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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대국의 빈(嬪): 악의 딸
작가 : 써니벨
작품등록일 : 2017.7.15

도덕심이든 윤리의식이든 단 1g도 없는 야만인의 아가씨, 야낙(여주)의 피말리는 궁중생존기와 위태로운 로맨스 스릴러! 살육과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야인족의 영애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입궁한 대국의 내명부는 그야말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궁에서 낙오되어 사라질 것 같았던 야만인 소녀는 정말 강하고 사악했는데?! 아름답고 가련한 '마왕(魔王)'과 그 마왕을 사랑하고 만 '대마왕(大魔王)'의 사극 로맨스 스릴러.(실제 역사와 아무런 상관없는 중세시대 사극물입니다. )

 
<프롤로그>야인족의 영애, 야낙.
작성일 : 17-07-15 01:14     조회 : 419     추천 : 0     분량 : 1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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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사서(岱國史書) 21권 목종실록(睦宗實錄) 발췌번역 中)

 

 

 세기 1031년, 목종 9년 3월 모일.

 

 

 회임 중이던 목종의 왕후 마(瑪)씨가 후궁 덕비(德妃) 번(繁)씨 의해 홍화가 든 탕약을 마시고 유산되어 불임이 되는 변고가 벌어졌다.

 

 

 상감께서 이 일을 역모로 규정해 덕비 번 씨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시고, 관련자를 모두 차례대로 처형하여 사건을 무마하시니 결국 궁중과 나라에 큰 불화가 찾아왔다.

 

 

 덕비의 무고를 주장하던 번 씨 가문이 끝내 왕실과 외척에 반기를 들어 역도의 무리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4월에 벌어진 ‘번안의 난’이다.

 

 

 

 14대 가문 중 하나인 번 씨 가문에 맞서 10년 전, 한 해협 건너 존재하는 불모지 ‘부루크’란 곳에서 한 때 공을 세운 바 있던 야만인 무리가 동맹으로 나서서 이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니. 왕실과 외척 마 씨 가문이 이에 탄복하여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갈마’란 성 씨를 내리고 그를 영주로 인정하시어 대국의 백성으로 의무를 다하게 허락하시었다.

 

 

 

 이에, 영주 갈마 씨는 충성과 감사의 의미로 자신의 질녀를 영주의 적녀(嫡女),영애의 자격으로 왕실 허락아래 1년 뒤 후궁으로 보내겠다, 약조했다.

 

 

 

 

 그리고,

 

 

 

 1032년. .... 발언된 문제의 땅, 부루크 본거지.

 

 

 ************

 

 

 “그 동안 너무 많은 결례를 범했습니다, 마마님.”

 

 

 

 ........

 

 

 

 

 

 드디어 약속한 입궁일로부터 보름을 남겨둔 때가 찾아왔다. 새로 후궁으로 간택된 영애가 고향을 떠나야 하는 하루 전날이 된 것이다.

 

 

 

 “별말씀을요, 이 거친 땅에 부인께서 여러모로 도와준 덕분에 몇 달 편히 잘 지냈습니다. 영애님도 영민하고 조신하여 가르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요.”

 

 

 

 대국의 영지로 인정받았어도, 야인족의 벌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교양과 상식을 갖춘 대국의 궁인이 지내기엔 너무도 초라하고 험한 야인의 막사. 그 곳에는 점잖게 차려입은 젊은 부인과 노년에 접어든 노상궁이 귀한 차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희 딸을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바 없는 아이를 가르치느라 수고가 많으셨는데, 칭찬까지... 황공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오호호.”

 

 

 

 나이에 어울리는 소박한 예복을 차려입고 정갈하게 쪽을 진 부인은 부루크의 마나님이자, 영주의 정실. 그녀에게선 어딘가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련한 분위기가 났다.

 

 

 

 야만인의 여자로 사느라 심하게 고생했던 소녀 시절 따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은 노련한 안방주인답게 우아하고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예절 상궁으로 부루크에 찾아온 궁인에게 어느 정도 예법을 익힌 듯했다. 상궁과 어느정도 담소를 나누던 그녀가 싱긋 웃으며 미리 준비한 패물을 찻상에 올려놓았다.

 

 

 

 “약소하지만, 제 여식을 잘 부탁합니다. 마마님.”

 

 

 

 “부인! 전 왕실의 명을 받들어 임무를 다한 것일 뿐. 입궁을 앞둔 예비 소주님들에게 궁중 예법을 가르치며 이끄는 일은 소인의 도리이자 의무입지요. 왕실의 명을 빌미로 사사로이 이득을 챙기는 건 대죄오니, 불경한 행동은 삼가주시지요.”

 

 

 

 “전 그저 어미로서 제 여식을 걱정하고 챙기는 것 뿐이랍니다. 그 아이...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란 아입니다. 후궁으로 간택되었다하니 이는 더없는 가문의 영광이나 여식을 떠나보내는 입장에서 어미 마음에 어찌 걱정이 안 될 수 있겠습니까. 사사로운 이득이 아닌 부모의 정이라 생각하시고, 정 안된다면 노잣돈이라 생각하시지요.”

 

 

 

 가뜩이나 대국의 왕성이자 후궁들이 머무는 찬의성은 독사들의 소굴로 이름난 곳이었다. 곤란해하면서도 결국엔 패물을 받아챙기는 예절 상궁을 두며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의 바람대로 궁인 한 사람을 매수했으니, 입궁까지는 시조카가 무사할 수 있겠거니 확신이 들었으니까.

 

 

 

 .....

 

 

 

 “왕인 지 뭔 지 신랑은 60살 된 늙은이라면서? 아버지는 악질이야. 우리 누나는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에게 시집가는 건데!”

 

 

 

 사랑하는 사촌 누나가 혼인 때문에 고향을 뜬 다는 사실은 영주의 아이들에게도 심란한 문제였다. 엄마가 잠시 거처를 비운 사이 드디어 입을 다물며 눈치만 보던 형제가 드디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사실, 누이가 대국 왕실에 간택된 이야기가 나돌 때부터 형제의 기분은 늘 좋지 않았다.

 

 

 

 “하라트! 왕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분이고 여긴 왕의 부하들이 남아있으니까 말 조심해야한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아버지가 들으면 어쩌려구!!!! 나 아버지한테 호, 혼나기 싫어....”

 

 

 

 함부로 목청을 높이는 꼬마를 타이르는 아이는 아무래도 첫째인 듯했다. 어쩐지 영주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은 사내아이였다. 아비를 꼭 닮아 인상은 험악했지만 성격은 대단히 소심한 듯, 태어 난지 막 이제 막 백일 된 쌍둥이 동생을 앞뒤로 포대기를 업은 첫째가 둘째의 입을 막으면서 연신 주변을 휘휘 살펴보고 있었다.

 

 ​

 

 

 “그. 그리고 조용히 해. 아기들 깨겠다, 나 얘네들 겨우 재웠는데....”

 

 

 

 “알게 뭐냐구! 그리구 내가 아버지 따위 무, 무서워 하...할 줄 알고?”

 

 

 

 “그치만 작은 형... 조번에 아부지 말 안들어서 엄청 혼났잖아....무서워...난....”

 

 

 

 근처에 아버지 그림자도 없건만, 서 너살 밖에 안 된 셋째는 뭐가 무서운지 손가락을 입에 물며 낑낑대고 있었다. 한창 자신들을 키워준 누이와 엄마만을 쫓아다닐 어린 나이들이었다.

 

 

 

 형에게 입막음을 당해도, 제일 수다스런 둘째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그랬어! 일족을 위해 누나가 늙은이에게 생일선물로 팔려가는 거라구!!! 나 그게 뭔 소리인지 알아!”

 

 

 

 "하라트! 제발..."

 

 

 

 ‘......도련님들 까지.....’

 

 ​

 

 시끄러운 5남매가 있는 장소 뒤편으로 아까부터 몸을 숨긴 아랫것 하나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래선 곤란해...다들 이례적인 사건 때문에 들떠있어... 너무 시끄러워지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텐데.’

 

 

 

 남자 못지않게 키 큰 야인의 소녀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갈색 머릿결과 눈동자가 순한 분위기를 머금어 어쩐지 이 땅의 사람들과 닮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도련님들의 말을 뒤편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몸종이 이윽고 눈을 감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아....여기에도 안 계신다니...’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주인의 행방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루크를 떠나기 하루 전날, 지금 당장 몸을 정결히 하고 단장해야 할 신부가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다.

 

 

 

 몸종이자, 궁까지 같이 따라가는 혼수시녀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오늘 날이 저물기까지 주인을 못 찾으면서 자신은 목이 날아가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을것이다.

 

 

 

 

 

 ‘아가씨... 어디로 가신겁니까. 저도 심정이야 복잡하다구요.... 아이고 두야.’

 

 

 

 혼인을 앞둔 여자는 평소 안하던 행동을 한단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대범하기론 상대할 자 없는 주인아가씨도 결국 할 수 없던 여자였던걸까?

 

 ​

 

 상관이 대국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단 소식을 처음 들었던 때가 기억났다. 어명이라 전보를 전해받고 큰절을 올리던 영주님과 큰 마님. 그리고 그 뒤편에서 그 어떤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던 소녀의 초상이.........

 

 

 

 “마나.”

 

 

 

 뒤편으로 소리 없이 그림자 하나가 더 드리워진다. 마나라 불린 몸종과 또래로 보이는 긴 검은 머리의 소녀다. 날카로운 눈매에 서린 한기가, 기척을 죽이는 솜씨가 일품인 것이 일류 자객의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말없이 장소를 떠나려던 몸종이 깜짝 놀라며 바로 으르렁댔다.

 

 

 

 “란초이! 우리끼리 있을 땐 그런 망할 짓은 안하기로 했잖아!”

 

 

 

 ...“주인님이 아까부터 계속 보이질 않는다. 방목지에도 가봤는데 안 계신다. 곧 영주님께 인사도 드리러 가야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찾지 못하면 우리 둘 다 불벼락을 맞을 것이야.”

 

 

 

 금세 이성을 잃고 화내는 마나와 달리, 란초이란 몸종은 비교적 차분하고 냉정하게 말을 이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상관을 모시면서 어째 친한 사이는 아닌듯했다. 서로 같은 화제로 얘기하고 걱정하면서도 란초이를 두고 불편한 표정을 지은 마나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알아? 아가씨야 언제나 종종 혼자 사라지곤 하잖아. 아휴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런 날 그 분답지 않게 말도 없이 사라지고.... 영주님한테 뭐라 고해바쳐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

 

 

 

 “............”

 

 

 

 “야!!!!”

 

 

 

 마나에게서 별다른 대답을 얻을 수 없자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소녀다. 매정하다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떠나가는 란초이를 두고 마나가 바로 입술을 씰룩이며 혀를 내밀었다.

 

 

 

 “늘 저런 식이라지, 하여간 싸가지가 없어요.”

 

 

 

 란초이는 어릴 적부터 상관을 모신 자신과 달리, 몇 년 전 타지에서 부루크로 유입된 이방인이었다. 처음부터 야인족 사람도 아니고, 자신처럼 오랫동안 상관과 같이하지도 않은 주제에 윗선에게 자신보다 신뢰받고 있어 요즘 잔뜩 미워하고 시기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저 애도 자신과 같은 혼수시녀로 선택받아, 본심을 꾹꾹 누르는 거다. 운명을 같이하는 동료였다, 어쩌겠는가.

 

 

 

 ‘후우 정말 맘에 안드는 년이야.’

 

 

 

 여하튼 초조한 와중에 기분만 잡쳤다. 자신의 기척까지 아이들이 눈치챘는 지 바로 입을 다물고 있자 마나가 얼른 자리를 떴다.

 

 

 

 사라진 상관을 찾아 각자의 장소로 떠나는 두 몸종이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서조차 그들은 끝내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몸종이 영주에게 불벼락을 맞는 일 또한 없었다.

 

 

 

 “.........”

 

 

 

 입궁을 앞둔 영애님을 찾아낸 건 결국 그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조카의 간택이 결정되던 날부터 외출까지 자제하던 영주의 측근이 드물게 평복으로 들녘에 나와 있었다. 이방인들이 언제나 낯설어했던 화려한 금발도 모자나 두건으로 굳이 숨기지 않고서 말이다.

 

 

 

 드넓은 부루크의 초원엔 영애의 두 몸종도 모르는 그녀만의 장소가 있었고, 그 장소를 아는 사람도 그 뿐이었다. 서로가 아는 편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것이 어쩌면 씁쓸한 마음을 감추는 데 더 쉬울 지도 모르지...

 

 

 

 “영주가 널 부르더구나. 가야지, 그새 준비가 끝난 모양이로구나... 후후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다.”

 

 

 

 “...........”

 

 

 

 “야낙아.”

 

 

 

 야낙이라 호명된 여인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며 숙였던 고개를 조금 든다.

 

 

 

 “오늘 보고를 들어보니 너답지 않게 일을 벌어놓았더구나, 그래 심란하기도 하겠지.... 나도 심란한데 어떻게 너라도 심란하지 않겠어.”

 

 

 

 어둑어둑 짧기만 한 봄의 초원 들녘아래로, 드물게 누군가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석양 너머로 이미 깨끗하게 단장을 마친 한 여인이 추모를 마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숙부가 자상하게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 목에 걸린 곡옥을 소중하게 쓰다듬던 여인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계속 있어봤는데 이젠 제법 덥더군요.... 곧 여름이네요, 이 땅도.”

 

 

 

 “그래.”

 

 

 

 “심려끼쳐드려 죄송해요, 에르구 숙부님.”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은,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앳된 미모를 가진 소녀였다. 찬찬히 살피면 젊음과 미를 가진 고귀한 영애였으나, 때가 묻어 어둠에 잠긴 소녀의 눈동자는 슬퍼보였고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어우러진 고혹적인 작은 입술은 알 듯 말 듯한 아련함을 풍기고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내린 붉은 빛의 검은 머릿결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무리하지 않게 차려입은 단정한 하얀 예복이 석양에 비추어 쓸쓸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한 조카를 두고 손을 내미는 사내의 눈가에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 숙부의 보살핌을 살포시 잡은 그녀가 숙부의 근심을 알아채고는 안심하라는 듯 눈웃음을 짓는다.

 

 

 

 “언젠가 네가 내 곁을 떠날 때가 올 거라는 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 좋은 배필을 만나 해로하길 바랐는데... 나는 너조차 지키지 못했구나....”

 

 

 말이 후궁이고, 간택이지 왕성에 입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야만인 태생인 그도 모르지 않았다. 대국의 왕은 곧 환갑을 앞둔 노인이었고, 늙은 왕에게는 이미 정실인 왕후와 태자가... 그리고 같은 목적으로 간택되었을 열 명이 넘는 후궁들이 왕성에 살고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야낙아.”

 

 살아갈 힘도 잃어버린 채 여전히 절망을 이겨내지 못한 조카에게 또 다른 고생길이 확정된 거다. 그러나 숙부로서 10년 동안 같이해온 보호자로서 그는 아무것도 해줄 수도 없었다.

 

 에르구의 눈가에 눈물마저 어른거린다.

 

 

 

 

 

 

 

 .......................

 

 

 

 동이 트는 대로 출발이다.

 

 

 

 그러니

 

 

 

 고향인 초원을 나서기 직전인 이 날 밤은....

 

 

 

 후궁으로 간택된 영애가 마지막이 될 부모와 작별하는 시간이었다.

 

 

 

 “............”

 

 

 

 평범한 귀족 가문의 가정이었다면, 이 순간은 아름답고도 슬퍼야 했지. 그러나 부루크 영주가 거처하는 막사엔 소기름으로 만든 값비싼 촛불이 위태롭게 이지러질 뿐 야만인 부녀에겐 그 어떤 애정도, 슬픔도 없어보였다.

 

 

 

 넓고 화려하게 차려진 막사의 한가운데에는 범의 가죽으로 뒤집어쓴 오래된 권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당연하다는 듯 영주가 무심하게 앉아있었고, 그 앞에 대국의 예법에 따라 영애가 눈을 내리깔며 앉아 있었다.

 

 

 

 실제론 조카이나, 대국에 입적한 호적상 ‘친딸’의 신분인 소녀를 두고 중년의 영주는 아무 말도 없이 술잔만 입에 기울고 있었다.

 

 

 

 “.......흠....”

 

 

 

 그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바랄 걸 없는 황무지에서 짐승같은 일족들을 이끌고 지금의 신분을 따낸 남자였다.

 

 

 

 그리고

 

 

 

 약탈과 목축으로 근근이 살아갔건 천한 족속들은 이젠 오랜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대국에게 있어 필요할 때마다 유용한 병력을 제공해주는 집단이었고, 얼마 전부턴 그 어느 전투에 나서도 한 번을 지지 않는 귀신같은 전투력을 자랑하는 군대가 되었다.

 

 

 

 .....

 

 

 

 일족을 다스리던 수장에서 부루크를 합법적으로 다스리는 영주로 변모하기 까지, 여전히 불곰같이 거대하고 험상궂은 영주의 눈과 입가엔 세월의 흐름이 가득 서려 있었다.

 

 

 

 숙녀로 성장한 조카의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기라도 한 걸까?

 

 

 

 “.........너.”

 

 

 

 한참 후에서야 입을 여는 영주의 표정에 드디어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말이 나오자, 야낙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많이 자랐구나.”

 

 

 

 “...........”

 

 

 

 “네가 올해로 몇 살이었지?”

 

 

 

 “........”

 

 

 

 본인도 잘 아는 사실을 구태여 묻는 저의가 뭘까.

 

 

 

 우리의 위대한 영주님은 자신의 양친이 죽은 뒤에도, 친척으로서 한 번도 자신을 지켜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였다.

 

 

 

 “열 일 곱 입니다.”

 

 

 

 “....음...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픈 말만 하시지요. 곧 새벽입니다.”

 

 

 

 이제와 회한에 잠기려는 영주를 두고 야낙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아무 표정도, 어떤 감정도 그려져 있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소녀의 분위기는 칼날보다 더 날카롭고 차가웠다. 부녀지간은 형식일 뿐, 실제가 될 수 없다는 걸 강요하는 것만 같은 태도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딱 선을 긋는 조카의 태도가 불쾌할 법도 했지만 예상했다는 듯 그는 그저 미소만을 거두고 말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알았다. 그가 이윽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하대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말의 무게가 어떤 건지 너도 잘 알겠지.”

 

 

 

 “.........”

 

 

 

 “수도로 들어가 찬의성에 입궁하기 전까지, 네가 거쳐야할 일정이 어떻게 되는 지도 들었겠지?”

 

 

 

 “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떠느냐. 반 나절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마음 정리는 된 거냐?”

 

 

 

 “역시 입궁이라는 건 대단한 거군요. 평생 남 걱정안 할 줄 알았던 영주님 입에서 그런 따뜻한 말이 다 나오고 말입니다. 이거, 이거 하해와 같은 자상함에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야낙을 두며 영주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등불의 빛에 비추어 부적처럼 항상 걸고 다니던 조카의 곡옥 목걸이가 순간 빛을 발했다.

 

 

 

 ‘미련한 것.’

 

 

 

 조악하게 제조된 거라 값어치가 없어 보일 뿐, 저래 뵈도 진짜 옥으로 만든 귀중품이었다. 굴곡이 많았던 어린 혈육의 인생에 제일 많은 발자취를 남긴 자의 유품이다. 3년이 지났는 데도 여전히 상대를 잊지 못하는 조카를 두며 그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반나절 동안 그 놈 묘지에 갔었다지?”

 

 

 

 “그 일에 대해 언급안하기로 서로 합의를 봤을 텐데요.”

 

 “역시나 그 녀석에 대한 일이라면 물러서질 않는 구나.”

 

 

 

 “저는 이미 제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각오를 짓밟는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언급하지 않아. 다만 너는 지존을 모실 신분이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네가 누굴 마음에 품든 상관없지만, 그 감정이 우리 일족에게 대단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

 

 

 

 “그 곡옥 챙겨가도 좋다.”

 

 

 

 내내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영애의 입가에 아주 잠깐이나마 기쁨이 스쳐지나갔다. 아마 곡옥 목걸이가 이번 시간의 큰 갈등이자 위기였던 듯했다. 곡옥을 챙겨가고 좋단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애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 시간이 너와 부녀지간으로 남아있을 마지막 시간이라 들었다. 하지만 너한테 달리 해줄 말이 없구나. 이제와 무슨 말을 한다해도 소용없을 거라는 것도 안다.”

 

 

 

 “...........”

 

 

 

 “네가 영애의 신분이 되었을 때 너는 네 의지로 이 일족을 위해 입궁을 결심했다고 하였다. 허니 너 또한 나한테 할 말이란 게 있을 리 없겠지.”

 

 

 

 “........”

 

 

 

 “.....궁인들이 가르쳐줬겠지만 너의 시침일은 왕의 환갑연회가 끝난 다음이란다, 물론 정식으로 후궁이 되는 것도 그 때겠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시침을 받기 전까진 입궁했다해도 넌 그저 일개 궁녀 신분, 우리 일족의 영애에 지나지 않는 것을... 종종 그걸 잊어 퇴출당한 병신들이 있다고들 하니, 분수에 맞게 행동하도록 해라.”

 

 

 

 영주로 정식으로 임명받을 때, 한 번 성에 입궁하여 왕을 알현한 적도 있던 그였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왕성이 소리 없는 전쟁터 그 자체라는 걸.

 

 

 

 표적으로 찍히면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마굴. 그곳으로 떠나는 조카에게 영주는 이미 창과 방패를 곁에 붙여준 상황이었다.

 

 

 

 .......하나 뿐인 친조카다. 그도 뼛속까지 무정한 인간은 못되었다.

 

 

 

 “저는 제 분수를 누구보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입궁을 결심한 것 아니겠느냐?”

 

 

 

 “왕실과 연을 맺는 건 이 저주받은 일족에게도 엄청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이런 기회가 올까요.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 자체가 백부님의 능력 덕분이니 저야 그 은혜에 보답할 뿐이죠.”

 

 

 

 “.........”

 

 

 

 “아차, 말 실수를.... ‘아,버,님.’.”

 

 

 

 예법을 배워 사근사근한 말투였지만, 그 말에는 신랄한 칼날들이 서려있었다. 그 와중에서조차 야낙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드리워져 있질 않았다.

 

 

 

 “야낙 님, 모시겠습니다.”

 

 

 

 

 

 시간이 되었다. 자신을 부루는 시녀, 란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다. 그런 ‘딸’을 두고 영주는 말없이 술병을 도로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말없이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서는 그녀의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너는 그곳에서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저... 살아만 있어도 일족의 보탬이 될 터이니 말이다. 행운을 비마. 죽지만 마오."

 

 ........

 

 

 "개소리.”

 

 

 끝까지 예를 지킬 수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였다. 섬뜩한 한 마디가 영주의 가슴팍에 꽂혔다.

 

 

 

 막사 밖의 공기는 떠나기엔 딱 좋을 만큼 시리고 신선했다. 스리슬쩍 미소를 지은 그녀가 자신보다 더 말이 없는 몸종을 뒤로 한 채 성큼성큼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떠나야 할 때가 왔으니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치장할 순간이 온 거다.

 

 

 

 새롭게 태어나는 거다.

 

 

 

 강하고 화려하게,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것을 내다버리고서!

 

 

 

 “야낙 님!”

 

 

 

 먼 발 치에 오랜 친구이자 또다른 몸종, 마나가 신나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로서 창과 방패가 자신의 옆에 다시 모여졌다.

 

 ​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는 듯 조신한 영애의 모습을 집어치운 소녀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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