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다. 좋다. 좋아. 좋다고. 좋다니까. 좋단 말이야.”
세라는 아카드의 넓은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팔 다리를 휘저었다.
쇼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았지만 혼자라서 싫었다.
복사를 끝 낸지 2주 가까이 되어가고 있는데 아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급한 줄 알고 서둘렀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쉬엄쉬엄 해도 됐잖아.
투덜투덜 거리다 이내 잠이 들었다.
*
쿵! 엉덩이, 어깨, 머리에 느껴지는 충격 때문에 소스라치게 눈을 떴다.
침대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세상에, 내가 침대에서 다 떨어지고. 잠버릇이 험해졌나?”
머리에 난 작은 혹을 어루만지며 침대에 기어오르는 순간, 그녀가 누워 있던 위치에, 초점이 흐려진 검은 눈과 마주쳤다.
유독 검게 그늘진 눈동자. 밤보다 더 깊어 끝이 느껴지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
검은 입술. 지옥에서 올라 온 존재처럼 소름이 돋았다.
세라는 그녀도 모르게 침대에서 한 발 물러서서,
“영주님…….”
“방해하지 마.”
머뭇거리던 세라는 발소리를 죽여 소파로 와, 조용히 앉아서 그를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그는 숨조차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세라는 불안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확인해야 해.
다시 침대로 조심스레 다가가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뺨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칼로 베인 상흔이인가?
안구의 움직임도, 가슴의 오르내림도, 목동맥의 움직임도 육안으로는 확실치가 않았다.
너무 고요한 모습이어서 불안이 엄습해 왔다.
손을 그의 코끝에 가져다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그녀에게서 나는 열 때문인지, 그의 호흡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면 호흡이 거의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세라는 귀를 그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소리가 너무 흐릿해서, 점점 그의 가슴에 귀를 세게 눌러 댔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의 목과 손에 체온을 느껴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영주님? 영주님 정신 차려보세요. 제 말 들려요?”
그를 흔들며 부르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가까이 느껴졌다.
안 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잃을 수 없어.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시선을 한 곳에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브, 브르노, 브르노 선생님을 불러야 해!”
서둘러 침대에서 돌아 선 순간,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차가움이 전달되었다. 동시에 몸이 당겨지고 거칠게 침대 위로 눕혀졌다.
암흑의 시선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놀란 표정은 순식간에 무너지며, 와락 그의 목을 껴안았다.
암흑이든, 지옥이든, 깊은 수렁이든, 살아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카드가 자신의 목에 감긴 팔을 배려심 없는 포식자처럼 거칠게 풀어버렸다. 곧장 그녀의 몸을 짓누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삼켜버릴 듯 노려보는 눈이 빠르게 덥쳐 내려왔고,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의 코끝이 닿고, 서로의 호흡이 뒤섞였다.
“내 유일한 휴식을 망쳤어.”
독의 주입 직후, 금단현상과 거부반응 후에 찾아오는 잠시의 평온이었다. 악몽 같은 기억들도 집착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고통의 기억과 감정들을 버리고 진공상태로 들어서 분자처럼 공간을 유영하는 찰라, 방해꾼이 등장한 것이다.
“내 앞에서 알짱대는 너를 봐줬지만, 더 이상 안 되겠어.”
먹이를 바라보는 어조로 씹어 뱉었다.
세라는 그의 체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 공포, 좌절, 환희, 당황, 위기감.
빠르게 변해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이성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지금은 그녀를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은 인지할 수 있었다.
“여, 영주님이 숨을 안 쉬고 있었다고요.”
세라는 몸을 바둥거렸다. 헛된 몸부림이 그를 더 자극시켰는지 더 단단히 눌러왔다.
“죽은 줄 알았다고요!”
먹잇감이 된 토끼처럼 요동을 쳐보지만, 그는 간단히 제압했다.
“놔 주세요.”
애원도 하고,
“놔!”
명령도 해 보았으나,
포식자의 아가리는 열리기 시작했다.
굴종을 요구하듯 날카로운 눈이 그녀의 홍안으로 찔러 들어왔다.
“놓으란 말이야.”
그녀의 저항의 강도에 맞춰 둘의 호흡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빨이 가냘픈 목으로 질주해 들어오며, 뜨거운 숨이 목에 닿자,
세라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며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먹이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포식자의 의지를 어쩌지 못해 절망의 눈물이 차올랐다.
아악!
이빨이 살갗에 닿는 동시에, 고통이 시작되었다.
한껏 베어 문 살점 속으로 밀어 넣은 이빨이 온 몸을 관통해 들어오듯, 고통의 실제보다 확대되어 느껴졌다.
눈을 부릅뜬 채로 입술이 벌어졌다.
목을 파고들어 왔던 고통이 무감각해져 버리고, 온 몸이 마비된 듯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아카드는 그녀의 목을 문 채로 멈췄다.
턱이 강하게 맞물리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저항하며 아래턱이 경련을 일으켰다.
뜨거운 숨이 이빨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분명 그녀의 숨통을 끊고, 살점을 뜯어내려는 욕망으로 시작했는데…….
혀끝에 느껴지는 맛.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코로 들어오는 향긋한 내음.
손안에서 느껴지는 살결.
단단한 근육들을 사이로 흐르는 전율들.
그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갈퀴처럼 힘이 들어간 손가락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 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 들어갔다. 그 속에서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간질거림을 음미했다.
옭아매고 있던 다리를 풀고,
물고 있던 이빨 사이로 그의 혀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목선을 타고 올라 턱선을 따라 입술을 향해 움직였다.
붉은 입술을 내려 보는 정념에 사로잡힌 검은 눈이 흔들렸다.
“휴식을 망친데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데…….”
그녀의 입술 위에서 자신의 입술을 스쳐가며 말했다.
무반응에 미간이 구겨지며 고개가 들렸다.
점차 거세게 불어 닥칠 욕구를 억누르며 세라를 내려 보았다.
눈을 감은 채, 움직임이 없는 그녀가 거슬렸다.
욕망을 담았던 눈에 분노가 한순간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녀를 노려보던 눈에 곧 힘이 풀리고,
털썩, 정신을 잃은 그녀 옆에 누워버렸다.
“내 휴식을 망친데다가, 불만 지펴놓고 쏙 빠져나가?”
매번 자기 방에서 당하는 쪽은 그였다.
**
육중한 금고문이 열렸다.
영주의 집무실에는 도면을 그리기 시작한 첫날에 모였던 사람들이 착석하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보이지 않았다.
세라는 도면을 그렸을 뿐, 왜 다시 이 자리에 불려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금고 안에는 세라가 그린 250장의 도면이 들어 있었다.
“저걸 혼자 한 달 만에 하다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세라양.”
한꺼번에 모아서 보니 그 엄청난 양에 세라도 뿌듯했다.
기사들이 세라를 보는 눈들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어서 순간, 아카드가 자신을 위해 이 일을 시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해도 어젯밤의 난폭한 행동은 여전히 소름 돋게 했다. 아직도 그에게 물린 곳이 욱신거려 스카프로 가린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
밝은 빛 아래서 보니 그의 뺨에 난 상처뿐만 아니라 목, 손등에도 새로운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 보이는 동안 전쟁터를 종횡무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카드가 첫 번째 50장을 집어 들었다.
도면뭉치를 집어든 아카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화로 속으로 곧장 넣어 버렸다.
“주군!”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순간이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그를 불렀고, 세라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무슨 짓이야!!!!! 어떤 고생을 하며 그린 건데.
두 번째 50장이 그의 손에 쥐어 졌다.
기사단장이 벌떡 일어섰다. 아카드의 차가운 눈과 마주친 순간, 단장은 움직임을 멈추고 도로 앉았다.
또 다시 50장이,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었던, 피나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집합체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미쳤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마지막 다섯 번째까지.
한 달 동안의 투혼이 한 줌의 재로 허망하게 사라졌다.
정말, 당신이란 남자. 이해불가야!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이사벨라가 나 골탕 먹이라고 했나요?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당신 입에서 나오길 바라!
그녀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원본이다.”
그가 품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들었다.
설마, 저것마저?
모두들 간곡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역시나였다. 그는 원본도 화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며칠 전, 이사벨라가 죽었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누군가 죽었다는데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실감 못할 때 보통으로 그렇듯이.
한 달 동안 그녀가 앉아 있던 맞은 편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자리가 서서히 의미를 부각시켜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추고 주변이 정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사벨라의 당차고 이지적인 눈빛이 세라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며 낯익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래, 내가 혼자 다 만들었어. 네가 팔자 좋게 그림이나 끄적거리는 동안,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많이 죽일까만 연구했지. 열심히, 꾸준히, 공들여, 정성을 다해, 집중적으로.’
‘하사품, 너 머리 진짜야? 다른 색으로 염색해!’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그럴 줄 알았어.’
‘너, 여기 오기 전에 뭐 했어? 내 말은 단순히 띵가띵가만한 귀족영애는 아닌 것 같은데.’
‘몰라서 물어? 아카드의 여자가 되기 위해 5년 전부터 시작했어.'
금방이라도 눈을 치켜뜨며 문을 밀치고 들어서 세라를 놀라게 할 것만 같았다.
세라는 남자들의 높아지는 언성에 정신을 차렸다.
“개발자, 원본, 복사본. 모두 사라졌다.”
“주군…….”
“그렇다면 더더욱, 저것들을 태우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왜 원본까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것은 수년의 노력이 담긴 것들인데.”
“우리의 성패가 달린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주군, 설명 좀 해 주십시오.”
기사들은 비통에 젖어 아카드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있다.
“발도르, 정보유출을 가장 염려하던 자네의 걱정을 덜어 주고 있잖아.”
“……네?”
“나도 그 부분을 해결 봐야 하지. 황제의 첩자, 말코족의 첩자. 정보유출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어.”
기사들은 경청했다. 하지만 세라는 듣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아무도 관심 없는 거야?
영주는 죽었다는 결과만 언급하고 기사들은 더 이상 묻지도 않잖아.
고작 한 달 동안 함께 했던 세라도 이리 혼란스러운데,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야?
이사벨라, 네 존재의 무게는 이 정도 밖에 안됐니?
“이사벨라는 세라 파갈이 완벽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익힐 때까지 여기를 뜨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거론 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료는 저 여자 머릿속에 있다. 걸어 다니는 병기도서지.”
“저 여자를 어떻게 믿고, 거짓 정보로 저희를 혼란케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검수할 수 있다. 제작에 필요한 모든 숫자는 따로 기억해 뒀어.”
“그래도 서면으로 남겨둬야 안심이…….”
“지금이라도 두 시간이면 전 부다 그려낼 수 있어. 그러니 세라 파갈이 다치지 않게 경호계획을 짜도록.”
뒷통수를 맞은 듯 기사들은 침묵했다.
"모든 자료가 사라진 이상, 새로운 도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가짜이거나……."
아카드가 말을 멈추고 세라를 응시했다.
"세라 파갈이 황제의 첩자라는 증거겠지."
걸어 다니는 병기도서…….
그거, 나를 뜻하는 거야?
*
“용건이 남았나?
기사들이 모두 집무실을 나갔지만 세라는 나갈 수 없었다.
세라는 고개를 들어 아카드를 바라봤다.
아무리 짝사랑이라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사랑했던 그를 위해 헌신했던 여자가 죽었는데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에서는 상실의 슬픔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었다.
“이사벨라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아카드는 그의 자리에서 싸늘히 세라를 응시해왔다.
“너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가 막혔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몸서리치게 무정했다.
한 달 동안 매일 마주 앉아서 눈을 마추고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둘 관계에 대한 모욕이었다.
“나 없는 사이…… 친구라도 됐나?”
냉소가 그의 입꼬리에 걸렸다.
“둘이 연적 아니었어?”
어쩜! 감정을 잃었다 해서 망자에 대한 예의까지 상실할 필요가 있나?
저 남자는 감정을 잃었다는 핑계로, 그에게 없는 인간미를 숨기는 것은 아닐까?
“네! 친구에요. 친구가 됐어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와 나에게 있는 마라에 대한 내성이 그녀에게는 생기지 않았어.”
그는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마라, 결국 그거였어? 아카드가 먹는 독약.
'전사했다'라든가 '암살당했다'라든가 그런 비슷한 말들이 나오길 기대했었다. 그편이 그녀에게 어울렸으니.
“이사벨라가 나를 만져도 크게 이상이 없었기에 내성이 생긴 줄 알았지. 나한테 선물을 남기고 싶다고 할 때도 눈치 채지 못했어.”
“…….”
“첩자로 증거가 나오든 그렇지 않든, 나 때문에 널 노리는 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네 죽음은 시간 문제야. 가는 곳마다 널 데리고 다닐 수도, 너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
“게다가 기사들은 네 경호를 서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니 믿고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이사벨라가 여기 온 날 말해주더군, 줄 선물이 뭔지. 자기한테 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세라는 현기증이 났다.
“그게 바로 네 머릿속에 병기도서를 모조리 저장해 두는 거였어. 그렇게 되면 기사들이 나서서 너를 보호하려들 테니까.”
이사벨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첩자로 몰리는 마당에, 저한테 시킬 일은 아니지 싶은데요.’
‘야! 하사품. 영주님이 시키면 할 것이지. 어디서 건방 떨고 있어!’
도면 그리기를 거부하는 세라에게, 호통 치던 앙칼진 소리가 귓전을 슬프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