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멍청하게 서있을 거야! 출발 안 해!”
은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가의 촉촉함은 그리 자세히 보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났다.
동재는 은아의 표정에 새빨간 얼룩무늬 옷이 보여주는 기괴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 알겠어.”
동재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밴은 목적지 없이 망망대해를 배회하였다.
승냥이 같은 해적들에게 선장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 난파되었고 좌초된 배에 꼼짝없이 갇힌 선원은 하릴없이 키만 이리저리 돌릴 뿐이었다.
조타수는 백미러를 통해 끊임없이 항해사에게 메이데이의 시그널을 눈빛으로 보냈지만 항해사는 해식애마냥 깎여나간 마음을 추스르느라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수 분간 몰아쳐댄 풍랑에 해안절벽은 시스택이 되어 단단해졌고 마침내 길었던 폭풍우가 끝이 났다.
긴 표류에 지쳐 선상반란을 꿈꾸는 잡부들을 독려하기위해 콜럼버스는 입을 열었다.
“내려가자... 지방으로”
“거긴 왜?”
“가보면 알아. 거기서 부턴 내가 알아서 지낼 수 있으니까 거기에 나 내려다 주고는 돌아가도 좋아.”
캡틴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귀항약속까지 내걸자 키잡이도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에 상세한 주소까지 집어넣자 돛단배는 순풍을 탄 듯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긴장이 풀리자 생리현상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은아야 배고프지 않아? 내가 화장실도 가야하고 또 꼭두새벽부터 이 난리 통에 아무것도 못 먹어서 허기가 지네...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때웠으면 하는데...”
동재가 조심스레 물었고 은아도 출출했는지 별 말없이 승낙했다.
검은 밴은 휴게소에 잠시 정박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면 간식거리 내가 골라서 담아올까?”
“소머리국밥 얼큰하게 깍두기 많이”
은아의 당당한 요구에 동재는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뭘 봐. 빨리 안 움직이고”
“그 그게 은아야 그냥 간단하게 간식거리로 때우는 게 어때? 식사는 보통 식당에서만 먹으니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주목될 거고...”
동재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제안했다.
“차에 선글라스랑 까만 마스크 있지?”
“아... 너도 내린다는 말이었어? 그렇지. 그게 아니면 이상하지 하하 그런데 여분의 옷은 없는데 어쩌지?”
동재는 약간의 안도를 하며 헛웃음을 멋쩍게 지었다.
“뭔 말이야. 내가 왜 내려?”
“응? 그럼 어쩌자는 말...”
“내가 이 꼴로 왜 내려? 쪽팔려하는 것 같아서 선글라스랑 마스크는 네가 쓰란 건대?”
“하하 하 그랬어? 나는 몰랐네... 근데 꼭 밥을 먹어야 될까? 하하 하”
“뭐야? 너 내가 하루 세끼 꼬박꼬박 밥 챙겨 먹는 거 몰라? 이제까지 너는 나 따라 다니면서 뭘 한 거야? 잔말하지 말고 배고프니깐 빨리 갔다 와!”
동재는 기가 차서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가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 저기요... 혹시 여기 포장도 되나요?”
“아니요. 포장은 안 되세요.”
“그죠... 이런 걸 묻는 저도 어이가 없는데... 그러면 음식을 밖으로 가져가서 먹어도 되나요?”
동재의 생소한 질문에 종업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뭐 식기 반납만 부탁드릴게요.”
“아... 되는구나... 후우우 그럼 소머리 국밥 2개만 부탁드릴게요.”
동재는 아쉬움에 한숨을 푹 내쉬고 계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을 보면서 동재는 자신이 빠뜨린 한 가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아! 깍두기 많이 달라고 안했다...”
동재는 자신의 깍두기를 모두 부어 은아의 몫으로 만들고는 은아의 몫이 담긴 국밥을 가지고 차로 돌아왔다.
“이렇게 잘 가져올 거면서 뭘 그리 투덜대”
동재는 울화가 치밀어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맛있게 먹어. 나도 돌아가서 먹고 올 테니까... 꼭꼭 씹어 먹어”
동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동재는 깍두기 없는 국밥을 먹으며 부르르 떨었다.
동재는 또 잔소리를 들을까봐서 국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위장으로 때려 넣었다.
차로 돌아오자 은아는 식사를 마쳐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밥은 반 공기는 남아있었고 국은 건더기만 떠먹었을 뿐 국물은 손도 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깍두기는 가져왔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다.
“이욜 빨리 왔네. 늦으면 뭐라 하려고 했었는데”
“너 밥 다 먹은 거야? 깍두기는 전혀 손도 안 댔는데?”
“나 같은 탑 급 연예인은 식사량도 관리해줘야 하거든”
동재는 얼이 빠져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굳었다.
“날씨 덥네. 빨리 왔으니까 기념으로 빨리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와. 얼음은 빼고”
동재는 기가 차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그럼 내가 늦게 왔으면?”
“그럼 너건 코로 마셨어야 될 걸.”
은아의 말을 들은 동재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얼음을 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검은 배는 다시금 출항했다.
은아는 커피를 한 모금 쭉 빨았다.
그때 은아의 눈에는 구석에 꽂혀있던 작은 노트가 한 권 들어왔다.
“이건 뭐야?”
“안 돼! 읽지 마!”
“제목 인어공주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 푸하하 뭐야 동화책이야?”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야 어른이를 위한 동화책이라고”
“애걔 겨우 10장밖에 안 썼네. 너 나 없을 때 이런 거 쓰고 있었니? 킥킥킥 글씨는 왜 또 삐뚤삐뚤해? 너 아직 글도 제대로 못 써?”
“아니야 그거 내가 쓴 게 아니라고. 내 동생이 날 위해 써준 거야”
동재의 고백에 은아는 신나서 웃던 웃음을 멈추었다.
“아... 그래? 동생이 몇 살인데?”
“중학교 2학년”
“뭐... 어쨌든 나이 대에 비해 글씨가 삐뚠 건 사실이야.”
은아는 동화책을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한 동안을 책을 읽던 은아가 입을 열었다.
“뭐. 읽어줄만 하네. 너만 읽기는 아까운 부분도 있어.”
“그렇지? 걔가 책은 진짜 잘 써. 꼭 자기는 커서 잘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될 거래니까.”
동재는 동생의 이야기에 신나서 팔불출마냥 떠들어댔다.
“뭐래? 그렇다고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거든! 아직 다 쓰지도 않았구만 무슨 김칫국을 장독 째로 마시냐?”
그렇게 떠드는 사이 신바람 탄 돛단배는 신대륙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주차했다.
“이 건물이 맞는 거지?”
“맞아 제대로 왔어”
“근데 여긴 왜?”
“너도 모르겠지만 대표님도 아빠도 엄마도 모르는 사실인데 이 건물 내거야 죽이지?”
동재는 은아와 건물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떡 벌렸다.
10층의 커다란 빌딩은 눈부신 햇살을 반사시키며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