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님, 다 되었습니다.”
도나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칠한 붓을 내려놓자 이반나는 눈을 떴다. 심해 바다 같은 눈동자가 맞은 편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넓은 방에 두 사람의 대화가 유독 크게 들린다. 이반나는 파티에 갈 때도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어색했다. 그녀는 문득 조용한 도나를 바라보았다. 젖살이 통통했던 도나도 어느 새 자라있었다.
“도나”
“예, 마님”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는데도 표정이 어찌 그러니”
“아닙니다.”
“다 되돌리러 가는 거야”
“네...압니다”
이반나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잘 밀봉된 서류봉투를 챙겼다. 방을 나서는 이반나의 뒤로 도나가 오래도록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반나의 남편인 체이스 첼레스테 대공은 오늘 종일 집에서 업무를 본다. 이반나는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복도를 걸었다. 인사를 건네는 하녀들과 하인들을 모두 지나친 그녀의 얼굴은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 도자기 인형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남편의 서재 앞에선 숨을 한 번 들이킨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17살의 나이에 버진로드를 걷던 날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자신의 남편인 체이스는 햇빛을 등진 채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차가웠으며, 오만했다. 궁에 입궁할 때와 달리 검은 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문을 연 사람이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방주인인 남편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서재에 놓여진 소파에 앉았다.
“잠깐 시간 좀 내요”
체이스는 멍하니 아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 뒤로 쫓아들어온 집사 제드는 눈치껏 지나가던 하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명한 뒤 굳게 닫힌 방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모셔왔던 어린 마님은 남편에게 갖고 있던 모든 환상을 깨버린 뒤엔 감정이 다 메마른 사람처럼 무덤덤히 일을 처리했다. 지금 그녀의 얼굴엔 생기가 있었지만, 손버릇이 나쁜 하녀를 질책할 때나 보이던 단호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주인님이 마님과의 관계를 더욱 나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질 뿐이었다.
시녀가 들어와 소파에 앉은 그녀 앞에 차를 내왔고,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잘 훈련된 기사처럼 그녀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었다. 긴 시간동안 그녀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그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화려하게 화장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반나는 잘 밀봉된 서류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저 무뚝뚝한 얼굴에 금이 가게 해볼까. 그녀는 문득 차갑고 냉정한 그가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감정의 동요를 보인다면 통쾌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열어보세요. 직접 열어 보여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체이스는 탁자 서랍에 예비로 들어있던 레터 오프너를 꺼냈다. 종이 몇 장이 들어있었다. 종이 상단에 적혀있는 글자를 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험악한 기운을 담았다.
"내가 이 서류를 순순히 동의할 것이라고 보는가"
"안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건 합의 이혼서류지만, 제 부관이 갖고 있는 서류는 이혼소송 서류거든요."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심해 바다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속내를 파헤쳐질 것 같은 빛을 가지고 있었다.
"이반나."
"그리고 제가 소송을 준비하는 순간 모든 언론사가 우리의 연애 결혼에 대해 의문을 품겠죠."
"이반나."
"그리고 연애 결혼으로 귀족 영애들의 부러움을 샀던 첼레스테 대공부부는 결혼 전 고작 3번을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반나의 눈동자는 더욱 깊게 침잠했다. 심해의 푸른 색이 문득 검게 보였다. 그녀는 체이스에게 폭탄을 던져놓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했다. 체이스는 골치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이혼 사유는"
"방치, 무관심, 그리고 억압"
"이반나, 그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해?"
이혼이 흔하지 않은 제국이었다. 체이스는 이반나가 주장하는 것이 황실재판소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무관심했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많은 황실 재판을 봐온 그로서는 그녀의 이유를 재판장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 안 받아들여지겠죠. 체이스. 내가 아카데미에서 뭘 전공했는 지 아나요?"
한창 이혼에 대해 얘기하던 그녀는 뜬금없이 자신의 전공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타르타루가 후작 또한 자신의 딸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것만 얘기했을 뿐, 그녀의 전공이 무엇인지 떠들지 않았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전공한 건 법학과 경제학이에요. 황실 중부를 맡고 있는 당신보다 재판관련해선 내가 더 잘 안다는 소리에요. 그래서 내가 얘기했잖아요. 소송도 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황실 재판소만이 문제가 아니잖아."
"네, 물론 황실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겠죠. 상관 없어요. 나는 이혼이 목적이에요. 어느 하나를 내어주고라도 내려올 수 있다면 뭐든 내어줄 겁니다."
"이반나"
“당신이 정말 미워, 과거의 나를 후회해.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체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이반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7년 전의 그 선택을 후회해. 그 선택을 하도록 부추겼던 당신과 내 아버지를 원망해. 난 모든 것을 돌릴 거야."
훗날 체이스는 자신이 그렇게 멍했던 적은 그날이 처음이라고 회상했다. 중부의 장을 맡고 있던, 체이스 첼레스테 대공의 첫 패배였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어린 아내에게 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