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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르 일디나크
작가 : 아르체
작품등록일 : 2017.7.22

태양이 꺼지고 열한 개의 달이 지탱하고 있는 세계에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차광시대에도 죽지 않은 이들은 '잔', '계승', '거짓 나무', '무지개', '원소'. 그리고 '유언'의 종족.
황야를 떠난 곳에서 소년이 마주한 것들.

"사라진 네 갈래의 꿈, 여섯으로 나뉜 이야기.
멈췄던 주사위는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회의
작성일 : 17-07-22 04:29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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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하나의 좌와 다섯 홀을 위한 십자 유리탁상의 꼭대기에서 5홀을 응대하는 풍경이 이제는 날짜마저 헷갈리게 만든다. 자신이 부임한 이래 골치 아픈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기분이 드는 게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차광 직후에 비하기야 하겠느냐마는, 전대 부국왕들도 현재와 같은 연속적인 격무에 시달린다는 기록은 없었으니 말이다. 5홀을 소집하는 회의가 이번 해, 아니 이번 주기에만 대체 몇 번인지. 귀찮을 지경까지 와서 드는 생각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회의의 주 요인(要因)이었던 사건이 아직도 다 정리되지 못한 시국에 괴한이 궁에 침입했다는 점이며, 게다가 그 괴한이라는 것이……

 리드로스는 생각을 잘라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더 이상 사고해 봐야 갇힌 고민이 꼬리를 물 뿐이다. 그는 주의를 돌려 오늘 밤의 할 일을 상기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참석해 주어서 고맙소. 논할 것이 많지만 그런 만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일단 침입 당시의 상황부터 듣도록 하지.”

 

 조급함이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알아서 비쳐 나오는 법이다. 통치자의 시선은 앉은 순간부터 정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물색없이 줄곧 예의를 지키던 끝자리의 눈동자가, 윗자리의 기색을 확인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나 해 왔던 감각으로 자세의 중심에서부터 정중한 목례를 취했다.

 

 “통솔자, 마클 크람이 보고드립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상급의 예를 취한 뒤 그는 작고 투명한 상자를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형의 일부가 평면을 마주하고 나서 한 차례 통솔자의 호흡이 있자, 천장이 정보를 잃기 시작했다. 유려하게 입혀진 거울 안에서 잉크와 같이 기록의 원어(原語)가 배어나오고, 깨끗하게 비춰내는 상을 배경으로 곡선을 따라 흘러내려온다. 사라진 정보는 곧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 사이에 마름모로 된 전경으로 맺혀 겉 부분만이 산화, 이윽고 외곽에 새로 생긴 공터들과 수목(樹木)으로 가득한 땅 위를 비추었다. 건축 당시 최고의 미학과 신학을 기반으로 재단된 섬세하고 웅장한 형태.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게 정련되어 있는, 의심할 바 없는 여왕궁의 전경이었다.

 

 “다소 급박하고 혼잡한 상황이었기에 일부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의례적인 말을 앞에 붙여둔 후, 그는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통솔관의 당시 상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통솔관에서는 인가되지 않은 생명 반응이 거울관에 포착되어 영월궁에 보고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직후, 포탑의 발동 대신 의전관들에게 체포 지시가 내려왔기에 즉시 지휘관들을 배치한 후 방어에 나섰었습니다.”

 

 시작부터 방해하는 것 같아 다소 꺼림칙했지만 팔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장이 끝날 때에 맞추어 리드로스는 탁자에 괸 채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잠시 기다리라는 지시이자 발언하겠다는 의사였다.

 

 “그 점에 대해선 매우 유감이라고 여기오.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도중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영월궁으로 향했소. 더 이상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 포탑을 사용할 수 없다는 재촉을 받고 정말 서둘러서. 확실히 말하자면, 발동은 성공했소. 침입자가 호수를 지날 때 쏘아졌고, 그만큼 포탑에 있는 총량도 줄어들었지. 내가 발언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영월궁에서 듣도록.”

 

 부국왕의 손이 사라지고 잠시 얇은 여백이 있었다. 그 자리에 조율자의 과자 꾸러미와 입소리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포탑 자체의 문제일 가능성은 적다는 게 되겠군요. 외벽을 함부로 만질 수 없도록 조치했던 것들이 침입과 동시에 없어졌다고 하니, 모종의 수단으로 궁 전체에 기술적 간섭이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 내부적인 문제는 아닌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언으로 그의 말을 긍정하면서 리드로스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 나라에서 포탑의 목표점을 산란시키기 위한 방법을 연구 중인 것과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군. 나 또한 기술적으로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어. 이론적으로는 궁 외부의 통신까지 끊어져야 정상이지. 뭐 이 부분은 이미 세부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니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몇 가지를 재어 보더니 갑자기 머리를 짚었다. 전체를 짓누르는 통증이 엄습했다. 만성적인 두통이었다.

 

 “마클, 계속하게.”

 

 리드로스의 말이 끊어진 사이에 통치자를 대신해 조율자가 다음 지시를 내렸다. 테이무드의 눈에 따르면 통솔자는 발언이 잘린 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어줄 달콤함이 필요했다. 마클은 말을 받은 즉시 전경 위에 손가락을 대었다. 로임 어 마지막 글자 ‘라일’이 붉게 떠올랐다. 글자는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걸 시작으로, 서서히 자취를 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궁 북서쪽에서 발발한 흔적은 늘어나며 이제 선이 되었고, 이윽고 중심부를 향해 막힘없이 뻗어 오르기 시작했다. 리드로스는 머리를 쥐고 신음했다. 아직도 정신이 흔들리지만 붉은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명확히 보인다. 철저한 계획성이 느껴지는 침입자의 저 행보가 어디서 끝났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생생하게 다가왔다. 초대받지 않은 자는 호수를 잠시 경유했을 뿐 숲과 별궁을 지나쳐 최단거리로 본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다가간다. 일순 소름마저 사그라들었다. 통치자의 얼굴색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이내 잊혀져버릴 기우였다.

 정말 갑자기, 쉼없이 가던 붉은 선이 별궁을 따라 선회했다. 변덕이었는지 자국은 방향을 틀더니 다시금 바깥에 닿으려 한다. 이유를 붙일 새도 없었다. 서쪽으로 길을 되짚던 선은 거기서부터 급격히 거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탑과 폐궁 사이에서 한번 빙 돌더니 호수 근처에서 외곽으로 돌진하다가 잠시 동안,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민한 움직임은 어느새 발이 묶이어 추를 맨 듯이 휘둘린다. 튕겨져 나가듯이 주춤거리며 첨탑으로 몰려가던 선은 내내 흔들거리다가 별안간 탑 가운데서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붉은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클은 호수를 향해 선이 꺾인 부분을 가리켰다. 해설이자 해석이었다.

 

 “침입자가 처음 포착된 시각을 기준으로 기록된 침입 경로입니다. 이하 침입자를 ‘라일’이라 칭하겠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숲 부분에서 라일은 거의 직선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병력을 피해서 호수 쪽으로 일시적으로 우회했고, 본궁 방향으로 직행했습니다. 다만 별궁에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아…… 실제 목표는 본궁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가능성으로 제기해 두는 바입니다.”

 

 발언과 함께 선을 따라가던 그의 검지는 이제 첨탑과 폐궁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폐궁 앞의 이 지점에서 첫 지휘관이 인솔하는 소대가 라일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신병을 확보하는 건 실패했습니다만 이동 범위를 정교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고, 덕분에 포위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로 포위 진형을 유지한 채 첨탑으로 향하던 도중 라일과 마주쳤습니다. 그 시점에서 교전이 일어났는데……”

 

 돌연 소리가 났다. 지팡이 끝이 탁자를 울리는 경쾌한 소리에 마클은 세 번째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키 작은 노인이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있다. 선험자, 니클러 베나임. 그는 이미 지팡이를 들어 올린 후였다.

 

 “우연히 말인가?”

 

 니클러는 그 외에 별다른 말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선험자를 기다리게 한 황송함에 마클은 얼굴을 붉히며 목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발언 신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팡이를 내리치신 것이 분명했다. 보고에 골몰하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한 초보적인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답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래서?”

 

 대답하는 동안 그의 입 안이 말라갔다. 그가 알고 있는 니클러의 성정이라면 이런 사소한 일로 문책하지는 않겠지만, 이건 기본 소양에 관한 문제였다. 규율에 엄격한 마클 본인은 적어도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자책하느라 회의를 지연시키는 건 더욱 어불성설이다. 상념은 한편에 묻어둔 채 그는 눈앞의 소임에 집중했다.

 

 “교전 도중 첫 지휘관의 분대가 합류해 포위를 도왔으며, 검을 사용한 공격으로 1진이 무너졌었으나 2진에서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제압 당시 첨탑 부근으로 몬 순간 침입자가 돌연 기술적 공격을 가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다소 발생했습니다. 이후 저와 함께 첫 의전관들이 라일을 따라 탑으로 돌입, 추격 끝에 저지했습니다. 다행히 조의가 필요하거나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의전관이 없는 것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그는 말을 맺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말 수고하셨소 마클. 내 특별히 치하하도록 하겠소.”

 

 다소 안색이 돌아온 통치자가 감사의 말을 건넸다. 리드로스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무려 하나의 좌께서 내리는 찬사에 괜스레 상기되는 얼굴을 숙이며 마클은 자리에 앉았다.

 

 “역시 폐궁이야.”

 

 틈을 비집고 짧은 말소리가 울렸다. 선험자가 별안간 마클의 발표에 뒷말을 붙인 것이다.

 

 “뭐라고 하셨소?”

 

 주목을 감내할 필요도 없다. 생각한 사실을 그대로 풀어놓으며 선험자는 마주하는 시선들의 가장 위쪽으로 이야기를 향했다.

 

 “아니오, 리드로스. 침입자가 폐궁에 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물론 이게 꾸며낸 소행이 아니라면 말이야.”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이 순간에 머리가 아픈 건 사치이며 태만이다. 통치자는 짚었던 손을 내리고 자세를 폈다. 지금부터가 본 회의이자 안건의 시작이었다.

 

 “그래. 선험자께서 말을 꺼내신 김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지요. 사실 침입자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문제는 이 침입자…… 심지어 ‘들’이라고 했었지. 이 침입자들이 누구인가.”

 

 통치자는 말했다. 의제이자 하나의 좌가 다섯 홀에게 내리는 질문. 문(問)이 내리었으니 답(答)이 진상되어야 할 것이다.

 마클 크람은 주저했다. 확실하지 않은 추측으로 논의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는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화제에 대해 여섯 중 가장 잘 알고 있을 심판청의 알 라크테이는 첫 발언의 기회를 거부했고, 보필자 룬 루드 란플은 지금까지처럼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데 온 소양을 다하고 있었다. 선험자는 대답을 들을 위치에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좌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테이무드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오딤의 손자?”

 

 좌중 침묵. 너무도 당당하게 핵심을 파고드는 발언에 대답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테이무드는 머쓱해하며 대화의 나머지 부분을 직접 채워 넣었다.

 

 “진짜일 경우에 말이오.”

 

 진짜와 가짜. 현자와 바보. 종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면에 적힌 글자가 뒤집히는 것뿐이지만 아무리 돌리고 뒤집어도 의미까지 뒤집히겠는가. 수 하나에 엮인 경우의 수가 하나라고 해서 그저 수이겠는가. 조율자는 과감히 상황을 조율했다. 이왕에 힘들 것이면 과단히 방향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그것이 선택이고 답변이었다. 덕분에 니클러는 만족했다.

 

 “그렇지. 여러 가지 정황이나 상황이 좀 우습긴 하지만 애써 가짜를 만드는 것보다는 더 쉽고 정확하지 않겠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어투로. 마클은 선험자께 질문했다.

 

 “그렇다면 니클러께서는 진짜 오딤의 손자가 부모를 구하러 나타났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렇다면 둘 중 어느 쪽이 진짜라고 생각하는지 여쭤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글쎄. 진짜든 가짜든 적어도 그런 모습을 할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니겠나.”

 

 절반의 답이었다.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확인이 필요했다.

 

 “정 내 생각을 듣고 싶으면 또 다른 침입자의 이동 경로 모형을 보여주게 마클.”

 

 “네. 즉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존의 붉은 자취가 지워지고 사각형 조감도에는 묘지 방향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완성되고 난 뒤, 1좌와 5홀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대표로 선험자가 점수를 매겼다.

 

 “……이건 뭐 계획성이고 나발이고 대체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르겠군. 체력 하나는 좋구만.”

 

 이리저리 경로가 구부러지고, 같은 길을 몇 번씩 오가고, 건물과 반대 방향으로 수없이 걸어간다. 좋게 말하면 여러 군데를 살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게 길을 잃은 것이다.

 

 “저…… 발언해도 될까요.”

 

 여전히 다른 쪽 손을 움직이면서, 소심한 목소리가 다섯 번째 자리에서 등장했다. 테이무드의 고갯짓에 룬 루드 란플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살펴봤습니다만 기록에 따르면 암살자를 두 명 보내서 한 명은 인질이나 민간인으로 위장한 후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할 경우 두 번째 계책으로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성공한 사례도 있고요. 이번 사건도 그와 유사한 경우가 아닐까요? 만약 목표가 폐궁이었다면 노리는 건 역시 지금 구금된 두 분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객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죄수들의 암살 혹은 탈옥을 꾀하는 그럴듯한 가짜라.

 선험자는 지팡이를 쓰다듬다가 바닥에 강하게 짚었다. 탁하면서도 쨍한 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만…… 만약 그런 발상을 한 멍청이가 있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지팡이로 두들겨 때려도 모자라. 그래, 자네가 말한 대로 목적이 오딤의 딸과 사위라고 치자. 만약 지금 잡혀 있는 녀석이 감방에서 나와서 더 지하로 돌입하는 데 성공한다고도 하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셋이서 감시를 뚫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혼자라도 안 될 텐데? 단순한 암살은 아냐. 그런 모습을 했다는 건 탈출시키거나 구슬릴 생각이라는 거지. 그냥 죽일 거면 뭐 하러 애써 분장을 해?”

 

 사실 침입자가 가짜라도 일련의 논증에 큰 문제는 없다. 잡혀 있는 둘의 목숨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정보가 목표일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가까이 간답시고 일부러 잡히는 바보짓을 숙련된 자객이 행한다는 건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한 번 잡힌 이상 안이든 밖이든 경비를 뚫는 건 불가능하다.

 니클러의 격앙된 어조 뒤편에, 앞선 말의 열기를 씻기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알 라크테이, 발언하겠습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전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합니다. 그렇게 찾았는데도 발견되지 않던 그 사람의 손자가 정확히 부모의 형이 선고되는 날 수도에 나타났고, 전례에 없었던 포탑과 통신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을 가지고 침입을 감행했다? 게다가 두 명입니다. 이 상황이 성립되려면 몇 가지 가정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절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부모가 체포되었는지는 어떻게 알았다는 겁니까. 내부에서도 기밀로 유지되다가 오늘 형의 선고를 위해 예고 없이 발표된 사항이었는데. 심판청 내에서도 누설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도(首都)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신분을 증명해야 하죠. 수배자의 혈육이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등록자라면 더더욱.

 마지막으로, 현재 구금되어 있는 쪽은 또 다른 침입자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더군요. 그의 행동이나 감정이 진실이라면 그는 또 다른 침입자가 경비체계를 무력화시켰을 때 운 좋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게 됩니다. 전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는 발언은 채택하지 않겠습니다.”

 

 알 라크테이의 발언이 끝난 후 쉼 없이 움직이던 란플의 손이 멈췄다.

 

 “잠시만요 알 님. 말씀에 따르면 수배 중인 인물의 직계라서 검문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건데, 오딤의 손자로 가장한 시민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등록자가 아닐 시 최소한 시민이거나 신원 보증이 있어야 수도 입성이 허가되니까……”

 

 알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상황이 이상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형태가 확실한 이 전제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오류가 나왔냐는 것. 알은 란플의 말을 듣고서 테이블 아래로 사라졌다. 이윽고 진동과 함께 단상 위에 거대한 서류 뭉치가 등장했다.

 

 “……그게 문제입니다.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지금부터 ‘라일’에 대한 심판청의 검시 보고를 시작하죠.”

 

 억양이 거의 없는, 딱딱하다기보다는 차가운 목소리. 서류가 한 장씩 넘어가고, 은색 눈이 기록된 자료들을 고집스럽게 바라보며 내용을 서서히 읽어 내린다.

 

 “침입자에겐 어떠한 기술적 흔적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달에 등록되지 않은 자여서 즉각적인 신원 확인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국내 인명부와 일일이 대조했는데, 시민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넘기고 있는 이 자료의 대부분은 라일의 인상착의와 달에 등록되지 않은 국민 명부를 대조하는 서류인데 인력과 기술력으로 각 6회씩 대조한 결과 확실합니다. 죄인 명부에 혈연으로 짐작되는 자가 약 1명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관련성의 유무를 떠나서 이 자들은 어느 각도로 봐도 신원을 전혀 알 수 없는 비 등록자이며 외부인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서류를 덮었다. 보필자의 질문을 받기 위해 의례적으로 한 번 고개를 드는데, 그 외에 발언권을 요청한 자가 있었다.

 

 “이의 있습니까?”

 

 앉아 있던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5홀의 끝자리로 향했다. 알 라크테이의 말이 가리킨 곳에 있는 건 머리의 자락만을 희게 탈색한 푸른 머리의 남자였다. 마클 크람은 긴장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결과를 다시 한 번 재고(再考)해 주셨으면 합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까?”

 

 통솔자는 정면으로 알 라크테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포위 작전을 수행할 당시 침입자는 말을 탑 위에 놓았습니다.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검으로 그런 위력이 나올 수 있었다면 사망자가 수십은 발생했을 겁니다. 기술을 사용했으니 등록자임이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사항입니다.”

 

 고민의 순간은 없었다. 알 라크테이는 대답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 변수가 많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인간 몸에서 영구적인 기술적 자국이 그냥 없어진다는 건 이상하군요.”

 

 심판자의 주장은 여전히 견고했다. 마클 크람은 침착하게 발언했다.

 

 “제가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포탑을 사용해도 시신에 자취는 남게 되어 있습니다.”

 

 마클 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차 목소리에 열기가 서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명백한 사실입니다. 직접 현장에 오실 때까지 일체의 훼손은 없었습니다. 분명히 어디엔가 등록된 자일 겁니다.”

 

 서로 상반된 온도의 두 목소리가 각을 세우고 제각기 주장을 펼쳐놓는다. 나머지 앉은 자들이 흥미롭게, 혹은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는 와중의 이어지는 대치.

 

 “이번 사태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훨씬 엄중히 조사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4번 시행하는 검사를 12번 시행했단 말입니다. 이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검이나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력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기술적으로 등록자가 갑자기 비 등록자가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시신에서 흔적을 흐리는 데만 최소 주기 단위 이상 걸리는 데다 흐름에 위배되는군요.”

 

 “그러니까 라일이 등록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라일이 등록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취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깨끗했습니다. 조사도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고요. 더 이상의 이의를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그럼 제가 본 것이 무엇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이외 별도의 방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면 신빙하겠지만 통솔자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그런 위력이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거친 고함과 함께 공기가 흔들렸다. 나머지 홀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례적인 마클 크람의 분노. 표정 없는 심판자마저 당황했다. 그의 눈썹이 살짝 비뚤어지며 굳은 얼음 같던 표정이 변했다. 잠시의 간격.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그의 평정이 되돌아왔다. 여전히 서늘한 말투로, 알 라크테이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확신하신다면 회의 후 현장 주변에 있었던 의전관들과 함께 심판청을 방문해 주시길. 당시 통솔자께서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여는 걸 시도해 보겠습니다.”

 

 판결이었다. 언쟁이 끝나고, 마클 크람은 자신이 주목받고 있는 걸 알아챘다.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그는 알 라크테이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점잖지 못한 모습으로 회의를 지연시킨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말없이 그의 사과를 허락하고서, 알 라크테이는 의자 위로 돌아갔다. 경직된 분위기를 환기할 겸 마클이 나머지 다섯에게 예를 차리는 동안, 들은 것이 뭔가 마뜩치 않아진 자가 있었다. 그는 미미한 소란 속에서 인과를 되새김질하다가 이내 손을 들어올렸다.

 

 “잠깐만.”

 

 첫 번째 자리였다. 리드로스는 턱을 괸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절대 수도로 들어올 수 없는 침입자 두 명이 같은 날 거의 같은 흐름에 궁에 침입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여서 하나가 성벽을 넘어 온 건 완전히 운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는 등록자가 아닌데 등록자만이 가능한 짓을 했고, 둘 다 생김새가 오딤의 손자란 말인가.”

 

 자세와 함께 삐딱하게 기울어진 어조가 통치자의 혀에서 흘러나왔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지끈거리는 그의 머리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얹힌다. 오딤의 손자라는 전제를 물리고 다시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조율자와 선험자. 5홀 중 가장 연장자이자 권위 있는 두 사람이 발의한 침입자의 신원이기에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순으로 가득한 방향성이 정말 옳은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속임수고 본래 목표는 폐궁 지하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는 건 어떠신가요?”

 

 리드로스가 머리와 함께 고뇌하는 사이 란플이 정중히 선험자께 말했다. 니클러는 오랫동안 둘의 이야기를 셈해 보더니 나직히 읊조렸다.

 

 “아니야. 그렇게 설명하기엔 행동에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분명 눈치 채지 못한 조각이 어딘가에 있다. 이것이 전부라기엔 연신 머리와 등허리를 주무르는 싸한 느낌이 불쾌했다. 그의 경험상 이런 직감을 간과하고도 제대로 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른 곳이라면 굳이 이런 동선을 택할 필요가 없다네. 본궁으로 가다가 갑자기 선회한 것도 그렇고…… 그리고 왕실에서 모르는 기술이라는 게 가당한 일인가? 앞으로 나올 거라면 모르겠지만.”

 

 선험자는 꺼내어 놓고서는 자신의 말을 되뇌었다. 다른 이들이 기꺼이 취하기에는 아직 논리가 설익었다. 하지만 이쪽이 옳은 길이라고 그는 이전부터 확신하고 있다. 수확을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가 더 필요했다. 지금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과 침묵. 뇌리를 맴도는 언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래…… 어쩌면 이 사건은 본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지도 몰라. 만약 이 모든 게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 있다면?”

 

 모든 시야가 그에게로 향했다. 선험자의 말을 마클은 애국심의 발로로 들었고, 테이무드는 17년 전 사건의 또 다른 언급으로 이해했다.

 

 “내부 요인에 의한 기술의 유출입니까?”

 “인간 분열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겐가.”

 

 대답은 마클이 약간 더 빨랐다. 니클러는 정답자를 발표했다.

 

 “그래. 메-바르티가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상황 아니겠는가. 인간 분열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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