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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와 나의 세상
작가 : 은아린
작품등록일 : 2017.7.19

이제는 없는 그 아이를 찾아야해.


인간의 노예화를 추진 중인 뱀파이어와 인간과의 공존을 꿈꾸는 뱀파이어 사이에 서게 되었다.




어느새 내 지척에 다가온 라무엘이 한 손은 쇼파를 짚고 한 손으로는 내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큰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겉보기와 다르게 눈물 많고 여리다는거."

라무엘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눈매를 매만졌다. 차가운 손끝이 피부로 느껴졌다.

"뭔 개소리야."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신지. 손을 탁 쳐내자 라무엘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를 흘겨보며 술병을 들어 안의 내용물을 입 안에 쏟아부었다.

 
너와 나의 이미 시작된 시간 1
작성일 : 17-07-21 13:00     조회 : 219     추천 : 0     분량 : 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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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너와 나의 이미 시작된 시간(1)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바스락대는 소리에 끙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만류하는 라무엘을 뿌리치고 잠이 들때까지 술을 마셨던게 생각이 났다. 어제보다는 집같은 꼴이 된 거실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넓직한 등이 보였다. 까만 뒷통수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라무엘이 고개를 돌렸다.

 

 "잠든지 30분도 안됐어. 나때문에 깬거야?"

 "아니야."

 

 30분이나 잠들었다니, 대단하군.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 뚜껑을 따고 입에 들이밀었다.

 

 "얼마나 이렇게 생활한거야?"

 "몰라."

 

 라무엘의 말에 성의없이 대꾸하며 생수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아있다는게 신기해서 그래."

 

 역시 그는 딱히 내 대답을 바란게 아니었나보다. 내 앞에서 보란듯이 썩은 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린 라무엘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지금 동정하는거냐.

 

 "신경꺼."

 

 퉁명스럽게 말하고 쇼파에 다시 널부러졌다.

 

 "좀 더 자는게 어때?"

 "잠이 안와."

 "그럼 누워라도 있어."

 

 눈을 가린 팔을 슬며시 잡아서 일으킨 라무엘이 거실 상황과 별반 다를바 없는 방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거실이나 방이나……."

 "치울 동안만."

 

 똑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말을 뚝 끊어버린 라무엘이 문 마저 닫고 나가버렸다.

 

 "모르겠다."

 

 신경이 예민해진건지 둔해진건지 나조차도 구분이 안갔다. 피곤해서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아 미칠 지경이라는 것만 명확히 알고 있었다. 대충 내 몸 하나 누울 자리를 만들고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꿉꿉하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그리고 어제 라무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재희와 라무엘은 성에서 만났다. 재희가 라무엘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재희가 라무엘을 성에서 탈출시켰다. 재희는 뱀파이어 여왕을 소환하기 위한 제물이다. 그래서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재희는 탈출하지 못했다. 라무엘은 재희를 데려오기 위해 재희를 찾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라무엘은 단조로운 감옥 생활 중에 소소하게 재희와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라무엘도 그 곳에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워낙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했기에.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 옆에서 구깃구깃한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개비가 가운데 반쯤을 덜렁이며 들어있었다. 달랑대는 반쪽을 툭 잘라내고 입에 물었다.

 

 "아, 불."

 

 라이터가 없는 것을 깨닫고 입에 담배를 대롱대롱 물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일단 뭐 좀 먹고 치우는게 좋을것 같아서."

 

 인덕션 앞에서 돌아보지도 않고 라무엘이 말을 건넸다.

 

 "아."

 "무슨 의미야?"

 "별 뜻 없어.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고개만 슬쩍 돌려 나를 보는 라무엘에게 어깨를 한번 으쓱해서 보여준 뒤 뒤죽박죽인 테이블 위를 여기저기 쏘삭이다가 라이터를 찾아냈다.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지만 쉽게 불이 붙지는 않았다. 오기가 생겨 힘껏 라이터를 켜자 불길이 확 하고 위로 솟아올랐다.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달큰한 향기가 훅 몰아쳐왔다.

 

 "담배는 나중에."

 

 뒤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내놔."

 

 손을 뻗어 반개비라도 남은 담배를 다시 회수하려 했지만 라무엘이 더 빨랐다. 손을 쭉 뻗어 위로 올리니 내 손이 닿지 않았다.

 

 "이참에 금연을 해보는건 어때?"

 "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알고 일단 아침을……."

 

 내 옆을 스쳐가는 라무엘의 품으로 재빨리 파고들어 엎어치기를 해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그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작작해.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아, 아하하하."

 

 얼굴을 바짝 붙이고 사납게 말하자 라무엘이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엄청나게 유쾌하다는 듯이 말이다. 엎어치기 당하고 멱살 잡혀서 좋다고 웃다니, 자존심 상해서 정신줄을 놓은건가.

 

 "미친거야?"

 "아, 아니. 크큭."

 

 한 팔로 눈을 가리고 한참을 큭큭 대던 라무엘이 한순간 웃음을 뚝 멈췄다.

 

 "언제까지 내 위에 있을거야?"

 "내걸 돌려받을 때까지."

 

 정색하는 라무엘에게 나도 정색으로 맞받아쳤다.

 

 "안돌려줄건데."

 

 말하면서 라무엘이 손안에 든 담배를 사정없이 구겨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허탈했다. 아, 사러 나가기 귀찮은데. 맥없이 라무엘의 위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쇼파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온 몸이 묵직했다.

 

 "아아, 진짜. 나중에 당신이 사다 놔. 진짜 정신 못차리겠어."

 

 계속 한군데만 앉아 오래전에 움푹 패인 내 전용 자리에 앉아 축 늘어졌다. 역시 정신 맑게 하는데는 몸에 해로운걸 해야해. 라무엘이 일어나 자신의 옷을 팡팡 털었다.

 

 "역시 재밌네."

 "그건 또 무슨 개풀뜯어먹는 소리야."

 

 입가로 희미한 미소를 걸고 있는 라무엘의 말에 내가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너. 이제이. 재밌다고."

 

 역시 범인의 생각으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의중을 알기가 상당히 어렵군.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겠다. 나 커피. 완전 진한거. 많이."

 

 다시 눈을 감고 손을 힘없이 훼훼 저었다.

 

 "그래."

 

 바람빠지는 소리로 웃음을 흘린 라무엘이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정말 저 작자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못하겠다. 나 방금 엄청 자연스럽게 시켜먹었는데 화도 안내고 군말없이 커피를 내리고 있어. 왜때문에 저러는거지?

 

 "피곤하면 잭한테는 나중에 갈까?"

 

 지척에서 달큰한 향기와 커피 향기가 뒤섞여 났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흐리멍텅한 시야때문에 대중으로 라무엘에게서 머그잔을 건네 받고 고개만 슬쩍 들어올려 한모금 마셨다.

 

 "으으."

 

 역시 엄청 썼다. 정신이 확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인상 쓸꺼면서 왜 진하게 달래."

 "그래야 정신차리니까. 이따가 밤에 잭한테 가자. 솔직히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지금은 문을 열지 않았을테니."

 

 중얼거리듯 말을 하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라무엘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눈만 빼꼼이 치켜 떠서 보자 그가 나를 말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많이 힘들어보여서."

 "당연하지. 나흘째 잠을 제대로 못잤어."

 "상처때문이야?"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는데 라무엘에게서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은 안피곤해? 당신도 어제 제대로 못잤잖아."

 "너희들과 달리 며칠 안자도 상관없어."

 

 걱정까지는 아니었고 좀 신경쓰여서 한 말이었는데 라무엘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며 다정히 말했다. 그의 입가로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진 미소가 떠있었다.

 

 "좋겠네."

 "과연 그럴까."

 

 약간 얄미워져 비꼬았는데 라무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씁쓸하게 변했다. 그가 몸을 바로 돌려 주방으로 향했지만 봐버렸다. 무슨 의미일까.

 

 "아침 먹고 눈이라도 감고 있어. 그러다가 자면 더 좋고."

 

 방금 내가 본게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다를바 없이 말하며 상을 차리는 라무엘을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당신 이상해."

 "나야 뭐 태어난 순간부터 이상했다던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국그릇을 식탁에 올려놓은 라무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거는 내가 알 수 없는거고. 너무 자연스럽잖아. 왜 내집을 당신집처럼 사용하고 치우고 밥차리고 그러는데?"

 

 의자를 빼자 드륵 소리가 났다. 그 위에 털썩 앉으며 내 앞에 놓인 생소한 풍경을 인상을 쓴 채 바라봤다. 국과 밥 뿐이었지만 몇년만에 식탁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정말 낯설군.

 

 "앞으로 네 옆에 머물텐데 사람꼴은 하고 살고 싶어서."

 "아, 내가 사람이 아니었어?"

 

 건성으로 말하긴 했지만 상당히 내 욕이잖아. 그래도 입씨름해서 가뜩이나 없는 기운 빼고 싶지 않았다.

 

 "집에 쌀이 있었나? 몰랐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숟가락으로 푹 찌르며 말하자 라무엘이 달걀국을 숟가락으로 퍼올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봤다.

 

 "방금전까지 네집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라무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가 무언가를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아, 그래. 너한테 많은걸 바라진 않을게."

 "그래그래.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마."

 

 대충 대답하며 숟가락을 식탁 위에 탁 놓고 국그릇을 들어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 그릇을 내리자 흥미롭다는 듯이 날 보고 있는 라무엘이 보였다.

 

 "뭘 봐."

 "왜인지 재희를 이해하게 됐어."

 

 그건 또 뭔소리래.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줄래."

 "내가 왜. 네가 잘 알아들어봐."

 

 이건 뭐 말이 안통하잖아. 대표님같다. 완전 대표님같은 작자야. 그걸 깨닫자마자 대번에 질린 표정이 되어버렸다.

 

 "아니. 그냥 당신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어.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해. 난 나대로 할테니까."

 

 다 먹지도 않은 라무엘을 내러벼둔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무엘이 내 몫으로 놔준, 한숟가락 크게 패인 밥덩어리를 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밥은?"

 "건더기는 안넘어가서. 아, 국 잘먹었어. 맛있네."

 

 돌아섰다가 고개만 슬쩍 돌려 라무엘을 쳐다봤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웃음을 참는 것도 같고 울음을 참는 것도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뭐라고 건넬 말을 찾지 못해서 라무엘을 등지고 쇼파의 내 지정석에 풀썩 앉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식탁 쪽에서 라무엘이 마저 식사를 하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세상 모든게 다 귀찮다. 제발 잠이 와줬으면 싶다.

 

 

 ***

 

 

 하얀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재희다. 재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이야, 좀 웃어봐. 넌 재미없어?"

 

 뭐, 어떤게 재밌다는거야. 나 목소리가 안나와, 재희야.

 

 재희의 자그마한 손이 내 팔을 붙잡고 한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더 재밌을거야."

 

 순순히 재희가 이끄는대로 끌려갔다. 아아, 절대로 잊을리 없는 모습과 목소리였다. 분명히 재희다.

 

 "이리로 이리로."

 

 조잘조잘 끊임없이 떠드는 재희가 맞았다.

 

 "자, 여기서 봐봐. 너도 좋아할거야."

 

 방긋방긋 웃어보이는 재희가 기대에 가득찬 눈으로 나를 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재희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저게 뭐지?

 

 입은 벙긋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밖으로 내보내주진 않았다.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야."

 

 티끌하나 없는 해맑은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재희만 들어오던 시야가 사방으로 확 넓어졌다. 주변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냥 붉은색도 아니고 시커멓게 죽은 핏빛이었다. 사람들의 창백한 팔이 나뭇가지처럼 사방에 펼쳐져 있었고 그 가운데 재희의 얼굴이 있었다. 희게 질린 재희가 감은 눈에서 새빨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자, 어때? 마음에 들어?"

 

 맑고 영롱한 재희의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옆을 돌아보자 재희가 활짝 웃으며 내 팔에 매달려있었다.

 

 "제이, 네가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어."

 

 정말 기쁘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재희가 낯설었다. 분명 재희 얼굴인데 재희같지 않았다. 꿈, 꿈이다. 분명 꿈이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나 너무 기뻐. 그럼 너도 저렇게 만들어줄게. 그럼 네가 더 좋아하겠지?"

 

 재희가 밝게 웃으며 까치발을 들고 내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위험했다. 재희가 너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더 이상 꿈 속에 있다간 엄청난 정신적 데미지를 입을 것 같다. 그 망할놈의 불면증은 지금처럼 필요할때 어디로가서 꿈 속에 나를 처박아 둔건지 모르겠다. 재희의 작고 하얀 손이 점점 내 얼굴 위로 다가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쩌지, 어째야하지. 여긴 내 꿈이고 내 꿈이니까 내가 바라는대로 해줘야하는거 아닌가. 어서 깨라고. 꿈에서, 잠에서 깨어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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