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달의 노래1

　처소로 옮겨진 아랑은 밤새 끙끙 앓았다. 그 옆을 주아가 지켜주었다. 다행히 사라사로부터 약을 받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새벽녁에는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정신이 좀 드세요?"

　"아, 주아. 여기는 달의 전각이야? 나 돌아온거지?"

　"네, 아가씨. 마차에 실려서 한 밤중에 돌아오셨어요. 열이 펄펄 끓어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주아의 채근에, 아랑은 씩 웃으며 말했다.

　"고뿔에 걸렸어. 그 잠깐 사이에. 하하하 얼마나 다행이야?"

　열없이 웃어보이는 아랑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주아가 호통을 쳤다.

　"다행은 요! 얼마나 열이 높았는지, 사라사 아가씨의 약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거기에다가 아가씨는 고뿔에 걸리면 안되요!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멍도 잘 사라지지 않고, 상처가 아무는 데에도 오래걸리시잖아요! 이번 고뿔이 얼마나, 갈지....... 흑... 아가씨 요즈음 혈색도 좋아지셔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밤새 아프면서 다시 홀쭉해졌어요. 흑흑."

　주아의 눈물섞인 푸념에 아랑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 알고 있었구나.. 괜찮아. 이 까짓 감기쯤은. 금방 나아질거야. 아, 참.. 시간이 몇시야? 윽.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졌네.. 향낭가게에 가야하는데, 늦겠다. 주아, 나 옷 좀 가져다줄래?"

　"지금, 지금 이 꼴을 하고 나가시겠다는 건가요? 안돼요!"

　"그래도 여기는 전화도 없구.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제 폐끼친 것도 있어서 오늘도 그러면 안 되는데......... 괜찮아 주아, 힘들면 빨리 끝내고 올게. 그래도 믿어주신 분인데 가서 얼굴은 비춰야지."

　"그럼 제가 대신 갈게요. 오늘은 좀 쉬세요."

　아랑을 다시 눕히는 주아의 손을 잡으며 목이 쉰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원래 땀을 빼야 감기는 빨리 나아. 자, 일어날 테니까 나 좀 붙잡아줘."

　"하여간, 고집은 엄청 세다니까요. 좋아요 그럼 옷 가져다 드릴테니까 힘들면 일찍 오셔야해요? 저도 은의 궁 최고 상궁마마님께 약을 부탁해 볼테니까요. "

　"안 줄지도 몰라."

　"네? 왜요? 흥, 안주면 제가 사오면 되지요. 아님 뺏어오기라도 할게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랑은 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몸이 정말 안 좋았지만, 어젯 밤,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서 느낀 것은, 딱 한가지 였다. 어서 이 궁을 나가자. 빨리 돈을 벌어서 자유의 몸이 되자.

　향낭가게에 도착하자, 하마르는 보이지 않고 리젠이 대신 상점을 지키고 있었다.

　"아랑아가씨? 이렇게 아픈데 좀 쉬지 그랬어요?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서 손님도 별로 없을 텐데."

　"전 괜찮아요, 절 믿고 맡겨주신 일인데, 그래도 잘 해야죠"

　"목이 완전히 쉬어 버렸네요. 그럼 무리하지 말아요."

　"네, 음........ 저 그리고 오늘 같이 그....... "

　아랑이 주저하는 기색을 눈치 챈 리젠은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아랑아가씨가 몸이 안 좋으니까. 다음에 같이 먹어요. 아픈 아가씨를 눈 앞에 두고 입으로 잘 안 넘어갈것 같거든요."

　리젠의 상냥한 말에 아랑은 가슴이 울컥 하는 것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꼭 같이 가요."

　"당연하죠. 그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핫"

　선하게 웃는 리젠의 얼굴에서 또다시 현태의 그림자를 발견하던 아랑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향낭주머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젠은 자신의 모습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았던 아랑을 알면서도 모른척 해 주었다.

　리젠이 상단 일 때문에 먼저 간 후에, 하마르에게 오후의 상점 일을 인계하고는 아랑은 으슬거리는 어깨를 다잡으며 테마르칸 상단으로 향했다.

　"어서오..... 아랑아가씨.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미용비누 만드는 일에 대해서 중간 보고도 드려야 하는데.. 아가씨 말처럼 해봤더니 독성이 빠르게 제거되었습니다. 거기에다 비누를 만들 장소와 인력을 확보해두었습니다. 자 이것을 한 번 보세요."

　무현이 건네는 화선지 뭉치를 살펴보던 아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넘겨주었다.

　"좋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무현님이 더 잘 아실테니까 저는 믿고 맡기겠습니다. 제가 향을 넣는 방법과 굳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나요? "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러실 것 같아서 모두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

　아랑은 무현이 이끄는 대로 상단의 안채로 따라갔다. 역시나 그곳에는 정원에서 햇볕을 쬐고있는 검은 옷의 사내가 있었다. 검은 옷이라면 마주치고 싶지조차 않았던 아랑은 그쪽을 외면하며 총총히 무현을 따라갔다.

　태무황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아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 황자는 무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순식간에 전각 지붕위로 뛰어올라 창 쪽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아랑아가씨. 목소리가 많이 잠겨있네요. 혹시 고뿔에 걸리신 겁니까? "

　"아, 아하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콜록."

　기침이 심해지고 콧물이 흘러내렸다. 무명천으로 콧물을 닦아내리며 아랑은 멋쩍게 부탁했다.

　"아, 혹시 고뿔에 잘 듣는 약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일하는 데 너무 불편해서요. 콜록콜록."

　"제가 지금 바로 수하를 시켜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저희 가문의 의원이 만든 약이니 만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콜록.. 감사합니다. 윽.....콧물이 계속 나오네요. 하하하."

　"아가씨가 무리하셨나 보네요. 의원에게 진찰이라도 받아보시는게 어떻습니까? "

　"아니에요. 진찰은 이미 받았어요. 약만 받아가면 되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랑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무현은, 이 작은 아가씨의 헬쑥해진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꾸밈없이 웃고, 볼우물이 패이도록 웃었으면. 태무황자님의 후궁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돈을 벌려고 하는 걸까?

　"실례지만 아가씨. 혹시 빚을 지셨나요?"

　"네? 빚이요? "

　"아니....... 돈을 버는 일은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아서...."

　"아, 그건, 다 이유가 있는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얘기해주세요."

　"감사합니다. 하하 제가 인복이 참 많네요. 여기 저기서 도와준다는 사람들도 있구."

　"또 누가 아가씨의 인품에 반하셨나보군요. 하핫."

　"엇. 인, 인품이라니요.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열 때문에 빨간 얼굴이 더 빨개졌다.

　"겸손하시기까지."

　거듭된 칭찬에 아랑은 쑥쓰러워하면서도 쓸쓸한 눈빛을 했다.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빨리 돈을 모으려는 목적도 저를 위해서에요. "

　아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현은 순간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바로 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랑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빨리,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거든요........"

　"저희가 최선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의뢰인의 만족은 저희의 기쁨이니까요."

　분위기를 바꾸며 무현이 경쾌한 목소리로 아랑을 위로했다.

　"네, 그럼 믿고 일어나 볼게요. 콜록.."

　"제가 나가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무현과 아랑이 여닫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오자, 하얀색 보따리가 떡 하니 놓여있었다.

　"어? 이게 뭘까요?"

　"아.아하하하 제 수하가 아랑아가씨게 챙겨드릴 약제를 가져다 놓은 모양입니다. "

　"네? 무현님께서는 조금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셨는데, 수하가 어떻게 알았을 까요?"

　"그..... 아하하하 미리 눈치를 챈 수하가 가져다 놓은 모양이지요. 제 수하가 이렇게 행동이 재빠르답니다. 핫핫"

　"정말, 대단하시군요. 역시 테마르칸 상단이 제 1의 상단인 이유가 있네요. "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아랑이 문 밖으로 나가자. 아랑과 무현이 있던 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랑이 앉았던 의자에 걸터 앉으며 탁자위로 두 발을 올렸다. 잠시 후 아랑을 상단 출구까지 안내하고 돌아온 무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셔서 직접 전해주시지, 왜 문 앞에 두신 겁니까?"

　태무황자가 감았던 눈을 뜨고 무현을 쳐다보았다.

　"아, 아니, 제 말은 이 기회에 아랑아가씨랑 대화를 해보셨으면 해서 말씀드린겁니다. 굉장히 영민하고 바른 아가씨인것 같습니다."

　무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태무황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황자는 처음부터 이 방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가, 그도 궁금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지만 답은 듣지 못했다. 자신의 궁의 여인들이 생활비의 명목으로 따로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황자도 잘 아는 일이었다. 선조때부터 후궁들의 투기를 막기위해 사용되었던 방법임과 동시에, 그녀들을 옥죄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랑은, 이한, 려 의 아끼는 딸이라 하지 않았던가? 은의 궁의 최고상궁의 보고에 따르면 그 어떤 원조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 1년 여간 달의 전각으로는 그 어떤 물품도 려 공국으로부터 전달되지 못했다고. 현재 행방불명 된 이한. 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에 그 모습을 감췄다.

　자신의 첫째 황자의 측근이 공을 세운 상급으로, 섭정왕이 되어 려 공국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이한 .려의 왕비들을 후궁으로 들였기 때문에 아랑공주의 신분이라면 충분히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패전국의 귀족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왕을 조롱하기 위해 왕비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아랑의 모친 또한 나이가 많은 여인인지라, 뒷방신세이긴 하나 명목상으로는 섭정왕의 후궁으로 들어갔다는 보고가 있었다.

　사실, 태무황자는 아랑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기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은의 궁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몰랐다. 일국의 공주였던 여인이 상인의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지난 밤에 그녀를 침소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감기에 걸려있었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큭. 영민한 여인이긴 하더군."

　무현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태무황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하, 외람되오나, 첫째 황자님께 보냈던 조희와의 소식이 끊겼다는 보고입니다. 아무래도 첩자임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희 이외에 우리가 심어 놓은 자들은 아직 발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태무황자에게 무현이 덧붙였다.

　"아니타국의 세리에 공주가 최근 수상한 자들과 접촉했고, 이한. 려가 남지환에 나타났다는 보고입니다. 그들이 우리 쪽에 심어놓은 첩자들은 언제까지 그냥 두실 예정입니까?"

　"아직은 속아낼 필요는 없지. 좀 더 거짓 정보를 흘린 후에."

　"존명."

　무현이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가 들었을 때, 이미 태무황자는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아랑은 몸이 아파서그런지 마음이 더 우울해지는 걸 느꼈다. 주아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 엄마와 현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가슴쪽에 둔통이 느껴지는 듯 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탈출 할 수 있을까. 마치 거대한 새장에 갇혀서 끝이 보이지 않는 출구를 향해 미친듯이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대체 왜 이 곳으로 온 걸까 난."

　그때 마침, 아랑의 시야에 악기상점이 보였다. 단순한 연주가 가능한 악기에서 부터 여러나라의 고유 악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평소에는 바쁘게 오가느라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오늘은 유독 아랑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아랑은 아니타루 앞에 섰다. 사라사의 것보다는 투박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아랑 자신과 같이 느껴졌다.

　"어서오세요. 예쁜 아가씨, 이 악기가 마음에 드시나요?"

　홀린듯이 한 쪽 벽에 걸린 아니타루를 쳐다보는 아랑에게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 아니타루는 보기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최고급의 소리를 낼 수 있죠. 요즈음 같이 악기의 외양만을 보고 사가는 손님들에게는 절대 팔지 않지만, 왠지 아가씨께서 이 악기의 주인이 되실 것 같네요. 한번 연주해 보시겠어요?"

　아랑은 주인이 건네주는 아니타루를 들고 현을 몇 개 튕겨보았다. 주인의 말대로 소리의 울림이 좋았다.

　"몇 년 째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주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귀한 녀석입니다. 저의 외조부께서 아니타국에 가셨다가, 아니타루의 장인이 죽기 직전에 만든 것을 사오셨죠. 임종 직전이라 악기를 예쁘게 다듬을 새가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소리만은 최상입니다. "

　"이걸로... 이것으로 사겠어요."

　"네, 저도 좋습니다. 아가씨께 팔게요. 그리고 선물로, 아니타루를 보관하는 가죽 주머니도 드리겠습니다. 하아. 드디어 주인을 찾아주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네요."

　아랑은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나오면서 아니타루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뒤로, 태무황자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궁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눈에 악기점으로 걸어들어가는 아랑의 뒷모습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을 닮은 볼품없는 악기를 품에 안은 채 마치, 노인처럼, 터덜 거리며 궁으로 돌아가는 아랑이 사라질듯 흐려보였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을 뻔한 태무황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기척을 지우고, 아랑을 계속 따라갔다. 태무황자 본인도 인식하지 못 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