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던 임 감독이 함께 일어나 자신의 작품을 빛내준 배우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무대 위로 오른 그녀는 곧 트로피와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사회자의 요청으로 마이크 앞에 선 민연은 미리 준비해 둔 수상 소감을 전했고 그녀가 말을 마치자 또다시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모든 시상식이 마무리되자 수상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단체로 기념 촬영을 했다.
민연은 트로피와 꽃다발을 든 채로 앞줄에 서서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고 여기저기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최우수 남자 배우와 최우수 여자 배우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유난히 뜨거웠다.
기자들의 요청이 쇄도하자 두 사람만 따로 남아 기념 촬영을 이어갔다.
"안녕....... 하세요? 중국 배우.... 황원입니다."
'황....... 원......?'
민연은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그를 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상을 받은 중국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였다.
중국 배우에게서 능숙한 한국어를 듣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유를 묻기엔 상황이 적절치 않았다.
키가 작지 않은 민연이 힐을 신고 올려다 볼 정도였으니 그의 신장은 족히 183cm는 되어 보였다.
의아한 얼굴로 조용히 인사를 건넨 민연은 시선을 돌려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카메라로 향했다.
블랙 턱시도에 보타이를 맨 그의 모습과 단아한 드레스로 우아미를 드러낸 민연의 모습은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한동안 이어졌다.
시상식이 끝난 후 컨벤션 센터 2층 그랜드 홀에 애프터 파티가 마련되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널따란 홀은 속속 모여드는 배우들과 감독들 그리고 드라마 관계자들로 채워졌다.
막 들어선 민연의 코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스몄고 귓가엔 밴드의 잔잔한 선율이 울렸다.
향기롭고도 편안한 파티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쟁반 위의 샴페인 잔을 권했다.
민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림한 유리잔을 손에 들었다.
최우수 여배우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다름이 없었다.
낯선 배우들과 감독들이 다가와 축하의 인사를 건네자 민연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로 화답했다.
파티에 모인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함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친분을 나누는 분위기였으나 차기작의 캐스팅 여부나 드라마 세일즈 같은 실질적인 대화들도 오고갔다.
민연에게도 한 중국 감독이 통역을 대동하고 다가와 자신의 차기작에 그녀를 여자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대상을 받은 진가성 감독은 스스로를 <인현왕후>의 광팬으로 소개했다.
민연은 통역을 통해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드라마가 해외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기뻤지만 그런 자신을 캐스팅 하겠다는 제안을 중국의 감독에게 들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기작에 대한 갈증이 심했지만 그녀에겐 그저 지나가는 소리일 뿐이었다.
민연은 진 감독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우회적인 거절을 표했다.
몇몇 사람들의 사인 요청에 응해준 민연은 피로와 갈증을 동시에 느꼈다.
비중 있는 수상자로서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매너임을 잘 알기에 나름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으나 이젠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였다.
귀에 익은 저음의 맑은 목소리가 그녀를 가만히 불렀다.
"민연 씨?"
온갖 외국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름이 정확한 한국어로 불린 음성에 반갑게 반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황원이었다.
밝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민연에겐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샴페인 잔을 양손에 든 채 다가온 그는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이번에 최우수 남자 배우 상을 받은 황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밴드의 선율이 바뀌었다.
가 경쾌하게 흘러나오자 많은 이들이 환호성으로 기쁨을 표현했고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민연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 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복잡한 느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능숙한 한국어로 그녀의 앞에 선 황원이란 남자.....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이 느낌....
민연은 얼떨떨함을 떨쳐버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반갑습니다. 민연입니다."
그녀가 담담히 인사하며 샴페인 잔을 건네받자 황원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런 한국어에 놀라셨죠? 학창시절에 우연히 접한 한국 드라마와 K-POP 에 반해서 대학 때 부전공을 했습니다. 전공보다 더 열심히 했더니 오늘 이렇게 큰 도움이 되는군요."
잔잔한 미소로 반응하는 민연의 얼굴이 황원의 시야로 스며들었다.
사실 그는 수상자로 무대 위에 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랐었다.
차라리 지인들에게 숱하게 들어온 <인현왕후>를 한번이라도 봤더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던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이가 이토록 낯익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민연은 아름다웠고 싱글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호감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의 상상과 난무하는 추측을 자제한 채 그녀에게 축하의 인사만 건넸다.
공연히 처음 보는 한국 여배우에게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이유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깊은 잠에서 깨어난 민연이 조용히 눈을 떴다.
전날의 요란했던 플래시 때문인지 두 눈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허공을 향해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대에 놓아둔 파우치를 찾아 지퍼를 열었다.
"일어났니?"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인기척을 느낀 여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몇 시야?"
"오전 10시 반. 눈 건조하구나?"
“응.”
잠긴 목소리로 대답을 한 민연은 파우치에서 인공 눈물을 찾아 양쪽 눈에 떨어뜨렸다.
배우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강렬한 조명과 반사판은 눈에 피로감을 더했고 어제와 같은 강한 플래시 세례를 마주할 때면 피로감이 배가 되었다.
게다가 한동안 눈물 마를 날 없는 가련한 배역들이 주를 이뤘기에 통증을 호소하던 어느 날 안구 건조증 진단을 받았었다.
"깨우지 그랬어."
"깨우긴.......곤히 자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걸? 게다가 오늘부터 휴가잖아."
"훗...... 휴가라.......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다들 어디 있어?"
"관광 보냈어. 같이 움직이면 너 불편할까봐."
"잘했어. 휴가인데 눈치 보며 대기할 필요는 없지."
"그러게. 배고프지? 룸서비스?"
긍정의 뜻을 전달받은 여진이 거실로 나가자 민연은 암막 커튼을 걷었다.
통유리 너머로 빽빽한 빌딩들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들은 의외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런 모습은 이방인의 눈에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이국적인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민연의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구지?"
의아한 표정으로 문 밖의 얼굴을 확인한 여진이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어머, 최 대리, 어떻게 된 거에요?"
"아...... 그게...... 아직 식사 전이시죠? 도시락이랑 연예 조간신문 한 부 사왔어요."
"어머, 땡큐."
한껏 감동한 여진의 음성이 하이 톤을 넘나들자 무영은 겸연쩍은 얼굴로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세수를 마친 민연이 밖으로 나와 거실의 소란을 직접 확인했다.
여진과 함께 도시락을 꺼내 세팅하던 무영이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진중한 성격인 그의 인사법은 언제나 튀는 적이 없었다.
"연아, 이리 와서 좀 들어. 최 대리가 어제 그 집에서 사왔대."
"관광은요?"
민연의 질문에 최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 구경하다보니 별 재미가 없어서....... 다른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먼저 돌아왔습니다."
“오...... 최 대리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챙겨주려고 일부러?”
여진의 말에 무영이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리자 그녀가 손짓했다.
"최 대리도 이쪽으로 와요. 같이 들게......"
"아, 아닙니다. 두 분 드시죠.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럼, 방으로 가 있겠습니다."
"혼자서 뭐 할 일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민연의 물음에 여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무영은 흠칫 놀란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사적으로 무언가를 묻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쉬시는데 방해가 될까봐......."
"그럼, 커피나 한 잔 해요."
당황함을 모면하기 위해 간신히 말을 얼버무린 무영은 이어진 민연의 권유에 더 큰 당황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평소와 비교해서 어딘가 달라도 많이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래요, 최 대리. 내가 만들어 줄게요. 이쪽으로 앉아요."
여진이 티 테이블로 움직이자 이래저래 민망함을 느낀 무영도 그녀를 돕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민연은 신선한 샐러드를 한 입 가져가 오물거리며 무영이 사온 신문을 펼쳤다.
영자로 된 신문엔 중화권 연예가 소식이 주를 이루다가 3면과 4면 전체에 어제의 드라마 어워즈 기사가 제법 상세히 나와 있었다.
"어? 예쁘게 잘 나왔네?"
어느덧 커피를 들고 온 여진이 민연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 기사를 힐끔거렸다.
"어머, 최 대리도 나왔네?"
"네?"
무영은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가다 말고 다시 내려놓았다.
금시초문은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기어이 무영을 신문 앞으로 이끌고 말았다.
신문의 지면 위, 차에서 내리는 민연을 에스코트하는 그의 옆모습이 선명했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고 빨리 움직였는데......."
얼굴이 붉어진 무영의 한 마디에 여진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최 대리도 참........ 뭐 어때요? 외국 신문에 나오기가 어디 쉽나? 워낙 훤칠해서 그런지 슈트도 잘 어울리고 배우 못지않게 잘 나왔는걸요?"
여진의 말에 민연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 도시락, 홍콩 신문에 뜬 기념으로 한턱 쏜 건가요?"
"어머, 말 된다."
민연의 시니컬한 농담에 여진이 먼저 까르륵 웃자 이어서 무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농담은 희귀했지만 웃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재미있었다.
사실 그에겐 계속되는 민연의 새로운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마음에 그만큼의 여유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그들의 웃음 속에서 민연의 시선은 담담히 4면의 사진을 향했다.
그녀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애프터 파티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황원의 모습이 크게 보도되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황원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던 민연은 그를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