.

 

 

 

 세게 쳐내니 곧장 튕겨 나오는 공을 손에 다시 쥐고서 한 번 더.

 

 탕!

 

 한 번 더.

 

 탕! 탕!

 

 그렇게 수십 번을 쉬지 않고 쳐내고 쳐냈다.

 

 마치 공이 현실인 것처럼, 지금 그가 지고 있는 고민인 것처럼.

 

 열중해서 움직이다 보니 금세 숨이 차오르고 땀이 베여 나오기 시작했다.

 

 “헉... 헉.......”

 

 

 

 또 한 번.

 

 공이 튀어 올랐다.

 

 지원은 그 공을 노려보며 있는 힘껏 쳐냈다.

 

 그런데.

 

 “윽.......”

 

 방향 조준을 잘못하여 저도 모르게 공이 종아리로 날아왔다.

 

 지원은 욱신거림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아픈 것이 다리의 통증인지, 가슴의 통증인지.

 

 어딘지 모를 만큼 전부 다 아팠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이에게 기대어 오늘 하루 너무 아팠노라 얘기할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세희의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러버덕을 보러 석촌 호수에 갔던 날.

 

 이 날이 그들의 첫 데이트 날과 다름없었다.

 

 세희가 해맑게 웃는 모습에 입 꼬리가 풀어졌다.

 

 

 

 하지만, 혼자가 되고 나서 확인한 사실에 다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날을 같이 했는데. 머릿속은 온통 세희와 함께 했던 순간들로 가득한데. 어떻게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을까?

 

 사람들은 그 순간에 집중하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는 것은 결국. 사진이었다.

 

 세희에게 잘해주고 싶어 그녀를 많이 아낀 것은 사실이었지만 되돌아보니 추억할 만한 특별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그녀와 제대로 만났긴 했던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완벽하다 자부했는데 이제는 그 말도 함부로 꺼내면 안 될 것 같다.

 

 완벽한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얼어 죽을.

 

 지원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듯 누워버렸다.

 

 .......세희와 헤어진 지 아직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보고 싶어졌다.

 

 아주 많이.

 

 지원은 화면으로 나마 마주할 수 있는 세희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손을 들어 허공에서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얼른 돌아와라.”

 

 따뜻한 그녀의 체취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돌아오거든 많이 안아주고, 사진도 같이 많이 찍어야겠다.

 

 그립다.

 

 꿈에서라도 다시 널 안고 싶을 만큼.

 

 

 

 지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라켓을 고쳐 잡았다.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 어떠한 힘보다 강력하게 내려앉으려는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준다.

 

 힘이 든다는 이유로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이것보다 더 한심하고 치졸한 짓이다.

 

 

 

 

 

 ***

 

 

 

 

 

 며칠 뒤.

 

 기획팀 팀원들은 사무실 내에 내려앉은 우울한 분위기에, 뭐라 대놓고 묻지는 못한 채. 업무 해내랴, 세희를 살피랴. 신입 인턴의 입사 이후,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이유가 궁금해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구석에서 푸석한 얼굴로 다음 주에 있을 브리핑 심사 때 활용할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는 세희를 보던 남자 직원 하나가 전체 톡을 띄웠다.

 

 딸이 없는 자신에게 딸처럼 느껴졌던 세희가 평소처럼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주지 못해 내심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세희 씨, 무슨 일 생겼나? 누구 아는 사람 없어?]

 

 [몰라요. 기운 넘치고 잘 웃던 사람이 갑자기 저러니까 분위기 너무 쳐져요ㅠㅠ]

 

 [재희 씨! 재희 씨 뭐 아는 거 없어요?]

 

 무슨 일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재희는 철저하게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없습니다.]

 

 [우리 팀 분위기 너무 우울하네요. 제가 조금 있다 점심시간에 한 번 물어볼게요.]

 

 [에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바로 물어보면 되잖아.]

 

 [제 생각에는 그냥 저대로 둬도 나쁠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모른 척 해줍시다. 다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셨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아는 척 했다가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괜찮다할 너니까.

 

 

 

 한편, 지원이라고 온전한 상태일 리가 있겠는가.

 

 “장 비서님, 사장님 갑자기 다시 무서워지셨어요, 어흑......”

 

 지원이 다음 주가 브리핑 심사라는 이유로, 세희에게 맡겨왔던 보고서 심부름을 일제히 철회 시켰기에 사장실의 결재가 필요한 직원들은 직접 걸음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사장님의 분위기가 완전 바뀌어 있다는 향간의 소문을 믿고 구경을 겸해서 올라온 여직원은 부드러운 미소는 진작 얼어 죽은 지원에게 다시 결재 올리라는 퇴짜를 맡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원이 일에만 푹 파묻혀 지내다보니, 이렇게 다시. 하나 둘씩 그의 눈치를 보느라 몸을 사리기 바빴다.

 

 

 

 “장 비서, 강 사장님 요 며칠 사이에 너무 일에만 빠져 사시는 거 아닌가? 얼굴이 반 토막 나셨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원은 회사에 있는 사장 전용 객실에서 잠을 자거나, 그마저도 생각이 없을 때는 사무실에 틀어 박혀 있기 일쑤였다.

 

 세희와 있었던 공간을 피한다고 노력했는데, 회사며 집이며 전부 세희와 함께 있었던 공간들 천지였다.

 

 그가 쓰는 객실 침대마저 세희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던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몇 번이고 그녀를 보러 기획팀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 벌써 며칠 째.

 

 

 

 지원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는 덕분에, 빈 집이나 다름없는 그의 집에 홀로 지내고 있는 레온은 혜빈이 보살펴주게 되었다.

 

 동생의 부탁으로 왔지만, 어제 했던 그와의 통화가 마음에 걸렸다.

 

 ‘회사에는 오지 마.’

 

 마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모습마저 감춘 사람 같다. 본인은 아니라 하는데 핏줄은 못 속인다고, 이럴 때는 희연과 똑같다. 언니 목소리도 점점 시들어가던데. 얘까지 왜 이러니.

 

 곧 들어오겠지 싶어 동생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가려고 지원의 집에 상주하다 시피 지내고 있는 혜빈이었다.

 

 “레온, 밥 먹자.”

 

 혜빈이 레온에게 다가가 통조림 하나를 따주자, 레온은 통조림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저 멀리로 천천히 걸어가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렸다.

 

 주인이 안 들어온 지 며칠 지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같이 살며 나눈 정이 뭐라고. 이 작은 솜뭉탱이는 진짜 혈육보다 그의 마음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구슬프게 울어댔다.

 

 “니야앙. (주인 보고 싶다냐아앙~. 내 주인 어디 있는 거냐아앙. 주인 내놔라아아앙.)”

 

 혜빈은 레온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하얀 털을 살살 쓸어내렸다. 통조림이며 사료며 챙겨주는 족족 다 거부하길래 문제가 있나 싶어 동물병원에 데려가 봤었다. 아무 문제없다는데 왜 먹질 않니. 고양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뭘 아는 게 있어야 얘를 돌보지.

 

 그도 걱정이지만 레온도 레온 나름대로 걱정이다.

 

 주인 보려면 건강해야지.

 

 아는 게 없으니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긁어모았다.

 

 “발정 났나? 세희 씨한테 물어보고 괜찮으면 얘 여자 친구 하나 만들어줘야겠다.”

 

 

 

 

 

 ***

 

 

 

 

 

 점심시간이 끝난 후, 미영은 고디바 밀크 아이스 초콜릿 음료를 사들고 세희에게 가져다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희 씨, 힘든 일 있으면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일할 필요는 없어. 팀장님도 그렇고, 세희 씨가 열심히 한다는 거 알아.”

 

 “감사해요.”

 

 세희는 빨대를 쭉 빨아 당겼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진한 초콜릿 향과 달콤함이 혀를 자극하며 가라앉아있던 마음을 조금 가볍게 했다.

 

 초콜릿은 진리!

 

 우울할 때, 답답할 때.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단 한 방울, 또는 한 입만으로도 기분을 전환 시킬 수 있는 최고의 간식. 마약처럼,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는 일상 속 친근한 음식이다.

 

 

 

 “달달한 거 먹으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우울할 때 초콜릿 먹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미영이 싱긋 웃어준 뒤, 재희의 당부를 떠올리고서 그저 어깨만 토닥여주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그러니까. 우울하다고 감정에 먹히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세희는 곰곰이 생각하다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래.

 

 가야할 데가 생겼다.

 

 

 

 

 

 ***

 

 

 

 

 

 “현우야, IP 하나 준비해줘.”

 

 “알았어.”

 

 지원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장 비서와 함께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예전의 지원이 젊음이라는 에너지를 쏟을 데가 없어 오직 일에 집중하여 열을 올렸다면, 지금의 지원은 일을 상념을 쫓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쉼 없이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없던 일을 만들면서까지 근무하던 지원이 아니었기에, 그 일이 오히려 독이 될까 걱정되는 현우의 마음을 알았는지. 지원이 그를 돌아보며 안심시켰다.

 

 “양 이사님께서 올려주신 보고서만 보고 객실로 내려갈 테니까 현우 넌 퇴근해.”

 

 “너무 무리하지 마라.”

 

 

 

 지원이 현우를 돌아보고 있을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희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응. 번거롭지만 않다면 내 집에 들려 레온이랑 누나한테 안부도 전해줬으면 좋겠.......어........”

 

 “.......”

 

 지원이 현우에게 부탁을 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말은 잠시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퇴근 허가를 받은 뒤 어딘가로 가기 위해 바쁘게 걸음 하던 세희와 로비 한 가운데서 만났기 때문이다.

 

 지원의 눈이 커졌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얼굴 가까이 마주하고 만지고 싶은 세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세희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만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녔던 그간의 노력들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은 여린 마음에 무너져 내릴까. 그렇게 제 임의대로, 아직 답도 듣지 못했으면서 그녀를 제 욕심으로 잡아두게 될까.

 

 자신에 대한 선택권을 온전히 세희에게 맡기기 위해 그는 마음과는 반대로 세희를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세희가 사장인 자신에게 직원으로서 간단히 고개를 까닥인 뒤 로비로 뛰어나갔다.

 

 바람에 흩날린 그녀의 온기가 지원의 심장을 세게 흔들었다.

 

 ‘가지 마.’

 

 그녀가 갔던 길을 쫒아가 욕심껏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알다시피 자신은 세희를 사랑하니까. 세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러니까 그녀가 싫어할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지원은 쿡쿡 쑤셔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세희는 로비를 나가기 전, 잠시 뒤를 돌아 그런 지원의 쓸쓸한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속삭였다.

 

 ‘오빠, 조금만 기다려.’

 

 

 

 

 

 ***

 

 

 

 

 

 “대박! 방금 들어오다 봤는데 우리 부대에 여신 떴다 여신!!!”

 

 훈련을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부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난 여신님에 의해 들썩거리며 난리였다.

 

 누가 그랬던가. 시커멓기 짝이 없는 칙칙한 남정네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다 보면 마음이 피폐해진다고.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남정네들의 가슴에 단비를 내려줄 단 하나의 존재!

 

 아이돌이든 여배우든.

 

 그저 여자라면 다 좋다.

 

 환하게 빛나는 그 분을 멀리서라도 볼 수만 있다면 눈 호강은 물론이요 남은 복무 기간을 이겨낼 에너지 충전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단다.

 

 그 짧은 시간에 ‘여신’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 부대 전체가 동요하여 소문의 그 님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꼴깍.

 

 ‘헉!’

 

 

 

 눈을 호강시켜주실 여신님이 서 있다는 곳으로 달려온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 꼬리를 내리며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성환과 같이 있는 여신님을 보고서 김 다 샜다.

 

 “야, 씨. 아까 여신 강림했다 말한 새끼 누구야? 이 준위님 따님인지 아닌지 구분 제대로 안 해?”

 

 호랑이 교관으로 유명한 성환이었다. 게다가, 군대라는 폐쇄적인 집단의 특성상 소문도 빛의 속도로 빨라 그를 아는 소수에 의해 그가 얼마나 딸을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걸렸다간 전역 전까지 시달릴 수도 있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빠!”

 

 성환은 굳이 자신의 부대로 찾아오겠다던 딸을 말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 가득 부대 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웃음이 넘쳐흘렀다.

 

 딸의 여군 지원을 반대하여 마음이 상했는지 한동안 찾아오지도 않던 이곳에 오랜만에 찾아온 세희였기에, 같이 퇴근할 기회가 생겨 내심 좋았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사근거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었기에 기분이 구름처럼 둥실 떠올랐다.

 

 “딸~ 아빠 보고 싶어서 왔어? 엄마 몰래 데이트나 하고 갈까?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성환의 팔에 세희가 애교스럽게 매달려온다.

 

 “맛있는 거 말고. 그냥 아빠랑 걷고 싶은데. 같이 걷자.”

 

 그러면서 웬일로 먼저 성환의 커다란 손에 깍지를 껴왔다.

 

 세희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사춘기에 들고 자신과 갈등을 겪느라 쉽게 잡을 수 없었던 딸의 손이었다. 세월이 흐른 탓도 있었지만, 어릴 때까지만 해도 고사리 같던 여린 손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새삼 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성환은 세희와 천천히 걸으며 부대 정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려면 자신의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좀처럼 얻기 힘든 딸과의 데이트를 놓칠 순 없었기에 부대 근처에 있는 오솔길로 걸음 했다.

 

 자박자박.

 

 발에 감겨오는 푹신한 잔디와 싱그런 풀 내음이 머리를 맑게 한다.

 

 성환이 손짓을 하며 세희를 쳐다봤다.

 

 “네 손이 요만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 아가씨, 언제 이렇게 컸어.”

 

 그러게. 난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일은, 힘들진 않고?”

 

 “응. 벌써 2분기 인턴들 들어올 시기가 다 되어 가는 걸. 할만 해.”

 

 “세희야, 아직도 아빠 원망 하니?”

 

 성환의 보폭에 맞춰 걷던 세희는 그의 물음에 보폭을 줄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아니. 아빠가 여군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오빠를 만날 일도 없었을 거잖아.”

 

 “강 지원이 그렇게도 좋아? 네가 어디에 있든 더 좋은 남자 만났겠지.”

 

 “아니야. 나한테는 오빠만큼 좋은 사람 없어.”

 

 어느새 자라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가는 딸을 보는 눈빛이 씁쓸하면서도 누구 딸 아니랄까봐 감정 표현만큼은 솔직하고 화끈하여 웃음이 났다.

 

 

 

 “아빠.”

 

 천천히 걷던 세희의 걸음이 뚝하고 멈췄다.

 

 왜 그러는가 싶어 성환이 딸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냥 어리고 귀엽기만 하던 딸이 아닌 성숙하게 자란 여인이 서 있었다.

 

 “오빠가 결혼하자는데,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바로 답을 주지 못했어.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도 하고 싶은데 결혼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싶어서. 혼란스러워.”

 

 성환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지난번에 시은이 그랬었다. 결혼을 두고 세희와 지원의 의견이 조금 엇갈리는 거 같아 걱정 된다고.

 

 

 

 성환은 달랐다. 요즘 애들이 인생을 물로 보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 불안했었는데, 나중에 가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신중하고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신중해서 나쁠 것 없고, 고민이 있어야 더 좋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라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똑같아. 아빠도 네 엄마가 먼저 고백해 왔을 때 많이 망설였어. 나는 처음부터 네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서 고백을 받아들이면 청혼까지 할 생각이었거든. 미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데 누군가의 아내로 살게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비밀이지만, 엄마도 그런 걱정 안 해본 건 아니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엄마는 선택을 번복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대. 아빠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용기 냈다더라. 세희야, 이 사람이다 싶으면 잡아야 돼. ........우리는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언제나 네 편이다.”

 

 고민이 있다는 것은 그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저렇게 누군가에게 물어볼 만큼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결론이 나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환은 커다란 손을 딸의 손에 포개어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내가 볼 때, 이미 네 마음속에서는 결정을 내린 거 같아. 강.......서방이 일하고 싶다는 너를 말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던데 강 서방이랑 잘 얘기해봐.”

 

 지원을 ‘강 서방’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순간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세희는 모를 것이다.

 

 세희는 성환의 차분한 목소리에 아까 보았던 지원의 쓸쓸한 뒷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반지 케이스를 쥐어주며 자신을 외면하지 말라던 그의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윙윙거렸다.

 

 

 

 그래.

 

 답은 이미 나와 있었어.

 

 세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며칠 동안 누군가 짓눌러 놓은 듯.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희는 성환을 진심을 다해 소중히 끌어안았다.

 

 “고마워, 아빠.”

 

 “그래. 그쪽에서 마음 아프게 하거든 꼭 얘기해. 나는 우리 딸 아픈 거 보기 싫어.”

 

 “응.”

 

 울지도, 아프지도 않고 잘 헤쳐 나갈 거야.

 

 서로의 곁에 서로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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