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분노
Happy birthday 아빠, 사랑해요!
눈처럼 하얀 생크림 위에 초코 가루로 쓴
글씨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하얀 생크림의 파편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아버지를 위해 엄마가 처음으로 만든
생크림 케익이었다.
엄마의 마음이, 사랑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무서워!! 무서워 엄마 제발 멈춰주세요!
그러나 엄마의 분노는 멈춰지지 않았다.
잠시 멈춘 엄마의 분노!
엄마는 저벅저벅 거실 베란다 문앞으로 갔지.
그리고 소리가 들렸어.
퍽!
아아악!
바당은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그런데 그 꿈은 눈을 뜨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미가 마루에 앉아 작은 돌맹이로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가 중천에 떴으며, 장미는 바당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공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건수와 장미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바당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저녁형이였다.
건수랑 장미는 저녁 밥만 먹으면 골아 떨어져 잤다.
해가 떨어지면 잠들고 해가 뜨면 일어나 활동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바당은 자연주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라디오 TV도 없고 신문 잡지도 없으니 눈을 괴롭힐
일도 없었다. 밤이면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별이란 그저 문학작품이나 그림 속에서나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상징물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도시에서도 매일밤 이렇게 별이 떴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은 별빛보다 불빛에 익숙한 도시 남자였다.
그는 어느 한 부분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만
기억하지 못할 뿐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답습한
것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부분의 기억만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 부분 기억상실증이라고 명명하는 그 병에
바당은 걸린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
못하는 것인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당 우리 공기놀이해요”
바당이 눈을 뜬 걸 안 장미가 말했다.
“나 한번도 안해 봤는데”
“내가 알려 줄께요”
장미가 시범을 보여줬다.
날렵하게 공기돌을 줍는 장미의 손놀림이
예술이었다. 바당은 장미가 알려주는대로 따라했다.
몇 번 해보니 손에 익어 잘되었다.
“우리 내기해요”
장미가 말했다.
“내기? 좋아요”
바당은 호기롭게 대꾸하면서
‘돈이 없네?’
하는데 장미가 이긴 사람이 진사람 손목을 때리는
내기를 하자고 한다.
“좋아요!”
첫 번째 판은 운좋게 바당이 이겼다.
장미는 손목을 내밀었다. 한줌도 안되는 장미의 가느다란
손목을 때릴 수 없어서 검지와 중지를 모아 살짝! 때리는
시늉만했다.
“에게! 이게 뭐 때리는 거래요? 제대로 해요”
다시 손목을 내미는 장미 바당은 또 살짝! 손가락을 얹기만
했다. 두 번째 판에는 장미가 이겼다. 장미는 바당의 손목을
힘껏 때렸다.
“아악!”
바당은 깜짝 놀랐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손힘이 쎄요?”
“우린 아빠랑 이렇게 때리는데?”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연속 장미가 이겼다.
그럴 때마다 장미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찰싹찰싹’ 잘도 때렸다. 바당의 손목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아고! 미안해요. 바당, 많이 아프지요?”
“네 아파 죽겠어요. 살살 때려주세요. 아니 이쪽 팔로
바꿀래요“
바당은 엄살을 부리면서 왼쪽 팔을 내밀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가 쑥 나왔다.
“바당 이것이 뭐이래요?”
“어? 이것 시곈데?”
장미 눈만 껌벅껌벅한다.
“배꼽시계요?”
“하하하 배꼽시계가 뭐예요?”
“순이할망이 그러는데 맨날 배꼽시계가 밥달라고 한다”
이번에는 바당이 장미가 한말을 못알아 들었다.
“장미씨 지금이 어느 때죠? 아침? 점심? 저녁?”
“어? 점심 시간이다?”
장미가 말했다.
“시계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장미는 마루에 절반쯤 와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만큼 오면 점심시간이예요”
“그 시간을 알려줘요. 이것이”
바당은 자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장미에게
보여 주었다.
“와 신기하다!!!”
장미는 해바라기 그림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 밑에는 ‘Sunflower Resort’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다.
“바당, 이것 영어지요? 뭐라고 써있는 거래요?”
“선플라워 리조트”
“응 리조또? 거기 거기 잖아요. 내가 가고 싶은 집이 리조또잖아요”
허걱! 바당은 깜짝 놀랬다.
이. 건. 뭐. 지?
장미랑 며칠 전에 가서 보았던 건너편 바닷가 언덕에
있던 그 럭셔리한 황금빛 성. 어쩐지 낮설지 않게
다가왔던 그곳이 선플라워 리조트였던가?
왜 나는 거기 로고가 박혀있는 시계를 차고 있을까?
바당은 거기에 가보면 뭔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온 그 바닷가. 황금빛 성은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아름답긴 했지만 그 성에 대한 느낌은 서늘했다.
이 한기. 바다에 빠졌을 때의 그 한기가 바당의 온몸을
휘감아 왔다. 그때 나는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애타게
소리를 질렀던가?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지.
'아, 이대로 가는구나!‘
아버지는 말씀 하셨지.
“넌 너무 속이 깊어서 거기에 내가 빠져 죽을 것 같다.
폭폭혀! 폭폭혀!“
아래로 아래로 깊이깊이 추락하고 있을 때
검은 여신이 와서 나를 위로 끌어 올렸지.
오.늘.은. 여.기.까.지.
그의 무의식은 더 이상 접근을 못하도록 방화벽을 쳤다.
바당은 하염없이 건너편 바다 언덕 위에 있는 그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이 방화벽을 친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이 방화벽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있다. 아는 것은 병이다. 지금껏 알아서 좋았던 일은 없었다.
가슴 속 깊은 바다에서 끓고 있는 마그마를 식혀야 했다.
“바당, 바당 어딨어요?”
장미가 애타게 그를 부르면서 달려왔다.
“하아하아! 한참 찾았잖아요! 아무소리도 안하고 오면
어떡해요. 빨랑 가요. 전복죽 끓였어요“
장미가 바당의 목발을 부축하고 갔다.
그 모습을 보던 해녀 할망들은
“햐! 그림 좋다!”
“어디서 저렇게 잘생긴 총각이 왔당가?”
“용왕님이 보냈디야? 장미 착하다고”
“오메! 용왕님 나도 젊고 잘생긴 남자 하나 보내주쇼!”
“젊고 잘생긴 남자가 미쳤는가? 거기 짝으로 오게?”
“그럼 돈 많고 늙은 영감으로 보내주쇼!”
“돈 많은 영감은 젊은 여자 좋아하지. 늙은이 좋아 안혀”
“자네는 그거 아는가? 사람은 겁나게 욕심쟁이여~
그 욕심으로 산당께”
이렇게 인생의 황금명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건수의 2G 폰이 울렸다.
문명의 이기라곤 건수의 2G 폰 하나였다.
그것도 조경 일을 하는 건수의 연락처 역할만 하는 폰이었다.
“네 장건수입니다. 네 네...알겠습니다. 바로 가지요”
전화기를 끊으면서 건수가 전복죽을 먹고 있는 장미와
바당에게 말했다.
“나 좀 나갔다 와야 겠다. 일이 생겨서 말이야. 보수공사 해주는
거니까 막배로 들어올게.
“응 아빠 잘 다녀오세요!”
“그래 바당이랑 잘 놀고 있어”
건수는 이렇게 말하고 배를 탔다.
선플라워 리조트.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상징하는 금으로
도금한 이 리조트가 지여졌을 때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건물의 아름다움에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건물에 담긴 사연이였다.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남편이 지은 성.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명소가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죽은 지 십수년 동안 매해 기일날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초빙해 콘서트를 열고 고향 제주도에 리조트를
만들어 정원 가득 아내가 좋아하는 꽃 해바라기를
심어 놓고 ‘썬 플라워 리조트‘라고 했을까?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로망을 담은 그 리조트가
문을 여는 날.
그 황금빛 성을 지은 민진건설 회장 윤일봉은
지인들 500 명을 초대해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날은 윤회장의 생일이자 죽은 아내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태풍이 심하게 몰아쳐왔고,
강풍에 해바라기가 다 뿌리 뽑혀 버렸다고 했다.
건수는 그 리조트의 조경 사업에 참여 해 해바라기를
심었었다.
무엇이든 만지기만 하면 다 작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건수의 솜씨는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게다가 그는 말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손해만
보기로 작정하고 온 사람 같았다.
자기 것을 도대체가 챙기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건수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도무지 계산이 없는 사람.
손해보고 사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다가
건수에 대한 한결같은 평가였다.
‘이건 바람에 뽑힌 뿌리가 아닌데?’
건수는 해바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일만 해주고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임무라는 듯 늘 그렇게 살았다.
건수는 반나절 동안 해바라기를 다시 심어주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바닥에 전단지 몇장이 뒹굴고 있었다.
‘이런 깨끗한 화장실에?’하면서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사람을 찾는 전단지였다.
“이름 윤민수 나이 32세 민진건설 전무이사.
2017년 5월 30일 저녁 7시 경 실종.
혹시 보았거나 보호하고 계신분 있으면 연락주세요.
사례금은 원하는대로 드리겠습니다(기본 1억)“
가만 그런데 얼굴이 낯이 익다.
천천히 보니 집에 있는 바당이랑 닮았다.
건수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민진건설이라면 이 리조트 회사 아닌가.
장미가 바다에서 구출해 바당이라고
이름 지여준 그가, 자기 이름도 기억 하지 못하고
있는 그가 윤민수라는 이 사람인가?
건수 머리에 쥐가 났다.
만약 그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아! 먼저 집에 가서 확인을 해보자.
건수는 전단지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항구로 향했다. 5시 막배를 타야 한다.
그 배를 타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5시 10분 전이다. 건수는 다 낡아 빠진
그의 트럭을 몰았다. 항구에 도착하니 배가 막
떠나려고 한다. 건수는 정신없이 배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막 달려오던 트럭이 건수 몸과 부딪쳐
건수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퍽!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웅!’ 뱃고동을
울리면서 배는 떠나갔다.
‘안되는데 우리 장미 한번도 혼자 있었던 적이 없는데..’
가물가물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건수는 장미를 생각했다.
제 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