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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르 일디나크
작가 : 아르체
작품등록일 : 2017.7.22

태양이 꺼지고 열한 개의 달이 지탱하고 있는 세계에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차광시대에도 죽지 않은 이들은 '잔', '계승', '거짓 나무', '무지개', '원소'. 그리고 '유언'의 종족.
황야를 떠난 곳에서 소년이 마주한 것들.

"사라진 네 갈래의 꿈, 여섯으로 나뉜 이야기.
멈췄던 주사위는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달, 그리고 모순
작성일 : 17-07-22 03:57     조회 : 262     추천 : 0     분량 : 19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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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차디찬 비명인지조차 알지 못한 밤이었다.

 흐름마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풍경. 눈으로 떨어지는 까마득한 허공. 시야는 멀고, 멈춰선 낭떠러지는 아마득한 곳까지 뻗어 있었다. 올려다본 것이 하늘인지 의심될 정도로 설고, 단단하고, 이상한 간극. 이유는 단순하고 동기란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일.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끝이라 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초대받지 않은 걸음은 보기와 다르게 순식간이었지만, 역시 한순간의 인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몸 한가운데서 맥동하는 심장 소리뿐. 흑암은 미로처럼 짜여 낯설음을 코앞에 던져 대었다. 막막함에 휩쓸려 짧고도 긴 흐름을 헤매었던 그 어느 순간이었을까. 이정표, 혹은 묘비. 희미한 시야 사이로, 성긴 그림자를 가득히 메우며 흘러내리는 빛.

 예감과 함께 울려대는 거센 감정을, 그는 애써 닫아 두었다.

 

 

 

 오랫동안 헤맨 끝에 서게 된 정원엔, 눈 시린 달이 떠 있었다.

 뜻 모를 음성을 입 안에서 굴리며 불청객은 조용히 칼을 쥐었다. 빛이 시선을 지나가고, 그제야 이곳이 묘지인 것을 알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은색 비석들이 스치는 감각. 이 서늘한 감정이 적어도 즐거운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머무르고 싶지도, 머무를 수도 없다. 생각은 순간을 갉아먹는 의미 없는 망설임일 뿐. 그는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시야의 저편에 걸린 건물의 끝으로.

 그도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청객들은 언제나 대담하기 마련이다. 초대받지 않았어도 기어이 찾아오는 만용과 병사들의 과업을 일깨워 주는 친절함을 겸비하고서, 사소한 허점이라도 있으면 그 부분을 반드시 일깨워 준다. 물론 매우 모욕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불청객은 바보와 같은 대담함으로 로임-벤의 궁성을 방문했다. 어찌 보면 현명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최근엔 이런 덕목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품위를 훼손시키지 않는 적당한 예우가 다소 녹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 그 무례함이 주인의 옷자락을 더럽히는 순간 예우는 태만과 무능의 찌꺼기가 되어 걸러질 뿐이다. 정말, 정말 오래간만의 방문이었다. 생소하기까지 한 밤의 사건에 병사들은 분주하게 자취를 쫓았다.

 

 “현재 위치가 어딘가?!”

 

 쉽게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자부하던 그는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소리쳤다. 통솔자, 마클 크람. 궁성에 침입하는 자객들은 모두 미친놈들이라고 공언하고 다니는 그였지만, 이쯤 되면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성벽을 건드릴 수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맨몸으로 그 높이의 성벽을 넘어 들어온 것부터가 보통 정신 나간 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검 하나 들고 설치면서 정예병들을 족족 따돌리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가장 돌아버리게 하는 건 대놓고 성벽을 넘어 온 녀석을 아직까지도 못 잡고 있는 자신의 무능함이었다.

 

 “연못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별궁 방향이구요.”

 

 연락병은 말[言]과 동시에 도착했다. 보고를 받은 순간 그는 여태 고민하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뭉친 뒤 쓸어버렸다. 이번에도 예측이 한순간에 먼지더미가 되어버렸다. 숲을 가로질러 벌써 연못이라. 힘이 빠지고 머리가 식는다. 연신 솟구쳤던 초조함이 결국 정점을 찍은 뒤 한순간에 소강했다. 그는 한숨처럼 심호흡을 뱉었다. 또다시 가정한 범위를 훨씬 벗어났지만 그나마 몇 번 당하고 나니 어느 정도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반나절 동안 잔뜩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와 관목의 냄새가 목에서 연신 사부작대는 가운데,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알아서 감옥 쪽으로 가 주니 다행이군. 지금 호수 쪽으로 가봤자 늦어. 첨탑에서 집결한다. 별궁엔 별도의 병력이 전갈을 받았으니 폐궁 쪽을 막으라고 전해. 녀석의 속도로 볼 때 유리정원에 들어서면 본궁까지는 순식간이다.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막지 못하면 끝이라고 봐도 좋아. 내가 도착할 때까지 첫 지휘관이 그 부근의 모든 병사들을 통솔하도록 권한을 일임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외곽에 잡아 두도록.”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답신을 보낸 후 병사들을 이끌고 탑으로 향하는 동안 마클은 의문을 곱씹었다. 미묘한 의구심이 머리 한구석을 연신 괴롭히고 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연락 체계가 완전히 불통이다. 일일이 사람을 교환하면서 상황을 교신해야 하는 탓에 갈수록 대응이 지연되고 있다.

 이처럼 병사들 간의 연계가 평소처럼 긴밀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포탑을 쓰는 편이 효율적이다. 기억을 추출해낼 수 있는 현 상황 하에서 자객이란 죽으러 오는 비수일 뿐, 잡히는 순간 배후가 드러나기에 반드시 즉사할 수 있는 방법을 내장하고 있어서 사실상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실외의 침입자는 치사가 확실한 포탑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녀석이 절반 이상 침입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다. 체포 지시가 본궁에서 왔으니 동선도, 위치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생포하기를 바라는 건 탑지기의 과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떤 경우와 조건을 가정하더라도 침입자를 막아야 한다. 적어도 그 하나는 확실했다.

 마클 크람은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밤이 되겠군.”

 

 불행히도, 그의 예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정보가 모이는 전당. 창[窓]조차 비추는 창[窓]. 본래 정숙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할 곳에 백색, 은색, 청색이 어지러이 뒤엉키며 사이에 찬 소음으로 여백을 메꾸어 낸다. 조율자 식으로 말하자면……

 

 “조율자께서 오셨습니다!”

 

 잠깐 동안의 나쁜 생각. 하지만 생각마저 잘라먹느냐고 타박할 순 없지 않은가. 읽던 책을 문맥 중간에서 잘리고 온 탓에 테이무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침입한 것이 대체 어떤 우스운 혁명가인지는 몰라도 참 사람 화나게 하는 녀석이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방 안에 그는 한 마디 던졌다.

 

 “상황은?”

 

 거울관의 책임자는 간단히 예의를 갖춘 후 대답했다.

 

 “침입자와 병사들의 위치는 순조롭게 파악되고 있습니다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궁 안에서는 연락을 취할 수가 없어요.”

 

 좋지 않다. 가장 확실한 수단 대신 자신이 직접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란 대저 개운할 수 없는 법이다. 한숨을 잠시 눌러두고, 테이무드는 직접 거울관을 응대했다.

 방 자체를 구성하는 견고한 은색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언제나 무한한 상(像)을 이야기하는 여왕의 전언. 그 사이에 생기는 끝없는 정보를 가공하면 원하는 모습을 맺어 준다. 판단하기로, 적어도 지금 거울이 이루고 있는 저 모습에 변명이나 왜곡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나 인생 중 하나가 터무니없는 과장질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거울 속에는 반평생 넘게 보아 온 궁의 전경, 그리고 익히 보아 온 로임-벤 식구들. 다만 오늘은 드물게도 붉은 것이 하나 끼어 있다. 침입자라는 낙인으로 표시된 작은 네모꼴. 아직까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유감이라면 유감이었다.

 

 “부국왕께서는 어디 계시나?”

 

 곧이어 정갈한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조금 전 방문하셨다가 바로 환궁하셨어요. 현재 집무실에 계신 것으로 보인답니다.”

 

 테이무드는 방금 전의 생각을 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유감이라고 해야 하겠다. 속단을 배제하고 치워두었던 전개 그대로여서 입맛이 불쾌했다.

 

 “……포탑에 문제가 생겼군.”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라는 공손한 단어가 이토록 상실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테이무드는 오늘에야 발견했다. 이 나이에 무언가를 또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여왕이시여! 등줄기에 어리는 이 소름은 분명 어떤 은자의 농간이나 수작임이 분명합니다!

 소리 없이 단말마를 외치고 나자 마음이 한결 더 무거웠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쿠키의 가장 작은 조각보다도 더 작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 꾸러미를 끌러 쿠키를 두어 조각 영접했다. 피폐해진 정신에는 양식이 필요한 법이다. 음, 시고 달콤한 열매의 맛. 이제야 좀 호흡이 맑아진다. 조금이나마 밝아진 기분을 쥐고 다시금 전경(全景)을 응대했다.

 

 “어떤 문제인가?”

 

 “자체에 결함이 생기거나 작동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간섭…… 같은 것을 받아 무산되었다는 게 현재로선 가장 정확합니다.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네요.”

 

 어느 것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판이 적다고 해서 오판이 아닌 것은 아니니 말이다. 테이무드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고서 조용히 말을 전했다.

 

 “밖으로 나가보고 싶으니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알려주시오.”

 

 지금 모두를 위한 가장 좋은 수작은 기다림일 것이다. 만약이라는 녀석이 방해하지 않길 고대하며 조율자는 입을 닫았다.

 

 “물론이죠. 지금 지시해 두겠습니다.”

 

 다행히 돌아온 대답은 시원했다. 그것마저 답답했더라면 갈 데 잃은 생각에 눌려 질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장을 직접 보고 싶지만 저 붉은색이 누굴 노리고 있는지 모르니 응당 현명한 자의 대처를 해 주는 것이 올바르겠다. 조급한 이론에 눈이 멀었다간 앞 못 본 무기나 자신을 뽑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저 도박꾼의 손에 쥐일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머리나 심장이 따인다면, 글쎄, 테이무드에게는 꽥 하고 죽은 일이겠지만 테이무드가 테이무드보다는 조율자이니 로임-벤의 몸 일부가 성덩 하고 날아가는 일이 큰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는지는 모른다.

 ‘성덩’까지 떠올린 상황에서 테이무드는 적당히 데운 생각이 아니라 완전히 식힌 채로 상황을 바라볼 정신을 잡았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자신 특유의 묘하게 뜬 사고가 갈수록 미적거리는데, 객관성이 필요했다.

 여기서부터 침착한 생각. 우선, 자객일지도 모르는 침입자의 목적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조율자씩이나 되는 고위관료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역시 바보짓이다. 병사를 대동할 수도 있지만 연락체계의 기능이 원활하지 못해 혼잡한 상황이므로 고집보다 병사들을 먼저 고려하자. 하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요인의 암살이 아니라 이 침입자의 특수성이다.

 첫째로 통신. 궁 밖에서야 가능하지만, 궁 안의 독자적인 연락체계가 두절된 적은 여지껏 없었다. 현재 부국왕이 가지고 있는 최고 권한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저 곤란한 손님이 해낸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 끊었는지조차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초반의 소란에 비해 병사들이 잘 움직여 주고 있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포탑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부국왕의 허가 아래 영월궁에서 천체로부터 선사되는 포탑을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일반적인’ 대응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무산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포탑이 막혔다. 포탑이 막힌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포탑이 막혔다. 달, 절대적 무력, 상징체이자 나라. 만일 이 사태가 어떤 누군가가 확신을 가지고 저지른 일이라면 열한 달과 11국으로 대변되는 절대적 경계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심각하게 협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협의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침입자를 잡으면 나가서 상황을 살피고 후에 있을 회의를 기다리면 된다. 정리 끝.

 테이무드는 지끈거려 오는 눈썹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머리가 진정되니 이젠 할 일이 없었다. 무료는 낭비의 다른 얼굴이라고 여기는 그에게 편안하기만 한 엉덩이는 달갑지 않은 여유다. 귀를 기울여 보았다. 입구에서 전령을 보내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그 외에는 적막하다.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신경을 두고 싶지 않아서이다. 차츰 아까 읽다 만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사태에 대한 소란스러운 고찰은 잠시 버려두더라도 곧 질리도록 맡을 수 있을 터였다.’

 

 마침 이 상황에 어울리는 영웅적인 명언이 아닌가. 테이무드는 기꺼이 시끄러운 고민 대신 조용한 사색을 택하기로 했다.

 

 

 

 지나간 이야기들을 되짚으며 소리 없이 저편을 응시한다. 계기는 어떤 확신이었다. 무모한 동기를 손에 옮기고 단순한 이유를 입에 담게 한 절대적 확신. 닫힌 문을 부수어서라도 들어가야 하는 절박한 근거를 그는 알아채고야 말았다. 침묵한 채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팔에 쥐인 것은 칼이었다. 여섯 가지 허언과 여덟 가지 거짓말 모두가 텅 빈 자취만을 남기고 이내 잊혀졌다. 감추는 길을 선택한들 잿더미 없는 여정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한 마디의 보장이, 뼈가 부서지도록 동기를 헤집어 놓았다. 열에 열이 바보라 말할 것이고, 너는 허울만 남은 혁명가이며 은자를 택하지 않은 미치광이라고 조롱당한 후에 탑지기의 만용과 영웅의 용기를 혼동하는 껍데기라는 소리마저 들을지 모르더라도. 이제 와서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되씹다가 곧 뱉어버렸다. 피가 섞여 나왔다. 숨이 차고 근육이 떨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쫓는 무리들이 날을 겨누고 추격해온다. 얽힌 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두어 명이 노련하게 따라붙어왔다. 고쳐 쥘 새도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나무 아래로 쫓아냈다. 다소 놀라 힘으로 밀어붙인 것치곤 운이 좋았다. 그렇다. 운이 좋았다. 목적을 위해서 궁성 침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했고, 삼엄하게 배치된 정예병들을 상대하면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미약한 기대만을 가지고 하나뿐인 기회를 감행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생각한 대로 풀려 주었다. 하지만 시작이 좋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모 종족의 허구소설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현상이다. 이상대로의 완전무결한 전개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누군가가 쫓기는 일도, 긴박함도, 죽음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엔 쫓기고 있고, 몸이 떨려 오며,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직 살아 있다.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왔고, 산 채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부터 라타네나* (역자 주 : 클라이막스)다. 이 목숨 건 도박에 던져진 주사위의 말로(末路)가 패배가 아니기를 바라며, 그는 가지 사이를 빠져나왔다.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 서자 질량 있는 감촉이 밟혀온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무기둥에 기대니 한껏 부풀어 오른 호흡에 짙은 풀내음이 선선히 내려앉는다. 그제야 복면의 입 부분이 답답하다는 걸 알아챘다. 치워내니 쌓였던 열기가 한순간에 뿌옇게 올라온다. 미루어 두었던 공기를 한껏 채워넣고 나서 위치를 되뇌어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외웠던 길을 복습한다. 계획했던 대로 오기는 했다. 중간에 잘못 판단한 것이 없다면 이곳은 분명 그가 생각했던 장소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말의 기대감이 뜨겁게 혈관에 돌아가고, 가능할 거라는 희망이 기분을 고양시킨다. 이 너머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 이 너머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 요동하는 맥박을 억누르며 떨림을 쥐어쥔 채로, 그는 나무를 반쯤 등지고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마클 크람의 판단은 정확했다. 어느 정도 기다림을 센 끝에 침입자는 별궁을 지나쳐가는 길목에서 발견되었다. 빠르게 본궁으로 가는 진입로를 차단하고 효율적으로 인원을 배치, 동선을 나누어 둔 덕분에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안온한 기다림이라 하기엔 적잖이 어폐가 있는 게 사실이다. 돌아가는 상황은 지시하는 말조차 아껴야 할 정도로 긴박했다. 창고에서 급히 공수된 구식 신호탄이 병사들에게 모두 나눠지기도 전에, 첨탑 뒤 수풀에서 신호 하나가 올라왔다. 첫 지휘관 레시스가 신속하게 지원 명령을 내렸지만 남아있는 것은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병사 셋뿐이었다. 두 번째 신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미미한 불빛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노파심에 수색 명령을 내렸는데, 그곳에는 반쯤 불발된 신호탄을 들고 상처를 부여잡은 채 필사적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부상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혼절하기 직전 올린 생생한 보고는 오히려 레시스를 당황케 했다. 침입자가 돌연 방향을 비틀어 외곽 쪽으로 달려갔다는 전언을 신빙하기가 힘들었다. 답신은 대답을 결정하기도 전에 도착했다. 세 번째 신호였다. 병사들의 보고는 정확했다. 그들의 판단력을 의심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누르며 레시스는 다시금 책무를 수행했다.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인지 목표물은 첨탑 부근에서 돌아 호수 쪽으로 되돌아갔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 걸리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예상했을 리는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침입자에게 최악의 수가 되었다.

 

 

 

 첨탑 부근에서 신호가 올라왔다. 저 남부에서 나는 조개색처럼 은은히 흐르는 노란빛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여왕의 청색이 아닌 이상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놓쳤다는 소식을 들어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초조함 섞인 탄식을 뱉어내는 것 뿐. 마클 크람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첫 지휘관과 합류하는 대신 본궁 쪽으로 바로 가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홀을 바로 뒤에 세우기에는* (역자 주 : 배수의 진) 침입자의 행동반경이 지나치게 변화무쌍해서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이 길목을 포기하기엔 아쉬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걸음마다 '만에 하나'를 세며 격앙된 부담감에 쥐어짜이고 있을 때였다. 정면에서 묘한 기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성한 관목이 수어 번 흔들리더니, 그 사이에서 목표물이 우두커니 모습을 드러냈다.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니 주사위가 들어맞았다고 해야 할까. 검은 차광막으로 몸을 뒤덮은 그것은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마클 크람은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놀라지도 못하고 명령을 내렸다. 로임어로 된 짧은 구령에 은색 우리가 서서히 요동한다. 몰이의 시작이었다.

 포위망을 유지한 채 전진하던 병사들에게 경계령이 신속히 전달되었고, 견고히 짠 진형이 상대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유동적으로 인원을 보강해 가며 조금씩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다. 땅과 공중 전체에서 짓누르듯 좁혀지는 울타리. 침입자는 병사들을 잠시 살펴보더니 검을 단단히 쥐었다. 서로의 무른 정도를 품평하는 순간이 잠시 오가고, 순간에, 검격이 우리의 일부를 두드렸다. 포위 간격이 더 줄어들기 전에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본대가 첨탑을 기준으로 일정 높이 이상의 나무들을 베어내면서 전진했기에 부근에는 엄폐할 곳이 더 이상 없고, 안으로 다시 들어가도 숨을 곳이 계속 사라질 뿐이었다. 위기 혹은 기회. 동일한 판단 끝에 쌍방은 서서히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대는 빗나갔다. 쉽게 압도할 수가 없었다. 공격당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밀집하면, 밀집하느라 빈 부분을 오히려 치고 들어온다. 검으로만 하는 공격이지만, 틈을 주지 않는 격렬함에 막고 밀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술적인 공격을 가하려고 하면 근처의 병사들 사이에서 난전을 벌이고, 직접 제압하자니 물리적인 무기가 없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 정도 유지되던 원의 한 쪽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병사 둘을 침입자가 돌파할 것 같았던 그 때였다.

 

 “전원, 본대를 지원하도록! 외곽에서부터 포위망을 보강한다!”

 

 첫 지휘관 레시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지휘관이 이끄는 원군이 포위망에 합류한 그 순간은 어떤 선고였다. 인원이 배로 늘어난 시점부터 침입자는 몰리기 시작했다. 몇 명을 더 쓰러트려 보아도 비좁도록 모인 수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몰이당하며 인간으로 짜인 그물을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는 이미 철저히 몰린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두들겨 댄다.

 맥박은 진작 머리를 앞질렀다. 눈보다 손이 먼저 돌아간다. 상황은 아주 유쾌해서,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아 죽을 각오로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격렬하게 충돌하는 공방의 한가운데. 호흡이 질식할 것 같은 찰나. 서서히 없어져가는 숨 어딘가에서 생각이 조용히 움직인다. 적어도 최선을 향해 달려왔다.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웠다. 다만 남아 있는 경우의 수를 지금 사용해버릴지 정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경우의 수라 하기에도 초라한 막무가내지만, 어쨌든 그는 결정했다.

 이를 악물고 팔로 왼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받아낸다. 순간적으로 감각이 사라졌지만 가까스로 틈이 생겼다. 약간 물러서서 손잡이와 검신 사이의 장치를 돌리자 검의 부품들이 돌아간다. 거칠게 움직이는 마찰음 사이로 녹색이 새어나오고, 순간의 간격. 공격을 내린 그 짧은 여유를 노리고 날 없는 흉기들이 순식간에 도열했다. 선명할 정도로 명확히 느껴지는 목표. 그러나 얌전히 추가타를 맞아 줄 생각은 없다. 잘 예열된 검을 쥐고 나선으로 들어올려, 별안간 뒤를 향해 크게 한 번 그어버린다.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 뒤이은 바스라지는 굉음! 먹먹한 소리가 파도 일듯 울렁이고, 일격이 내려앉은 곳의 앞 대열이 무너졌다. 반동이 멈추자마자 그는 달려나갔다. 동시에 뒤에서 포화가 유성우처럼 쏟아진다. 정통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를 검으로 치고, 내려찍으면서 침입자는 진열이 무너진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중지!”

 

 마클 크람의 지시가 내리자마자 돌진하던 맹공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병사들이 신속히 진형을 정비하고 통솔자의 한 마디를 기다렸지만 명령은 없었다. 애꿎은 허공만이 주목받은 채 의문 서린 시선들을 감내한다.

 마클은 상황을 곱씹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격해도 아군의 피해만 늘어난다. 판단이 늦었다기보다는 시야에서 벗어난 적을 눈앞에서 공격하는 바보짓을 기꺼이 사양할 뿐이다. 1진을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바깥에 2진, 3진이 대기하고 있고, 상대의 체력도 이제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니 긴장을 늦추지만 않으면 무리 없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이 통솔자의 판단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침입자는 2진에서 다시금 불을 마주하게 되었다.* (역자 주 : 매우 힘든 상황)

 숲에서 시작했던 공방은 어느 새 첨탑으로 옮겨왔다. 공기 시린 밤 내내 이어진 이 술래잡기도 곧 끝낼 수 있을 터였다. 두 번째 포위망이 본격적인 몰이를 시작했다. 침입자는 첨탑 외벽을 등지고, 다가오는 덫에 칼을 겨누며 발버둥친다. 천 마리 새와 과일 하나의 싸움. 누구도 승산 있는 발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재미없는 격언. 그는 상처 입은 채 기대어 가까스로 숨을 몰아쉰다. 끝은 지척이고 길은 아무데도 없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쫓는 이들이 쓴 잔이 땅에 쏟아지려 기울어진 끄트머리* (역자 주 : 높은 확률로 끝)라고 여긴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자취가 흘러오르기 시작했다.

 맞닿은 손에서 시작한 푸른 너울이 첨탑의 벽을 타고 솟는다. 은백청색 제복 중에서는 가까이 있는 이가 없으니 당연히 쫓기는 이의 것이다. 염두에 두지 않았던 수지만 그들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기술적 처리가 된 작은 상자가 벽에 닿아 움직이고, 그의 호흡에선 색이 묻어나온다. 만약 저것이 익숙할 정도로 모르는 이 없는 그것이라면, 너무- 가깝다!

 

 “전열 후퇴!!!”

 

 마클의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형체를 알아볼 새 없이 공격이 탑 주위의 병사들과 충돌했다. 비명소리와 흩날린 자국이 비산하며 눈앞을 가린다. 오산이었다! 정보 누출을 막기 위해 칼만 사용하는 전통적인 자객인 줄 알고 밀집한 탓에 다 잡아 놓고 허를 찔렸다. 위쪽에 떠 있던 병사들이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면서 사방에 사람과 땅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히 울린다. 소란스러운 메아리가 시야를 가리는 동안 침입자는 아스라이 첨탑 안으로 사라졌다. 마클은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다가 이내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진형이 산발적으로 퍼진 채 흐트러졌으며 도처에서 부상병들이 신음한다.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6열까지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그 중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한 인원은 부상자들의 후송을 돕고, 그 외에도 수행이 불가능한 자는 신고 후 귀환하도록. 첫 의전관들은 나를 따라 첨탑으로 돌입한다. 그 외에는 첫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주변을 포위하도록. 레시스!”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간결하고 깔끔한 어조. 청명함마저 느껴진다. 그녀를 신뢰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저쪽이다. 여러 가능성을 곱씹어보며 마클 크람은 탑 안의 계단을 주시했다. 공간이 협소한 탓에 기습이나 전멸의 가능성이 높은 공간이다. 상대의 수단을 특정할 수 없는 한 철저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유가 허용되는 선 내에서의 이야기일 뿐, 그 이상의 고민은 그저 계책을 가장한 지연이다.

 침입자가 놓은 말들이 여전히 탑 주위를 배회하며 위협을 상기시킨다. 어수선함이 맴도는 짙은 냉기가 불쾌하다. 청백색 머리를 한 차례 가다듬고서, 그는 옅은 음영이 새어나오는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화려한 장막의 뒤에, 소리를 피해 걷고 달리는 한 소년이 있다. 사건의 틈새에 끼인 채, 너머를 바라보면서. 바람소리가 내리는 나뭇잎을 지나, 휘황한 불빛이 담기는 웃음소리를 엿본 후, 가까워지지 않는 먼 지표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본다. 그러나 다시 돌아 걸어간 곳에는 저 끝까지 이어진 호수와 물의 줄기뿐이었다. 어느 새 초조함이 목을 삼킨다. 얼추 가는 방향을 잡고선 길 없는 곳으로 다시금 막연히 들어간다.

 그렇게 걸음만 끊임없이 쌓여가는 어디에선가, 이상한 귀울음이 울렸다.

 소란은 때없는 여명이었다. 올려다본 하늘 저편에 서서히 빛이 차오르며 타다 만 소음을 흩뿌린다. 고개를 들어 살피니 그저 탑이 비춰내는 잔영일 뿐이었지만 따뜻했던 지 오래 된 대기엔 제법 밝았다. 흑백의 선이 까마득한 관측탑의 외벽 위에서 타오르다가 사그라들고 타오른다. 흔적 없는 자취를 열없이 그어대는 불규칙한 움직임. 그는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진다. 병사들의 말소리가 주변에 있다. 무의식중에 다리가 움직였다. 멈추는 중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멈춰선 것은 그보다 조금 더 후였다. 이곳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데 나무들이 몇 그루만 남긴 채 거칠게 잘려 있어서 더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검 손잡이를 굳게 잡고 만지작거렸다. 궁도 아닌 장소를 이렇게까지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분명하다. 각오를 곱씹으며 첨탑을 응시했다.

 첨예한 높이의 전경이 까마득한 그늘을 드리우고, 주위에 매달린 포위망이 반사광에 산란하게 비치운다. 맥박을 억누르며 시선을 기울이고 있으니, 저 끝에서 검은 무언가가 날아갔다. 휘날리며 이윽고 사라진 옷, 같았던 무언가. 서서히 집중하는데, 저 꼭대기에서 요동치는 거친 움직임이 한순간에 주의를 빼앗았다.

 탑의 끝에 발을 디디고 있다. 오른손에 검을 들고서. 그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수어 번 검으로 견제하며 탑 끝의 장식을 잡고 올라섰다. 싸늘한 달빛을 등진 뒷모습이 어렴풋이 비친다. 잠시간의 휴식. 숨이 거칠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이윽고 그는 소년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가까스로 보이는 형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익숙하고도 낯선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어슴푸레한 역광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래빛이, 왜인지 기억에 남아 있다. 모른 채 호기심에 바라보던 순간. 어느 새 사람자국의 고개가 살짝 내려가고, 장난과도 같이 눈이 마주쳤다.

 오가지 않는 말을 사이에 두고 모래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한다. 경악을 담아낸 채. 저편에 놓인 거울에서, 있을 수 없는 자신의 왜상(歪像)을 목도하면서.

 정적(靜寂)이 바람에 스며든다. 순간은 길고, 마주침은 길지 않았다. 불현듯 탑 꼭대기가 중심을 잃었다. 그의 발끝에 성긴 빛살이 한 차례 비치고, 서 있던 곳이 무너졌다. 뿌리를 잃어가는 얇은 기둥을 놓고 비켜서는데, 오른발이 디딘 건 허공이었다. 말은 없었다. 다만 시선에 짧은 혼란을 담아낸 후에, 한 걸음. 내딛어 추락했을 뿐이다.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구름 소리가 났다. 한 차례의 움직임, 한 차례의 소리, 한 차례의 침묵.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뜨는 이는 없었다. 지켜 선 이들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긴장을 삼키며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윽고 통솔자가 탑에서 내려왔다. 뒤따른 연락병이 침입자의 상태를 살핀 후 짧은 보고를 올렸다.

 

 “사……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저벅거리며 마클 크람은 미동조차 사라진 목표물에 다가갔다. 그는 쓰러진 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갑작스레 돌아섰다.

 

 “상황 종료! 전 인원은 해산 후 귀환한다!”

 

 그의 말에 일사불란한 소란이 기력을 되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마클 크람은 연락병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

 

 “통신 상태가 좋지 않으니 심판청에 따로 연락해 두도록. 그리고 홀의 지위에 있는 다섯 분 중 아무나 모셔 올 수 있으면 좋겠군.”

 

 짧은 목례와 함께 병사는 길 위에 올라섰다. 부산하던 공터는 현장만 남기고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본래의 안정을 되찾은 자리를 마클 크람과 병사 몇만이 남아 지키고 섰다.

 마클은 곧 없어질 잠시간의 여유를 헤아리며 흐트러진 몸가짐을 정돈했다. 소임을 다했다는 안도감. 앞으로 남은 일들에 대한 고민.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이 몰려온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나열되며 곧 있을 더 골치 아픈 사건들의 자취를 흐릿하게나마 비추는 것 같았다.

 

 

 

 호흡과 목에서 쓴맛이 난다. 눈을 세로로 찢는 듯했던 추락은 어느 새 끝나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지금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저것’은 누구인지.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광경만이 의식을 끊임없이 쥐어흔든다. 아직도 선명하게 배어 있는 그 모래색, 탑 위에 서 있었던… '그 무엇'. 때문에 마치 떨어진 것이 자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 소년은 머리를 흔들었다. 마주쳤을 때의 경악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그것은…….

 나오지를 않는다. 단 한 마디가 나오지를 않는다. 저것을 지칭할 가장 적절한 단어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지러운 정신을 망치기만 한다. 소년은 그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확인해야만 했다. 오류와 몰이해로 뒤섞인 의식이 제멋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곧은 적막이 사사로운 소리를 지워낸다. 바람 소리, 대화 소리, 다가오는 소리. 수용할 곳 없이 마비된 감각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목적은 목표. 목표는 목적. 숨마저 날아간 채 다가가고 있는 어느 순간이었는지. 팔에 무언가가 걸렸다.

 즉시 왼쪽을 쳐다본다. 장갑이었다. 수려한 은백색 장갑이 약간 뒤에서 팔을 쥔 채로 걸려 있다. 정확히 해석하자면, 안에 손이 들었으니 잡혔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팔이 붙어 있고 그 위엔 눈썹이 살짝 가까워진 얼굴이 다소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황한 표정?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데는 조금 더 걸렸다. 병사는 소년이 움찔거리며 몸을 움직이기까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바로 팔을 꺾어 제압했다. 순식간에 흙과 몸이 충돌하고 다리가 쓰러졌다. 그를 바닥에 찍어 누르며 병사는 저편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또 다른 침입자가 있습… 잠깐, 뭔 힘이……!”

 

 기술이 아니라 그저 무식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다. 그다지 체구가 크지 않은 소년인데도 잡아둘 수가 없다. 잡힌 자가 거의 허리를 세우고 서려는 찰나 병사 몇이 더 달려와 다시금 그를 제압했다.

 결국 소년은 병사 다섯의 엄중한 호위 아래 통솔자 앞으로 끌려갔다.

 

 “……!”

 

 마클 크람은 그를 보자마자 다가가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득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 그는 다시 탑 아래로 돌아갔다. 주검을 천천히 내려다본 후 돌아온 그의 혼란은 몸짓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마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년의 무의미한 발버둥이 몇 번 있고 나서야 과묵한 통솔자는 비로소 입을 떼었다.

 

 “경위를 보고하게.”

 

 소년을 발견했던 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첫 의전관, 본궁 외곽, 세 번째 장(場) 소속 하를 레이넨입니다. 본래 위치로 복귀하던 중 현장으로 걸어가던 침입자를 발견하고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이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말이 끝나자마자 질문이 되돌아왔다. 통솔자의 흔치 않은 반응에 병사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삼켰다.

 

 “정확히는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걸어가는 걸 발견한 거지만, 그렇습니다.”

 

 두 번. 주위를 돌아보고서 마클은 대답했다.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겠는데.”

 

 시선이 소년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소년은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겨우 통솔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

 

 소득은 없었다. 이내 소년의 시야는 탑 아래로 다시 향했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마클은 곧 소년이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뭔가 원하는 게 있나?”

 

 고개를 숙인 웅얼거림이 슬며시 지나갔다. 소년의 입에서 무어라 작은 소리가 있자 마클 크람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잘 들리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는군.”

 

 다시금 말을 종용하려던 그 때 저편에서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연락병이었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은 뒤 마클 크람의 귀에 조곤히 말했다.

 

 “조율자께서 오십니다. 니클러께서도 계십니다만 리드로스님과 상황을 논의한 뒤 내방하신다고 전언을 부탁하셨습니다.”

 

 “알겠네. 조율자께서 귀환하실 때까지 대기하도록.”

 

 예의를 갖춘 후 물러나는 연락병의 뒤에서 곧 한 무리의 인파가 도달했다. 중심에 서서 걸어오는 조율자 테이무드. 그 주변으로 만반의 경계를 하는 병사들이 사열한 엄숙한 진행.

 

 “조율자를 뵙습니다.”

 

 마클 크람이 나서서 정중히 팔을 굽히고 인사했다.

 

 “통솔자, 수고하셨소.”

 

 간단히 인사를 받고 테이무드는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주변 경관의 훼손이 심한 것이 듣지 않아도 상당한 고초였음이 선히 보인다. 수고의 대가로 쿠키라도 주고 싶지만 이 엄격한 통솔자는 냉랭히 거절할 테니 삼가는 것이 좋으리라. 게다가 지금 상황은 개인적인 치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즐겁지가 못하다. 알 라크테이 휘하의 사람들이 와서 처리하면 종결될 일에 5홀의 인간이 필요하다는 건 심각성을 꽤나 고려할 만한 사건이라는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경 쓰이는 게 옆에서 계속 바둥거린다.

 

 “그래. 정말 수고했네만 이 작은 손님은 대체 누군지?”

 

 “침입자입니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매우 명료한 설명을 끝내고 마클 크람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소년을 잡고 있던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호위 둘을 사이에 두고 테이무드는 소년과 마주하게 되었다. 다만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는지라 로임-벤의 조율자와 독대하는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결국 병사 한 명이 소년의 얼굴을 비스듬히 잡아 올렸고, 그제야 가무잡잡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하이람 계통 피부에 누구와 꼭 닮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이다. 모래색이라고도 하는 혈통색이 짙게 드러나 있고, 나지막한 코의 선이나 둥그면서도 단단한 얼굴형이 매우 비슷했다.

 

 “…오딤과 닮았군.”

 

 조율자의 감상평이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해했다. 상당히 곤란한 어떤 단어에, 마클 크람은 난색마저 표했다. 이어지는 테이무드의 말이 없었다면 진언이라도 올릴 기세였다.

 

 “그런데 죽은 것치곤 너무 팔팔한 거 아닌가? 살아 있다고 해도 속겠군.”

 

 애초에 ‘상황이 종료’되어 위험 요소가 없어졌기에 외출을 허가받은 것이다. 그런데 보고와는 달리 매우 건강하고, 병사들이 잡고 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추락으로 즉사’한 몰골은 아니었다. 핏자국이나 다친 곳도 없다. 마클 크람이 허언으로 보고시킬 위인도 아닌데 참 재미있는 상황이다. 테이무드는 속으로 웃음을 읊었다.

 

 “침입자의 사망 확인 후 귀환 중이던 첫 의전관이 발견하고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본래 저희가 추격하던 침입자와는 다른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침없던 통솔자의 보고가 잠시 멈췄다.

 

 “문제는?”

 

 “일단 이쪽으로 와 주시길…”

 

 마클 크람은 조율자를 탑 아래로 안내했다. 주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현장을 확인한 테이무드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클과 몇 마디 의논하고서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율자는 다시금 천천히 용모를 뜯어본 후,

 

 “…오딤과 닮았군.”

 

 무게 있는 말을 내뱉었다. 같은 말이었지만 아주 달랐다.

 

 “저쪽이 더 크고 나이도 있어. 하지만 정말…… 이상하군. 외동이 확실한가?”

 

 마클 크람은 조용히 대답했다.

 

 “헤렘 쪽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닮았으면 어느 형태로든 확인되었을 겁니다.”

 

 “…자네 이름은?”

 

 뇌리를 떠도는 유력한 후보가 있지만 일단 물어 보았다. 예상한 바대로 되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테이무드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연신 조그마한 소리를 입 안에서 굴린다. 대화에 응할 의지는 있다. 다만 뜻을 전하려는 시선을 두고서 말을 열지는 않는다.

 

 “…고 싶어요.”

 

 억양이 독특한 나하크 이알라스*가 이름은 아니겠지만 아직 몇 마디 말을 들어 주는 관용은 가능한 상황이다. 조율자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좀 더 크게 말하게.”

 

 “보고 싶어요.”

 

 소년은 창백하게 떠는 말소리를 확실하게 내뱉었다. 주어가 없지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명백하다. 테이무드는 마클에게 시선을 보냈다. 허가하라는 명령이다. 통솔자는 짐짓 당황했다. 머릿속에서 원칙은 당장 거절하라고 찔러대지만 융통성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냐며 비웃는다. 침착하게 상황을 둘러보았다. 인원 충분하고 현장은 확보되어 있으며 규정상으로도 문제는 없다. 괜스런 기우일 뿐이지만 성격적으로 불안감이 질척대는 건 역시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주춤거리다가 병사들을 남기고 물러섰다.

 

 “…….”

 

 드디어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소년은 한참 동안 주검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한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저항은 없었다. 그저 간혹 몸을 가늘게 떨 뿐, 아직 앳된 티가 있는 얼굴엔 하나의 감정만을 딱딱히 굳힌 채였다. 슬픔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말랐고, 분노라고 하기엔 극도로 차갑다. 하지만 확실히, 눈에서 비치는 거부는 경악을 표상하고 있었다.

 반응이 멈춰버린 소년을 다시금 탑에서 떼어놓은 후, 조율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일단 이름을 알려주겠나.”

 

  “…….”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결국 테이무드는 질의를 포기했다.

 

 “어쩔 수 없군. 소집이 있어서 일단 돌아가야겠네. 자네도 곧 회의실로 와 주게나.”

 

 “마무리하고 곧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클은 정중히 인사했다. 테이무드는 소란스러운 기척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그가 떠나고 난 뒤, 통솔자는 병사들을 직접 인솔해 소년을 폐궁 지하로 데리고 갔다.

 계단을 몇 번 돌아 내려간 복도엔 넓게 트인 공간과 방이 번갈아 자리잡고 있었다. 쇠창살과 쇠창살 사이에 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방엔 잡동사니가, 어떤 방엔 간단한 가구가 있다. 궁이 건축된 이래 용도가 여러 번 바뀐 흔적이 그대로 남은 내부 옥사. 외부에 교도소가 신설된 지금도 드물게 사용될 때가 있는지라 반은 정리되어 있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자리를 새로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졸다가 발소리에 헐레벌떡 뛰쳐나온 담당자가 마클 크람의 설명을 듣고 방 하나를 새로 치우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침입자는 안쪽 깊은 곳에 지어진 독방에 수감되었다. 차고 부드러운 바닥과 높게 난 작은 창. 닫힌 곳을 올려다 본 그림자에 창살이 검게 드리운, 명백한 감옥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물음에 짓눌린 채 소년은 그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거대한 회의실이 침묵 속에서 엄숙히 정돈되는 동안, 부국왕 리드로스는 평소보다 더욱 검어진 눈으로 내부를 주시했다. 명멸하는 시야 위로 흐릿한 전경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벽에 장식된 푸른색과 은색, 흰색이 뒤섞여 지나간다.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돔에 둥근 천장. 정적마저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고요함. 말하는 이는 없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도 있는 무료함이다. 그리고 어느 새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섯 번째다. 방금 들어온 심판청의 수장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5홀이 전원 참석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간단히 사건을 되짚으려다가 뇌를 짓누르는 두통에 포기했다. 조금 전 들은 보고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심지어 복잡하기까지 하다. 그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괴었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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